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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이 나라를 살림-173화 (173/261)

173. 세계의 갑판에서 (1)

석마갈을 돌려보내고 나서, 나는 유리아를 불러들였다.

“유리아. 상현 공작가 측에 보고 올려 보낼 거지?”

“예, 각하.”

“좋아. 그 때 이 서신도 좀 보내줘.”

내가 건넨 서신을 유리아는 따개미가 잔뜩 돋아난 암초를 보듯 보았다.

“무슨 내용인지 여쭈어 보아도 되겠습니까?”

“안 될 게 뭐 있겠어.”

나는 석마갈과 합의한 내용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리고 늘 벌어지던 일, 유리아가 기겁하고, 내 정신 상태를 의심하며, 시아람이 그런 유리아의 목을 따려 들고, 내가 말리는 일이 벌어졌다.

다만 마지막 일을 평소보다 조금 늦게 했다. 감정적인 이유와 실용적인 이유 양측 모두에서였다.

내가 말했다.

“존나게 큰 배를 만들 거야. 석마갈이 탈 배.”

유리아는 목을 쓸어 만지면서 미간을 찡그렸다. 방금 정말 목이 날아갈 뻔했다는 걸 인지한 만큼 내 정신 상태를 의심하는 일은 그만두었다.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대신 유리아는 실용성을 의심했는데, 그건 의미 있는 일이었다.

왕궁기사가 말했다.

“이 나라의 시원(始原)이 밝혀졌다는 것, 그리고 그 성지(聖地)를 찾아 나선다는 것은 확실히 감격적인 일입니다. 신화 속에 숨겨져 있었던 비밀에 제 몸이 다 떨리는군요. 하지만 그런 대업을 사교도 요술쟁이와 그 추종자들 따위에게 맡길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나는 여기서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첫째, 그런 건 너 같은 말단 찌끄레기와 조율할 내용이 아니라 서신을 받을 상현 공작가 고위층과 할 이야기라고 쏘아붙이는 것.

둘째, 유리아를 납득시키려 시도하는 것.

나는 둘째를 선택했다. 감정적인 접근은 많은 경우 손해를 불러온다. 그리고 이런 설득 과정은 어차피 상현 공작가 고위층과 서신을 나눌 때도 거쳐야 할 일이었다. 왕궁기사 하나 설득시키지 못한다면 요원할 터, 좋은 예행연습이 될 것이었다.

하므로 내가 말했다.

“먼저 석마갈이 사교도 요술쟁이는 아니지. 심해교와 달의 여신 교단은 하나로 합쳐졌어. 앞으로는 같은 길을 걷게 될 거야.”

유리아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송구합니다만, 후작 각하. 그 건에 대해서는 아직 세 성현의 공증을 받지 않았잖습니까? 어디까지나 절차적인 문제입니다만….”

보라, 벌써부터 고쳐야 할 부분이 나오지 않은가.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잔월공, 제사장, 법왕 말이지. 그건 내가 해내려고 하는 일이고 또 해낼 일이다만, 그대의 말을 들어보니 확실히 선박 건조에 앞서 해내야 할 일이겠군. 절차적인 문제라고 말했는데, 그 절차를 끝내야 심해교와 우리 교단 사이의 조직 개편도 이루어질 테니까 말이지. 우선순위를 정돈하게 해주어서 고맙구나.”

그런 내 모습에 유리아는 도리어 당황했다.

“아, 아니요…. 음. 마땅히 드려야 할 말씀을 드려야 한 것뿐입니다. 같은 이치로, 정식으로 두 종교가 하나로 묶였다고 해도 석마갈과 그 추종자들의 전적은 여전히 문제가 됩니다. 달의 성지를 찾아 나선다는 원정에 선발대로 보내는 것은 격이 맞지 않습니다. 마땅히 달의 여신의 축복을 받은 전사들로만 원정대를 꾸려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이야.”

나는 어디까지나 실용적인 내용을, 다만 감정을 실어 말했다.

“그대 또한 짐작하겠지만 성지 원정은 무척이나 지난한 일이 될 것이다. 몇 번이나 시행착오를 거치게 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막대한 희생자가 발생할 테지. 첫 번째 시도는 더더욱 그럴 터이고. 왕국의 미래를 짊어져야 할 이들에게 그런 짐을 맡길 수는 없다. 별의 자리를 목표하는 정결한 이들은 보다 경험이 쌓여 성공 가능성이 높을 때를 위해 예비해 두어야 할 것이야.”

“왕국의 젊은이들을 생각하시는 후작 각하의 마음이 실로 아름다우십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성지를 찾아 나서는 영광은 그런 사교도들이 아니라-.”

“그럼 니가 갈래? 왕궁기사 나리?”

“어어, 그건….”

유리아는 어물쩡 꼬리를 내렸다. 하여간 야심도 신앙심도 충성심도 모조리 어정쩡한 녀석이다.

나는 그런 녀석에게 계속 말했다.

“그리고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보자면, 이것은 불평분자들을 이 섬으로부터 싸그리 치울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거야. 그럼 치워버려야지.”

그 말 역시 왕궁기사를 납득시켰다. 그러나 또 다른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각하, 그렇다면,”

나는 손을 들어 그 말을 끊었다.

“아, 뭐 말하는지 알아. 그럼 그냥 돛단배 한 척 주면 되는 거 아니냐고 말하고 싶겠지. 뭐 배까지 만들어 주냐고 말야. 맞지?”

“역시나 송구한 말씀입니다만, 정확합니다. 왕국의 재산을 들이며 배까지 한 척 만들어줄 필요는 없는 것 아닌지….”

“하지만 그 또한 시행착오의 견지에서 말할 수 있는 문제다. 봐.”

나는 걸어가 창문 너머를 가리켰다. 후작성과 항구는 가까웠고 그래서 정박해 있는 배들이 잘 보였다.

흑구들로부터 나포한 배는 그 흑구들의 출생지만큼이나 다양했다. 나투아식 넓적한 배가 있었고, 알실라 칼배들이 있었으며, 반듯하게 다듬어져 대륙의 기상이 느껴지는 배도 있었고, 뱃머리가 마귀할멈 콧부리마냥 꼬부랑 휘어진 검은 열도의 악명 높은 배들도 있었다.

모든 배가 흑구들로부터 나포한 배는 아니었다. 어민들이 쓰는 어선도 있었고, 애초부터 왕국에 속한 배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의 형태도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약탈자들이 여기저기서 주운 것들을 이리저리 기워 만들어낸 누더기 갑주 같았다.

“본디 왕국에는 조선 기술이 없었어. 초대 법왕과 국부께서도 그것을 아셨지. 그러기에 초대 법왕이 결혼했을 적에 나투아, 알실라 양국과 조선 기술 협약을 맺은 것이었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기본적인 역사 교육은 받고 자란 왕궁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들어 압니다. 강철의 단검주 님과 외팔의 대학장님, 두 여인께서 적극적으로 노력해 주신 덕에 배를 만드는 기술의 얼개가 잡혔다고 들었습니다.”

[하누리(대 야리소연 전적 5승): 개고생했었지.]

[외팔의 대학장: 네… 그치만 충분하진 않았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아의 말에든, 저승 사람들의 말에든.

“하지만 그 이후로 발전이 없었어. 나투아를 집어삼키고 25년이 흐른 지금조차 ‘왕국식 배’라고 이름할 만한 배가 만들어진 바 없다. 날카로운 배는 알실라식 배, 넓적한 배는 나투아식 배, 꼬불탕한 배는 흑열도식 배라고 불리는 게 현실이지.”

유리아는 미간을 좁혔다.

“그건….”

“유리아. 너 전에 이런 말 한 적 있지? 나투아 대궁이 아니라 왕국 대궁이라고. 그래. 맞는 말이야. 그치만 그게 다지. 백날 그렇게 단어 수호단장 노릇을 해봤자 니 눈 안 닿는 곳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수군거릴걸. ‘나투아식 대궁이 세긴 세단 말야.’ 안 그러겠어?”

유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옷깃을 추슬렀다.

“물론 구태여 왕국을 대표할 만한 배를 만들 필요가 있느냐? 이게 네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부분이겠고, 그건 명분상으로도 실용적으로도 타당한 이야기였어. 지금까지는 말이지.”

유리아는 머리를 굴렸다.

“명분에 관해서는 성지 찾기가 그 자체로 명분이 되겠군요. 실용적으로는… 그렇게 배를 만드는 기술을 쌓음으로써 장차 더 나은 배를 만들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니까 나는 석마갈을 위해 배를 만들자는 것이 아냐. 어디까지나 차후 원정에 나설 왕국의 젊은이들을 위해 경험을 쌓는 차원에서 만들자는 것이지.”

그 말은 유리아를 납득시키고도 남았다. 그녀가 가슴을 폈다.

“각하의 큰 뜻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그럼 곧바로 서신을 전하여….”

“하나 더 있어.”

그리고 나는 왕궁기사 하나를 납득시키기 위해 이리 길게 말한 것이 아니었다. 거듭 말하거니와, 상현 공작가 측과의 설전을 대비한 예행연습을 위한 거였지.

“하나 더 있다면….”

“알실라 그 땅지렁이 새끼들 말려 죽이려고.”

유리아가 멈칫했다.

나는 마른세수를 했다.

“사실 진즉에 가능해야 했을 일이야. 나성 군사동맹의 실패로 말미암아 대륙은 혼란에 빠져 우리 쪽에 신경을 못 쓰고, 북방의 야만족들은 그런 대륙을 털어먹느라 신났지. 한편, 전쟁에 승리한 왕국은 대하를 접수했다. 나투아를 무너뜨리고 그 강역을 모조리 삼켰어. 그렇게 남강과 태산을 경계로 반도 남동쪽에 알실라를 가두었단 말야.”

나는 팔짱을 낀 채 항구를 내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근데 왜 여태 알실라가 숨을 쉬고 있나…. 유리아, 군사 명문 상현 공작가가 중히 키우는 후기지수야. 니 생각엔 왜 그러겠냐?”

“어어… 그건, 알실라가 제함도 토벌전에 공헌한 바 있고… 또 우리를 상국으로 모시면서 순종하기 때문에….”

“그럼 왜 교역선들 갖고 이 섬에 갑질하냐? 흑구들 지원하고 지랄치냐고.”

유리아는 입술을 적실 뿐 대답을 못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지. 먼저 나투아 영토를 점령한 영주새끼들이 대부분 븅딱이라는 거. 저기 남전도를 통째로 맡고 있는 남전후(南全侯) 겸 신월 공작가의 작위 요구자 겸 왕실 종친 아신군부터 시작해서 말야. 그리고 왕국 외교를 맡고 있는 현 법왕이 온건파라는 거. 2대 법왕 유미였으면 진즉에 뒤집어엎었을 텐데, 그 양자님께선 참 온순하시단 말야….”

“….”

“하지만 기사. 내가 볼 때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어.”

“어떤….”

“여기.”

나는 손가락으로 내 바닥을 가리켰다. 이곳은 후작성이었으므로, 나는 후작성을 가리킨 셈이 되었고, 이 후작성은 후작령의 머리였으므로, 나는 후작령을 가리킨 셈이 되었다.

또한 후작령이란 곧 제함도였으므로, 나는 제함도를 가리키며 말을 이어간 것이었다.

“이 제함도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다는 거야.”

나는 다시금 팔짱을 끼었다.

“나투아가 건재하던 시절 이 섬은 심해교의 성지였다. 나투아의 수도였고. 바다의 요새였어. 무엇보다 해상 무역의 거점이었지. 이 섬에 나투아 정예 해군들이 알박혀 있으니, 저 대륙에서도 검은 열도에서도 알실라에서도 반도 근해를 지나려던 것들은 나투아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왕국이 나투아를 정복했고, 제함도는 흑구들의 맛집으로 전락했다.

“그러니 알실라의 물길을 막을 수가 없지. 알실라가 숨 쉬는 걸 넘어 활개 치는 이유가 있다면 그거야.”

“하지만 이제부터는 달라지겠군요.”

유리아는 중얼거렸고, 다음 순간 깨달았다.

“이 섬은 자체적인 치안을 회복했지요. 가장 큰 골칫거리였던 종교 문제도 해결을 앞두고 있고요. 거기에 더해 각하께서 주도하시고 공주 전하께서 참여하시는 사략선 사업… 외부에 투사할 수 있는 무력까지 갖추게 되는군요.”

덤으로 왕국 중앙해군 소속인 원기윤 제독이랑도 친하게 지내고 있다.

제함도의 군사력은 이 시점에서 충분히 크며, 앞으로는 더더욱 커져갈 것이다.

“거기에 왕국 규모의 조선 사업이 시작된다고 해보자고. 성지 원정을 떠나보내는 배들을 빼도 왕국선의 절대수가 늘어나게 될 거야. 어떻게 될까?”

도출되는 답은 어렵지 않았다.

그 답을 유리아는 입에 담았다.

“알실라의 물길이 막히겠군요.”

“응. 정확히는 왕국을 통해야 하게 되겠지. 그나마 교역하려면 검은 열도와 해야 할 텐데, 그거야 사략선이랑 왕국 전함들이 각 잡고 원정 가서 깔짝거리면 쉽게 어지럽힐 수 있는 일이고.”

나는 옷깃을 추슬렀다.

“힘이 있으면 갑질을 하게 되지. 제함도는 힘이 없었고, 그래서 갑질을 당해왔어. 하지만 이제 힘이 생겼고, 그러니 갑질을 할 수 있게 된 거야. 그런데 갑질을 하는 이유 자체는 단순히 그게 즐거워서도 있지만, 그 힘을 유지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을 회수하기 위해서란 말야.”

나는 선언했다.

“수십 년 안에 알실라는 말라서 무너질 거야. 그리고 그럴 걸 아니까, 그 전에 왕국을 향해서 전쟁을 걸겠지.”

그리하여 나는 유리아를, 그 너머의 상현 공작가-- 왕국의 군사권에 대한 지분을 신월 공작가와 나눠 갖고 있는 전쟁광들을 향해 말했다.

“빨라도 다음 세대의 이야기겠지만, 어때. 네 상전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 아니야?”

유리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          ◈          ◈

그 다음의 일들은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나는 왕국 종교계의 세 현인들과 서신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잔월 공작, 제사장, 현 법왕. 그중 한 명은 제함도에 직접 내방해 왔다. 그들을 설득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 다음에는 상현 공작가 측과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미 한 차례 유리아에게 예행 연습한 것과 비슷한 이야기가 오간 결과 그들은 납득했다. 현성이를 구스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사호는 구호가 어떻게든 해주었다.

흑구들을 네 차례쯤 더 토벌했을 무렵, 왕국은 대규모 조선 사업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물론 배라는 것은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재료도 찾아야 하고, 기술자들도 수배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한 달 가량의 항해가 아니라 그 이상의 항해를 목적하여 만드는 배다. 무수한 시행착오가 있을 것이고, 실제로 첫 배가 만들어지기까진 못해도 5년은 걸릴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진 내가 직접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었다.

[ 임무명: 정복지 안정 ]

[ 달성점수 : 138점 / 100점 ]

제함도 후작으로서 임무의 끝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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