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제함후, 휘영 (1)
나는 죽을 놈들을 풀어주겠다는데 어딜 더 도움을 바라냐는 식으로 쏘아붙이진 않았다. 만약 석마갈이 뭔가 더 얻어내려는 욕심을 부렸다면 그랬을 테지만 그는 자신이 그런 짓을 할 처지가 못 됨을 잘 아는 듯했다.
‘그러니 그런 식으로 갈궈 봤자 현성이 짓밖에 안 되겠지….’
하여, 나는 조금 생각해보았다. 생각할 거리들은 많았지만 압축하긴 쉬웠다.
“결국 심해교의 기세가 오른다는 문제인데. 그 기세가 오르는 이유는 후작성이 네 권위에 굽혔다거나, 널 인정했다거나 하는 식으로 해석될 거라 그렇다. 이 소리 맞지?”
“예….”
석마갈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 전하께서 한 마디 보탰다.
“그럼 이러는 건 어때요? 우리들 앞에 완전히 무릎을 꿇는 거예요. 후작성 앞에 제가 앉아있을 테니까, 댁은 흰 옷 입고 맨발로 나와서 돌바닥에 이마를 쿵쿵 내려찍는 거지요. 아주 피가 나도록요. 그리고 그 모습을 사람들이 다 지켜보게 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이제 제가 자비의 대가로 후작이 잡은 포로들을 인계하는 거고요. 그럼 다들 ‘어마, 뜨거라!’ 하면서 알아서들 기지 않을까요?”
나는 왜 인사는 공주 전하가 받고, 포로는 내가 풀어 주냐고 말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그렇게 된다면 인사는 공주 전하가 받아야 할 터였다.
[첫 번째 은월: 왜?]
‘내가 인사를 받으면 단순히 세속 권력에 무릎 꿇는 거지만, 공주 전하가 인사를 받으면 다른 종교에 귀의하게 되는 거거든.’
[첫 번째 은월: 아. 그러면 좀 더 부드럽게 항복 가능한 거임? 신자들 반발도 누르고?]
‘아니. 그 경우에도 문제는 있어.’
과연 석마갈은 난색을 표했다.
“말씀하신 대로 하는 것은 조금….”
“왜요. 자존심 상해서? 배가 불렀네요 아주. 뱃살 만져보고 싶네.”
비은공주가 말만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도 석마갈의 배를 향해 손을 뻗으려 했기 때문에 나는 일단 그녀의 손목을 잡아 멈추어야 했다.
그리고 문제점을 말했다.
“교단이 분열될 거라 그럽니다.”
“웅? 분열이요?”
비은공주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세속 권력에 찍어 눌리는 거라면 교단 전체가 뭉쳐서 대항할 겁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면 이탈자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이탈자들은 극렬분자가 되어 사회 혼란을 불러일으키고요.”
비은공주도 공주였다. 그녀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말했다.
“그 뭐냐. 검은 도끼의 밤? 그 이후 생겨난 마신 추종자들처럼 말인가요?”
“비슷합니다.”
“흐음… 두 가지 부분에서 논할 수 있겠는데요.”
비은공주는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첫째, 결국 그렇게 이탈하는 건 소수에 불과할 거 아니에요? 그럼 편하게 다 때려잡을 수 있지 않을까요?
둘째. 그렇게 이탈하는 이들은, 역시 후작이 말한 것처럼 극렬분자들이겠지요? 통치에는 하등의 도움도 되지 않은 쓰레기 같은 것들. 그럼 그 기회에 싹 다 잘라내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요? 후작도 두건 벗기 전에 저 석마갈 씨한테 말했잖아요. 잘라내야 할 것들은 잘라내야 하는 법이라고.”
나는 팔짱을 낀 채 그 말을 들었다.
석마갈이 아랫입술을 사려 물었다.
“가엾은 분들입니다.”
비은공주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래서요?”
석마갈은 비은공주를 바라보았다.
아마 석마갈의 외모는 타고난 것일 터였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이용하기 위해 가꾸어 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눈동자 속에 깃든 빛무리는, 금방이라도 꺼질 듯 깜빡거렸지만, 그럼에도 그 자리에 있었다.
비은공주는 그 눈빛에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드물게도 자신의 간단한 대답을 길게 풀어 말했다.
“그야 가엾겠지요. 시대에 뒤처진 비루한 노인네들이라니. 어떻게 가엾지 않겠어요? 가여워하면 가여워할 수록 자기가 도덕적으로 우월해지는 느낌까지 들 테니 가여워하지 않을 이유가 없겠지요.
하지만요. 그 밖에도 가엾은 사람들은 많다구요. 그 가엾은 노인네들이 깔보는 사람들, 무시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가엾지 않나요?”
비은공주는 숨을 고르고서 말했다.
“당신은 그저 자기 곁에 있는 사람들을 편애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걸 탓하진 않아요. 다들 하는 짓거리니까. 근데 그걸 어떻게 머릿속에서 짜 맞춰서 고결한 척 하는 건 제법 역겹고 많이 그렇네요. 개짓거리라는 것 사실 스스로도 알고 있을 거 아녜요? 집어치우지요 좀.”
“….”
“본인과 후작은 관대한 제안을 하고 있고, 석마갈 당신도 그걸 알아요. 당신이 지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지키려 드는 건 좋은데, 모두를 지킬 수는 없어요. 추려내고 잘라내세요. 이것은 최종 통고니까 뒤지기 싫으면 따르시라구요. 아시겠어요?”
석마갈은 참혹한 얼굴로 고개를 수그렸다. 비은공주는 성난 고슴도치 같은 얼굴로 그런 석마갈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내가 말했다.
“공주 전하…. 통고 같은 건 제가 해야 하지 않을까요? 왜 은근슬쩍 공주 전하께서 하십니까?”
“-라고 후작이 통고하리라는 의미였어요. 그렇죠? 그렇다고 말해라 얼른.”
“어… 좋은 말씀들 감사합니다. 새겨들을 가치가 가득한 일침들 감사히 들었고요. 그런데 전하. 저 그렇게 통고하진 않을 건데요.”
“아 나 진짜! 그냥 그런갑다, 공주님 뜻이 바로 제 뜻입니다, 하면 좀 어디 덧나요!?”
“공주님 뜻이 제 뜻일 때는 그리 말하겠습니다. 근데 지금은 아니어서요.”
비은공주가 도토리를 빼앗긴 고슴도치 같은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그녀가 그러도록 놔두고 석마갈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석마갈은 심호흡을 했다. 심해교의 제사장은 자신의 생각을 정돈하여 말했다.
“그들… 말씀하신 비루한 노인네들은 모두 다 나쁜 흐름에 휘말린 이들입니다.”
석마갈의 말이 이어졌다.
“전쟁을 일으킨 데에 책임을 가진 이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선대 해웅을 비롯해 모조리 월국의 손에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지요. 그들 주변인들도 덤으로 죽거나 끌려가는 식의 참화를 겪어야 했고요.
그런 이들이야 그렇다고 칩시다. 하지만 남겨진 이들은 어떻습니까. 이 섬에 남아있던 이들. 공주님께서 비루한 노인네들이라고 말한 이들은요?”
석마갈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에게 달리 어떤 삶이 가능했겠습니까?”
그 말은 숫제 한탄에 가까웠다.
“전쟁이 그들의 의지로 일어났습니까? 나투아가 멸망한 것이 그들의 책임입니까? 그렇지 않지요. 그럼에도 그들은 기나긴 시간 고통을 겪어왔습니다. 자신의 책임도 아닌 일로 인해 피해를 감당하는 동안 그들은 늙었습니다. 공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비루한 노인네가 되었습니다.”
비은공주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뭐 망국의 백성들이면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꼬우면 승전국의 국민이 되던가요. 당장 나투아가 전쟁에 이겨서 왕국이 멸망했다면 떵떵거리는 건 저 노인네들이었을 테고, 탁자 아래 묻힌 코딱지처럼 찌그러져 있어야 할 것은 왕국민들이었을 텐데요.”
“오히려 그렇기 때문입니다.”
석마갈은 마른세수를 했다.
“역사가 다르게 흘렀다면 왕국민들도 같은 처지에 놓일 수 있었습니다. 조금 더 자비로운 대처를 바라는 것은 잘못된 바람입니까?”
“너무 많은 바람이긴 하네요.”
“그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또한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말씀하신 것처럼 편애라는 사실을 저는 인정합니다.”
심해교의 제사장은 되풀이하여 말했다.
“그렇습니다. 편애입니다. 당장 저도 외지인들의 재산을 꿀꺽하는 걸 마다하지 않습니다. 후환이 없다면 더더욱이요. 그러니 그런 편애에 천착해서 말하는 것입니다만, 저는 저 비루하고 뒤처진 노인네들을 내버려둘 수가 없습니다. 잘라낼 수도 없습니다. 저는,”
[최초의 성녀: ….]
“저는 저들을 책임지고 싶은 것입니다.”
석마갈이 말했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수그렸다.
“그러니 도와주십시오. 저 가여운 이들을 어떻게든 할 수 있도록, 한 번이라도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힘을 빌려주십시오.”
그리고 비은공주는 ‘내가 왜요?’ 하고 말하지는 않았다. 석마갈은 고개를 들어 비은공주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 눈빛은 비은공주로 하여금 조금 더 진지하게 대화에 임하도록 했다.
“미치겠네요 진짜….”
비은공주가 가시를 세웠다.
“아니 젠장, 석마갈 씨! 진짜 정말 가여운 게 누군지 아세요? 바로 여기 있는 저예요. 저, 비은공주야말로 겁나 진심으로 가여운 비운의 인물이라구요!
팔아먹지도 못할 은월의 눈깔을 타고 태어나서는! 사람들 죽는다고 오라비랑 제대로 한 판 붙어보지도 못하고! 결국 이 섬에 이렇게 개 한 마리 달고 흘러와버려선! 이제는 홍보탑에 해적 노릇까지 하게 됐지요! 이 무슨 설화에 나올 법한 기구한 팔자인가요?
그나마 마음에 드는 건 마지막 것들뿐인데, 그것도 까놓고 말하면 후작의 필요에 따른 결정이지 제 의사가 한 톨도 반영이 안 됐걸랑요!? 완전 흘러가는 대로 흘러온 인생이라구요. 이건 진짜 완전 진심 동정심 팍팍 치밀지 않나요?”
한 차례 격정을 쏟아낸 비은공주는 석마갈이 그러했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망할 노릇이지만요. 사람들은 말이에요. 원하는 대로 못 살아요. 살 수가 없어요 그냥! 왕국에서 가장 신성한 핏줄을 타고난 저조차 그렇다고요! 폐하이신 아바마마도 그렇고, 우리 엄마? 겁나게 센데 여행 한 번 못 다니고 궁에 처박혀 계시거든요! 이건 가엾지 않나요!? 아니면 댁들은 그래도 쌀밥에 고깃국 먹을 수 있고 권력도 지위도 있고 뭐 하여간 좋은 것들 갖고 있고 그러니 아가리 싸물어야 한다고 말할 건가요!?”
석마갈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이 없었다.
잠시가 지나서, 석마갈은 말했다.
“아닙니다.”
다시 잠시가 지나서 석마갈은 이마를 짚었다.
“아닙니다… 옳습니다.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제가 노인들의 삶을 불행하다 말한다면 월국의 공주님께서도 같은 이치로 불행하다 말해야 한다는 것을 저는 이해합니다.”
비은공주의 표정이 다소 누그러졌다.
“예, 왜냐면 사실이니까요. 망할. 당장 여기 이 자리에 있는 이들만 해도, 지 맘대로 살고 있다고 할 만한 건 저기 제함후뿐이라구요.”
음.
“공주 전하. 왜 갑자기 절 끌어들이십니까?”
“아까 본인이 최종 통고하겠다고 했더니 그건 자기 뜻 아니라매요! 공주 전하의 직접적인 압박에도 불구하고 ‘그러든가 말든가~ 나는 내 길 간다~’이러는 것은 인생의 자유를 구가하고 있다는 증거 아닌가요!”
“1 그저 공주 전하의 압박에 압박이라 할 만한 가치가 없을 뿐일 지도 모르지요. 2 저도 생각하시는 것처럼 자유롭진 않습니다.”
“그건 또 뭔 소리?”
나는 저승 임무니 빙의니 하는 말을 입에 담진 않았다. 언젠가 천사님이 말했던 것처럼 이 시대에 속해있는 이들보다 내가 더 자유로운 건 사실이기도 하고.
하므로, 그냥 석마갈을 향해 말했다.
“정리 좀 하자.”
나는 손가락을 폈다.
“먼저 하나. 댁이 심해교의 중추를 맡고 있다는 건 나로서는 큰 이점이야. 댁 하나만 잘 정리하면 심해교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는 건데, 댁은 말이 통하거든.”
두 번째 손가락을 폈다.
“하지만 둘째. 댁은 자기 사람들을 아껴. 이건 나로서는 난점이고. 노친네들까지 품어 안는 건 솔직히 손해가 크거든. 날 지지하는 할머니들이라면 모를까, 댁이 품어 안고자 하는 노친네들은 생산할 여력도 없으니까 불만만 늘어놓는 잡것들이잖아? 뼈 째 갈아서 밭에 거름으로 뿌려야 그나마 세상에 공헌할 것들이라고.”
석마갈은 몸을 떨었다.
“잔인한 말씀이십니다….”
“그게 통치야. 공정함을 기하기 위해 덧붙여두자면 나는 내 영지기사 모가지도 하나 날렸어. 여기 시아람이가 수고해 줬는데, 방금 내가 말한 것과 정확히 같은 이유였지.”
날건달 기사의 모가지를 날렸던 시아람은 조용히 고개를 수그렸다. 나는 다리를 꼬고 앉아 그 시아람의 머리를 툭툭 두들겨주고는 석마갈을 내려다보았다.
“영주로서, 나는 썩은 사과들을 골라낼 의무가 있다. 종교 지도자로서, 너는 그런 이들조차 버리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공주 전하와 너랑 나눈 대화의 결과 드러난 궁극적인 대립점은 결국 이 부분이니, 지금부터 이걸 어찌 해소해야 할 것인지 말해주도록 하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