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188화 (188/261)

188. 황금성 (1)

한동안 정적이 이어졌다.

루지아는 입술을 열려다가, 다물고, 다시 열려다 다물길 몇 차례 반복하다가 진저리를 쳤다.

“…자네처럼 어린 소년이 그런 걸 어떻게 아는 건가?”

나는 대답했다.

“저는 별의 목소리를 듣거든요.”

성은대군도, 루지아도 그것은 대답이 아니라는 말을 하려는 듯 했다. 그렇지만 그들의 얼굴은 부지불식간에 납득을 하고 있었다.

◈          ◈          ◈

루지아는 이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구체적으로는 눈앞에 있는 소년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성은대군, 서군후 세오, 그리고 자신만 있는 자리에서 나눈 이야기를 알고 있는 것부터 시왕에 대해 잘 안다는 양 말하는 것까지 어느 하나 범상하지 않았다. 13살 소년이 아니라 세상을 여러 차례 살아온 노인을 상대하는 것 같다.

‘거짓말? 하지만 연기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정신에 문제가? 망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그렇게 상황을 익숙한 방식으로 해석해 보려 해도 잘 되지 않았다.

이해되지 않는 것으로 따지면 전장에서 있었던 일부터가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충실한 가신들이 손짓 하나에 꼭두각시마냥 자신을 구속했지 않은가. 스스로 말한 것처럼 마술쟁이 같은 일이었다. 10여 년도 전에 배를 타고 성지를 나아갔다는 그 마술쟁이처럼 말이다.

‘제함후는 거슬러 올라가면 하현의 직계에 속하지. 하현후는 초대 법왕의 피를 이었고. 초대 법왕은 여러 가지 신비한 일을 벌였다고 하던데… 그 덕분인가?’

그런 식으로 이해하려 해도 잘 되지 않았다.

상현공은 전사로서, 지휘관으로서, 가주로서, 정치가로서 살아왔다. 신비란 무지의 소산에 불과했다. 경외심은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불러일으키고 이용해야 할 도구였다….

“말해두는 건데 상현공, 당신이 야망에 가득 차 있다는 사실 자체를 비난하려는 건 아니에요.”

휘파랑이 이마를 짚은 채 한숨지었다.

“사람이 무슨 목표를 잡고. 그걸 이루려고 해, 적극적으로. 말했지만은, 그래요. 그게 얼마나 보기 좋은 일이야? 그런 사람도 있어야 그래도 좀, 뭐랄까… 세상이 돌아가죠. 안 그래요?”

정말 무슨 노인네 같은, 아니, 만사를 초월한 현자 같은 소리다.

“다만 그 야망, 이루시려면 배우셔야 할 게 많아요. 지금 그렇게 나 끝판왕이요 하는 얼굴 해봐야 그냥 가소롭다고. 좀 더 겸허해 지세요. 배울 거 배우고. 한 20년쯤 지나 그런 얼굴 하셔도 안 늦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되면 화도 나지 않는 법이다. 애써 분노를 끌어 모아 ‘감히 내게 그딴 소리를’ 운운하려 해보아도, 조금 전 ‘너무 예상대로의 반응을 보였다’며 면전에 하품을 당한 것이 떠올랐다. 그런 마당에 판에 박힌 반응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루지아는 신음을 삼켰고, 욕설도 삼켰다. 많은 것을 삼켰지만 뱉을 수 있는 것이 얼마 없었다. 그중 하나를 물었다.

“그럼 왜 나를 가둔 건가?”

휘파랑은 루지아를 바라보았다. 루지아는 곧 자신의 질문에 대해 부연했다.

“왜 나를 마귀라고… 내가 능력에 맞지 않는 야망을 가졌다고 비난하려는 게 아니라면 말이네. 왜 그런 짓을 모두가 지켜보는 와중에, 하물며 전장에서.”

“그 질문은 좋네요. 그래요. 설명할게.”

그리고 휘파랑은 당시 기병대의 상황에 대해 말해주었다. 루지아도 성은대군도 군재가 부족하진 않았기에 바로 알아들었다.

“최대한 빠르게 군율을 회복해야 했다 이거군요.”

성은대군의 말에 휘파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자면 눈에 확 뜨이는 형태로 ‘누가 두목이냐’ 하는 걸 보여줘야 했고요. 그럼 상현공 아니면 세자 전하 중 하나를 한 순간에 찍어내야 하는데, 세자 전하를 찍어낼 수는 없잖아. 그러니 공작을 찍어낸 거예요. 뭐 감정이 있어서 한 일은 아닙니다.”

루지아는 미간을 좁힌 채 그 설명을 들었다. 그리다가 물었다.

“그럼 풀어줄 건가?”

“예.”

그 간단한 대답은 루지아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이어져 나온 말은 그보다 더 루지아를 놀라게 만들었다.

“처음부터 풀어주려고 왔고… 당신 도움이 필요하기도 해요. 오늘 밤 중에 황금성 성벽을 떨어뜨릴 거거든요.”

놀라고 있자니 휘파랑은 자신의 말 중 일부를 실제 행동에 옮겼다. 루지아의 결박을 풀어준 것이다.

구속될 때만큼이나 갑작스레 자유로워진 루지아는 얼떨떨한 얼굴로 휘파랑을 보았다. 정작 그 휘파랑은 이 정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럼 설명 들어갑니다. 세자 전하께는 지휘관 막사에서 대충 설명 드렸지만, 한 번 더 들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그럼 세자 전하도, 공작도 빡 소리 나게 집중해 주십쇼.”

그렇게 해서 나온 이야기에 다시 한 번 루지아는 놀랐다. 얼마나 놀라웠으면 결국 되물어야만 했다.

“우리 셋이 성벽으로 잠입하자고?”

미친 소리였다. 얼마나 미친 소리였는지 휘파랑도 깜짝 놀랐다.

“아뇨, 공작님. 그딴 미친 소리는 개도 안 하고 저도 안 하고 별도 안 할 건데요. 시아람이라고 거, 칼 잘 쓰는 제 기사랑 저랑 갈 겁니다. 그러니까 두 분도 적당히 뭐, 부관이든 뭐든 잘 드는 주머니칼 좀 내놓으시라고.”

루지아는 여러모로 민망해졌다. 그렇게 스승의 민망한 모습을 본 성은대군이 헛기침을 하는 바람에 더 민망해졌지만, 다행히 그보다 더 민망해지기 전에 성은대군이 입을 열었다.

“공로를 나누기 위해서입니까?”

“넹. 아까 그 막사에서 책임공방 오가는 거 보니까 제함도 후작군 혼자 성벽 먹으면 열등감에 심장 뒤틀려서 개지랄할 게 뻔히 보이더라고요.”

“음.”

성은대군이 얼굴을 붉혔다. 세자인 그로서는 왕국 중진들의 그런 모습을 보였다는 게 민망할 법했다.

휘파랑은 피식 웃었다.

“거기에 더해서 사람이 없기도 해요. 제함도가 말이 후작령이지 진짜…. 아무튼 그러니 왕국 정규군에 몇 명, 상현 공작가에서 몇 명. 이렇게 성벽 잠입할 용사들 좀 내어 주시고. 나중에 신호하면 잠입할 충분한 병사들 준비해주시고. 더 좋은 생각 있으면 지금 말씀해주시고요.”

성은대군은 그 말에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 얼굴에 결의가 서렸다.

“저도 가겠습니다.”

루지아는 당혹했다.

“아니, 자네….”

“스승님께서 무어라 말씀하실지는 짐작이 갑니다. 세자의 몸으로 일개 병졸처럼 나서는 것은 위신도 살지 않고, 또한 위험하다는 것이겠지요.”

루지아는 입을 다물었다. 정확히 그런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말이니까.

성은대군은 차분하게 말했다.

“피해가 많았습니다.”

무슨 말인지는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군세의 3할이 날아갔다. 10할 중 3할이라고 하면 적어 보이지만 세 명 중 한 명은 죽었다는 소리였다.

정상적인 병졸이라면 건너편에서 밥 먹던 전우가 사라졌다는 걸 슬퍼할 것이다. 비정상적인 병졸이라면 불침번 사이의 간격이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한탄할 터였다. 결국 정상과 비정상 모두가 괴로워 마땅한 사태였다. 그 두 가지 외에 다른 분류가 있을 수 없으니 사기가 좋을 수 없었다.

“그래서 떨어진 사기를 수습하기 위해 직접 나서시겠다? 그리 영웅 행세라도 해 보겠다 이건가? 아서게. 떨어진 사기는 서서히 수습하면 그만이야. 그러나 자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 때야말로 돌이킬 수 없을 것이네. 자네는 붉은 공주가 아닐세.”

성은대군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침착하고 어진 세자라고 해도 여동생의 별명을 들으면 그런 표정을 짓게 되는 것이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여기 휘파랑 공자가 주도하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별의 목소리를 듣는 성소년이 주도하는 길에 감당 못할 위험이 있을 것 같지는 않군요.”

루지아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휘파랑의 이름을 들으니 다시금 자신이 판에 박힌 반응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성은대군은 그 모습에 자신감을 얻은 듯 가슴을 폈다.

“그리고 저는 무술 역시 스승님께 사사 받은 몸입니다. 제 몸 하나쯤은 건사할 수 있습니다.”

루지아는 그 다짐에 반응하는 대신 휘파랑을 바라보았다. 이 이해할 수 없는 소년에게 세자를 맡겨도 괜찮을 것인가?

그 이해할 수 없는 소년이 말했다.

“아니… 무슨 소리세요, 세자 전하…. 그냥 안전한 곳에 짱박혀 계시지….”

성은대군은 조금 전 루지아가 짓고 있던 표정을 지어 보였다. 대단히 무안한 표정. 그렇게 사제로부터 쌍으로 면목을 털어간 휘파랑은 난처한 어조로 말했다.

“뭐 세자 전하께서 직접 나서면 유리한 부분도 있죠. 이상한 짓 하실 것 같지도 않고…. 정 끼시겠다면 받아들이기는 하겠습니다.”

“그, 그렇습니까. 음. 그럼 염치 불구하고 끼어도 되겠습니까?”

“예… 어떻게든 되겠죠. 생각해보면 시선 닿는 곳에 두는 게 안전하기도 할 테고…. 공작님은 어쩌실래요?”

짐짝을 떠맡은 얼굴로 한숨을 내쉬더니, 자신을 바라보는 휘파랑의 모습에 루지아는 말문이 막혔다.

“따라오셔도, 따라오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따라오시면 좋긴 하겠네요. 제가 아니라 공작님한테요. 인상의 변화도 줄 수 있을 테고, 그 근육 보면 단련을 허투루 하진 않았을 테니… 어쩌실래요?”

이러든 저러든 상관없다는 투였다.

루지아는 분노를 느꼈다. 동시에 허탈감도. 상현의 이름을 가진 공작은 그 두 가지 감정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고찰했다.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확인할 것이 있었다. 판에 박힌 반응이라는 말을 들어도 확인해야 할 일이었다.

“결정하기 전에 한 가지 묻지.”

“물으세요.”

“내가 앙심을 품으리라고… 언젠가 시일이 흘렀을 때 자네와 자네 고향을 해할 거라고 염려하진 않나?”

휘파랑은 웃었다. 하지만 무어라 아니냐고 비꼬는 대신 답했다.

“합니다.”

판에 박히지 않은 대답이었다.

“완벽하게 이성적인 사람은 없죠. 어처구니없는 순간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있어요. 안타까운 일이지만 공작님께서는 자신이 그런 사람이 아니란 걸 증명하지 못했죠. 그 반대만 신나게 증명하셨지.”

“….”

“그러니까 제 나름대로 안전장치를 해놨습니다.”

그렇게 말한 휘파랑은 성은대군을 돌아보았다.

“저는 공작님께 붙은 마귀를 떼어냈습니다. 성력, 그러니까 별의 힘으로 어떻게 얍… 아무튼 그랬고. 그러다 보니 제 힘만으로는 부족해진 거예요. 겁나 강대한 마귀였거든. 그래서 세자 전하께서 손을 빌려주셨는데, 과연 은월의 피를 이은 분답게 별의 힘이 팍팍. 덕분에 마귀는 종말을 맞이하고, 공작님께서는 풀려나고, 모두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 거죠. 그치만 그 마귀가 강대하여서, 언제 돌아오더라도 이상하진 않노라… 희곡이면 이쯤에서 속편 예고.”

루지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만 들어도 안전장치가 무엇인지 알 만했다.

“세자에게 내 목줄을 쥐여 놓겠다는 소리군.”

“예. 공작님의 마귀가 떨어져 나갔다는 걸 세자 전하께서 보증해 줄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세자가 바라지 않는 걸 시행하기란 어렵겠지요.”

“그리고 세자 전하께서는 내가 치졸한 복수를 하길 바라지 않을 것이고?”

“치졸하다는 건 아시니 다행이네. 뭐 그 밖에도 세자 전하 성정상 공작님이 많은 것을 하길 바라지 않으실 텐데…. 이건 솔직히 상현이 너무 컸잖아요. 견제 좀 받으세요.”

“견제가 아니라 통제겠지.”

“그런가? 그럼 통제 받으시고요.”

휘파랑은 가볍게 말했다. 루지아는 다름 아닌 자신의 앞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일이 그렇게 가벼이 언급되는 것을 믿기 어려웠지만, 그것이 바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루지아는 다시금 분노를, 허탈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감정이 비롯되는 원인, 바로 왜소감을 느꼈다.

자신이 필사적으로 쌓아 올린 것. 결사적으로 추구해온 것. 권력과 지위라는 것이 이 소년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는 듯 했다.

‘아니, 의미가 있긴 하겠지.’

언젠가 보았던 풍경이 눈앞을 스쳐갔다.

- 저기 굽어진 나무가 있잖아. 저 나뭇가지 위에 새가 앉을 거야. 그러면 우린 이 돌을 던져 맞히면 되는 거야.

- 응! 누나!

- 누나가 아니라 스승이라니깐.

굽어진 나무와 나뭇가지, 돌멩이. 새를 잡기 위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용해야 하는 변수. 단지 그 정도 의미에 불과할 것이다.

그것이 도대체 얼마나 어마어마한 권력을 지니고 있어야 가능한 일인지, 루지아는 감히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불가해한 기분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왜소감 속에서 물었다.

“자네 눈엔 지금 무엇이 보이나?”

많은 함의가 담긴 질문이었다.

하지만 휘파랑은 별 실없는 질문을 듣는다는 듯 대답했다.

“지금요? 공작님이요.”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휘파랑은 턱을 매만지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덤으로 달도 안 떠서 겁나게 어두운 바깥도 보이네요. 젠장. 내 앞날 같네.”

루지아는 웃었다. 허탈한 웃음이었다.

잠시 후,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가지.”

“예.”

잠시 후, 몇 명의 용사들이 추가로 뽑혔다. 황금성에 잠입할 이들이 그렇게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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