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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이 나라를 살림-174화 (174/261)

174. 세계의 갑판에서 (2)

나는 업무를 봤다.

“각하,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요. 여기 변변치 않지만 진상품을 좀 가져왔는디….”

제함도 반대편에서 온 어촌 촌장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가 사는 마을은 꼰대 기사의 기사령(騎士領)에 속해 있었고 그러기에 꼰대 기사에게만 알현을 하면 되었으나, 나는 일정 주기마다 한 번씩 각 기사들에게 자기 기사령의 요인들을 데려오도록 했다.

당연히 기사들 대다수는 좋아하지 않았다. 차마 불만스러운 표정은 못 짓고 볼멘 표정을 지은 채 그들이 말했다.

“각하. 저희를 믿지 못하십니까?”

“아무렴 저희가 뭐 세금을 빼돌리거나 그러겠습니까.”

“참으십시오, 여러분. 후작 각하의 분노는 이 제함도 한복판에 우뚝 솟은 나한산과 같은 바, 혹시라도 폭발하시면 여기 있는 모두가 살아남지 못할 테니까요.”

나는 간단하게 해결했다.

“시아람아. 얘네 좀 굴려라.”

시아람은 조용히 그렇게 했다.

후작성 알현실에서 똥개 훈련이 벌어졌다. 한바탕 굴러 기진맥진해진 기사들에게 나는 쪼그려 앉은 채 말했다.

“알아 임마. 다 믿지. 니들이 내 기사 아니냐? 니들 아니면 내가 누굴 믿겠냐.”

기사들이 우물쭈물했다.

“어… 그럼 왜….”

“그래도 마! 서로 얼굴 보고. 나도 진상품 좀 받고. 하사품 좀 내리고. 밥도 좀 먹고. 응? 보고 살자 이거지. 흑구들 잡을 때만 얼굴 보고 그러면 정 없잖냐. 안 그러냐?”

기사들은 이해를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손을 내저었다.

“아무튼 수고했다. 애들 데려오느라고 수고했고. 그 동안 흑구 저 미역놈의 새끼들이랑 싸우느라고도 고생 많았다. 이것들 받아. 니들 고생한 몫이다.”

바로 조금 전 있었던 대규모 흑구 토벌에서 얻은 전리품들을 적당히 던져 주자 기사들은 대번에 희희낙락한 얼굴로 바뀌었다.

‘단순한 것들.’

나는 그 단순한 것들에게 손을 내저었다.

“가라. 오느라 수고했고. 또 부르면 제꺽제꺽 오고. 시아람이는 남고.”

“옙.”

기사들은 인사 한 번씩 오지게 박더니 돌아갔다.

나는 후작성 창밖을 흘끗했다. 햇볕을 덧바른 바다는 그 피부가 비늘과 같이 반들거렸다.

‘바다에 용이 산다고 여겨진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겠지.’

한가로운 생각을 하는 나를 시아람은 조용히 기다렸다.

이윽고 내가 말했다.

“시아람아.”

시아람은 바로 대답했다.

“예.”

“어찌 보냐? 아까 그거.”

“저는 주군의 행동을 평가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닙니다.”

“평가 해.”

“의도하신 바는 알겠습니다. 기사들이 영민들을 수탈할 것을 염려하시어 정기적인 소집 기회를 만드신 것이시겠지요. 다만 효용성이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나는 선선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별 효용성이 있을 리가 있나. 걔들도 머리가 있잖냐. 혹시라도 수탈을 했으면, ‘후작님 앞에 가도 암소리 마라잉. 다 잘 되고 있다고 하고, 쓸데없는 소리 한 마디라도 해서 피곤하게 만들면 다 뒤진다 진짜.’ 이러면서 입단속 단디 해놨겠지. 그 뿐이겠냐. 촌장쯤 되면 나름 끗발 날리는 기득권들인데, 걔네가 진짜 아랫바닥 애들 고충을 전달할 만한 입장은 아니지.”

“하다면 어찌하여?”

“첫째는 그 동안 너랑 후작군 뺑이치게 했던 거랑 같은 거. 치안 유지 명목으로 애들 불러 벌 줬다가 풀어준 거랑 똑같아. 얼굴 한 번 보나 안 보나, 이게 중요하니까 정기적으로 함 보자고 한 거고. 둘째는, 그래도 이런 자리들이 마련이 되면, 아무리 요식적이라도 말야. 뭔가 좀 나아지지 않겠냐?”

“뭔가라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뭔가가 뭔가지 뭐겠냐.”

대답하고서, 나는 다시 바다를 내다보았다.

그리고 평소 없던 일이 벌어졌다. 시아람이 먼저 침묵을 깬 것이다.

“각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응?”

시아람은 조심스레 내 눈치를 살폈다.

“조만간 먼 곳으로 떠나실 것 같으십니다.”

나는 웃었다. 하여간 날카로운 녀석이다.

“얌마. 떠나긴 어딜 떠나냐? 내 안색이 좀 더럽다지만 내 나이 아직 스물 중반도 안 꺾였다. 뒈지려면 멀었으니 마음 푹 놔라.”

시아람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송구합니다. 각하의 건강에 대해 염려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럼? 석마갈이 따라서 배 타고는 이 세상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 던지고 내 행복 찾아 떠나기라도 할까 봐서?”

시아람은 조용해졌다.

나는 더 짓궂게 굴지 않기로 했다.

“알아. 무슨 말인지. 아까 그것도 그렇고. 지금 내가 갖추는 체계란 것들은 어째 내 부재 시를 대비하는 것들이지. 충심 깊은 우리 시아람이한테 몹시도 불안하게 느껴졌으리란 거, 본 후작은 충분히 이해한다.”

시아람은 말없이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걱정 마라. 어디 안 가니까.”

“예, 실로 다행한 일….”

“다만 좀 달라질 지도 모르겠다.”

시아람은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내가 임무를 달성했다는 것, 그리하여 곧 저승으로 돌아가리라는 것, 그래서 조만간 빙의가 풀리리란 것을 말하지 않았다.

다르게 말했다.

“사람이란 게 홱 바뀌기도 하잖냐. 천천히 바뀌기도 하고. 당장 아까 그 기사 애들만 해도… 1세대인 꼰대 걔는 무왕 폐하한테 술잔까지 받았었다고 입만 열면 자랑질하면서 그 지랄이고. 2세대인 다른 기사 애들도. 처음 이 섬에 왔을 때랑 지금이랑 비교하면 많이들 달라졌잖냐? 강철 같은 작자들일수록 바닷바람 맞으면 쌔하니 녹스는 거야 원래.”

“각하께서도 스스로가 달라질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뭐 그게 합리적인 추측 아니겠냐? 내가 뭐라고 안 변하고 그러겠냐. 나도 사람인데.”

나는 앉으면서 말했다.

시아람은 한동안 침묵했다가 말했다.

“각하. 제 혈통에 대해 아십니까?”

음.

“대충 안다.”

“송구합니다만 얼마나 아시는지 여쭈어보아도 되겠습니까.”

“네 집안에 공과 과가 있어, 그 둘이 상쇄된 결과 이 섬에 보내어졌다는 것을 알아.”

그보다는 더 자세히 알았지만 나는 말을 아꼈다.

그것을 시아람은 내가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것이라고 여겼는지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 할아버지는 무왕 폐하의 친위대장이셨습니다.”

신월회장에서 반역을 일으켰던 남자.

“그리고 제 고조부께서는 무왕 폐하의 무예 스승 역할을 맡으셨다더군요.”

대지진 당시 눈 한 쪽을 잃었던 아삼 부장.

“할아버지께서는 그런 고조부 님을 존경했습니다. 손주라는 입장도 있어서, 무왕 폐하와 함께 무예 훈련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두 남자는 동기생이 되었다. 같은 스승 아래에서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무왕 폐하께서는 너무도 초월적인 힘을 지닌 분이셨습니다. 전해 듣기로는 야리소연의 순발력과 가리비수의 용력과 모서아의 예지력, 태부 시우 님의 기술력을 타고 난 분이셨다더군요.”

나는 그 말을 이해했다.

이세는 강했다. 일신의 무력만 해도 압도적이었는데, 전술적인 판단 능력 역시 빼어났다.

전투 관련 기술 중에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면 전략적인 판단 능력 정도였는데, 이것이야 어차피 갖춘 이가 없었으니 공정한 평가가 아니었다.

‘비류아조차 청야전술을 예측하지 못했었으니.’

그런 시대상의 한계를 제외하면, 이세는 세계 최강이었다.

“그렇게 강한 분과 함께 훈련을 받으면서, 제 할아버지께서는 조금씩 자괴감을 품기 시작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재능을 곁에 두었을 때, 사람은 뒤틀리게 된다.

“그래도 할아버지께서는 자신을 다잡으려 노력하셨습니다. 자신이 더 노력을 하면 되는 일이다, 나도 또래 중에서는 뛰어난 편 아닌가, 인생은 장기전이다…. 그렇게 다짐을 하게 된 데에는 고조부께서 훌륭한 분이라는 것도 한 몫을 하셨습니다. 신분상의 공대를 했다고는 하나, 무예 훈련에 있어서만큼은 두 제자를 아무런 차등도 두지 않고 대하셨다고 합니다.”

아삼 부장은 훌륭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은 변하는 것입니다.”

훌륭한 사람이 끝까지 훌륭한 사람으로 남기란 어려운 것이다.

“고조부께서 돌아가실 적에, 그 분이 가장 먼저 찾은 것은 무왕 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무왕 폐하께서 은월의 피를 이어받은 분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지요.”

존경하던 할아버지가 임종을 앞두고 찾은 것이 자신이 아니었다는 걸 알았을 때, 그 손주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고조부의 뒤를 이어 증조부께서 무예 스승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증조부께서는 고조부만큼 훌륭하진 못하셨지요. 그분께서는 자신의 아들이 무왕 폐하에 비해 뒤떨어지는 것을 참을 수 없어 했습니다. 할아버님은 항상 무왕 폐하와 비교당해야 했고, 깎아내려져야 했습니다.”

거듭된 뒤틀림은 굴절이 되고, 쌓여든 굴절은 단층이 된다.

“할아버지는 무왕 폐하를 증오하게 되셨습니다.”

다친 사람은 낫고 싶어 한다. 또는 다른 사람을 자신만큼 다치게 하고 싶어 한다.

“이윽고 할아버지는 대역을 범하기에 이르셨지요.”

나는 그 날의 신월회장을 떠올렸다.

휘황한 달빛. 석궁을 들고 선 남자들. 인질로 잡힌 채 웃어 보이던 마나. ‘반드시 죽이겠다’던 하누리의 선언.

송곳니를 드러내던 친위대장과 그를 제압하던 이세의 모습.

“무왕 폐하께서는 할아버님을 용서하셨습니다. 하지만 증조부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용서하지 못했지요. 제 할아버님 또한 그것을 알아 도망쳤습니다.”

“대륙에 넘어갔다지.”

내가 말했다.

잠시 침묵했다가, 시아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신 것처럼 처음에는 대륙에 가셨다고 합니다. 그곳에 가셔서 어떻게든 성공한다면, 높은 자리에 오른다면, 그리하여 자신이 무왕 폐하보다 더 낫다고 자랑할 수 있는 인간이 된다면 자신의 모든 응어리가 풀어질 것이라 믿으셨다더군요.”

그러나 어느 시대, 어느 환경에서도 외지인이 성공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것이 쉬운 일이었더라면 아리야 시절의 월족 역시 그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분께서는 제법 높은 위치까지 오르는데 성공하셨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목표하던 바를 이루는 데에는 실패하셨습니다. 처참한 실패여서 다시 한 번 도망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투아로 갔다.

“하지만 그 분께서는 자신이 더 이상 젊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으셨습니다.”

사람은 변하며, 가장 극적인 변화는 노화일 것이다.

“그분은 생각했습니다.”

그 무렵 무왕 이세는 한창 무명(武名)을 올리는 왕이었다.

그에 반해 시아람의 조부는 단지 무명(無名)의 배신자였다.

만약 그가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더라면, 그래서 이세 앞에 무릎을 꿇고 죄를 청할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두 남자가 이윽고 화해하여서, 그 결과 왕국이 나투아를 병탄하는데 도움을 주었더라면 아름다웠을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았다.

“할아버지께서는 어떻게든 왕국에 피해를 입히고자 했습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왕국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줄 수만 있다면…. 그 생각만 하던 할아버지는 이윽고 당시로서는 묘안을 내게 되었습니다. 석마갈의 아버지, 선대 해웅이 그 묘안을 받아들였고, 나투아의 세 함호 역시 거기에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시작되었고, 밀리기 시작하자 청야전술이 펼쳐졌다. 하지만 그 전술마저 왕국군 앞에 무너졌다.

“마침내 할아버지께서는 자신이 패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 패배를 순순히 받아들이지는 않으셨습니다.”

나는 말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를 들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제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내 목을 베어라. 그것을 들고 무왕을, 무왕을 따르는 이들을 찾아가거라. 그렇게 해야 할 시기는 스스로 알 수 있을 것이다.’

“할아버지께서는 제게 말했습니다.”

‘손주야, 내 칼을 받아라. 그것을 들고 휘둘러라. 언젠가 무왕을 넘어설 만큼의 실력을 쌓아라. 네게는 그 자질이 있다.’

“그렇게 그분께서는 아버지에게 핏줄의 존속을, 제게는 가문의 미래를 맡기셨습니다.”

“….”

“제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목을 들고 왕국에 투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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