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제함후, 휘영 (2)
이 섬이 대체 왜 이런 사정에 놓였는지에 대해 언젠가 물었을 때, 자문사 구호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가 있다.
- 알다시피 각하 아버님이 정치도 통치도 못했잖아. 지원금 빵빵하게 받은 주제에 돈을 언제 어디다 써야 하는지 몰라서 얼타고 앉아있고.
여긴 섬이다. 섬 바깥에서 물자를 들여오려면 배를 통해 들여와야 한다.
그러자면 자연히 ‘언제 무엇이 얼마나 필요한가?’ 같은 것을 미리 판단하는 능력이 중요한데, 선대 후작은 그게 전무했다는 소리였다.
- 곁에서 그걸 보완해 줄 사람은 없었어?
- 누가 있겠어. 후작령 고위층은 죄다 말 타고 활 쏠 줄만 알던 사람들인데. 나도 젊은데다가 통치 관련 교육받은 적은 없었고…. 영지기사들 중에 그래도 통치 관련 교육 받은 사람도 있었지만, 반도에서 하던 거랑 섬에서 하려는 거랑 어디 같겠어?
전후 처리가 제대로 안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하긴 전쟁 당시에도 국가 대항 총력전은 처음이라 얼타던 것이 왕국이었다. 건국 반백년을 넘긴 시점이니 ‘왕국 전체에 이득인 방향’은 어렵지 않게 계산할 수 있었겠지만, ‘병탄한 영토를 어떻게 하면 불협화음 없이 다스릴 수 있느냐?’ 같은 것은 상대적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상대적 어려움’은 실제 섬에 처박혀야 했던 이들에겐 ‘실제적 어려움’으로 작용했다. 구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 그나마 나투아 사람이던 각하 어머님은 산송장이나 다름없지. 결국 오래지 않아 진짜 돌아가시고. 주둔군 제독들도, 첫 제독은 그래도 좀 정신머리 박혀 있는 놈이었는데 그 다음엔 원기윤 같은 놈이 오더니만 이젠 완전히 원기윤이 왔잖아.
- 왕국이 삽질이 심했네….
- 개심했어. 지원해줄 거면 돈만 지원해줄 것이지 왕국 사람들도 떼거지로 보내서 같이 살게 하고. 사민정책이니 뭐니 다 좋지만 그것도 통치가 안정된 다음에 해야지. 그 때 상황이 얼마나 개같았는지…. 창고에 돈은 가득한데 굶어 죽는 애들이 속출한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나는 여러 가지 의미로 할 말이 없어졌다.
- 속 터졌겠네….
- 완전. 덕분에 나 지금 완전 자문사 다 됐잖아. 난 그냥 바닷가 근처에서 책이나 읽고 싶었는데….”
구호의 한숨에는 세월과 회한이 묻어 있었다.
나는 말할 수밖에 없었다.
- 그… 여러모로 미안.
- 응? 각하 아버님 대신해서 사과하는 거면 괜찮은데.
- 아니 그냥….
언니는 자유로이 세상을 돌아다니는 것이 꿈이었고, 동생은 느긋하게 눌러앉아 책을 읽는 것이 바람이었다. 간첩 시절만 해도 반쯤이나마 이뤄질 법했던 소망은, 그러나 언니가 왕비가 되고 동생이 외척이 된 지금 파탄을 맞이한 것이다.
‘그리고 그 언니를 현성이와 결혼하도록 조정한 것은 나고….’
그러기에 미안하다는 말이었지만, 물론 이런 사정을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많았다.
높은 자리에 있을수록, 말할 수 없는 것이 많은 것이다.
◈ ◈ ◈
석마갈을 향해서 나는 우선 말해야 할 것부터 말했다.
“미리 말하는데, 나한테서 동정심을 바라지는 마라.”
석마갈은 고개를 수그렸다.
“압니다. 솔직히, 노친네들… 후작님뿐 아니라 누구라도 동정할 만한 사람들은 아니죠….”
“뭐 그것도 그렇다만, 그것 때문만은 아냐.”
나는 더 말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야리소연이 궁금해 했다.
[첫 번째 은월: 그럼 뭐 때문인데?]
음.
‘권력자의 판단 기준은 항상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야.’
[첫 번째 은월: 그럼 지금 명쾌하게 설명해 주라.]
‘가령 법에 따라 처분하는 건 간단해. 언제 아리야 엑스트라 미션 때 천사님께 설명했던 것의 심화판이 되겠지만, 그게 왜 간단한가 하면 재량의 여지가 딱 정해져 있어서 그래.’
이것은 그 처분에 불만을 품은 누군가가 ‘왜 그렇게 하느냐’고 딴지 걸 여지가 그만큼 제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법대로 하려고 하니 어쩔 수 없더라.’ 얼마나 편한 말인가.
[첫 번째 은월: 법 자체가 잘못된 거 아니냐고 따지고 들 수도 있잖아?]
‘그럴 수 있지. 그치만 그러면 표적이 분산되거든? 법이랑 법에 따라 판결한 사람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니까 이의를 제기한 놈 입장에서는 일점돌파가 어려워지는 거야.’
야리소연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나는 이어 설명했다.
‘한편 손득에 따라 처리하는 것도 간단해. 이건 손득이란 것 자체가 명쾌하고 직관적인 기준을 마련해주거든.’
그리하여 어떤 반박자가 ‘왜 그렇게 하느냐?’고 딴지 거는 것을 방해하게 된다. 반박자는 제시된 손득을 뛰어넘거나 상쇄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러지 못하면 그저 떼쓰는 징징이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런 징징이들을 짓밟는 것은 권력자로서 대단히 쉬운 일이다.
[첫 번째 은월: 그치만 동정심에 따라 판단하는 건 어렵고?]
‘응.’
동정심은 너무도 자의적인 기준이다.
‘항상 [그럼 왜 나는?]이란 질문이 따라붙거든.’
왜 저들은 긍휼히 여기면서, 왜 이들은 그렇게 여기지 않는가.
왜 그들의 처지에는 눈물을 흘리면서, 왜 우리들의 상황은 모른 척 하는가.
왜 나는, 구해주지 않는가.
‘이런 자의성 자체야 모든 감정들이 갖고 있는 것이지. 그치만 동정심은 그중에서도 고약해. 분노하는 권력자한테 [왜 쟤한텐 분노 안 하나요?] 하고 말하는 건 간덩이가 배 밖에 나오지 않는 이상 못할 노릇이지만, 동정심에 찬 권력자한테 [왜 저는 안 도와주나요?] 하고 말하는 건 비벼볼 만한 언덕처럼 보인단 말야.’
그리고 그것은, 그 근간이 자의적인 만큼이나 말을 얽고 엮어 흐리멍텅하게 만들어버릴 수 있다.
‘그러니까 지금 물망에 오른 게 시대착오에 빠진 노인네들이 아니라 앞날 창창한 소년소녀들이라도 동정심에 의거해서 판단해선 안 돼. 차라리 소년소녀들은 교화 여지도 크고 발전 가능성도 있다는 식으로 판단해야 하지. 그럼 적어도 논박이 오가고 또 결론이 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동정심으로 이야기가 흐르면 [노인들이 불쌍하지 않냐], [아이가 더 불쌍하지 않냐] 따위만 오가니 그게 안 되지.’
그런 상황에선 ‘그것과 이것은 다르다.’는 말을 해봤자 단지 평행선을 그을 뿐이다. 아무리 말이 오가도 서로 납득할 수가 없으니, 애원했는데도 거절당했다는 원망과 부당하게 차별당했다는 원한만이 종기처럼 돋는다.
권력자가 동정심을 이유로 행동해선 안 되는 이유다.
그러므로 나는 일체의 동정심을 배제한 채 말했다.
“그 노친네들에게 왕국이 달빛을 쬐어 품어주는 것 자체는 가능한 선택지야. 하지만 그러는 데에는 비용이 들고, 그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느냐 하는 게 내가 묻고자 하는 바다. 석마갈. 지불할 수 있나?”
석마갈은 고뇌어린 얼굴로 되물었다.
“비용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노친네들은 내 지배권을 부정한다. 비싸지지. 덤으로 그 사실을 혼자 골방에서 주절거리는 게 아니라 주변에 퍼뜨린다. 더 비싸지지. 심지어 그 과정에서 종교라는 거죽을 뒤집어쓰고 그렇게 한다. 굉장히 비싸지지. 그렇게 그런 말들을 주변에 퍼뜨린 결과 영향 받는 이가 나오겠지. 진짜 완전 비싸지는 거고.
영향 안 받은 녀석이 있다고 해도 그래. 그 녀석이 후작성에 와서 나나 자문사나 경비대장이나 여기 이 시아람한테 [거 노인네가 이상한 소릴 지껄이던데 어떻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요?] 한 마디 하면, 나는 행동에 나설 수밖에 하겠지? 행동에 나서지 않으려면 또 그만한 이유가 필요할 테고, 그러자면 귀찮아지겠지? 개비싸지는 거지. 이해 안 되는 부분 있나?”
석마갈의 얼굴에 떠오른 고뇌가 더욱 깊어졌다.
나는 뒷머리를 긁었다.
“조언하자면, 가장 싸게 먹히는 선택지는 역시 공주 전하 말마따나 손절치는 걸 거다.”
“왕국에 무릎 꿇는 것 말씀이시군요….”
“응. 달의 여신 교단에 귀의해. 배신자라는 욕 감수해. 널 욕하는 극렬분자들, 떨어져 나가서 딴 살림 차리라 그래. 내가 후작군 좀 빌려줄 테니까 네가 앞장서 작살내. 그렇게 왕국에 대한 충심과 달의 여신에 대한 신앙을 증명해. 거지같겠지만 이 섬에서 가장 적은 피로 갈등을 봉합할 방법이야, 그게.”
동정심을 배제하고 말하는 데에는 한 가지 모순적인 이점이 있다. 그렇게 배제한 결과 오히려 가장 동정심에 입각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이다.
석마갈은 한참을 고민했다. 이어 손을 들어 수염을 쓸어 만졌다. 잔뜩 지쳐 있는 것을 나타내듯이, 마치 그의 신경줄마냥 후줄근하니 늘어진 수염이었다.
“가장 싸게 먹히는 선택지를 굳이 말씀해주신 것은 감사드립니다.”
석마갈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지금은 사양하겠습니다.”
“그러면?”
“말씀하신 비싼 값들을 깎기 위해 노력해 보겠습니다.”
석마갈은 품에서 비둘기 한 마리를 꺼냈다. 그리고 깃털을 하나 뽑더니 비둘기를 다시 품 안에 갈무리했다….
“어떻게 한 건가요!?”
석마갈의 모자로 공기놀이를 하던 비은공주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니, 이건 솔직히 나도 좀 놀랐는데….’
저승 주민들은 물론이요, 심지어 시아람조차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하지만 석마갈은 그 비밀을 밝히는 대신 비둘기의 깃털대를 붓필 대신 써서 자신의 옷가지에 쓱쓱 무언가를 써내려갔다. 흑치사라 딸내미로 한 차례 생활해보았던 나는 그것이 나투아식 대차대조표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노인분들이 각하의 지배권을 인정토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입조심을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이 두 가지만 제가 해낸다고 해도 상당한 할인이 가능할 터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흐음.
“그렇기야 하지. 어떻게 그러게 하게?”
석마갈은 탁, 소리가 나도록 비둘기 깃털대를 탁자에 찍었다. 이어 조심스레 내 눈치를 살피면서 말했다.
“각하… 옥좌를 바꾸는 것은 어떻습니까?”
나는 그 말에 대해 생각했다.
시아람이 조용하게 분노하여 말했다.
“감히 각하께 옥좌에서 물러나라는 것인가?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석마갈은 말을 잇지 못한 채 내 안색만 살폈다.
나는, 음, 대충 이해한 바를 말했다.
“[심해에 가라앉은 아버지께서는 산호 옥좌에 여인이 앉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였었지?”
“예… 그러니까 다른 옥좌를 마련하셔서… 아니, 마련하셔서가 아니지요. 제가 어떻게든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경전을 우회하자는 건데… 좋아. 나쁘지 않은 발상이야.”
그런 내 말에 시아람은 곤혹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비은공주 같은 경우에는 아예 황당해했다.
“그런 말장난이 통하나요?”
“그게 통한다는 게 교조주의의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전례가 없는 것도 아니고요.”
개천식을 앞두고, 가리비수와 모서아, 아리야와 야리소연 등을 달의 여신의 사도좌에 앉혔던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일이다. 잘 포장해야 하겠지만, 그렇게 전례가 있는 이상 포장할 자신쯤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여, 나는 다음 사안으로 넘어갔다.
“그럼 산호 옥좌가 비게 되는데. 흠. 그걸 너한테 넘겨준다?”
“예, 하사해주시면 제가 잘 쓰겠습니다. 제 권위를 세우는 것부터 시작해서….”
“일단 그게 난점이네. 정복자의 손으로부터 산호 옥좌를 넘겨받다니. 네 권위가 너무 높아지잖아. 그건 두 가지 지점에서 문제를 일으키는데….”
“노인분들께서 기고만장하지 못하도록 잘 다독이겠습니다.”
“할 자신 없다매.”
“그래도 해야지요…. 하겠습니다.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석마갈은 간절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은 나를 납득시키지 못했다.
“말은 너무 가볍지. 증거를 보여야 할 거야. 그리고 그렇게 증거를 보인다고 해도 한 가지 문제가 더 남는데. 내가 널 어떻게 믿지?”
누군가에게 일을 맡기고 책임을 지우기 위해서는 두 종류의 믿음이 필요하다.
하나는 그 누군가가 과연 그 일을 해낼 수 있는가 하는 데에 대한 믿음이다. 또 하나는 그 누군가가 그만한 일을 맡았을 때 내 뒤통수를 치지 않으리란 데에 대한 믿음이다.
신용과 신뢰.
그리고 석마갈은 그 두 가지 모두 갖고 있지 않았다….
“제 약점을 넘기겠습니다.”
석마갈이 말했다.
수려하였으나 수척해진 그 얼굴에는 각오가 서려 있었다.
“제가… 그렇습니다. 친필로 뭔가 계약서 같은… 제가 달의 여신 교단으로 개종했다는 증서를 남기겠습니다. 심해교의 모든 것을 팔아 넘긴 배신자라는 증좌를 남겨서, 제 목줄을 각하의 손에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언제든 각하께서 원하실 적에 공개하실 수 있도록… 그러면 되지 않겠습니까?”
잠시간의 침묵이 이 자리를 지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