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황금성 (2)
오늘 밤은 달이 뜨지 않았다.
천사님 말을 빌리자면 달은 사실 매일 뜨지만 때때로 어둠에 숨어 빛나지 않는다고 한다. 비열한 암살자마냥 그림자에 자신을 숨겨 달빛이라는 단도로 뒷목을 찍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는 것이다.
우리들처럼 말이다.
나는 황금성에 잠입할 면면들을 바라보았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이들이 제가 가장 총애하는 무사들입니다.”
세자 전하가 말했다. 차분한 얼굴이 믿음직스러웠다.
“나도 끝났네. 이들이 내가 높이 평가하는 전사들일세.”
루지아 공작이 말했다. 늠름한 근육이 신뢰감을 불러일으켰다.
“나 또한 끝났다! 이들이 내가 자랑하는 늑대들이다!”
아신군이 말했다….
‘아 나, 진짜 좀.’
한 번의 삶을 건너뛰고서 나는 왜 또 이 늑대 면상이랑 얼굴을 맞대야 하는 걸까?
얘는 왜 낄 데 끼고 빠질 데 빠지는 걸 못하지??
왜 그러세요 진짜???
[간신 조련사: 세자 전하가 설명하던 걸 들었지 않습니까. 왕조차 부정하지 못할 업적을 세워야 한다는 명예욕에 시달리고 있다고.
왜냐하면 지금 왕위에 오른 현성이가 아신군을 박대하기 때문이고. 그리고 그 이유에 시현군이던 시절 당신이 아신군을 유독 갈군 탓이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지요.]
‘나는 왜 낄 데 끼고 빠질 데 빠지는 걸 못하죠??’
[간신 조련사: 그러게 말입니다. 왜 그러십니까 진짜???]
아무튼 아신군이 정예병을 데리고 직접 참가할 것을 천명했다.
그 밖에도 많았다.
“이 나주의 지배자도 왔소이다!”
‘왜 와….’
“왕국 수도 대하 북변을 대표하는 강북의 지배자 또한…!”
‘오지 마….’
“대장군이셨던 두오의 손주이자 서군후 세오의 아들, 네오입니다!”
‘얘네 집안 이름 막 짓네 진짜…. 그러고 보면 나 살아있던 시기에도 무슨 오가 있었던 것 같은데….’
“나시파 변경백가를 대표해서 아주 그냥… 이 가문의 장로가 확 그냥… 저 난쟁이 놈들 다리몽댕이를 부숴버리려고 그냥… 알실라… 게 섯거라… 우리가~ 간다~!”
‘얜 또 뭐야.’
늙은이들 말투는 결국 다 비슷한 지점에 이르게 되는 걸까? 그런 우주적 법칙이 있는지 없는지 몰라도 얘가 지금 있어야 할 곳이 황금성 잠입조가 아니라 대하가 잘 내려다보이는 정자 위라는 건 확실했다. 그런 곳에 앉아 있으면 누군가 깜짝 놀라 ‘아이고 신선님!’ 하면서 바둑판과 바둑알을 갖다 바칠 것이다.
그런 이들의 숫자가 제법 되었다.
세자와 상현 공작이 직접 참가한다는 게 왕의 친정이 미덕으로 칭송 받던 그 시절의 등신 같은 투혼을 불러 일으킨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냥 꿀 빠는 기회로 보였거나. 미묘한 동조 압력을 이기지 못한 것일 수도 있었다.
모든 원정군 집안들이 직접 참가하거나 아들내미, 딸내미, 손주손녀들을 고이 내민 것을 보면 셋 중의 하나는 확실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도련님?”
시아람 아저씨가 귀엣말로 물었다.
음.
“뭐 나쁜 건 아냐…. 쭉정이들 마지못해 내주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다만 음… 잠입조에 고위층이 너무 많다는 건 문제가 될 수도 있는데. 잠입조가 망하면 원정군 전체가 망하는 거잖아.”
“어차피 도련님께 무슨 일이 생긴다면 원정군 또한 희망이 없습니다.”
시아람이 조용히 말했다. 맞는 말이긴 한데 얘는 또 왜 이런다냐.
[최초의 성녀: 제사장도 동의하는 건데, 예언자님께는 그런 게 있거든요. 이 사람이라면 안심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는 뭐 이런….]
‘내가 그런 게 좀 있긴 하지.’
[최초의 성녀: 그게 지나쳐서 이 사람이 아니면 도무지 안심이 안 된다 하는 뭐 그런…?]
‘그건 좀 위험해 보이는데….’
내 위험한 매력에 매료된 아저씨의 위험한 의견 따윈 무시하고 생각해보자.
음.
‘역시 이대로는 안 돼.’
뭐냐면, 조금 전 알실라 기병대와 공멸할 수 없었던 것과 같은 이유다. 교환각이 날카롭게 섰는데도 이쪽에 고위층이 있어서 거래 승인이 안 떨어지면 환장할 노릇 아닌가.
[첫 번째 은월: 그 생각 하려면 애초에 세자랑 공작을 데려가지 않으면 되는 거 아냐?]
‘세자 하나쯤은 어떻게든 살릴 수 있으니깐. 근데 살려야 할 애들 숫자가 많아지면 그게 힘들잖아.’
[첫 번째 은월: 공작 언급 귀신같이 빠뜨리는 것 좀 보소….]
[개천의 시왕: 그럼 어쩔 셈인가?]
‘뭐 어쩌겠어요.’
자원자는 많은데 의자가 한정되어 있다. 그런 속에서 해야 할 일이란 건 뻔하다.
‘선별.’
나는 도끼를 들어 올린 채 말했다.
“아아, 달의 여신께 축복을! 그리하여 우릴 굽어보시는 별무리 모두에게 기원을! 이 자리에 이렇게 모여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별처럼 반짝반짝 거리는 눈동자로 좌중을 둘러보면서, 나는 도끼에 도끼집을 씌우고는 활짝 웃어 보였다.
“그럼 지금부터 별의 목소리를 따라, 이 영적인 여정에 따라오실 수 있는 분들을 추려내겠습니다!”
◈ ◈ ◈
“워메!”
성의 없이 이름을 짓는 가풍을 가진 서군후 집안의 후손이 가슴을 맞고 나가 떨어졌다.
내가 외쳤다.
“죄송합니다! 별께서 다음 기회를 노려보라고 말씀하시는군요! 다음!”
“우허억!”
나시파 변경백령쪽에서 왔다는 큰 어른도 사이좋게 그 옆에 나뒹굴었다.
“역시 죄송합니다! 성소년의 이름으로 당신이 두 번째 기회를 가질 날이 오길 빌어봅니다! 다음!”
그런 일이 되풀이되었다.
“다음!”
“흐억!”
“다음!”
“으악!”
“다음!”
“억!”
많은 이들이 맞고 날아갔지만, 일부 그런 내 도끼를 잡아 멈추는 이도 있었다.
“하앗!”
세자 전하는 갑주를 두른 팔을 내밀었다. 그 팔로 내가 휘두른 도끼날을 가로막는 미친 짓을 하는 게 아니라, 내 도끼 자루를 쳐서 막았다. 캉! 눈앞에 번쩍이는 시퍼런 도끼날, 그것을 두 눈 또렷이 뜬 채 노려보면서, 세자 전하는 내 가슴을 향해 검을 찔러 왔다. 내민 팔을 석궁의 대로 삼아 쏘아지는 쇠뇌 같은 일격이었다.
“흐랴아압!”
상현 공작은 나보다 압도적으로 큰 체격과 긴 간격 차이를 영리하게 이용했다. 완력과 길이 차이, 거기에 도끼와는 비할 수 없이 긴 단창이 쏘아지니 이건 뭐 어떻게 할 각이 안 나왔다.
“후앗!!”
그리고 아신군.
이러니저러니 해도 늙은 늑대는 강했다. 무기는 나와 같은 도끼를 썼는데, 특유의 저돌성과 풍부한 실전 경험이 더해져 나오는 종합 효과가 강력했다. 무왕 이세의 핏줄이 헛되진 않은 것이다.
“합격!”
“합격!”
“합격입니다!”
허리를 틀어 세자의 검격을 피해 내면서, 상현 공작의 거리 바깥으로 물러나면서, 아신군의 도끼를 엇걸어 젖히면서 내가 외쳤다. 그런 일 또한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도련님, 저도 한 번….”
“그 칼 당장 집어넣어라.”
들뜬 아저씨가 나잇값 못하고 끼려다가 시무룩 고개를 수그리는 일이 있었지만 그거야 아무래도 좋았다.
그리하여 잠시 후, 정예 중에서도 정예 잠입조 30인이 탄생했다.
[간신 조련사: 스킬로 치면 레벨 2 후반 이상만 가려 뽑았군요.]
[개천의 시왕: 태반이 길잡이와 같은 달인급. 심지어 두 명은 시아람보다 약간 못한 정도인가. 과연 내 아들급은 없지만, 대단한 전력이군. 내가 전성기이던 무렵 이끌던 친위대와 비슷한 수준이다.]
좋다.
알실라에도 역전의 용사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왕국 전역에서 가려 뽑힌 용사들은 과연 그 격이 달랐다. 그런 이들이 한 층 더 정제되어 압축되었다. 탁 트인 곳에서 대놓고 붙어도 3배, 소수가 소수를 상대할 수밖에 없는 잠입 상황에선 5배에서 6배 이상의 병력과 붙어도 지지 않을 것이다.
‘손발을 맞출 시간이 없다는 건 아쉽지만….’
그것도 결국은 지휘권의 문제.
나는 꿈꾸는 듯한 얼굴로 외쳤다.
“모두 저를 따라 주십시오!”
“와아아아!”
나한테 박살났던 이들은 환성을 내질렀다. 나와 대등하게 겨룰 수 있었던 이들도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후자가 중요하지.’
달인 소리를 들을 만큼 싸움박질에 정진해 왔던 이들. 따라서 그만큼의 깐깐함도 갖추게 된 이들은 날 미심쩍다고 여기고 있었을 거다. 세자나 공작이 간다니 따라왔을 뿐, 나 자신을 믿고 있진 않았을 터.
그런 이들에게 나는 내 솜씨를 내보였다. 별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이야 어쨌든, 싸움판에서 등을 맡길 만한 실력이 있노라고 천명한 것이다.
‘이 녀석들 실력도 대충이나마 파악했고.’
덕분에 빠르게 명할 수 있었다.
“세자 전하는 저와 함께 최선두에서. 데려오신 병력 중 제가 지목하는 이들은 상현공과 함께 중추를 맡도록 해주십시오. 그리고 남전후께서는 자신이 데려온 병력들과 함께….”
좋아, 이 정도면 제법 기능적인 배치가 됐을 것이다.
‘과거시를 쓰는 편이 확실했겠지만, 이만한 숫자의 사람들이 살아온 인생을 일일이 되짚는 건 불가능하니까….’
사전에 준비할 수 있는 선에서는 최선의 준비를 마쳤다.
“그럼 모두 저를 따라오십시오. 지금부터 황금성을 향해 갑니다!”
달이 빛나지 않는 밤, 서른 명의 용사들이 막사를 나섰다.
◈ ◈ ◈
황금성은 황금 평야 한복판에 세워졌다. 사방이 탁 트여 있다는 소리다.
이는 포위하기 좋다는 말이지만, 기습조를 보내기엔 나쁘다는 말이기도 하다. 시야 좋은 곳에 짱박혀 있으면 다가오는 이들이 훤히 보일 거라는 소리니까. 눈이라도 마주치면 어색한 시간이 흐를 것이다. 그 다음에는 정신없는 시간이 흐를 테고.
“우와아아아!”
“우오오오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이거였다.
“우리가 접근하는 반대편에서 주 병력이 시선을 끌고 있습니다.”
잠입하는 입장이니 목소리를 높일 수는 없었다. 그래도 사람들 보는 앞이니 별의 소리를 듣는 미친 놈마냥 들뜬 얼굴로 내가 설명했다.
세자 전하가 턱을 매만졌다.
“동쪽에서 소란을 피우고 서쪽을 친다…. 성동격서(聲東擊西)로군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문을 열면 바로 들이치기도 해야 하니까요. 그럴 병력을 미리 모아놓는 겁니다.”
그런 내 말에 루지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저들에게 그 화포라는 것이 날아들면 어쩔 것인가? 그리고 그럼에도 우리들을 포착하면? 적들 역시 바보가 아닐세. 성동격서라는 말을 떠올릴 수 있는 이들은 적들 중에도 분명 있을 텐데.”
“그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째서?”
“저는 별의 인도를 받고 있으니까요.”
루지아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쩌랴. 그것이 내가 줄 수 있는 유일한 답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 자체이기도 했다.
‘진짜 맞지? 우리 접근하는 방향으로 초병 없는 것 맞지?’
[첫 번째 은월: 아이고 진짜 좀….]
‘화포가 지금 소란 끄는 애들 쪽으로 움직여도 바로 말해줘야 돼.’
그렇다.
지금 나는 저승 입주자들 모두에게 황금성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도록 부탁한 상태였다!
[개천의 시왕: 전장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사기적인 능력을 지녔으면서 이처럼 소극적이라니…. 길잡이여. 내게 그대가 쓸 수 있는 힘의 절반만 있었어도 반도는 물론이요 대륙을 제패했을 거다.]
‘어쩔 수 없잖습니까요. 저한테 딱히 군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군재 하나만 보면 세자 전하나 루지아보다, 아니 아신군보다 못할 것이다. 뭔가 잘못되지 않았는지, 상황에 변화가 없는지 신경질적인 것을 넘어 상대가 신경질 낼 정도로 점검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이런 짓거리가 불가능했다면 잠입하지도 않았을 걸요.’
상대가 뭘 준비하는지도 모르는데 왜 다가선다는 말인가? 그런 미친 짓은 하지 않는 것이 장수의 비결이다. 추가적인 장수의 비결은 망해가는 나라의 왕 곁에 있지 말자는 것 정도가 있겠다.
덕분에 우리는 순조롭게 성벽 앞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중간중간, “모두 정지, 움직이지 말고 바싹 엎드리십시오.” 알실라 병사들의 이목을 속여야 했고, 쾅…! “방금 적이 시행한 화포 발사는 순전히 겁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본대를 향해서도, 우리를 향해서도 발사되지 않았습니다.” 적들이 이목을 시도하는 것을 간파해야 했지만, 모두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었다.
사람들의 움직임을 감시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절대적인 힘이었다.
“이 쪽으로.”
성벽 위에 도착한 다음에는 가장 후미진 곳으로 돌아갔다. 루지아 말마따나 알실라인들 몇몇도 성동격서라는 말을 떠올린 것인지 우리가 접근한 곳 근처에 초병들을 말뚝 박아놨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그렇게 조금 돌아가니 깔끔하게 뚫렸다.
“정지.”
나는 심호흡을 했다.
“별무리의 목소리를 기다리겠습니다. 제가 지시하면 그때 집어던지십시오.”
성벽 등반용 갈고리를 꺼내든 잠입대원들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