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191화 (191/261)

191. 황금성 (4)

불발한 줄만 알았던 화포가 갑자기 불을 발한다. 그로 인해 난데없이 알실라 기병 옆구리가 터져나간 이 상황에 대해, 내 거짓 없는 마음은 다음과 같았다.

‘워메 시벌.’

완전 깜딱이었다. 뚝 떨어진 간이 제 자리로 돌아오기 위해 낑낑거리며 척추를 등반하는 전율이 온몸을 핥아댔다.

그렇게 실시간 콩닥콩닥을 경험하고 있자니, 성은대군을 비롯한 십인조가 환성을 터뜨렸다.

“대단하군요, 공자!”

“과연 별의 목소리를 듣는 성소년!”

“이 얼마나 정확한 타격인가!”

단체로 별빛에 취해버린 것 같다. 심지어 시아람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읊조리기까지 했다.

“역시 도련님….”

‘얜 휘영이 시절부터 왜 이리 나한테 푹푹 빠지고 난리야.’

[제사장: 그러니까 법왕님은 자신의 늪지 같은 매력을 자각하셔야 합니다….]

뭘까 그건? 악어 떼가 나타날 것만 같은 매력이다. 모기와 거머리가 들끓어 역병의 근원지가 될 것 같은 느낌은 덤이었다.

내가 그런 기분 나쁜 매력의 보유자이든 아니든, 지금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예! 이것이 별의 인도하심입니다!”

이 모든 걸 예상했다는 듯 양팔을 펼친 채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

별들이 실제로 말을 할 줄 알았다면 뭘 함부로 품을 벌리냐며 남사스러워했겠지만, 천사님 말씀을 빌리자면 가스-광물 혼종에 불과한 별에게 그런 능력은 없었다. 그러기에 나는 극적인 자세 그대로 말할 수 있었다.

“자, 내려가서 합류하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했다.

◈          ◈          ◈

옆구리 터진 김밥은 안에 든 내용물을 쏟아내는 법이다. 알실라 기병대 역시 딱히 나은 꼴을 보이지는 못했다.

“뭐꼬!”

“화포에 얻어맞았습니다!”

“뭔 소린데 그게! 저 불쟁이 새끼들이 확 돌아삐기라도 했다 이긴가!”

난장판이 된 속에서 기병들은 돌진력을 잃었다. 수습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것이 더 큰 화를 불렀다.

“가리비수우우우우!”

활짝 열린 성문 너머에서, 월국 기병들이 뛰쳐 들어왔다. 오랜 전통을 따라 그들이 기리는 별들의 이름을 외치면서.

“흑치사라아아아!”

“하누리이이이잇!”

본디 월국민에 속하지 않았더라도 별자리를 추증받은 이들이면 누구나 차별 없이 호명의 대상이 되었다. 웃기게도 그들이 멸망시킨 나라와 멸망시키려 하는 나라 출신의 인물들 역시 기도의 대상이었다.

오오오, 오오오오. 이름을 부르는 그들의 목소리가 한 가닥씩 얽혔다. 오오, 오오오, 오오오오. 동굴 깊은 곳으로부터 새어 나오는 바람 소리처럼 깊은 소리였다. 오오오, 오오, 오, 오오오오, 오오, 오. 단체로 입을 모아 부르는 그것은 일종의 성가(聖歌)이자 성가(星歌)였다. 오오오! 별을 기리는 목소리의 선율 속에 성문을 타 넘어온 기병들은 달리는 그대로 진형을 취했다.

월국 기병들은 그렇게 화했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창 끄트머리를, 진열을 추스르지 못한 알실라 기병들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보았다.

“쏴! 쏴라!”

기병단장이 호령했다. 낮에 왕국 기병들과 싸우면서 그들도 배운 것이 있었다. 월국의 전매특허로 여겨지는 마상 사격이, 갑주로 무장한 자신들보다 월국 기병들 자신에게 더 잘 먹히리라는 사실이었다. 알실라 기병 태반이 말 위에서 자유자재로 사격할 만한 실력을 갖지 못했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멈추어선 한 차례 쏟아 부을 수는 있을 것이다.

알실라 기병들만큼이나 땅딸막한 활들이 화살을 토했다. 자그맣지만 치명적인 살촉들이 어둠을 가르고 날아가 월국 기병들에게 처박혔다.

과연 효과가 있었다. 히히히힝! 선두를 달리던 월국 기마들은 크게 몸을 뒤틀면서 허물어졌다. 그렇게 무너진 선두는 자연히 뒤따르던 월국 기병들의 장해물로 작용했다.

알실라 기병단장은 그 모습을 보고 희망을 품었다. 좋아, 월국 기병들이 다리가 걸려 넘어지는 것은 과연 요행수라 하더라도, 최소한 이쪽이 진형을 다시 갖출 시간적 여유를 얻을 수 있다면….

그러나 알실라 기병단장의 표정은 곧 딱딱하게 굳어졌다.

“비류아아아아아!”

월국 기병이 달리던 기세를 조금도 죽이지 않은 채 노호했다. 동시에, 펄쩍…! 화살 맞고 무릎 꿇은 자기 앞의 기병을, 그 거대한 장해물을 그대로 뛰어 넘었다.

‘인마일체(人馬一體)….’

알실라 기병들의 얼굴에 공포심이, 뒤이어 절망감이 떠올랐다. 그들의 눈에는 그 월국 기병이 인간의 상반신과 말의 하반신을 가진 괴수처럼 보였다.

심지어 그 괴수는 한 마리가 아니었다.

“모서아아아!”

“이세여어어어!”

방파제를 훌쩍 넘어 몰아치는 지진 해일처럼, 펄쩍, 펄쩍! 괴수 떼는 장해물을 뛰어 넘으며 몰려왔다. 기세를 조금도 줄이지 않은 채, 오히려 점점 몰아치듯 가속했다. 달 없는 밤이라 말이 흘리는 안광과 사람이 뿜어내는 숨결만 유독 푸르게 그 자리에 남겨졌다.

괴기스러움을 뛰어 넘어 가히 신화적인 광경이었다.

알실라 기병들은 항거할 의지를 잃었다.

“괴물이다! 괴물!”

“도, 도망쳐라!”

“도망칠 곳이….”

우왕좌왕하는 알실라 기병들을, 순식간에 달려온 월국 기병들이 삼키고 지나갔다. 알실라가 수십 년간 키워온 정예 기병들은 그렇게 수십 초 만에 말발굽에 짓밟혀 무너졌다.

다시 수십 분 뒤, 황금성의 꼭대기에는 달의 여신을 기리는 깃발이 내걸렸다.

◈          ◈          ◈

지휘관과 병졸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

가령 승전의 아침을 맞이한 지금을 보자.

“연회다!”

그 한 마디를 무슨 출사표처럼 내던지고 술과 고기 속에 뛰어들 수 있는 것이 병졸이다. 좀 부지런한 병졸이라면 상관의 눈이 안 띄는 곳에서, 또는 아예 상관을 꾀어 함께 약탈에 나서기도 할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가 부유한 삶을 누릴 상상에 흥겹게 어깨춤을 추거나 출세길이 열렸다는 생각에 연속 물구나무 서기 왕국 신기록에 도전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지휘관들은 그럴 수가 없다. 승전하기 전에도 승전한 뒤에도 일을 해야 한다.

물론 승전이 가져다 줄 영토와 권력 생각에 흐뭇한 표정을 짓는 녀석들도 있지만 나한테는 그딴 게 호박엿 하나만큼의 가치도 없지 않은가.

“괜찮습니까, 공자? 전쟁하던 무렵에는 환하게 웃던 사람이 성을 함락한 지금은 완전히 땀에 찌든 옷가지 같은 표정을 짓고 계시는군요.”

알실라 호박엿을 우물거리면서 퀭한 눈으로 서류를 살피는 나를 성은이는 피에 취한 전투광으로 오해한 듯했다. 그야 달의 여신의 신실한 신도 상당수는 그런 위험한 녀석들이고 내가 그 종교적 영웅을 연기한 입장이긴 해도 억울한 노릇이었다.

“역시 전장이 아니어서 그런지 별의 목소리가 멀게 들립니다, 세자 전하.”

“공자는 정말 신비한 사람이군요.”

성은이가 감탄하며 말했다. 얘도 시아람 아저씨처럼 내 늪지대 매력에 발목이 푹 빠진 모양이었다.

‘대륙 남쪽 야만의 땅 어딘가에는 환각독을 지닌 거머리가 있어서 그 거머리에게 피를 빨아 먹히는 녀석은 행복한 꿈을 꾸며 죽어간다는데 꼭 그 짝이네.’

지금이라면 내가 무슨 헛소리를 늘어놓아도 감탄해 줄 것 같았다.

시험해 볼까?

“세자 전하의 눈빛으로부터 저는 따뜻함을 느낍니다. 그렇게 눈빛에 온기를 실을 줄 아는 세자 전하야말로 신비로운 분이세요.”

“고, 공자께서 저를 그리 평해주시다니… 저로서는 정말 어쩔 줄 모르겠습니다.”

“웃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 웃겠습니다. 음음. 이렇게 웃으면 되겠습니까?”

“보기 좋군요. 하지만 그렇게 주어진 신비감을 잘 사용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십니다. 세속의 군주란 세속의 일에 걸맞게 그 신비감이라는 망토를 두르셔야 하는 법이니 주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읏… 주의하겠습니다.”

“신비하다는 건 본래 대륙 문자로 신과 감추어져있음을 뜻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공자가 그리 말하니 신비함을 뜻하는 문자가 새삼 신비스럽게 보이는군요.”

봤지?

그 뒤로도 나는 입에서 나오는대로 마구 던져서 세자를 띄워주었다가 떨구길 거듭했다. 호박엿을 씹어 먹는 것보다 골백 배는 쉬웠다….

[개천의 시왕: 내 증손주 갖고 놀지 마라.]

‘넹.’

나는 넌더리를 냈다.

“좌우간 그런 것입니다. 제게 주어진 소명이 아직 덜 끝났다는 사실이 두렵기도 합니다.”

“그렇군요….”

성은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짚었다. 나도 심각한 얼굴로 호박엿 하나를 입에 까 넣었다. 방금 꺼낸 말은 심각한 문제 제기가 맞았다. 구체적으로는 대체 왜 황금성을 함락시켰는데도 임무 완료가 뜨지 않느냐는 하소연이었다.

아니 정말 왜 임무 완료 안 뜨지??

왜 임무 완료 안 떠요???

[ 영토를 완전히 편입시킬 때까지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닙니다. ]

‘뭔 삽소리에요 그게. 정복했으니까 끝내주세요 얼른.’

[ 주어진 임무는 삼국통일을 완료하라는 것입니다. 임무를 제대로 완료해 주십시오. ]

‘아 나 진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를 벅벅 긁었다. 무슨 소리인지 납득한 바였으므로 입에도 손에도 힘이 빠졌다. 자연히 호박엿이 주륵 흐를 뻔했지만 그건 입술에 힘을 주어 붙잡았다.

[첫 번째 은월: 무슨 소리인데?]

[개천의 시왕: 무슨 소리겠는가. 길잡이가 지금까지 피해왔던 종류의 업무와 마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비류아의 목소리에서는 어떤 희열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개천의 시왕: 길잡이는 여러 차례 전쟁에 관여했다. 전쟁을 준비하기도 했고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지. 하지만 그렇게 전쟁과 관련된 일들을 수행해 온 길잡이가 유독 하지 않은 일이 하나 있었다.]

[최초의 성녀: 끝난 전쟁을 수습하는 것 말이군요….]

[개천의 시왕: 그렇다. 길잡이가 앞서 지휘관과 병졸의 차를 논했지만, 길잡이는 기실 정확히 병졸과 같은 일을 해왔던 것이다!]

망할.

[개천의 시왕: 그리고 그렇게 길잡이가 전쟁 수습을 도외시한 결과 무슨 일들이 벌어졌는지는 보아 알고 있겠지. 나는 지쳐 스러졌다. 나라가 세워지지 못할 뻔했다. 나투아 합병 뒤에는 그 후유증으로 인해 임무 하나가 통째로 생겨날 지경이었지….]

‘아니 좀! 솔직히 그 정도는 알아서 해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언제까지 내가 끌고 가야합니까요….’

[개천의 시왕: 그대의 말이 옳다. 그 모든 일을 두고 그대를 탓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해버리는 것이 또한 ‘인간’, 그렇다, ‘인간’이란 동물의 슬픈 업일 지어니….]

‘시왕님 왜 이래요….’

[최초의 성녀: 지금 좀 취해서 그래요. 예언자님께서 전쟁에 이기자 완전 신나서 퍼마셨거든요….]

그런가, 취했나.

취했다면 어쩔 수 없지….

[첫 번째 은월: 반면 하누리는 단단히 토라짐.]

‘니가 잘 달래드려라.’

[간신 조련사: 음, 좌우간. 정복지 관리 임무에서 차후 통치에 대한 기틀을 잡아두었으니, 아주 힘들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기틀을 잡았다고 해도 다른 나라를 합병하는 데에 있어 선례를 확실하게 잡아놓는다면, 간신이여. 그대가 차후 임무에 들어가는 일을 줄일 수 있을지 모릅니다.]

‘천사님마저 저를 이렇게 부드럽게 대할 만큼 살인적인 노동강도….’

[간신 조련사: 됐고 일이나 하십시오.]

‘넵.’

그래, 일이나 하자. 차후 임무의 절대수를 줄일 수 있다는 이야기는 감미롭게 들리기도 하고.

그렇게 나는 서류 업무를 재개했다. 하지만 별 진척은 없었다. 알실라 호박엿의 재고는 빠르게 줄어가는데 말이다.

‘휘영이한테 땅이라도 좀 떼줄까? 젠장. 제사장이 절실하다. 구호도 보고 싶고.’

제사장이나 구호가 있었으면 일감 떠넘기고 좀 놀 수라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제사장은 타계한지 오래되었고 구호는 지금 이 시대엔 늙었을 테니 그럴 기력도 없을 테지.

한숨과 함께 마른세수를 하자니 세자 전하가 물어왔다.

“조금 쉬시겠습니까, 공자?”

나는 피식 웃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귀엽긴 하다.

“괜찮습니다, 세자 전하. 할 건 하고 쉬어야죠. 흠. 그보다 세자 전하야말로 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