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166화 (166/261)

166. 제사장, 석마갈 (3)

내가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개천의 시왕: 퇴각 경로는 마련해 두었다. 유사시에는 내 말을 따라 움직이도록.]

첫째, 비류아가 말한 것처럼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도망 경로가 완전히 섰다는 것.

“후작 각하…?”

“고, 공주 전하까지 계시는데….”

둘째, 좌중의 반응이 썩 나쁘지 않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 통치의 결과가 나오고 있다 이거지.’

물론 개중에는 원독을 줄줄 흘리는 이들도 있었다. 나투아 시절에 이미 성년하여 가치관과 재산을 형성하고, 왕국의 정복으로 그것이 송두리째 무너진 이들은 왕국을, 그 대리인인 나를 호의적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그러한 이들이 당연히 이 자리에도 있었다.

하지만 25년이 흘렀다.

사람은 늙는 것이다. 원한이 아무리 깊어지더라도 그것을 담아내야할 인체는 쇠하여 얇아지고 만다.

심지어 그들은 원망해야 할 이들이 많았다. 왕국뿐 아니라, 왕국에 빌붙은 배신자들, 사시사철 그들을 노략하는 흑구들까지. 나를 향해 순수한 분노를 투사할 수 있는 이들은 얼마 안 되었다.

석마갈은 말없이 그 얼마 안 되는 노인네들을 지키듯 앞에 섰다.

아까 걸었던 독심술 내용으로 추론하자면 분명 당황하거나 허둥거리고 있을 터였지만, 겉모습은 지금까지처럼 완벽했다. 흐트러짐 없는 근엄한 얼굴로 석마갈은 고개를 수그렸다.

“안녕하십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정체가 드러난 이상 더 이상 존댓말을 할 필요가 없었기에 편히 말했다. 그것을 석마갈은 받아들였으며, 심지어 심해교 심관들 역시 받아들였지만, 노인들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늙어 흐려진 눈동자들에 불똥이 튀었다.

“어딜 감히 석마갈께….”

“이 산호 옥좌를….”

그로부터 이어질 말은 ‘감히 그런 불손한 소리를!’이라거나, ‘산호 옥좌를 더럽히는 월국의 깡패년’ 정도가 아니었을까.

정도가 아닐까, 하고 추측한 이유는 그 말이 끝까지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석마갈이 버럭 소리쳤다.

“그만!!”

벽력같은 고함 소리였다.

노인들이 주춤 입을 다물어 그 말들이 묻힌 가운데, 석마갈은 계속하여 외쳤다.

“이 석마갈께서 말씀하고 계시오이다! 이 자리를, 여러분을 대표하여! 여러분들의 귀한 의견들은 모두 다 귀로 마셔 심장에 채웠으니, 여기서 더 보태거나 덜하지 말아주시오!”

노인들은 어물어물 입을 다물었다. 석마갈은 곧바로 한쪽 팔을 들어 심해교의 신관들을 가리켰다.

“신관들은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인솔하여 자리를… 아니, 그럴 필요 없겠소. 공주와 산호 옥좌에 앉은 분께서 이리 석마갈을 찾아오셨으니, 이번에는 자연히 석마갈께서 따라가는 것이 공평하겠지.”

석마갈은 다시 팔을 내리고는 성큼성큼 나를 향해 걸어왔다. 노인들은 떨면서도 그런 석마갈을 말리려 했다.

“합하….”

“위험합니다…! 합하께서 가지신 위엄을 저들이 지극히 꺼리고 두려워할지언대…!”

석마갈은 멈추지 않았다.

“그 걱정이 곱소. 그러나 넣어두시오. 석마갈께서는 석마갈이시니.”

한편, 이단 종교의 제사장이 다가오는 것을 유리아와 시아람은 마땅히 경계하려 했다. 그 이단 종교의 제사장이 모자에서 토끼를 꺼낼 수 있기까지 하니 더더욱.

석마갈이 노인들을 만류했듯 나 역시 손을 들어 두 기사를 만류했다. 그러며 다가오는 석마갈을 바라보았다.

‘이건 좀 대단한데.’

솔직히 감탄이 나왔다.

[최초의 성녀: 그러게요. 넘어야 할 선과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잘 알고 있군요.]

다른 부족의 지배 하에 맥을 이어온 이단 종교의 우두머리라는 점에서, 아리야는 누구보다 지금 벌어진 일에 대해 잘 파악했을 것이다.

[최초의 성녀: 저 노인들이 한 마디라도 더 하게 두었다면 석마갈 저 사람도 도저히 물러날 수 없게 됐겠지요.]

그리고 석마갈이 물러서지 않으면, 나 또한 세속의 지배자로서 물러설 수가 없다. 의미 그대로 권력 다툼이 되어 버리며, 그 다툼에서는 자연히 세속의 권력자인 내가 물고를 내는 식으로 마무리 되었으리라.

공주 전하께 구구절절 설명했다시피 그건 내가 바라는 그림이 아니다. 그 경우 그래도 저쪽이 빌미를 주었다는 이점이 생기겠지만 어쨌건.

‘그래서 그리 되지 않게끔 내가 먼저 끊으려 했었는데, 석마갈 저 놈이 역시 눈치가 있군.’

[최초의 성녀: 예, 잘 끊어주었네요. …우리로선, 예언자님 오시기 전까지는 도무지 잘 안 되었던 것인데.]

석마갈이 자신의 입지를 어찌 여기든 그는 지금 민중 지도자 입장이다. 아무도 없는 밀실이면 모를까, 이런 중인환시에 자신이 보살피고자 하는 민중의 뜻을 무시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그는 내가 모서아에게 빙의했을 때 그랬던 것마냥 대놓고 비굴하게 굴 수도 없었다.

[간신 조련사: 지금까지의 인과가 그를 옭매고 있는 것입니다.]

천사님이 평가했고, 나는 동의했다.

‘그런 만큼 석마갈은 밀실에 들어가고 싶겠죠. 둘만 있을 수 있는 곳. 사람들의 눈이 없는 곳 말이에요.’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도 바람직한 일이었다.

굳이 지금 정체를 드러낸 마지막 세 번째 이유.

“석마갈이라 했나. 나는 제함도 후작 휘영이다.”

일 대 일로 담판을 지을 수 있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먼저 귀한 광경을 보여주어 고맙군. 대단했어.”

나는 소매를 추슬렀다. 그렇게 석마갈을 한 차례 가볍게 추켜세워 주고는 비은공주를 흘끗했다.

“본디 나는 이런 곳에 올 사람이 아니지. 전하께서 보러 가자 말씀하신 덕에 머리라도 식힐 겸 왔던 것인데, 우려했던 것처럼 시간을 낭비하진 않게 된 셈이야.”

그리고 비은공주는 자기가 언제 그런 말을 했느냐는 식으로 산통 다 깨지는 않았다. 고슴도치도 홍보탑 노릇 좀 하다 보면 그 정도 자제심은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 나도 그에 대한 보답을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석마갈에게 말했다.

“그대는 내 성에 찾아오겠다고 말했지만, 그건 반려하지. 대신 정식으로 그대를 초대하겠다. 둘이서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다면 좋겠군.”

석마갈은 변함없이 담담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내 말을 자신들의 지도자에 대한 존중과 경의로 이해했는지 노인들의 안색은 대번에 밝아졌다.

그런 노인들로서는 더욱 기쁘게도, 유리아는 질겁했다.

“후작 각하, 성 안에 저런 마술쟁이를 불러들여서는 안 됩니다. 무슨 사단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그런 왕궁기사의 반응은 신앙에 대한 박해보다 신비한 힘을 갖춘 자에 대한 두려움의 표시로 해석되었다. 노인네들이 기뻐할 만했다.

그리고 나는 능숙하게 그것을 받아넘겼다.

“기사. 지금 이 자리에는 은월의 피를 이어받으신 공주 전하께서 계신다. 물론 성 안에서도 나와 함께할 테지. 저 남자가 어떤 힘을 가졌든 간에, 가호라는 측면에서는 뒤지지 않아.”

그 말에 유리아는 귤과 굴 껍데기 양산에 탁월한 재주를 지닌 이 고슴도치가 신성한 핏줄이라는 사실을 새삼 자각한 듯 했다.

‘내가 공주님을 홍보탑으로 세웠던 이유가 바로 그거였는데 말이지….’

어쨌든 좋다. 나는 손짓으로 시아람이 내 곁에 서도록 한 다음 석마갈을 향해 말했다.

“후작성으로 가지. 우리 둘이 나눌 이야기가 많을 것이다.”

석마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          ◈          ◈

“각하, 어서 와. …어라. 손님을 데려왔네.”

“응. 자문사. 응접실에 차 들여와. 그리고 다들 나가.”

석마갈을 데리고 후작성으로 돌아오자마자, 내가 먼저 한 일은 그렇게 불필요한 이들을 모두 내보내는 것이었다.

유리아가 즉시 반발했다.

“저는 공주 전하를 보필해야 합니다.”

“너 시아람 이겨?”

유리아가 시무룩한 얼굴로 떠나갔다.

“각하. 나도 안 돼? 모자에서 갈매기 꺼내는 거 보고 싶은데….”

“나중에 보여줄게. 지금은 나가.”

구호도 시무룩한 얼굴로 떠나갔다.

그렇게 응접실 안에는 나와 시아람, 공주 전하, 그리고 석마갈만이 남게 되었다.

석마갈은 여전히 근엄했다. 추호도 밀리는 기색 없이 엄숙한 모습이었다. 심해교의 제복을 차려 입고 반듯하게 앉은 그 모습으로부터 절로 성스러운 분위기가 풍겼다. 그는 심원한 눈동자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비은공주가 그 석마갈에게 귤즙을 뿌렸다.

“흐억!”

석마갈이 두 눈을 감싼 채 비명을 터뜨렸다.

나는, 어, 비은공주를 돌아보았다.

“공주 전하…?”

비은공주는 머쓱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그냥요…. 저도 모르게 그만….”

“음… 왜 그러셨는지는 이해합니다만….”

나는 헛기침을 했다. 이어 아직 두 눈을 부여잡고 있는 석마갈, 심해교의 제사장을 향해 말했다.

“제사장… 항복하지?”

석마갈은 두 눈을 감싼 그대로 더듬더듬 말했다.

“항복하다니… 심해에 가라앉은 아버지께서는….”

“응. 한 번이라도 뺀 그 용기 가상하게 여겨주마. 그치만 말해두는데 두 번 빼면 뒤진다 진짜. 항복해.”

그리고 석마갈은 뒤지고 싶어하지 않았다. 손을 치운 그가 벌게진 눈으로 나를 보았다.

“항복 조건이 어찌 되는지 듣고 싶소만….”

“싶소만?”

“싶습니다.”

“그래, 새끼가…. 일단 내가 가둬 둔 니네 성직자들 있잖아. 걔네 데려가게 해줄게. 그거 갖고 대충 니 위대한 신통력으로 어쩌고저쩌고. 그래서 데려나올 수 있었네 어쩌네. 하여간 잘 포장해봐. 잘 하더만.”

석마갈이 움찔했다.

“살아 있습니까…?”

“왜? 뒈지길 바랐냐?”

“그럴 리가. 다만 그… 월국은….”

석마갈은 말하다가 말고 입을 다물었지만, 나는 그가 삼킨 말을 끄집어냈다.

“진작에 죽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거지? 왕국은 잔인하니까. 그래. 죽일 만하지. 미친 새끼들이 어딜 감히 영주성 앞에 와서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난리야? 죽여 달란 소리지 뭐야?”

“맞아요! 변명이 있거든 어디 해보시죠!”

왜인지 비은공주가 기세등등해서 거들었다. 나는 석마갈의 모자를 낚아채 공주 전하께 안겨줘서 “앗싸!” 잠시간 조용하게 한 다음 석마갈을 바라보았다.

석마갈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말했다.

“관대한 제안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사실 집회 전만 해도 이보다 더 안 좋은 상황들을 가정했던 터라 지금 이 모든 일들이 선물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을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마땅히 그럴 테고. 다 알겠으니 본론만 말하자. 문제가 뭐야?”

내가 간파했던 대로 광신도도, 막후지배자도 아닌 싸구려 약장수로서, 심해교 제사장 석마갈은 현실적인 문제를 입에 담았다.

“붙잡힌 이들을 풀어주시고 제가 그들을 데려간다면 제 입지가 드높아지겠지요. 제 지지자들이 늘어날 것이고 이미 지지자였던 이들은 한 층 더 열광에 휩싸일 겁니다.”

“그래서? 기세가 올라서는 ‘후작성으로 돌격하자~!’, ‘흐름이 우리를 이끌어주신다~!’ 뭐 이런 일이라도 벌어질 거다?”

“그럴 가능성을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그걸 잘 통제하는 게 네가 할 일인 거지. 심해교 대빵 씨. 자신 없어?”

석마갈은 두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솔직히, 예… 지금 여기까지 온 것도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저로서는 도무지 사람들을 억누르기 어렵습니다….”

“우와, 찌질해…. 진짜 완전 얼굴 마담이네요 당신.”

비은공주가 모자를 손가락 하나로 빙빙 돌리면서 평가했다.

석마갈은 성을 내긴커녕 허탈하게 웃었다.

“맞는 말씀입니다. 애초에 과분한 짐이었어요.”

“그럼 내려놓으면 됐을 걸.”

“어떻게 그럽니까. 제가 뭣 모르던 시절에 저를 도와주던 사람들이고, 이제는 또 저만 바라보는 사람들인데.”

“웅? 요컨대 어렸을 적에는 도움을 받았는데 지금은 도움이 안 된다는 말? 그러면 더더욱 빠르게 손절 들어가야죠. 그랬으면 이득만 보고 빠져나올 수 있었던 각이잖아요. 뭘 버티고 앉아있나요?”

석마갈은 비은공주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비은공주는 도리어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생각해보면 현성이도 이런 기질이 있었지….’

현성이의 윤리의식 결여와 사호의 동정심 결여가 맞물리면 이런 무시무시한 결과물이 나오는 거다. 핏줄이란 게 얼마나 정직한 것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면서, 사호가 세자 전하를 따로 낳아주었다는 게 너무나도 감사한 부분이었다.

나는 넌더리를 냈다.

“신경 쓰지 마, 석마갈. 그렇네…. 공주 전하를 사람이 아니라 말을 할 줄 아는 짐승으로 생각하면 편할 거야. 지독하게 교활한데, 그 교활함을 자기 눈 앞 보는 데만 쓰시거든.”

“왕실 모독죄…!”

“예. 그리고 제가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증명해줄 사람이 이 자리에 없군요.”

“젠장! 아까워라.”

비은공주가 모자를 푹 눌러쓰며 툴툴거렸다.

나는 본론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뭐야. 가둬 놓은 성직자들 필요 없다는 거야?”

“아니요. 저는 각하의 관대한 제안에 감사드리며, 또한 그들이 무사하다는 사실에….”

“짧게 말해.”

석마갈은 고개를 끄덕이고 짧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노력하겠습니다. 보답하겠습니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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