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제함후, 휘영 (3)
지금까지 오간 이야기를 정리해보자.
1 석마갈이 새로운 옥좌를 준비하여 바친다.
이로써 심해교의 경전을 우회하여, 심해교도들이 나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덤으로 저 더럽게 불편한 옥좌에서 벗어나 허리랑 엉덩이 건강도 챙길 수 있고.’
2 석마갈에게 산호 옥좌를 하사한다.
심해교 제사장 석마갈의 권위를 제함도 후작이 보듬어 주게 되는 만큼, 심해교를 왕국의 영향권 안에 집어넣는 것이 가능해진다.
3 석마갈의 약점을 잡는다.
석마갈이 배신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내 뜻을 따라 움직이도록 족쇄를 채운다.
“합리적인 결론이야.”
나는 평가를 내렸다.
그리고 잠시 후 이어서 말했다.
“또한 선량한 생각이다. 합리성과 선량함이 공존하긴 어려운데 그 어려운 걸 해내는군.”
석마갈은 고개를 수그렸다.
“용기가 부족한 것뿐입니다….”
“아, 평판과 명예가 다르다고 생각하는군. 물론 그 둘은 다르지. 그럼에도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해두자면, 첫째, 권력자인 내 입장에서는 평판을 중시하는 자가 명예를 중시하는 이보다 나아. 적어도 그건 통제가 가능하니까. 둘째, 결국 객관적인 사실만이 이 세상에 남는 것 아닌가. 그런 만큼 어떤 행위가 있었을 때 그것이 위선이냐 진선이냐 가리는 것은 역사가들이 심심풀이 삼아 할 일이지, 스스로 판단하는 건 썩 의미가 크지 않아.”
석마갈은 그런 내 말을 잠자코 들었다. 비은공주와 시아람은 그 말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 같았다.
저승에서 야리소연이 논평했다.
[첫 번째 은월: 솔직히 좀 감명 받은 모양이네. 말이 길어진 걸 보니.]
나는 그 논평에 반응하는 대신 석마갈을 바라보았다.
“그 모든 합리성과 선량함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인 문제가 한 가지 있다.”
석마갈이 멈칫하여 고개를 들었다.
그 문제에 대해 설명한 것은 내가 아니라 비은공주였다. 은월의 피를 이어받은 모태 성직자가 말했다.
“그 경우, 심해교를 왕국이 공인하게 된다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이것이 안 돼요. 왜냐면 왕국에서는 달의 여신 교단 외에는 싸그리 다 이단 취급을 받거든요.”
‘바로 그게 문제란 말이지….’
나는 허탈하게 생각했다. 마신 추종자 때도 그러했듯 망할 일신교 교리와 종교의 무자유가 또 한차례 임무 수행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개천의 시왕: 하물며 그 달의 여신이란 게 사실은 존재하지도 않는다니. 이건 진짜 저질적인 농담이 따로 없군.]
[간신 조련사: 간신이여, 그래서 제가 말했지 않습니까…. 종교에는 함부로 손대면 안 된다고 말입니다….]
나는 그런 저승의 말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다만 해결책을 내놓았다.
“물론 이것도 어떻게 포장을 잘 할 수는 있어. 경전을 한 번 더 우회하는 식으로 말야. 알고 보니 하얀 흐름과 검은 흐름은 달의 여신께서 이 땅을 창조하실 적에 내려 쬔 달빛이고, 최초의 항해자이자 심해에 가라앉은 아버지는 달의 여신께서 바다를 탐사하러 보낸 사도였다는 식이 되는 거지.”
“해결책이 그냥 좔좔 나오네요…. 후작, 본인은 정말 후작에게 많은 것들을 배우는 듯 싶어요.”
비은공주는 그렇게 감탄했지만 나는 잘난 체할 기분도 안 들었다. 그냥 이마를 짚고서 말을 이었다.
“그 밖에도 뭐 여러 가지 신화랑 신격이 있지? 심해교의 그것들. 달의 여신 경전과 모순이 안 되게끔 잘 조합해서 짜매야 할 거야. 일단 이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작업거리가 될 텐데. 이 작업거리를 해낸다고 해도 또 두 가지 문제가 생겨난단 말이지….”
“문제들도 그냥 좔좔 나오고요…. 후작, 알고 보면 후작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문제의 흑막이라거나 그런 반전 없나요?”
“공주 전하께서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금단의 지식, 그 비밀의 편린을 엿보시고 말았습니다.”
“아니, 농담했을 뿐인데 그리 진지하게 반응하셔도 곤란한 것인데요…. 후작, 생각보다 실없는 부분도 있네요.”
어이없어 하는 공주 전하께 나는 그냥 힘없이 웃어주었다. 어차피 죽으면 알게 될 일이니.
비은공주는 그런 내 반응에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곧 턱을 매만지면서 분석에 들어갔다.
“아아무튼 흠, 어디 보자…. 일단 문제 하나. 석마갈 씨, 심해교가 독립 종교가 아니라 달의 여신 교단 아래 완전히 대가리 박게 되는데요.”
공주 전하는 자신의 말을 설명했다.
“신화를 짜매는 과정에서 심해교에 등장하는 모든 신격들의 급수를 사도, 위인, 성좌 따위로 한 단계씩 깎아야 할 거예요. 그 결과 남는 것은 ‘동등한 독립 종교 심해교’가 아니라 ‘달의 여신 교단 산하 심해 성좌 지파’ 따위가 될 테고요. 가능하겠어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확실히….”
석마갈은 쉬이 확답하지 못했다.
비은공주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짧게 쳐 뾰족한 머리카락들이 흔들리며 사위에 핏빛을 흩뿌렸다.
“흠. 아니 뭐, 이만하면 과연 본인도 알겠어요. 석마갈 씨 당신 자존심 때문에 주저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심해교의 독립성 보장이 안 될 경우 결국 후작이 말했던 것, 석마갈 당신이 심해교 손절 치고 달의 여신 교단에 귀의하는 것과 뭐가 다르냐는 것이겠지요.”
그 경우 발생할 일은 다음과 같다. 석마갈 휘하에 있던 심해교도들은 여러 종파들로 나뉘어 각자 도생하려 할 것이고, 그 결과 각개 격파 당하게 될 것이다.
‘공주 전하 말마따나 내가 했던 제안… 가장 싸게 먹히는 처리법과 비슷한 결과를 맞이하는 거지.’
석마갈은 그 제안을 거부하고자 생각을 짜낸 것이지만, 그것이 돌고 돌아 여기서 똑같은 결과를 남기게 되는 것이다.
‘희생자 수가 좀 줄기는 하겠지만… 좀 줄어들 뿐이야.’
이러니 결국 세상에 남는 것은 객관적 사실에 불과하며, 위선과 진선의 구분 따윈 무의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석마갈은 입술을 사려 문 채 한참을 생각하더니 말했다.
“심해교의 독립성은 어떻게 해도 보장해주실 수 없는 것입니까?”
“응. 계명 상 못박혀 있어서 불가능해.”
“계명을 뜯어고치는 것은….”
“논외다. 존망섬 영주에 불과한 나 따위가 감히 할 수 있는 일도 아닐 뿐더러, 교단 계명을 손대면 왕권이라는 세속 권력에도 영향이 가게 되거든.”
비은공주가 턱을 괸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넹. 왜냐면 제 이 팔아먹지도 못하는 눈깔이 왕위 계승을 위한 증거물인데, 이게 달의 여신의 대리자라는 증명서라고 하거든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다네요.”
[첫 번째 은월: 쟤 말마따나 나도 그게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첫 번째 은월: 왜 눈동자가 좀 특이하다고 해서 그게 지배할 수 있는 자격? 이 되는 거야?]
‘음… 소연아. 가령 니들은 막 새하얀 사슴을 보면 와 신기하구나 하고 생각하잖아. 걔가 뭔가 이상한 짓을 하면 의미가 있을 것 같고 그렇게 여기지 않아?’
[첫 번째 은월: 그렇게 여기지. 근데 사람들은 사슴이 아니잖아?]
[첫 번째 은월: 그리고 니가 방금 말한 그거. 신기한 동물들 섬기는 건 나 같은 야만인들이나 할 법한 짓이라고 비웃었던 거 아냐? 왜 문명인들의 지배자를 뽑는데 야만인들이랑 똑같은 짓을 함?]
나는 뼈를 맞은 기분이었다. 다행히 아리야가 내 편을 들어주었다.
[최초의 성녀: 그, 예언자님을 위해 변명하자면… 이 달의 여신 교단 자체가 아직 우리가 야만인이던 시기… 그러니까 제 시대에 만들어진 거니까요. 야만적인 부분이 있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고 해야 할까요….]
‘뭐지 시벌.’
편을 들어주었는데 왜 뺨을 맞은 것 같지….
[간신 조련사: 간신이여, 그래서 제가… 이하 생략하겠습니다.]
정리하자.
“달의 여신 교단의 계명은 손댈 수 없어. 그러니 심해교를 독립 종교로 인정할 수 없어. 따라서 심해교는 달의 여신 교단 산하에 들어오거나 멸망하게 될 거야. 그리고 달의 여신 교단 산하에 들어온다고 쳐도 대략 3할에서 5할 정도는 가지치기를 하게 될 거야.”
이것이 첫 번째 문제점이다.
“두 번째 문제점은, 이건 석마갈 씨가 아니라 후작이 수고해 줘야 할 문제예요. 일단 잔월 공작가랑 법왕가, 두 곳이랑 협상을 해야 할 테지요. 전서구들 오지게 날려야 되겠고요. 전서구 유실률이 솔직히 크다고 들었는데… 아. 마침 이 석마갈 씨가 비둘기를 잘 다루니까 그 부분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지도요.”
“전서구 문제야 어쨌건, 예. 제가 왕국 종교계 측과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개천식 임무 당시, 가리비수 등을 반나절 만에 사도성좌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비류아라는 절대적인 권력자와 그 전폭적인 지지, 그로 인해 내가 법왕으로서 전권을 쥘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법왕이 아니며, 현재 왕국 종교계는 신전을 대표하는 제사장, 신전의 중추를 이루는 잔월 공작가, 그리고 신법의 대행자인 법왕가, 이 셋이 삼위일체를 이루면서 서로를 견제 및 보완하고 있다.
“그리고 제가 가진 공식적인 직함은 이 존망섬의 후작 각하에 불과하지요.”
“비공식 직함들 쓰세요. 뒀다가 홍합탕 끓여먹을 것도 아니잖아요.”
공주 전하는 뚱하니 말했다. 전쟁 영웅 시현군의 조카이자 그로 인해 3대왕 현왕의 관심을 받고 있으며, 또한 적검후의 외척을 자문사로 두고 있는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지요…. 뭐 어떻게든 되기야 될 겁니다.”
겁나게 귀찮겠지만 말이다.
불만을 참는 것과 태연함을 연기하는 것은 내 주특기 중 하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선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내 짜증은 숨김없이 드러났다. 얇고 창백한 내 피부는 그만큼 쉬이 주름이 잡혔다.
석마갈이 그런 나를 올려다보았다.
“후작 각하께서도 고생을 하셔야 하는군요….”
“응. 완전 개고생해야 해. 그리고 그 고생의 대가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곤 절대 내 편이 되어주지 않을 게 뻔한 데다가 10년쯤 지나면 확실하게 관짝 들어갈 노친네들의 목숨뿐이지. 말하다 보니 열 받네. 야, 석마갈아. 내가 대체 이걸 왜 해야 하는 거냐?”
대답을 기대하고 꺼낸 질문은 아니었다. 그냥 푸념이었지. 만약 대답이 돌아온다고 해도 피상적인 도덕론이거나 동정심에 대한 호소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내가 동정심에 입각하여 말하지 않은 것과 공주 전하께서 동정심을 갖고 말장난한 것을 기억해서일까, 석마갈은 전혀 다른 논지를 꺼내 들었다.
“불경한 말씀을 하나 올려도 괜찮겠습니까?”
불경한 말이라.
“지껄여봐.”
“각하께서는 그냥 후작성 안에 머물러 계실 수도 있었습니다. 원하신다면 그냥 귤과 굴을 무한히 까드셔도 괜찮으셨겠지요. 이 섬이 아무리 망가진다고 해도 각하께서 일용할 양식과 쓰실 재산이 부족할 일은 없었을 테니까요.”
석마갈은 나를 바라보면서 한숨을 짓듯 말했다.
“하지만 각하께서는 그렇게 가만히 있는 대신 움직이길 선택하셨지요. 왜 그러셨습니까?”
나는 담백하게 답했다.
“영지를 망가뜨린 책임을 지고 목 잘리기 싫었거든.”
“선대 영주의 실정, 그 폐해를 일방적으로 물려받은 처지, 불운한 과거사, 그 밖에 각하께서 가진 비공식 직함 등으로 인해 보호받지 않았겠습니까?”
나는 끈적하게 답했다.
“나투아 잔당. 가령 심해교 제사장 같은 양반이 폭도들을 모아서는 후작성으로 들이닥칠까봐 걱정이 됐거든.”
“가능한 염려로군요. 제가 현실주의자이고 또한 겁쟁이라는 걸 모르셨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해도 원기윤 제독과 그가 지휘하는 왕국 수군이 적어도 후작 각하 일동만은 보호했겠지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이 섬을 살리라는 저승 임무에 대해 말할 수는 없었으니,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다 떨어진 셈이었다.
그럼에도 마치 내가 할 수 없는 그 말을 들은 것처럼, 석마갈은 말했다.
“각하께서는 일신의 영달과 편안함, 그 너머에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분이십니다.”
심해교 제사장은 고개를 수그린 채 이어서 말했다.
“그리하여 그것에 대비할 수 있는 분이시지요. 그런 만큼, 그 고생을 자처하실 것이고, 또한 기꺼이 해내실 것입니다.”
“흠.”
나는 턱을 긁적였다.
“그냥 다 죽여 버려도 대비는 끝난다고, 그러니까.”
“아니지요. 외지인이나 흑구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죽은 자는 누군가의 친지이고 지인일 것입니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죽이는 건 장기적으로 득책이 아니란 거 말이지.”
“예. 왜냐면 이 섬에서 살아갈 사람들이니까요.”
석마갈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의 백성들이니까요.”
“그 노친네들조차도?”
“그 노인분들조차도.”
정적이 흘렀다.
조용한 속에서, 시아람은 방금 오간 이야기를 곱씹고 있었다. 비은공주조차도 호두를 눈앞에 둔 고슴도치 같은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석마갈이 말했다.
“제가 돕겠습니다. 나투아 인이 월국민이 될 수 있도록. 이 섬에 사는 사람들이 왕국민이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나는 잠시간 침묵했다가 툭 되물었다.
“그러자면 너도 달성해야 할 과제가 있을 텐데.”
“심해교가 달의 여신 교단 산하로 들어오는 것 말씀이군요. 거기에 대해서는 생각해둔 바가 있습니다.”
석마갈은 쓰게 웃었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 비은공주가 건네준 모자를 쓰고서 심해교의 제사장은 말했다.
“기적을 일으켜야지요. 늘 해왔던 것처럼.”
모자 속에서 토끼를 꺼낼 때처럼 자신 없는 목소리가, 그러나 어쩐지 믿음직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