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178화 (178/261)

178. 황금성 (1)

부악이라는 이름을 가진, 알실라 최대의 항구 도시가 있다.

대륙 문자로 가마(釜)를 뜻하는 것처럼 가마솥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 항구 도시는 본디 알실라보다 오래된 태고의 부족이 가꿔온 것이었다.

반도 남동부의 산 사람들이 알실라 인이 되고 반도 남서부의 물 사람들이 나투아 인이 되는 와중에도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오던 그 부족은, 그러나 결국 결단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싸우지는 않았다. 규모의 차이가 너무 거대했다. 그렇다면 어느 쪽 산하에 들 것이냐 하는 문제였는데, 그들은 알실라를 선택했다.

단순히 지리적으로 가까워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상재를 타고난 나투아 인들은 너무 탐욕스럽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뿐인가, 피부도 희여멀건한 데다 키까지 훤칠했다. 아무래도 알실라 인들이 쌈박한 만큼 의리가 있었다. 구릿빛 피부에 땅딸막해서 보고 있자면 우월감이 든다는 것도 덤이었다. 서로 피가 섞이면서 그 덤은 빠르게 사라지게 되었지만, 그들은 조선술과 해상 방어술로 알실라의 최남단을 지켜왔다.

말 그대로 의리와 핏줄로 뭉쳐진 역사의 항구였다.

“두오 대장군의 피를 이어받아 남서 군도를 총괄하는 이 서군후 세오가 제함도 후작군 및 제함도 주둔 제독의 선단과 함께 부악을 점령했습니다.”

- 왕국력 100년 4월, 부악 함락.

◈          ◈          ◈

경문새재라는 이름을 가진, 고개이긴 한데 참 고개라고 불러주기 뭣한 고개가 있다.

낮아서 뭣하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태산의 허리 중에서도 고도비만에 시달리는 허리였다. 새재라는 말부터가 새조차 ‘아 진짜 날갯짓하기 엿 같네’싶어 쪼그려 앉아 담배 한 번 피면서 쉬고 갈 만큼 높고 길다는 뜻이다.

땅지렁이라 불리는 알실라 인들이 그런 곳에 요새를 세워 두지 않았을 리 없다.

험준한 곳에 세워진 만큼 강인한 요새였다. 왕국이 반도 북부에 자리 잡기 이전, 나투아와 영혼의 한판 싸움을 거듭할 무렵에도 이 경문산성은 단 한 차례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

그야말로 돌 대신 무패로 쌓아 올린 전설의 요새였다.

“이 남전도의 후작이자 무왕 폐하의 아들로서 군호를 받은 이, 아신군이 경문산성을 무너뜨렸소이다!”

- 왕국력 100년 5월, 경문새재 점령.

◈          ◈          ◈

동안호(東安湖)라는 이름을 가진, 좀 이상하게 생긴 호수가 있다.

이 호수는 다른 호수처럼 원형으로 퍼져 있지 않았다. 대신 망막에 새겨진 벼락의 잔영처럼 북호와 남호 두 개로 갈래를 치고 있었는데, 그 갈라진 사이의 물길이 좁게 틀어 막혀 있었다.

이쯤 되면 지형 자체가 요새를 지으라고 유혹하고 있는 셈이다. 왕국의 북벽처럼 말이다. 물론 호수 근처라는 특성상 지반이 무른 터라 어려움이 많았지만 신기에 달한 알실라 인들의 축성술은 그 모든 난관을 극복해낼 수 있었다.

거기에는 역사적인 이유도 있었다. 쌈박한 알실라 또한 초기에는 다른 나라들이 그러하듯 여러 유력 가문들이 얽어 만들어진 형태였는데, 동안의 누르쇠라고 하면 먹어주는 집안이었다. 아무튼 금(金)을 다루던 일족이었으니 그만한 대우를 받을 만했다.

누르쇠 집안은 그 대우를 아낌없이 누렸으며, 호수 반절 이상을 해자로 삼아 동안성이란 이름의 불가사의를 구축해냈다.

정말이지 세력과 재력으로 이룩한 돈지랄의 정화였다.

“여기는 상현 공작 루지아! 지금 막 동안성을 무너뜨렸다네!”

- 왕국력 100년 6월, 동안성 정복.

◈          ◈          ◈

왕국은 그렇게 차근차근 알실라를 몰아갔다.

역사를 삽으로 허물고, 전설을 칼로 쓰러뜨리고, 돈지랄을 말발굽 아래 파묻었다. 나투아 전쟁 당시 얻었던 국가대항전의 교훈이 살아있어 승리에 취해 내달리는 일도 없었다.

쌈박질 잘하는 놈들이 물량공세를 퍼부어가면서 방심도 하지 않고 차근차근 조여오는 것이다. 이래서야 알실라가 아니라 알실라 할아버지가 오더라도 방도가 없었다.

“서군후 세오. 제함후의 핏줄과 함께 도착했습니다.”

“남전후 아신군. 아들, 손주와 함께 도착했소이다!”

“상현공 루지아! 내 남편감 후보들과 함께 도착했다네!”

그리하여 왕국력 100년 하고도 7월, 뙤약이 지글지글 달궈 놓은 황금 들판 앞에는 왕국에서 가장 악명 높은 전쟁 군주들이 모여들었다.

달의 여신을 상징화한 왕국기가 휘날렸다. 그 주변에 서군 후작가를 상징하는 개의 깃발과 남전 후작가를 상징하는 늑대 깃발, 상현 공작가를 상징하는 사자 깃발이 늘어서서 황금성을 압박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데려온 군소 가문들의 깃발들도 곳곳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제함 후작가를 상징하는 감귤 깃발도 그중의 하나였다.

물끄러미 그 깃발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조용한 청년으로부터 아저씨로 자라난 시아람 경이 말했다.

“휘파랑 도련님, 긴장되십니까?”

음.

“조금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도련님의 안전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시아람은 길게 말하고는, 호흡을 한 차례 고르고서 말을 이었다.

“도련님의 어머님과 아버님, 형제와 자매 분들께서 도련님이 돌아오시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이 시아람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도련님을 살려서 돌려보내겠습니다.”

으-음.

자.

여기까지 보았다면 알겠지만, 뭔가 이상하다 싶은 부분들이 있을 것이다.

[최초의 성녀: 아신군 저 양반은 환갑이 다 된 나이인데 왜 직접 전장에 나서고 염병인가요?]

‘좋은 지적이오. 하지만 초점을 잘못 잡았소.’

[개천의 시왕: 제함도 후작기 모양만 뭔가 이상하군.]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치만 그게 아니지요.’

[첫 번째 은월: 시아람이 쟤 나이 들더니 안 조용해졌네.]

‘넌 평소에는 제일 날카로운 주제에 지금은 왜 이래….’

소연이 지적만 빼고 다 중요하다면 중요한 지적이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은 따로 있었다.

[간신 조련사: 이전 빙의체인 휘영이 살아있는데, 그 아들내미에게 빙의해 있다는 것이겠군요.]

‘바로 그겁니다요.’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군마로 쓰기에는 심히 귀여운 제함도 특산 조랑말, 그 위에 올라탄 13살 소년의 손이 거기에 있었다….

“암초 괴수 가죽으로 틀을 잡고 상어 가죽을 덧입힌 장갑입니다. 특히 암초 괴수는 붉은 공주 전하께서 직접 사냥하신 것이지요.”

시아람이 설명했지만 물론 나는 내 손에 낀 게 뭔지 궁금해서 내려다본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지금 내가 빙의한 휘영이 아들내미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느라 바빴다.

‘잘 움직여지네.’

그것은 내가 임무에 제대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뭐여 진짜.’

이건 빙의의 법칙에 어긋나는 것 아닌가?

[간신 조련사: 지난 번 자모신 3 업데이트 당시, 저승의 주인인 당신을 여러모로 강화하지 않았습니까. 그로 인한 결과 중 하나 아니겠습니까.]

‘아-마 그렇겠지만 말이죠…. 확실한 건가요 천사님…?’

[간신 조련사: 자모신 시스템에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변명 진짜 무적의 방패네요. 왕국 대장한테 들려주고 싶습니다.’

[첫 번째 은월: 왕국 대장이 뭔데?]

‘나 살던 시절에 대륙에서 유행했던 희곡 있어. 방패가 오라지게 단단한데… 아니 아무튼. 그래서 나랑 휘영이랑 마주치면 어떻게 되는 거임?’

[첫 번째 은월: 어떻게 되기는. 안 그래도 개판인 족보가 한층 더 개판되는 거지.]

‘나를 낳은 나와 마주치다….’

[최초의 성녀: 대단히 철학적인… 아니 거의 시적인 표현이네요 그거.]

[간신 조련사: 사실 생물학적으로 옳은 표현이기도 합니다. 우리들 몸 속 깊은 곳에는 생명의 조각, 이른바 이중 나선 구조로 되어 있는 고분자화합물이 존재하는데, 이것은 스스로를 복제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천사님 말씀만큼이나 알쏭달쏭하네요. 어느 정도로 알쏭달쏭하냐면 어떻게 되나 확인하고 싶어서라도 지금 당장 짐 싸고 제함도로 귀환하고 싶을 정도입니다요.’

[간신 조련사: 아니아니! 그러지 마십시오! 그러면 안 됩니다!]

천사님이 오랜만에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말렸다.

야리소연이 갸우뚱했다.

[첫 번째 은월: 어째서? 가리비수였던 자와 가리비수가 된 자가 서로 만나면 세상의 섭리가 어그러져서 모든 게 터져 나갈까봐?]

‘약간의 가능성….’

[최초의 성녀: 현실적으로 어렵네요. 휘영의 아들이라면 제함도 후작가를 대표해서 온 걸 테고, 관록을 쌓는다는 면에서 특파된 것일 텐데. 결판을 앞둔 이 시점에 ‘저 집에 갑니다’ 하고 빠질 수는 없잖아요? 제함도 후작가의 위신이 걸린 문제니까요.]

‘정치적인 사유….’

[개천의 시왕: 둘 모두 올바른 추찰이지만, 한 가지 결정적인 사실을 간과하고 있군.]

비류아의 목소리엔 좋지 않은 심기가 팍팍 묻어났다.

야리소연도 아리야도 그런 비류아의 태도를 잠자코 견뎌줄 양반들이 아니었지만, 비류아의 다음 지적이 정확히 맥점을 눌러 놓았다.

[개천의 시왕: 길잡이가 임무에 들어왔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다.]

[간신 조련사: 그렇습니다! 빙의의 법칙은 잠시 놔두더라도 임무의 법칙을 상기하십시오!]

그렇다. 두 사람의 말대로였다.

‘이 알실라 정복, 내가 간섭하지 않으면 망하는 상황이라 이거죠.’

완벽한 포위망. 압도적인 군사력. 고명한 지휘관들이 있는 이 상황에서조차, 왕국은 냉면 한 사발 하듯 시원하게 말아 먹힐 수 있었다.

‘무슨 나라가 진짜….’

나는 이마를 짚었다. 벌레 먹은 작약도 이보다도 강인할 것 같다….

◈          ◈          ◈

[간신 조련사: 결국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들어보지요.’

[간신 조련사: 빙의의 제 1원칙은 가장 가까운 핏줄에게 빙의한다는 것. 임무의 제 1원칙은 해결할 수 있는 시기에 해결할 수 있는 형태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흐음. 그래서요?’

[간신 조련사: 그리하여 빙의의 제 1원칙과 임무의 제 1원칙이 충돌한 결과. 자모신 시스템이 그… 뭣이냐, 하여간 유연성을 발휘하여 당신을… 아무튼 거시기한 것입니다.]

‘뒤로 갈수록 설명의 상태가…?’

[간신 조련사: 음… 임무나 수행하십시오.]

‘넹. 뭐 더 말해봤자 임무 들어온 건 들어온 거고… 저도 대충 이해는 하는데 말이죠….’

자모신 시스템이란 게 이상한 부분에서 냉정하고 엉뚱한 부분에서 편의주의적이라는 거야 알고 있었다. 그러니 내 이전 빙의체 아들내미한테 빙의했다는 것까지는 어떻게 납득할 수가 있었다.

‘그래도 뭐라고 하나. 휘영의 몸으로도 전장에는 나설 수 있잖습니까?’

[개천의 시왕: 영주로서 제함도를 통치해야 할 제함도 후작이 직접 군세를 이끌고 참전하는 건 어렵지 않겠나?]

‘시왕님. 시왕님이 세운 이 나라 말인데요. 바로 지난 세대만 해도 왕이 친정을 하는 게 미덕을 넘어 당연한 걸로 여겨지는 미친 나라 아니었습니까?’

[개천의 시왕: 너와 내가 같이 세운 나라였지. 그리고 왕의 친정은 내 아들이니 가능했던 일이다. 덤으로 흑치사라 강의에 따라 말해보자면, 왕이 친정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체계가 발전했다는 것 아니겠나.]

‘그것도 인정합니다. 저기 남전도 후작이랑 서군도 후작, 그리고 상현 공작이 출병하긴 했지만 말이죠.’

[개천의 시왕: 저들은 통치자보다는 전쟁 군주로 이름 높은 이들이니 말이지. 그에 반해 휘영은-]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인물이 직접 출병을 했고 말이죠.’

비류아가 침묵했다.

나는 출병한 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보급로는 탄탄합니다. 포위망은 단단합니다. 유격전을 펼치는 잔당들이 있지만 오래지 않아 소탕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변수 없습니다.”

서군후 세오가 부채로 입가를 짚은 채 말했다. 길게 기른 수염이 바람에 휘날렸다.

“음! 역시 말을 타야 살아있는 맛이 난단 말이오. 이번 달 만월이 뜨기 전에 저 황금성 음에 앉아 술을 기울이고 싶구만. 어떻습니까. 공작 각하께서도 함께 하시겠습니까?”

남전후 아신군이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면서 말했다. 아리야 말마따나 환갑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송곳니는 여전히 늑대처럼 날카로웠다.

“아하핫! 그러도록 하세! 이제 정말 황금성만 남았군 그래!”

상현공 루지아가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울뚝불뚝한 근육과 장대한 기골에 걸맞는 우렁찬 웃음소리였다.

“자, 여러분.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인물’이 말했다.

“고지가 바로 저 앞으로 다가왔습니다만, 이런 때일수록 스스로를 다독여야 할 것입니다.”

타오르듯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였다.

그 인물이 고왔다. 휘영의 그것처럼 퇴폐적인 요염함도, 흑치사라의 그것처럼 지성적인 음험함도, 현성이의 그것처럼 앙칼진 귀여움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한 떨기 백합마냥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힘내도록 합시다.”

가장 닮은 이를 찾자면 석마갈이겠지만, 석마갈이 늘상 짊어지고 다니던 자괴감과 자조감이 없다는 데에서 또한 달랐다.

‘왕국 정규군을 이끄는 사령관.’

그것이 저 남자의 정체였으나, 쟁쟁한 전쟁군주들이 그 말을 듣고 있는 데에는 또한 따로 이유가 있었다.

내 모습을 쭉 곁에서 지켜보던 시아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저분이십니다.”

내가 바라보는 곳. 그리하여 시아람이 반응한 곳에 선 남자의 정체.

“저분이 바로 세자 전하, 성은대군이십니다.”

비은공주의 오라비, 차세대의 은월을 짊어진 자가 이 전장에 와있었다.

[ 제 1목표. 알실라 정복 과정에서 성은대군을 보호하십시오! ]

[ 보호하지 못할 경우 비은공주께서 왕위에 오르실 테고… 음… 아시죠? ]

너무 잘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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