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 구국의 성소년, 휘파랑 (1)
[개천의 시왕: 좋지 않다.]
‘밀리고 있습니까?’
광란의 도가니 안에 있는 나로서는 아무것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름 높은 전쟁 군주로서 바깥에서 전장을 들여다보고 있는 비류아는 냉정하게 전황을 분석했다.
[개천의 시왕: 그렇다. 이대로는 오래지 않아 몰살당할 것이다.]
‘역시 쪽수에 밀려서?’
[개천의 시왕: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기병과 기병이 얽히면 지금과 같은 난장판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데, 그 속에서 기병들은 질서를 갖춘 군대 하나가 아니라 말 탄 전사들의 모임이 된다. 내가 세운 나라의 기병들은 물론 한 사람의 전사로서도 강하겠다만-]
‘그런 개싸움에서는 무장 상태가 빛을 발하는 법이다 이거군요.’
[개천의 시왕: 정확히는 갑주의 견고함, 방어력이 빛을 발하게 된다.]
살아있는 것은 쉽게 죽지 않는다.
팔이 찔려도, 다리가 날아가도, 목이 찍혀도, 살아있는 것은 쉽게는 죽지 않는다. 모가지가 날아간 닭조차 심장이 멎는 그 순간까지 펄떡거리는 것이다.
하지만 살아있는 것은 쉽게 다친다.
팔을 찔리면 손을 못 쓰게 된다. 다리를 날리면 걷지 못하게 된다.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보유한 전투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 전투력 보존에 있어서, 장비가 얇은 왕국 측은 확실한 열세를 보이고 있었다.
[개천의 시왕: 지금도 왕국 기병들의 몸에는 착실하게 피해가 축적되고 있다. 전투에 취해 미처 깨닫지 못할 뿐이지.]
[최초의 성녀: …대홍수 무렵에도 동사자가 가장 많이 나왔던 건 비를 맞으면서 움직일 때가 아니었지요. 겨우 비를 피할 수 있는 동굴을 발견해서 한숨 돌리게 됐을 때, 그렇게 긴장의 끈이 풀린 순간이었어요.]
[개천의 시왕: 그렇다. 결국 누적된 피해가 임계점을 넘는 순간 무너지기 시작할 거다. 그럼 숨통이 트인 알실라 기병들은 통솔력을 되찾고 재차 하나의 군대로 기능하기 시작하겠지.]
‘그리고 그렇게 질서를 갖춘 군사력 앞에 무용이 뛰어난 개인의 집합체 따위는 의미가 없다는 거죠….’
[개천의 시왕: 잘 알고 있군. 군대를 베어 넘기는 영웅 같은 건 전설에나 등장하는 것이다.]
[첫 번째 은월: 어, 잠깐만. 이세 걔는 군대를 막 통째로 베어 넘기고 그러지 않았어?]
[개천의 시왕: 이세는 내 아들이지.]
비류아는 마치 그로써 모든 설명이 끝났다는 듯 말했지만 내가 부연했다.
‘이세는 더럽게 센 데다가 전술적 안목까지 겸비한 놈이었어. 신월회에서 마나랑 등신짓 할 때부터 싸움판 읽는 능력 장난 아니었잖아.’
[개천의 시왕: 내 말이 바로 그런 뜻이었다.]
[첫 번째 은월: 그래…. 어, 생각해보니 가리비수 말이 맞네. 근데 나는 왜 이세를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지?]
‘풍모랑 행동이 워낙에 호쾌했으니까. 진짜 전설 속 영웅처럼 말이야. 그리고 이세는 그 덕에 얻을 수 있는 이득도 영리하게 이용을….’
거기까지 말했을 때 나는 깨달았다.
비류아가 그 깨우침을 정확하게 짚었다.
[개천의 시왕: 내가 한 말과 그대가 한 말에 이 상황에 대한 해법이 담겨 있다.]
지금 이 상황의 문제는 무엇인가? 까놓고 말해 개인 대 개인 전에서 발리고 있다는 거다. 그렇다면 그 해법은 무엇인가?
‘알실라 기병대보다 먼저 군의 질서를 되찾는 것.’
그렇게 적들이 개개인의 전사들로 남아있는 동안, 아군들이 다시 군대가 되는 것이 이 열세를 뒤집을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었다.
‘그리고 그 유일한 방책을 시행하는 방법은 하나뿐이지.’
영웅의 어머니가 그 방책을 말했다.
[개천의 시왕: 그대는 전설 속 영웅이 되어야 할 것이다.]
◈ ◈ ◈
‘생각해보면 카한 그 개새끼도 그랬지.’
생긴 건 무식한 야만족 그 자체였지만, 속에서는 족제비와 구렁이가 춤추고 앉았던 인물. 그것이 왕국을 멸망시킨 야만족들의 우두머리였다.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해.’
겉모습은 최대한 화려하게, 행동은 한 눈에 딱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직관적으로.
하지만 머리는 한없이 냉철하게. 시야는 탁 트인 들판을 내다보듯 넓기 그지없게.
‘고전적인 영웅이 된다.’
그걸 위한 밑밥은 이미 깔려 있었다.
나는 불꽃과 굉음을 쏟아내던 저 황금성을 향해 단기로 돌격했던 몸이다. 심지어 13살 소년이기까지 하다.
‘그걸 고려하면, 지금 내게 가장 알맞은 영웅의 유형은--.’
다음 순간 나는 소리 내어 외쳤다.
“아아, 왕국이여! 들립니까! 들리십니까!”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신을 영접한 것 같은 얼굴로 애타게 부르짖었다.
“방금 제게! 달의 여신께서! 그 분이 거느리신 별들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종교적 영웅!
그것이 지금 내 빙의체에 가장 걸맞은 영웅의 유형이었다.
[간신 조련사: ‘종교라면 이제 신물 납니다. 벌써 몇 번이나 데였습니다. 천사님의 조언을 이제야 잘 알겠습니다. 더는 종교 건드리지 않겠습니다.’ 라고 누군가 말했던 것 같은 기억이 납니다만….]
‘마지막! 이번이 진짜 마지막!’
[간신 조련사: 간신이여. 그대는 정말이지 종교 중독자로군요. 좀 끊으십시오….]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천사님과 문답을 마무리한 나는 거듭하여 외쳤다.
“왕국을 구하라! 위기에 빠진 왕국군을 구하라! 왕국의 용사들을 구하라!”
때마침 말이 투레질을 했다. 나는 고삐를 감아쥔 채 칼끝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외쳤다.
“저 최초의 별 야리소연께서! 성스러운 예언자 모서아께서! 위대한 성녀 아리야께서! 용을 베고 하늘을 여신 시왕께서! 제게 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조금 전 세자가 취했던 자세를 참조한 것이었는데, 그 보람이 있었다. 실로 한 폭의 종교화 같은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나는 그 위에 스킬을 끼얹었다.
“믿습니까! 제가 여신의 목소리를! 별들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 연설(Lv.3)이 발동됩니다. ]
[ 예언(Lv.3)이 발동됩니다. ]
“이 휘파랑을 믿으십니까아아!”
두 스킬의 효과는 과연 대단했다. 이 수라장 속에서도 내 목소리는 청명하게 울려 퍼져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물론 적군의 이목도 끌었다.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꼬맹아! 머리가 쳐돌았….”
알실라 기병 한 명이 이를 드러내며 내게 대거리를 했다. 그치만 나는 도끼를 쥐고 있었고, 그건 곧 다시 말해서….
[ 도끼술(Lv.3)이 발동됩니다. ]
“이 불경한 자가아아아아!!”
내가 노호하며 내던진 도끼가, 퍽, 알실라 기병의 머리를 후려쳤다. 강철 투구는 깨지지 않았지만 그 안에 담긴 기병의 머리통은 수박처럼 터져 나갔다.
“감히 어디서! 별무리의 목소리를 듣는 나의! 이 성소년 휘파랑의 말을 끊는 것이냐아!”
그리 거세게 외쳐주니 이승 사람들이 주춤했다. 덤으로 저승 사람들도.
[첫 번째 은월: 음… 일단 묻는 건데, 비수야. 성소년이 뭐임…?]
‘성스러운 소년. 성자라고 말하기엔 어리잖아 아직. 그렇다고 성남이라고 말하자니 영 어감이 안 살고….’
[간신 조련사: 그래서 생각한 결과물이 그런 해괴한 대명사입니까…?]
‘아, 뭐 어때서요. 대륙 문자로 성은 성스러운 걸 뜻하기도 하고 별을 뜻하기도 한다구요. 중의적인 의미가 담긴 게 멋있지 않습니까?’
[간신 조련사: 중 2적인 의미 같습니다만….]
‘무슨 소리신지 도통….’
내가 그렇게 의미 그대로 별들과 교신하고 있자니, 이승 사람들 중에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이가 말을 걸어왔다.
구체적으로는 시아람 경이었다.
“도련님, 무슨 말씀을…?”
“후….”
나는 두 손을 가슴에 모았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새 도끼를 꺼내든 터라 자연히 도끼를 안아 든 모양새가 됐다.
“말 그대로다, 시아람 경! 별들께서! 왕국을 가호하시는 분들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마치 초대 법왕과 같은 성자 자세로 그렇게 또 한 폭의 종교화를 연출해주면서, 나는 사랑에 빠진 것 같은 얼굴로 외쳤다.
“소년이여, 그대는 선택받았다! 우리가 부여해 준 힘으로, 그대들 속에 숨어있는 마귀를 잡아내어라!”
◈ ◈ ◈
[개천의 시왕: 전사가 군인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두 가지다.]
1 적과 아군을 구분하는 것.
2 상관과 수하를 인식하는 것
[개천의 시왕: 그렇게 수평과 수직의 체계를 머릿속에 자리 잡게 만드는 것이 비결이다.]
잘 정련된 군대는 사람의 집합이 아닌 하나의 생물처럼 움직인다. 병사 하나하나는 그 생물을 이루는 부품으로 기능한다.
[개천의 시왕: 이 난장판 속에서 그 체계를 머릿속에서 일깨우기란 어렵다.]
그 체계를 심어 주기 위한 방법을 그대는 이미 지니고 있다.]
“마귀…?”
“마귀라니요, 도련님…?”
내 곁에 있던 감귤군이 당혹했다.
세자 전하조차 이 급박한 상황 속에서 싸움을 멈추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말입니까, 공자? 우리 안에 마귀가 있다니요?”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세자 전하! 별들께서 제게 속삭이셨나이다!”
나는 들뜬 얼굴 그대로 외쳤다.
“성소년이여, 그대는 선택받았다! 그대뿐 아니라 이 전장에 있는 그대들 모두가 선택받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렇게 외치는 나는 좋은 표적물이었다.
알실라 기병들 중에도 마상궁을 다룰 줄 아는 자는 있었다. 그들은 혼전이 잠시 멎은 틈을 타 자신들의 신장만큼이나 땅딸막한 단궁을 꺼내 들려 했다.
‘근데 난 진짜 목소리를 듣는단 말이지.’
[첫 번째 은월: 오른쪽, 말 다섯 마리 건너서.]
나는 그 쪽을 보지도 않은 채 도끼를 집어 던졌다. 스킬 보정을 받은 손도끼는 정확하게 야리소연이 짚어준 곳을 향해 날아가 처박혔다.
“헉!”
“어, 어떻게….”
알실라 기병들은 물론이요 아군까지 기겁했지만, 나는 말 그대로 안중에도 없다는 듯 외침을 이어갔다.
“그럼에도 그대들은 이런 수난을 겪는구나! 그 이유는 그대들 속에 마귀가 있기 때문이라! 그 마귀를 먼저 해치워야 그대들의 앞길에 비로소 서광이 비칠 것이다!”
성은대군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휘파랑 공자. 그 말씀은 곧 우리 안에 배신자가 숨어 있다는…?”
“아니요! 마귀는 마귀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한 쪽 방향을 가리켰다.
“저 자가 마귀입니다!”
“어…?”
갑작스럽게 지목당한 상현 공작 루지아가 당혹했다.
나는 열렬한 목소리로 외쳤다.
“성소년의 이름으로 명하노라! 그대들이 내가 별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저 마귀를 스스로의 힘으로 끌고 가거라!”
정적이 흘렀다.
루지아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런 헛소리를 늘어놓는다고,”
“어서 저 불경한 마귀를 끌어내려라!”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영주 노릇을 하면서도 쓰지 않았던 스킬을 썼다.
[ 즉각숙청을 사용합니다. (0/1) ]
그리하여 루지아 주변에 있던 상현 공작가의 기병들이 그 명령에 반응했다.
“고, 공작 각하!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죄송합니다!”
루지아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 그대로 뒷목이 잡혔다. “아니,” 말 그대로 뒷목 잡을 상황에 누군가 대신 뒷목을 잡아주었다는 것이 루지아에게 썩 위안은 되지 못한 듯 했다. “잠깐, 무슨,” 루지아는 몸부림을 쳤지만, 상현 공작가의 기병들 또한 루지아 못지않게 근육질이었다. 불시에 기습을 당한 루지아는 말 탄 상태 그대로 제압당했다.
그 광경을, 알실라 기병들은 물론이요, 왕국 기병들 모두가 얼빠진 눈으로 지켜보았다.
‘이해가 안 되는 광경이겠지.’
어린 소년이 갑자기 별의 목소리를 들었다며 소리치더니, 신들린 신위를 선보이며 저격하려는 적들을 거꾸로 저격했다. 그것만으로도 신비하기 그지없는 일인데, 손가락질 하나로 저 막강한 권력을 가진 상현 공작을 떨어뜨린 것이다. 그것도 전장 한복판에서.
‘이해할 틈도 안 줄 거야, 어차피.’
이해하려 해도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종교적 경외의 근본이니까.
“마귀는 제거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틈을 주지 않고 소리쳤다.
“왕국의 기병들이여! 달의 여신의 손가락들이여! 저 곳을 보라!”
나는 고삐를 감아쥐고서, 칼끝으로 한 쪽 방향을 가리켰다. 알실라 기병들도 방금 벌어진 일들을 이해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는지 흠칫 물러섰다.
‘어라. 이건 예상하지 못한 꿀이네.’
비류아가 말해주었던 ‘가장 약한 부분’이 그렇게 한 층 더 벌어진 거다.
‘당연히 받아먹어야지.’
나는 곧바로 말을 달렸다.
“쳐라!!”
황금성을 향해 단기로 내달렸을 때처럼.
“이 성소년 휘파랑을 따르라!”
다만, 그 때보다는 뒤따르는 이들이 빠르게 늘었다.
그렇게 나는 창의 끄트머리가 되었다. 시아람 경과 감귤군, 세자 전하와 그 기병들이 창날이 되었다. 나머지 왕국 기병들은 창대가 되었다.
난잡하게 꿈틀거리는 알실라 기병대의 한복판을, 왕국의 기창이 후벼 팠다.
그리고 알실라 기병대가 크게 찢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