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 구국의 성소년, 휘파랑 (2)
“씨삐럴!”
알실라의 명장이 성벽 위에서 고함을 내질렀다.
“뭐하는 기고! 왜 조 되야뿌노! 저 기병대장시끼, 기세가 덩덩하니 뛰치나가서는 저기 뭐꼬!”
명장 휘하 야장들은 할 말이 없었다. 그들로서도 대체 저 난장판 속에서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알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냥 갑자기 월국 꼬맹이 하나가 자기 편 하나를 찍어내더니 단기 돌격을 시작했고, 알실라 기병대는 거기에 그냥 주춤거리다가 짓밟힌 것처럼만 보였다.
‘뭐하는 거야 진짜. 왜 저래?’
‘뭐 저리 오합지졸처럼 흩어져? 말 탄 병사가 아니라 농민 떼거리인 줄 알겠네.’
화포 책임자 대부분은 칼보다 망치를 가까이 하던 이들이었다. 전장의 생리를 깊이 알 수 없는 기술자들로선 도무지 지금 벌어진 일에 대해 호의적인 결론을 내리기 어려웠다. 화포 이전 단계의 장거리 병기인 강노와 투석기를 맡고 있던 군사 계통 출신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거꾸로 군사 계통이기에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기병대에 비호감을 품게 된 화포 책임자들도 깜짝 놀랄 명령이 내려왔다.
“마! 됐다! 치아라! 야들아! 저거 그대로 날려뿌라!”
늙은 명장이 길길이 날뛰면서 소리쳤다. 화포 책임자들은 기겁했다.
“아니 큰 할배! 안 되지요! 아군들도 섞여 있는데!”
“그러믄요! 우리가 무슨 나투아 뱃놈들도 아니고!”
나투아 뱃놈들은 자신들도 아군 채 사격한 것은 결사대에 한정된 일일 뿐, 마지막 남은 기병 전력을 향해 그 짓거리를 하진 않았을 거라고 변명할 수 없었다. 나투아는 40년 전에 망했기 때문이다.
명장은 그 점을 짚었다.
“그럼 그 뱃놈들처럼이라도 해야지! 아니면 거, 거 뱃놈들처럼 될 끼가!”
“큰 할배요! 저 말 탄 병사들 없으면 그거야말로 뱃놈들처럼 되는 거요! 최소한 떨어진 다음에 쏴야….”
“저 월국 잡놈들이 등신이가! 잘도 떨어주겠다! 지금도 쩌그, 쩌 봐라 저거! 들러붙어 떠지질 않잖냐!”
그 말대로였다. 군율을 회복한 월국 기병들은 하나의 생물처럼 움직였다. 가장 선두에 선 조그만 소년의 뒤를 따라 우왕좌왕하는 알실라 기병들을 유린했다.
그것은 알실라 기병들에게 다행한 일이기도 했고, 불행한 일이기도 했다.
기병의 효과를 가장 극적으로 누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돌진할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하는 것이다. 만약 월국 기병들이 이 기세를 틈타 돌파하여 길게 나아간 다음 되돌아 돌진해왔다면, 그러길 2번에서 3번만 반복했더라면 알실라 기병대는 전멸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기병의 효과를 살리는 대신 알실라 기병진 속에서만 짧게 짧게 돌진하면서 유린하는 이유는 알 만했다. 알실라 기병진과 접촉면이 크게 떨어지는 순간 화포 사격이 날아올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커다란 이득을 포기하는 대신 조금의 손해도 보지 않겠다는 분명한 의지였으며, 월국 기병들은 그 의지를 관철해내고 있었다.
약삭빠른 짓을 뻔히 알고도 당하면 속에서 천불이 나는 법이다. 알실라 명장이 불을 토하듯 외쳤다.
“날려뿌라! 다 날려뿌라고 저거!”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알실라 야장들은 그런 명장을 말리느라 쩔쩔맸다. 그들이라고 열 받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저 강철갑 기병대는 알실라가 가진 마지막 희망이었다….
◈ ◈ ◈
‘이 기병대. 얘네는 알실라가 가진 마지막 희망이야.’
그 희망을 도려내면서, 나는 냉철하게 생각했다.
‘얘네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받으면, 그래서 복구할 수 없다는 게 확실해지면 곧바로 화포 사격 날아오겠지? 그러다 잘못하면 같이 몰살당할 테고….’
솔직히 그 정도면 나쁘지 않은 교환이기는 했다.
전쟁을 두고 영웅과 영웅의 숙명적인 대결, 주군에 대한 충성과 명예로운 약조 등에 중점을 두는 이들이 있다. 한편 같은 전쟁을 두고 울부짖는 과부, 떠도는 고아, 불에 탄 전답 같은 것에 시선을 두는 이들이 있다.
후자에 속한 이들은 자신이 전쟁의 본질을 꿰뚫었다고 말한다. 낭만에 휩싸이는 일 없이 전쟁의 민낯을 폭로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들 역시 종류가 다를 뿐 어떤 종류의 낭만에 휩싸여 있다는 데에서는 전자와 궤를 함께 한다. 전쟁은 그보다 더 무정한 무언가이다.
군대가 사람을 부품으로 만든다면, 전쟁은 사람을 숫자로 되돌린다.
그렇게 숫자가 된 목숨들을 부지런히 바꾸고 또 바꾸는 것이야말로 전쟁의 진정한 민낯이다. 거기에 대의는 없고, 따라서 명예도 없으며, 심지어 비극도 없다.
영웅들이 정련된 군대 앞에 무너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 문학은 수학을 이길 수가 없다.
그러니 전쟁 속에 영웅이 나타난다면, 그 영웅은 단지 서사시의 탈을 쓴 계산가들이다.
‘왕국 측에는 아직 보병과 궁병 등, 기병이 아닌 병과들이 남아 있지.’
나는 이를 악문 채 계산했다.
‘그리고 기병들이 알실라 기병들과 공멸한다 해도 이미 확보한 보급로를 통해 기병들을 좀 더 들여올 수 있어. 반면에 알실라는 더 쥐어짤 수 있는 기병이 없고. 그러니 나쁘지 않은 교환이긴 한데….’
문제는 지금 이 기병대에 고위층이 섞여 있다는 것이다. 방금 끌려간 상현 공작 루지아를 제외하면, 남전후 아신군, 서군후 세오, 그리고 물론 세자 전하까지. 원정군의 핵심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거다.
‘눈먼 포탄에 세자 전하가 박살나기라도 하면….’
왕국의 앞날에 드리워질 암운을 차마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니 그런 위험도 무릅쓸 수 없을 수밖에.
‘따라서 지금 끝장낼 수는 없어.’
적어도 알실라 기병대의 절반은 살려 보내야 했다. 역설적이지만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러자면 슬슬 빠질 시간이다.’
머릿속으로는 그렇게 차분하게 계산하면서, 하지만 여전히 신기(神氣)가 들린 듯 열에 들뜬 얼굴로 나는 한 쪽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입니다!”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소리치는 한편, 속으로는 거듭하여 캐물었다.
‘저기 맞지?’
[첫 번째 은월: 맞아. 저쪽 뿐이야.]
‘진짜지? 정말이지? 말 달리기 시작하면 진짜 돌이킬 수 없음요. 모든 걸 걸고 확실하지?’
[첫 번째 은월: 맞다고 진짜! 이런 불신자 자식아!]
‘그래! 믿는다 소연아!’
나는 말을 달리면서 외쳤다.
“계시가! 별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화포 몇 개가 깨어진 탓에 화망을 구성하기 껄끄러운 방향.
“가라! 저 쪽으로! 하면! 적도들이 부리는 사이한 마술로부터 보호받을 것이니!”
그곳으로 군대를 이끌면서, 나는 힘껏 외쳤다.
“왕국의 전사들이여, 모두 나를! 이 휘파랑을 따르라아아아!”
언변계 스킬들이 열일을 했다.
[ 예언(Lv.3)이 발동됩니다. ]
[ 군중들은 당신에게 깊이 집중하고 있습…. ]
[ 연설(Lv.3)이 발동됩니다. ]
[ 연설이 선동으로 바뀌어 시전…. ]
그 효과는 함성으로 돌아왔다.
“우와아아아!”
“성소년! 구국의 성소년 휘파랑!”
일반 기병들이 번갈아 외쳤다. 앞서 내가 말했던 대명사를 입에 담는 자들도 있었다….
‘실제로 들으니까 부끄럽네….’
[간신 조련사: 그대가 용 쩐다는 말을 부끄러워하기까진 제법 시간이 필요했지요. 하지만 이번에는 곧바로 부끄럽다 여기는군요. 장족의 발전입니다.]
‘천사님… 그만 좀….’
[첫 번째 은월: 용 쩌는 구국의 성소년 휘파랑. (완전 큰 웃음)]
‘으아아! 그만 좀 하라고!’
정말이지 비명을 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질렀다. 속 시원하게.
“와아아아아아아-!”
알실라 기병대는 비수로 수십 차례 찔린 복부처럼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나와 기병들이 내지른 고함에 주춤하며 물러섰다.
그렇게 길이 열렸고, 나와 내가 이끄는 기병대는 그 방향으로 내달렸다. 왕국 기병대와 알실라 기병대는 그렇게 분리되었다.
다행히 야리소연의 정찰 결과는 정확했다. 화포 사격이 날아드는 일은 없었다….
‘씁… 역시 이대로 뒤돌아 돌진해서 한 차례 더 싸먹고 싶은데….’
[개천의 시왕: 길잡이여. 욕심을 부리지 마라. 벌써 성벽 위에는 그 화포인지 하는 것의 방향을 조정하는 자들이 있다.]
‘넵, 시왕님. 알고 있습니다요. 지금까지가 운이 좋았죠 사실.’
나는 그대로 기병대를 이끌고 황금성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졌다. 그리하여 화포 사정거리 바깥으로 물러났던 보병들과 합류했다.
◈ ◈ ◈
“저 씨삐럴 놈들이!!”
황금성 성벽 위. 알실라 명장이 벽력같이 고함쳤다.
화포 책임자들도 표정이 썩었다. 포구의 위치를 조정하던 그들은 수박을 깨먹고 유유히 도망친 고라니를 보는 것 같은 얼굴로 월국 기병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안 돌아올 모양입니다.”
“어쩌죠 큰 할배….”
늙은 명장은 잇소리를 냈다. 1,200기에 달하던 알실라 기병대의 숫자는 척 보기에도 절반 가까이 날아간 상태였다.
그러니 남은 것은 절반인 6백. 저 6백이 본래 계획대로라면 포위망을 뚫고 바깥으로 나가야 했을 병력이었다. 저들이 월국의 보급선을 괴롭히고 알실라 전역에서 민병들을 모아 와야 희박한 승산이라도 생기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어떻게 돌파를….’
떠오른 생각에 늙은 명장은 곧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하사 받은 수정 안구 보호대가 증명하듯, 그 역시 칼보다 망치를 가까이 하며 세월을 보낸 인물이었으나, 그렇게 보낸 세월이 많았다. 이제 와서 포위망을 돌파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죽다 살아난 알실라 기병대의 사기(士氣)부터가 엉망이었다. 거기에 보병들과 합류한 월국 기병대는 화포 사정거리 바깥에서 천천히 맴돌고 있었다.
알실라 기병대가 기적적으로 사기를 회복하며 내달린다 한들, 보병들의 방진에 기병대가 합류하면 뚫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뚫는다고 해도, 턱없이 적은 숫자나 그럴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불씨 하나가 산불을 일으키는 법이라지만, 그래서야 불씨조차 될 수 없을 것이다.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한 가지 뿐이었다. 알실라 명장이 탁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성문 열라 캐! 저 잡놈들 들여삐라!”
엄밀히 말하면 성벽 위 화포 책임자에 불과한 알실라 명장에겐 그런 지시를 내릴 권한이 없었다. 하지만 알실라 군 총 사령관 또한 똑같이 생각했다. 알실라의 최고 권력자 또한 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은 지시를 내렸다.
그리하여 황금성의 성문이 열리고, 알실라 기병대가 돌아왔다. 은빛으로 빛나야 할 병장기들은 붉게 물든 채였는데, 그것이 핏물 때문인지 아니면 쏟아지기 시작한 노을을 맞아서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다만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이 날의 공방전은 끝났다.
◈ ◈ ◈
알실라 기병대가 황금성으로 복귀하고, 그 꽁무니를 쫓자는 아신군을 만류하고, 피해 상황을 확인하고, 기병 전력 절반을 비롯하여 포위 병력의 3분의 1 가량이 날아갔음을 알게 되고, 나머지 3분의 2도 사기가 엉망진창이란 사실을 보고 받고, 그런 병사들을 독려하고, 배식을 좀 후히 베풀고, 그 와중에 술도 풀까 말까 하다가 풀지 말기로 결정하고, 그 모든 것을 시행에 옮기니 밤이 왔다.
하지만 지휘 막사에는 불이 꺼지지 않았다.
이 원정군은 왕국 정규군과 영주들이 동원한 제후군이 합쳐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다 이긴 전쟁에서 이런 꼴을 당한 거다.
당연히 나와야 할 소리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 군이 너무 가까이 다가간 게 문제였다 이건가!”
아신군이 고함을 내질렀다. 서군후 세오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한 발 물러섰다.
“그런 말이 아닙니다. 다만 적들이 최후의 수단을 동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했다, 저는 어디까지나 그런 말씀을….”
“말 다했나! 오늘 죽은 자들 중에는 내 손주도 있었다! 세오 네 놈이 내 전우의 아들만 아니었어도 이미 모가지가 날아갔을 것이다! 변수 따윈 더 없다고 지껄였던 장본인 주제에-.”
“아니, 그러니까 남전후를 탓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방금 말씀은 좀 심하시군요. 저도 서군도를 총괄하는 후작인데….”
책임 공방.
이러네 저러네, 네 탓이네 내 덕이네 하는 소리들은, 그러나 다행히 더 심해지진 않았다. 세자가 적절한 시점에 끼어들었다.
“남전후의 군세가 앞장 선 이유는 제가 선봉을 맡긴 탓입니다. 그러니 서군후께서 그것을 탓하고자 하신다면 저를 탓하셔야 할 것입니다. 또한 남전후. 그대의 상실에 대해서는 삼가 조의를 표하겠습니다. 오늘 죽은 남전후의 가솔들을 저는 별이 되는 그 날까지 기억할 것입니다.”
세오는 이렇게까지 나오는 세자 앞에서 기세등등할 수 있는 위인이 못 되었다. 아신군은 세자가 직접 손주를 기억해 주겠다는 말을 하자 눈시울을 붉힌 채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강대한 두 영주가 입을 다물고, 왕국군 총 사령관인 세자가 고개를 숙일 줄 아니 소모적인 책임 공방은 금세 사그라지었다.
물론 거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음… 그런데 말입니다.”
“예,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은데….”
책임을 떠넘길 수 있을 만큼 고위층이면서 이 자리에 없는 이가 존재했으니까.
“그… 상현공이 마귀라는 이야기는….”
누군가 조심스레 꺼낸 말에, 쭈뼛거리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 쪽으로 향했다.
‘음.’
바로 내가 앉아있는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