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165화 (165/261)

165. 제사장, 석마갈 (2)

이번 지목 역시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겨우 벗어나 숨을 돌리던 노인은 당혹해하다가 얼떨결에 대답했다.

“어어… 글쎄요. 아무튼 아무도 다는 모른다는 겁니까요?”

어눌한 대답에 홍소가 터졌다. 노인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석마갈은 웃지 않았다.

“이리 나와 주시오.”

노인이 얼어붙었다. 석마갈은 심해교 신관들로 하여금 그 노인을 데려오도록 했다.

굳어버린 노인에게 석마갈은 품에서 무언가를 둘러주었다. 비단으로 만들어진 목도리였다.

좌중의 웃음이 그쳤다. 노인은 황송함 반, 당혹감 반으로 얼룩져서 말했다.

“어, 어찌 이리 귀한 걸….”

“해주신 말씀들에 비하면 전혀 귀하지 않소.”

담담하게 말한 석마갈은 목도리를 노인의 어깨를 다독여주더니 좌중을 둘러보았다.

“자. 들어 주시오. 방금 이 노인께서 말씀해주신 바가 지극히 옳소. 모든 것을 아는 이는 이 세상에 없는 것이오. 심해에 가라앉은 아버지께서도 마찬가지셨지. 그분께서도 저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소.”

사람들 사이에 웅성임이 퍼졌다.

“헤에… 굉장한 소리를 하네요, 저 양반.”

“그러게 말입니다. 잔월공이든 제사장이든 법왕이든, 우리네 신전에서 했다면 바로 돌 날아갈 소리이지 않습니까.”

그 웅성이는 이들 중에는 비은공주와 유리아도 있었다.

내가 말했다.

“종교 체계가 같지 않다는 게 한 몫 할 겁니다. 우리는 달의 여신이라는 유일신을 숭상하지요. 반면 저들은 여러 신들을 모시고요.”

“잘 아네요, 후작?”

“공부했으니까요. 어떤 싸움을 하든 적을 알아야 이길 수 있는 것은 불변의 이치입니다.”

말하면서도 나는 석마갈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석마갈의 말이 이어졌다.

“하여 그분께서는 바다에 배를 띄웠소. 저 너머에 무언가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그 결과가 어찌 되었는지 노인께서는 아시오?”

자신의 목에 둘러진 비단을 어루만지던 노인이 머뭇머뭇 답했다.

“으음… 그 이름처럼 바다에 가라앉으셨지요.”

“그렇소. 수평선 너머에는 용이 도사리고 있었지. 용은 수평선 너머를 모조리 자신의 영토로 여기고 있었소. 그분께서 배를 띄운 것을 감히 자신의 영토를 침범하려는 것으로 여긴 용은 분노하여 그분과 맞섰소.”

그것은 나도 들어본 적이 있는 나투아 신화였다. 하얀 흐름과 검은 흐름, 최초의 항해자와 용의 싸움.

“아버지께서는 섬 하나에서 달랑 배만 한 척 띄울 수 있었소. 반면에 용은 수평선 너머를 전부 소유하고 있었으며 거기서 나온 힘은 실로 강대했소. 결국 우리들의 아버지께서는 바다 깊이 가라 앉으셨소이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의 행동이 다만 무의미한 소동으로 그친 것은 아니오.”

석마갈은 좌중을 둘러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아버지의 업은 아들에게 이어지는 법이오. 그 아들의 업은 다시 그 아들에게 이어지지. 강과 계곡과 개울에 사는 세 여인이 그들을 도운 바, 많은 배들이 아버지를 뒤쫓아 출항했소. 대부분의 배들이 용에게 패해 가라앉았지만 누군가는 수평선 너머에 가서 닿았소. 거기에 있는 땅을 발견하고, 거기에 살아가던 사람들을 보았지. 그리고 돌아와 자신이 본 것들을 알렸던 거요.”

“….”

“결과, 사람들의 세계는 그만큼 커졌소이다.”

웅성거림이 가라앉았다. 사람들은 석마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석마갈은 계속 말했다.

“그런 일이 되풀이되었소. 사람들은 배를 타고 나가길 두려워하지 않았소. 수평선 너머에 가서 닿기를 주저하지 않았소. 그들은 도전을 거듭했고, 그 때마다 무언가를 발견하여 돌아왔소. 그 곳에 땅이 있음을, 사람이 있음을 알렸소. 사람들의 세계는 나날이 확장되었고, 용의 강역은 갈수록 줄어들었소. 이윽고 용은 광대한 바다가 아니라 테두리가 확정된 한낱 호수 안에 갇히게 되었지.”

항로의 개척, 그로 인한 미지의 혁파를 심해교에서는 그렇게 논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 그 용은 호수 바깥으로 나오고자 꿈틀거리고 있소.”

석마갈은 좌중을 한 차례 둘러보면서 말했다.

“그리고 심해에 가라앉은 아버지께서는 그것을 대단히 우려하고 계시오.”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태초에 흐름이 있었소. 검은 흐름과 하얀 흐름이었소. 검은 흐름은 뭍이 되었고 하얀 흐름은 물이 되었소. 심해에 가라앉은 아버지께서 그 이름처럼 심해에 가라앉으셨을 적에, 그분을 품에 안은 새하얀 흐름이 스스로를 굳혀 쉴 자리를 마련해주셨으니, 그것이 바로 산호이고 심해에 가라앉은 아버지께서 앉으신 산호 옥좌인 것이오.”

사람들 모두가 숨을 죽여 듣고 있는 가운데, 석마갈은 조용히 말했다.

“산호 옥좌에 여인이 앉아서는 안 될 이유가 여기 있소. 산호 옥좌는 심해에 가라앉은 아버지를 모시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오. 최초에 산호 옥좌가 만들어진 이유가 그러하니, 어찌 그 옥좌에 여인이 앉도록 할 수 있겠소?”

그리고 석마갈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몇 차례 심호흡을 하면서 좌중을 둘러보더니, 그는 천천히 한 쪽을 바라보았다.

“거기 서 계신 아가씨께서 한 번 대답해보시오.”

나는 멈칫했다.

석마갈이 가리킨 인물은 바로 나였다.

◈          ◈          ◈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뭐여 시벌.’

그 침묵 속에서 다양한 생각들이 떠올랐다가 스러졌다.

‘왜 나를 가리키고 지랄이야….’

설마 내가 누군지 알아차렸나?

‘그건 아닐 텐데….’

내 빙의체가 특색 있게 생기기는 했다. 휘영청한 키, 짙은 눈 그늘, 널따란 흰 자위에 콩알처럼 박힌 자그마한 눈동자, 허리까지 내려오는 묵빛 머리카락. 공주님 말마따나 불길한 느낌이 절로 드는 그 외모는 내게 다른 이들과 대비되는 이질감을, 그럼으로써 영주로서의 위엄을 갖추도록 도와주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두건을 눌러쓰고 있었다. 그 밖에도 자잘한 변장을 했다. 더군다나 왕국의 후작씩이나 되는 인물이 변복을 하고 이런 곳에 와 있으리라곤 상상하기 어려울 거다.

‘물론 그래도 알아챘을 가능성은 있지.’

가령 비은공주는 은월의 피를 이었다. 아무리 변장을 해도 누군가 알아차릴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심해교 심관들은 비은공주에게 먼저 죽을 건네는 등 적극적인 접촉을 했으며, 지금 그 비은공주는 내 곁에 있었다. 알아볼 개연성은 충분한 셈이었다.

‘독심술만 남아 있었어도….’

답답한 기분에 혀를 차자니 석마갈이 다시금 나를 불렀다.

“아가씨?”

사람들의 이목이 한층 집중되었다.

‘음.’

그래.

‘일단 대비부터.’

나는 빠르게 속으로 지시했다.

‘아리야. 주변에 뭐 이상한 움직임 없나 감시 부탁하겠소. 시왕님께서는 미리 탈출 경로 짜주시고. 야리소연 너는 일반 입주자들이랑 이야기하면서 혹시 모를 경우에 대비 좀 해주라.’

그렇게 만약의 만약까지 대비하여 안전을 확보한 다음, 살기를 뿜으려 드는 시아람을 눈짓으로 만류하고 나자 대답할 준비가 됐다.

내가 말했다.

“여인이 산호 옥좌에 앉을 수 있느냐 여쭈셨나요?”

“그렇소. 이 석마갈께서는 정확히 그렇게 여쭈었소.”

“글쎄요. 신화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만들어진 자리든 지금은 신화 시대가 아니지요. 그리고 앉을 수 있느냐 마느냐를 떠나 이미 앉아 계시지 않나요? 지금 후작님은 여인이신데요.”

좌중의 분위기가 요동쳤다.

“거 여편네가 어디 석마갈 님께 그리 말대꾸하듯이!”

“석마갈 님께서 길게 말씀하신 걸 듣지도 않았나, 월국 후작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와….”

적의를 표출하는 이들.

“맞는 말이긴 한데 좀….”

“거 석마갈 님 무안하시게시리….”

염려를 표현하는 이들.

“후작, 괜찮겠어요? 그런 말을 해도?”

“아니, 오히려 그렇게 해야 합니다. 상대가 정통성 논쟁을 걸어온 것 아닙니까. 각하라는 걸 알고 걸어온 건지 모르고 걸어온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

비은공주와 유리아, 시아람까지 소곤거리는 가운데, 나는 석마갈의 눈만을 바라보았다.

석마갈 또한 나를 바라보면서 담담하게 답했다.

“그 또한 올바른 말이오.”

그로 인해 다시 한 번 좌중이 요동쳤지만, 석마갈은 신경 쓰지 않고 나를 향해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납득하기 어려운 말이기도 하오”

“어째서요? 역시 신화적으로 옳지 않기 때문에? 말씀드렸듯 그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신화에 따른 정통성을 부정한다면 남는 것은 두 가지겠소. 먼저 얼마나 잘 통치하느냐 하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겠지.”

“잘 통치하고 있잖아요. 민중을 위협하던 흑구도 때려잡고 있고. 어지러웠던 치안도 바로 세우고 있고, 아랫것들이 장난치지 못하게 죄고 있고. 식량도 풀고 있고. 즐길 거리도 주고 있지요. 이보다 더 통치를 잘 하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석마갈께서는 모자 속에서 토끼를 꺼낼 줄 아시는 만큼이나 그 답도 아시는 건가요?”

대놓고 도발적인 내 말에 다시금 좌중이 요동쳤다. 그러나 나 역시 신경 쓰지 않고 석마갈만을 물끄러미 보았다.

석마갈이 말했다.

“최근에는 그렇지.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러지 못했고, 그로 인해 제함도 전체가 고통에 신음했다는 사실을 또한 알고 있을 것이오.”

선대 후작의 통치.

“문제가 좀 있었지요. 하지만 그 문제를 일으킨 후작과 지금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 후작은 다른 인물이지 않나요? 또 애초에 그렇게 된 이유를 따지자면 나투아가 무너진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할 텐데, 그거야말로 많은 이들이 피하고 싶은 화제일 텐데요.”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자연히 나투아의 마지막 해웅이 벌인 삽질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현실적인 통치자를 이야기한다면, 최근 수십 년을 통틀어 지금의 제함도 후작만큼 뛰어난 인물이 없다는 것도 인정하셔야 할 테고요. 그렇지 않나요?”

석마갈은 침묵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생각했다.

‘애초에 논리가 너무 궁색하단 말이지.’

석마갈은 신화에 대해 논하면서 후작좌의 주인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신화 따윈 의미가 없는 것 아니냐고 받아치니 현실적인 통치에 대해 들고 나왔다. 그러나 그 현실적인 통치 쪽도 내가 더 잘 대답할 수 있는 분야인 것이다.

그러니 어느 쪽도 작금의 후작이 갖는 정통성에 대한 결정적인 논박은 될 수 없었다.

‘하려면 논리 자체를 무시했어야 했을 텐데….’

과대망상에 빠진 미치광이도, 사람들을 갖고 노는 걸 즐기는 막후지배자도 아닌 자로선 그마저 부담이 됐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석마갈이 말했다.

“문제는 하나 더 있소.”

“두 가지라고 하셨죠. 두 번째 문제는 어떤 건가요?”

석마갈은 대답하기 전에 좌중을 한 차례 훑어보았다. 방금 그가 비단을 둘러주었던 노인을 포함하여 나이 든 사람들에게 잠시간 시선이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석마갈은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버려지는 자들이 있다는 거요.”

음.

나는 그 말을 이해했다. 그것이 대충 어떤 견지에서 나온 말인지도.

고개를 끄덕이진 않았다.

그러는 대신, 나는 후드를 벗었다. 그 밖의 변장들도 털어냈다. 짙은 눈 그늘과 병색 있는 얼굴 등, 특색 있는 외모가 그대로 드러났다.

“어느 곳이나 똑같아요.”

나는 제함도의 후작으로서 말했다.

“당장 당신이 말한 신화에서도 그렇지 않나요? 심해에 가라앉은 아버지는 용과 싸우다가 그렇게 됐죠. 아버지를 돕고 아들들을 도운 세 여인들은 산호 옥좌에 앉지 못하고요. 버려졌다고 느끼는 이들을 감싸 안고자하기 전에 그들이 먼저 버린 이들을 생각해 보셔야 하지 않을까요?”

좌중은 일순 시끄러워졌다가, 곧 쥐 죽은 것처럼 고요하게 변했다.

“세상에, 저 분은….”

“후작 각하…?”

“어, 어떻게 여기에….”

“그럼 저기 옆에 서 계신 분은 설마….”

수군거림 속에서, 비은공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음, 후작. 오늘은 염탐만 하는 것 아니었나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비은공주도 더 묻지 않고 후드를 벗었다. 붉은 머리카락과 은월의 눈동자가 이 자리를 환하게 빛냈다.

좌중의 얼굴에 신음이, 다음 순간에는 공포가 떠올랐다. 석마갈이 등장할 때 심해교 신관들이 그러했듯 인파는 좌우로 갈라졌다.

심해교의 제사장과 우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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