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황금성 (4)
강노가 쏘아낸 화살이 성벽을 후려갈겼다.
쾅…!
화살이 성벽에 부딪친다기 보다, 준마를 내달린 기병이 창으로 찍어 친 것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음! 언제 보아도 좋은 풍경일세.”
루지아가 팔짱을 낀 채 넉살 좋게 웃었다.
그녀 곁에 몰려 선 사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도 좋습니다!”
“역시 상현 공작가의 강노입니다!”
“보아 버렸다구…! ‘완벽한 전쟁병기’라는 것을…!”
상현 계통의 명가 도령들이었다. 비은공주의 곁에 붙어있는 왕궁기사 유리아의 성별이 남자였다면 저 중 하나에 섞여 있었으리라. 기사뿐 아니라 작위와 봉토를 가진 이들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이들 모두가 상현 공작의 눈에 들길 바라는 청혼자들이었다. 상현 공작의 신분상 루지아는 언제나 이런 별무리를 데리고 다녔으나 이번 원정에는 그 숫자가 많았다.
‘공작 각하도 이제 마흔을 넘기셨지.’
‘저 상현공이 자기가 낳지 않은 아이에게 자리를 물려줄 리가 없어.’
‘그리고 출산을 생각하시면 더 이상 결혼을 미루진 못하실 거야. 무슨 시왕 폐하도 아니고….’
다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출산을 생각할 경우 루지아는 더 이상 결혼을 미룰 수 없는 나이인 바, 이번 알실라 정복이 끝나면 그걸 계기 삼아 결혼식을 올리리라는 예상. 그렇다면 그 결혼식의 주인공 중 하나가 자신이 되지 말라는 법 어디 있느냐는 소극적인 상상, 또는 자신 외의 누가 될 수 있겠느냐는 적극적인 망상.
‘귀여운 것들.’
루지아는 웃으면서 생각했다. 그 때였다.
“하지만 확실히 동안성보다는 단단하군요.”
청혼자 중 한 명이 근심에 싸인 얼굴로 말했다. 루지아는 웃음 띤 그대로 그 청혼자를 곁눈질했다.
“흠? 그런가?”
“예. 방금 두드려 맞은 성벽에 흠집 하나도 안 나지 않았습니까?”
사내의 말처럼 황금성의 성벽은 멀쩡했다.
강노가 쏘아낸 화살의 위력이 기창 돌격에 버금간다고 하더라도, 기창 돌격을 맞았다고 해서 무너져 내리는 성벽 같은 건 이 세상에 없다. 다만 그 충격이 열 번, 백 번, 천 번 되풀이되었을 때를 노려 발사하는 것이 조립형 강노의 존재의의였다.
“그래도 동안성 때는 첫 발에 좀 큼지막하니 돌덩이가 떨어져 나갔었는데….”
청혼자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루지아는 사내로부터 시선을 거두었다.
“자넨 집에 가게.”
조금 지난 다음에야 사내는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알아차린 듯했다.
“예?”
루지아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 웃음 짓고 있었다. 다만 그 웃음의 온도가 바뀌어 있었다.
“아무도 상현의 병기가 가진 효과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는 없네. 내 남편이 되길 바라는 자라면 더더욱 그럴 수 없지.”
“고, 공작 각하. 저는 그저….”
“안 들렸나? 가라니까.”
루지아는 남자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대신 다른 청혼자들의 시선이 남자를 향했다.
남자는 수치심을 느끼는 듯 얼굴을 붉혔지만, 무어라 입을 열진 못한 채 고개를 푹 수그리고 돌아섰다.
떠나는 남자의 등 뒤에 대고 다른 청혼자들이 입 모아 소리쳤다.
“가차 없으십니다!”
“역시 공작 각하이십니다!”
“느껴버렸다구…! ‘강인한 매력’이란 것을…!”
루지아는 빙긋 웃었다.
“잘 들었네. 이제 조용히들 하게. 할 짓 없으면 늑대들이라도 돕고.”
청혼자들이 일제히 입을 닥쳤다. 루지아는 손가락을 퉁겨 그들이 선봉군을 도우러 흩어지게끔 했다.
루지아의 최측근, 상현 공작가의 자문사가 다가왔다.
“너무 심하게 대하신 것 아닌지….”
“그렇게 보였나?”
“예, 그래도 상현의 축을 이루는 백작가의 대공자였습니다. 자기 손으로 따낸 기사 작위도 있었지요.”
“그럼 더 효과적이겠군. 축을 이룬답시고 나대면 그런 꼴을 당한다는 걸 잘 알았을 테지.”
루지아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자문사는 그 웃음이 그치길 기다렸다가 말했다.
“이미 잘 알았을 겁니다. 이번으로 열 세 번째니까요.”
“으흠, 벌써 그리 됐나?”
“예. 하문하시지 않은 여쭈심에도 대답 드리자면, 예. 일일이 세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흰머리가 늘지. 쉬엄쉬엄하게.”
“진심으로 제 흰머리를 염려해주신다면, 각하. 다음번에는 부디 조금 더 생각해 주십시오.”
루지아는 자문사를 흘끗했다.
“으흠. 돌려보낸 이들 중에 자네가 찜해놓은 신랑감도 있었나?”
“그럴 리가요. 하지만 그리 하나하나 잘라낸 결과 남아있는 남편감 후보들이 저런 앵무새들 아닙니까?”
“앵무새한테 유감이라도? 어릴 적에 똥을 맞았다거나.”
“그랬다고 해도 앵무새들 모두에게 유감을 품진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각하의 반려 후보들이 모조리 다 새대가리만 남았다는 데에는 유감이 있군요. 새가 썩 현명한 동물은 아니잖습니까.”
“바로 그거야.”
루지아는 다시금 소리 내어 웃었다.
“현명해서 뭐하나? 잔소리나 하겠지. 하지만 잔소리를 하는 건 자네의 역할이지. 결정하고 집행하는 건 나의 역할이고. 그 사이에 내 반려 따위가 끼어들 자리는 없네. 새는 예쁘게 울 줄만 알면 돼.”
자문사는 고개를 조아렸다.
“물론입니다, 각하. 저는 단지 씨알만 건강한 멍청이가 상현의 안주인을 차지 할까봐 염려할 뿐입니다.”
“씨알만 건강한 멍청이로 충분하네. 안주인이면 안주인답게 주제를 알아야지, 에잉. 그 태부조차 시왕의 생전에는 입 딱 다물고 다녔다는데, 요즘에는 안주인이랍시고 집주인(家主)에게 나대는 것들이 너무 많단 말이야.”
늙은 자문사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 루지아는 위험한 선을 넘었다. 기가 센 안주인을 비난하다니, 말 속의 뼈를 읽을 줄 아는 이라면 누구든 당대의 달 그림자인 적검후를 겨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자문사는 쉽사리 맞장구조차 칠 수 없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현 공작이기 때문에 넘을 수 있는 선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자문사? 그리 여기지 않나?”
그걸 잘 알 텐데도 루지아는 서글서글 웃으면서 동의를 구해왔다. 소녀 시절부터 위험한 도발을 즐기던 인물다웠다.
그렇다면 동의를 해주어야 할 것이다. 다만 그대로 동의할 수는 없고 조금 돌려서.
자문사는 그게 다 무왕 폐하의 안주인, 그러니까 공작 각하의 조모이신 상현후께서 만드신 아름다운 전통 아니냐고 말하지는 않았다. 무왕은 네 명의 정실을 두었으며, 그런 고로 탓할 수 있는 사람은 상현후 외에도 많았다.
짧고도 치열한 생각 끝에 당대 상현의 그림자가 말했다.
“이게 모두 하현후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상현공은 만족했다. 루지아가 씩 웃었다.
“내 말이 그 말일세. 에잉, 하여간 하현이 문제야, 문제. 이 나라 모든 문제는 하현 녀석들이 일으키는 것 같다니까.”
◈ ◈ ◈
[경국의 하현후: 아~ 얼른 여기 오면 좋겠네. 마침 딱 돗자리 깔려 있잖아. 조국의 전사여! 얼른 전사해! 용맹하게 돌격해서 장렬하게 산화하려무나! 아아! 전사들의 천국이 너를 기다리고 있단다!]
[하누리(대 야리소연 전적 11승): 야.]
[경국의 하현후: 아니 하누리 어머니, 그러니까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면요….]
[제사장: 관리자님. 하현후의 채팅 좀 막아 주십시오. 솔직히 시끄러워서….]
[경국의 하현후 님께서 차단당하셨습니다. 당분간 메시지를 입력하실 수 없습니다….]
이승 한 편에서 그런 대화가 오가고 저승 저 편에서 저런 대화가 오가는 동안에도, 투석기는 계속하여 돌을 날려 보내고 강노는 연속으로 화살을 쏘아댔다.
황금성은 그야말로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길 거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진 이렇다 할 상처가 없었다.
“단단하긴 진짜 단단하네.”
내가 평했다. 나야 상현공의 구혼자가 아니니 이런 말을 해도 집에 가란 소릴 들을 걱정은 없었다….
‘구혼자 될까?’
[간신 조련사: 되지 말라니까요! 당신은 집에 가면 안 된단 말입니다!]
‘젠장!’
내가 낙담하여 어깨를 떨구자니, 시아람이 그런 내 어깨를 짚어주었다.
“아무런 효과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도련님. 보십시오. 저기에는 저렇게 돌쩌귀가 떨어져 나갔지 않습니까?”
‘아니, 그런 거 아냐…. 왜 위로하고 그래.’
그런 위로는 루지아한테 가서 해주면 좋겠다.
‘좋아할 테지…. 아니, 진짜 얘를 루지아랑 결혼시키면 어떨까? 칼 잘 쓰고, 몸 좋고, 조용하고, 충심 깊고. 그야말로 루지아가 바라는 최고의 남편감 아닌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요 여러분?’
[최초의 성녀: 예언자님, 전장에 집중하세요.]
‘그래야겠지….’
그치만 자꾸만 집중이 끊어지는 이유가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당면의 전쟁보다 왕도의 권력 다툼이 세자 전하 앞날의 먹구름처럼 보였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실라 측이 여기서 뭘 어떻게 할 수 없어 보이는데….’
황금성은 분명 잘 버텨주고 있었다. 아마 하루 종일 이럴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 날도, 어쩌면 그 다음 주까지 그럴 수 있겠지.
하지만 언젠가는 한계가 오는 법이다. 시아람의 말마따나 지금도 돌쩌귀가 좀 깎여 나갔다. 반격하지 못하는 자는 결국 짓밟히고 마는 것이다.
‘그런 결말을 피하자면 알실라 입장에서는 투석기나 강노를 파괴해야 할 텐데…. 성문 바깥으로 반격하러 나온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고.’
알실라 인들은 야금술과 제련술에 조예가 깊다. 그래서 무기의 질이 왕국보다 한 단계 높다.
반면 조그맣다는 신체의 한계가 있다.
‘그 한계는 왕국력 100년에 이르러 더 뚜렷해졌지.’
나투아 병탄으로부터 40년. 왕국의 군세에서 십병장, 백병장 노릇을 맡고 있는 이들 대다수는 왕국 귀족들이 전 나투아 귀족들과 피를 섞어 태어난 서자나 얼자들이었다. 시현군처럼 근육질인 데다가 키도 큰 공격-몸빵 완전체들. 특히 선봉을 맡고 있는 남전도 후작군이 그러했다.
‘남전도 후작군은 경문산성 공략에서 노예병 대부분을 소모했지. 그 말인즉 지금 남전도 후작군은 거의 전원이 정예 병력이라는 뜻이고. 잘 먹이고 잘 재우고 잘 입히고 잘 훈련시킨 녀석들… 그런 놈들이 조이고 있는 상황에서 이 집중 난타란 말이야.’
혹시 몰라 나도 불안요소들을 점검하긴 했다. 하지만 정말 이 상황에서는 알실라가 뭘 할 수 없어 보였다.
시아람에게도 물어보았지만, 다음과 같은 대답이 돌아왔을 뿐이었다.
“글쎄요, 도련님. 이 상황에 굳이 불안요소라고 할 만한 것을 꼽는다면…. 알실라로서는 아무래도 외부의 원군을 기댈 수밖에 없는데, 그 원군이라는 것은 검은 열도의 무사들입니다.”
“그치. 하지만 왕국도 생각이 있겠지?”
“예. 혹시 검은 열도 측에서 원군을 보낼 걸 대비하여 왕국 해군이 총 출동해 동해를 막고 있습니다. 다만….”
“다만?”
시아람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 총사령관이 원기윤 수군통제사이긴 합니다.”
“음….”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불안요소가 맞긴 했으므로 침음했지만, 시아람은 이내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제법 웃을 수 있게 된 기사 아저씨는 내 손을 잡은 채 말했다.
“염려치 마십시오. 원기윤 수군통제사가 휘하에 둔 군선들만 몇 척인데요. 거기다가 새로 만든 ‘왕국선’들은 검은 열도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배들보다 훨씬 튼튼합니다.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우위에 있는 군대가 패하는 일은 고금에 없었습니다.”
“그렇겠지 역시!”
그래! 역시 아무런 불안 요소도 없다!
‘알실라 측에서도 강노와 투석기를 준비하겠지만, 황금성 안에서 쏠 수밖에 없으니 날려 보낼 바위들이 한정될 수밖에 없지. 강노만 조심하면 되는데, 그 강노조차 알실라 측에서 쏘는 건 곧 그만큼의 물자를 소비한다는 뜻이니까….’
포위당한 상대에게 소모를 강요하는 공성전의 연장에 지나지 않았다. 알실라에겐 아무런 방법도 없는 것이다.
일반 채팅방에서도 제사장이 하누리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있었다.
[제사장: 하누리 님, 괜찮으십니까? 지금 하누리 님의 모국이 침략당하고 있는 겁니다만.]
[하누리(대 야리소연 전적 11승): 괜찮아.]
[제사장: 하긴 흑치사라 님께서도 나투아의 멸망을 담담하게 받아들이셨지요. 여기 와서 그런 걸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걸지도 모르겠군요.]
[하누리(대 야리소연 전적 11승): 응? 아니. 그건 아닌데….]
바로 그 때였다.
저승 입주자 시야로 황금성을 감시하던 야리소연이 침음을 흘렸다.
[첫 번째 은월: 웅….]
‘왜?’
[첫 번째 은월: 아니… 그. 뭔가 조금… 이상하게 생긴 걸 꺼내 오긴 한 것 같아서.]
이상한 거라니?
‘뭐 말이야? 저렇게 큰 석궁이면 조립형 강노고, 저렇게 지레처럼 생긴 건 투석기라니까.’
[첫 번째 은월: 아니, 둘 다 아닌데… 음… 근데… 아아아으, 뭐지 저게? 뭐야? 얘들아. 저게 뭐냐?]
야리소연이 일반 채팅방에 질문을 던졌다.
마나가 차단당해 한동안 평화를 맞이했던 일반 채팅방이 벌집을 쑤신 것처럼 뒤집어졌다.
[장막의 신월후: 어라. 그러게요. 뭘까요 저게?]
[제사장: 흑치사라 님, 혹시 아십니까?]
[외팔의 대학장: 아니요, 저도 잘 모르겠는데…. 뭘까요, 저게…?]
응?
흑치사라조차 몰라?
[외팔의 대학장: 다물… 혹시 아나요…?]
[재상 1: 글쎄요 스승님… 저도 잘은….]
[외팔의 대학장: 네… 그래요….]
[재상 1: 아니아니 스승님! 이 제자를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모든 걸 알진 못하지만 아는 건 안단 말입니다!]
[외팔의 대학장: 네….]
[대장군 두오: 저게 뭔들 무슨 상관일까! 내 막내아들 세오의 활약을 막진 못할 터인데!]
나는 일반 채팅방으로부터 눈을 떼었다. 이어 황금성 성벽 위를 바라보았다.
그리하여 시야에 들어온 물건을 보고 나는 입을 떡 벌렸다.
[하누리(대 야리소연 전적 11승): 내 고향 사람들이 저대로 끝날 리 없잖냐.]
우레가 터졌다.
천지가 뒤흔들렸다.
“으앗!” 내가 탄 제함도 조랑말이 펄쩍 뛰었다. 그 바람에 내가 미끄러지려는 것을, “도련님!” 시아람 아저씨가 다급하게 받아주었다.
그 덕에 나는 무사했지만, 아군이 무사한 것은 아니었다. 말들이 펄쩍펄쩍 뛰어다녔고, 사람들조차 혼미하여 그야말로 난장판이 됐다.
“뭐냐 방금 건!”
“알실라 측에서 뭔가를 한 것 같습니다!”
“뭘 했는데!”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투석기가 하나 박살….”
한 차례 더 우레가 터졌고, 다급하게 오가던 목소리가 비명 속에 끊어졌다.
나는 한 마디밖에 떠올릴 수 없었다.
‘아니 시벌.’
뭐여 이건.
‘저게 왜 여기서 나와…?’
화포(火砲).
이 시기에는 대륙에서조차 찾아보기 힘든 귀물(鬼物)이, 황금성 성벽 위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갓 불을 뿜은 용의 아가리가 그러하듯, 포구가 짙은 연기를 토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