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179화 (179/261)

179. 황금성 (2)

황금성은 황금으로 지어진 성이 아니다. 하지만 황금으로 지어진 성이기는 하다.

황금은 연약하다. 성을 쌓는 재료로 쓰기엔 효과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황금은 마약이다. 성을 쌓는 재료를 구하거나 성을 쌓는 이들을 부리는 데에는 효과적이었다.

알실라의 권력자들은 아낌없이 황금을 풀었다. 그 황금에 취한 이들이 제 어깨 위에 짊어진 것들의 무게를 잊고 돌과 나무를 날라왔다. 태산의 체중과 신장이 줄어든 만큼 황금성은 쑥쑥 자라났다. 알실라인들은 작고 탄탄했지만, 그들의 역작 황금성은 크고 단단했다. 그야말로 대단한 성이었다.

“으흠, 공격해서 떨어뜨리기는 어렵겠군.”

상현 공작 루지아가 평했다. 흥겨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땅에서 나는 것들을 다루는 데에는 도가 텄군요.”

서군후 세오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신중함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흥. 조그만 것들이니 재주라도 있어야겠지. 하지만 백 가지 재주를 가져봤자 용 앞에서는 무용한 법! 저 땅지렁이들은 달의 여신의 힘 앞에 무릎 꿇을 것이오.”

아신군이 육포를 꿀떡 삼키고는 이를 드러냈다.

얘는 그냥 아신군이었다.

왕국의 세자, 성은대군이 셋의 말을 듣고 나서 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단하기는 동안성 역시 그만큼이나 대단한 성이라 들었습니다. 하지만 상현공께서 그것을 깨뜨리셨지요. 그 방도를 본받는 것은 어떻습니까?”

루지아는 웃으며 답했다.

“흠, 세자 전하. 동안성이 호수 옆에 지어졌음을 상기하시게. 지반이 무르니 축성(築城)에 쓰인 소재도 무거울 수 없지. 무겁지 못하다는 말은 그만큼 단단하지 않다는 뜻일세. 그럼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동안호라는 장해물인데, 장해물이란 사람의 지혜로 해결할 수 있는 것 아니겠나. 그리고 지혜란 곧 다양한 것들을 알맞게 사용하는 것을 말하니, 그것들을 변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면 되는 것인데, 이는 보급선을 질기게 해두면 끝나는 문제라네. 하니, 이 상현공은 그저 기본에 충실했을 따름이라네.”

온몸을 뒤덮은 근육과 대조되게, 또는 어울리게, 차곡차곡 쌓아 올린 말이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상현 공작 루지아는 견고한 성채를 연상케 했다.

“허면 부악은 어땠습니까? 그 항구도시에도 훌륭한 성채가 있었다는 것을 압니다. 서군후께서 그것을 무너뜨리셨지요. 그 예를 본받기란 어렵겠습니까?”

세오는 담담하게 답했다.

“부악의 성채를 쉬이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은 그만한 밑작업을 해두었던 덕분입니다. 저는 시간을 들여 부악을 부패시켰지요. 관리를 매수하고 간자를 심고 세작을 뿌려, 불안을 부추기고 의심을 불지펴 스스로 성문을 열게 한 것입니다.

이는 제가 남서군도를 관리하는 몸으로 많은 배를 부릴 수 있었다는 것, 또한 서군후라는 신분이 있어 제함후 측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 그리하여 왕국 남해의 배 대부분에 제 손길이 닿은 바, 거기에 독을 묻혀 부악에 집어넣을 수 있었다는 것에 기인합니다. 그러니 지금 황금성에 쓰기에는 어려운 법도입니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서군후 세오는 훌륭한 책사였다. 턱에 늘어진 수염과 차분한 인상이 절로 선풍도골이란 말이 떠오르게끔 했다.

“그렇다면 경문산성에 대해 논해보고자 합니다. 그 난공불락의 요새를 남전후께서는….”

“노예병을 계속 돌진시켜 그 시체들로 경사를 메웠소이다!”

아신군이 당당하게 답했다.

얘는 여전히 아신군이었다.

성은대군이 아신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남전도는 풍요로운 땅이 아닌 줄로 압니다. 그만한 목숨들을 잃었다면 차후 영지를 관리하기 어려우시지 않겠습니까?”

내가 살던 시기, 그러니까 500년도의 남전도는 곡창지대라 불릴 만큼 풍요로운 땅이었지만 현재는 그렇지 않았다. 이는 나투아 측이 벌였던 청야작전과 복구되지 않은 전쟁 피해, 남전도의 주인이 아신군이라는 불행에 더하여, 치수 작업이 덜 끝났기 때문이다.

‘나투아와 알실라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던 계기부터가 나투아 측이 장마철마다 고생해서였으니….’

나는 개천식 당시 조사했던 정보를 떠올렸다. 남전도가 풍요로워지려면 앞으로 1백년 정도 더 둑을 세우고 2백년 가량 더 늪을 메워야 할 터였다.

따라서 세자의 물음은 그런 일을 해야 할 노동력을 허망하게 소모한 것 아니냐는 견지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었지만, 아신군은 역시나 아신군이었다.

“풍요롭지 않으니 군입을 줄여야지요! 그리고 저 황금성만 깨뜨리면 알실라 전역이 왕국의 손에 들어오지 않소이까. 그럼 소모한 노예들도 충원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 아니겠소이까!”

‘와.’

너무도 아신군스러운 대답에 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한편으로는 궁금해졌다.

‘과연 세자 전하께서는 어떻게 반응하실까?’

비은공주였다면 귤즙부터 날리고 봤을 테지만, 과연 그 오라버니는 그보다는 기품이 있었다. 성은대군이 말했다.

“남전후.”

“음? 말씀하십시오, 세자 전하.”

“선봉을 맡아 주실 수 있으십니까.”

지금 이 상황에 나오기는 뜬금없는 말이었다.

모두의 눈매가 가늘어지는 차, 성은대군이 이어서 말했다.

“저보다 더 전장에 익숙한 남전후라면 마땅히 아시겠지만 이는 지극히 위험한 일입니다. 저 황금성은 단단하며, 그 단단한 성 안에서 알실라 인들은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준비하고 있을 테지요. 남전후께서 이끄는 군세는 물론이요, 남전후 본인과 그 친족 또한 위험에 처할 수 있습니다.”

아신군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흥! 위험하지 않은 전장이 어디 있단 말이외까! 세자 전하께서 만약 이 남전후를 도발하려는 것이라면---.”

“황금성을 공략하는 데에 성공한다면 마땅히 그 위험에 합당한 보상을 약조하겠습니다.”

아신군이 멈칫했다.

“…정확히 어떤 보상을 말씀하시는 것이외까?”

“황금성 한복판에 비석을 세우겠습니다. 대륙 문자 1200자를 새겨 남전후와 남전후의 군세가 떨친 용맹을 기리지요. 그 문자들은 제가 직접 꼽을 것이며, 그리하여 비석에 새기기 전에 남전후로서 흡족한 내용인지를 먼저 확인받도록 하겠습니다. 족하겠습니까.”

성은대군은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담담한 말을 듣는 아신군은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달의 여신께 맹세하실 수 있겠소이까?”

“물론입니다. 흩어지기 쉬운 말이 아니라 계속해서 남아있는 글자로 이 자리에서 약조문을 써드리지요. 부관, 붓을 가져와주십시오.”

그러더니 성은대군은 실제로 그런 약조문을 작성했다. 건넸다. 아신군은 여전히 떨리는 손길로 받아 들더니 한 차례 훑어 그 내용을 확인하고는 한 쪽 무릎을 꿇었다.

“이 남전후에게 맡겨주시오! 최선을 다해 결과를 내보이겠소!”

“믿겠습니다.”

아신군은 누가 채갈 새라 약조문을 품에 집어넣고는 친족들을 향해 돌아갔다. 그런 아신군의 뒷모습을 성은대군은 조용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          ◈          ◈

상현 공작은 우선 주변 사람들을 물렸다. 그리하여 성은대군, 상현 공작, 서군후 셋만 남은 자리에서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돈 한 푼 안 되는 공치사 몇 마디로 죽을 자리에 떠미는 건가! 세자 전하, 자네 참 무서운 사람일세.”

성은대군은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스승님께서는 저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길 즐기시지요.”

세자로부터 스승이라 불린 여인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기울였다.

“으흠, 아닌가?”

“그럴 리가요. 나라를 경영하겠다는 자가 악을 마다해선 안 될 노릇이지요. 저는 나쁜 사람이 맞습니다. 다만 공치사라는 말씀은 심히 잔인한 말씀입니다.”

“잔인하다면 그저 사실이어서 잔인하겠지. 실제로도 왕실의 재정에는 별 부담이 없을 것 아닌가.”

서군후 세오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 듯 턱수염을 비틀었다.

“세자 전하, 이런 말씀을 드린다는 것이 지극히 외람되오나 경솔한 약조 아니었는지요? 부왕께서 남전후를 탐탁지 않게 여기시는데, 세자 전하께서 그런 약조를 하신다면 자칫 부왕과 세자 전하 사이에 이견이 있는 것처럼 비칠 수도 있습니다. 이로써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른다면 왕실의 재정에는 부담이 없어도 왕실의 권위에는 부담이 갈지 모릅니다….”

성은대군은 그런 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두 분 모두,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들을 하심에 앞서 고려하셔야 할 상대는 저나 왕실이 아닐 것입니다.”

“오, 그럼 누군가? 설마 남전후를 고려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겠지?”

루지아가 과장되게 입술을 오므리며 되물었다면, 세오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남전후께서 누군가의 고려 대상이 되실 만한 분은 아니시지 않습니까?”

성은대군은 잠시간 말이 없었다.

그 잠시간이 지나고서, 그는 입을 열었다.

“스승님과 서군후께서 이해해주실 만한 지혜를 가지셨다 판단하고 말하겠습니다.”

성은대군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서군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아바마마께서는 남전후를 너무 박하게 대하시지요. 예순이 넘은 남전후가 친족들을 데리고 참전한 이유 중 하나가 그것일 터입니다. 하지만 남전후는 왕국군의 장성이 아니라 영주이며, 그로 인해 남전후의 참전은 노장(老將)이 자신의 생을 증명하기 위한 여정으로 남지 못하고 그 영지민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성은대군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탄식했다.

“이는 남전후에게 불행한 일이며, 그 통치 하에 있는 이들에게 잔혹한 일입니다. 지나온 과거를 고칠 수 없다면 최소한 이번 전쟁을 계기로 해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루지아와 세오는 서로를 마주보았다.

잠시 후, 루지아가 팔짱을 끼었다.

“그 말은 마치 남전후가 벌이는 일들이 폐하께도 책임이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성은대군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바마마께서 이 나라를 통치하십니다. 이 나라 모든 일에 마땅히 책임이 있으시지요.”

“아니지! 폐하께서 이 나라를 통치하시니, 마땅히 폐하께서는 무오(無汚)한 존재여야지! 차대의 은월을 짊어져야 할 자네조차 감히 탓해서는 안 될 절대적으로 존엄한 존재란 말일세.”

“어째서입니까?”

“그야 자네 말마따나, 누군가 탓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이 폐하를 탓하게 될 테니까.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통치라는 걸 할 수 있겠나?”

“아니지요. 한도 끝도 없이 모두가 탓하더라도 그것을 견디고 해내야 하는 것이 통치입니다.”

“그건 귀찮은 일이야. 자네도 귀찮은 일을 피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할 텐데. 당장 자네도 귀찮은 일을 피하지 않았나?”

루지아의 목소리는 매운 내를 풍겼다.

“세자 전하. 자네가 자네 말대로 일을 ‘바르게’ 처리하려거든 먼저 남전후에게 남전후가 통치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부터 알려야 했을 걸세. 그리고 남전후의 참전이 자격지심에 따른 노망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알려야 했겠지. 하지만 자네는 그러지 않았어. 그저 탐스러운 미끼로 구슬렸을 뿐이지. 그렇지 않은가?”

“그렇지 않습니다. 남전후를 바르게 납득시키는 것이 제 깜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폐하께서도 남전후를 바르게 대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군.”

“그렇습니다.”

루지아가 폭발했다.

“그렇긴 뭐가 그렇다는 건가! 그러니까 그게 안 된다는 거야! 불가능은 곧 무능이야! 통치하는 자에겐 무능한 부분이 있어서도, 그 무능한 부분을 인정해서도 안 된단 말일세!”

서군후 세오가 쩔쩔맸다.

“고, 공작 각하. 목소리가 높습니다. 누가 들을 지도….”

“들으라지! 들은 연놈들은 모조리 고막을 파내어 죽일 거거든! 됐나 이제!?”

세오는 입을 다물었다. 루지아는 성난 사자같은 얼굴로 세오를 한 차례 돌아보았다가, 다시금 성은대군을 바라보았다.

“세자 전하… 몇 번이나 말하지만, 자네는 틀렸어. 잘못됐고, 바르지 못한 길로 가고 있네. 그런 길이면 차라리 도락으로 넘쳐흐르기라도 해야 할 텐데 웬걸, 끔찍하게 불편하고 귀찮기만 한 길이란 말일세! 이러니 내가 복장이 안 터지고 배기겠나!”

“하지만 스승님….”

“나를 그렇게 부르려거든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똑똑히 들으시게. 알아듣겠나?”

성은대군은 슬픈 눈빛으로 자신의 스승을 바라보았다.

상현 공작 루지아는 그 눈빛에 다시 울컥하는 듯 했다가, 심호흡을 하고는 말했다.

“자네는 경문산성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남전후가 막대한 비용을 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네. 이대로 전쟁이 끝난다면 남전후는 자신이 들인 비용들을 남김없이 이자 쳐서 받아내려 할 테지. 하지만 지난 세월 내내 남전후가 증명해온 것은 자신이 좋은 통치자도 좋은 경영자도 아니라는 것들뿐일세. 남전후에게는 노예도, 영토도, 재산도 주어서는 안 되는 상황이야. 하지만 자네는 왕이 될 사람이고, 왕은 그런 자들조차 부려야 하는 자리지. 그런 속에서 자네는 꾀를 낸 걸세.”

“스승님….”

“덜 끝났으니 계속 듣게.”

입을 다문 성은대군을 향해 루지아는 계속하여 말했다.

“자네는 남전후가 명예욕에 들떠 있음을 꿰뚫어보았네. 내 말이 맞지?”

“….”

“자네는 남전후의 명예욕을 살살 긁어주었네. 개새끼 등가죽을 긁어주듯이 말이야. 싸게 부릴 수 있는 방도를 찾아낸 거지. 내 말이 옳지?”

“….”

“자네는 그렇게 종이쪼가리 하나로 남전후를 사지로 밀어 넣는데 성공했네. 그대로 죽으면 좋을 것이고, 살아남는다 해도 더 후하게 대해줄 필요는 없게 된 게지. 내가 맞게 보았지?”

성은대군은 대답이 없었다. 그런 세자에게 상현의 공작은 대답을 재촉했다.

“맞다고 하게. 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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