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달의 여신 vs 심해에 가라앉은 아버지 (4)
석마갈은 고개를 끄덕였다.
“힘을 챙긴 다음에 말이오.”
“예. 먼저 힘을 챙기고 그렇게 챙긴 힘으로 민생을 챙기니 사람들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요. 암초를 깎아내는 파도라 해도 절벽 앞에서는 갈래를 칠 수밖에 없으니까요.”
다른 노인들은 학자의 말에 불편한 표정을 지었지만 끼어들진 않았다. 석마갈도 고개만 한 차례 끄덕였을 뿐이었다.
학자의 말이 이어졌다.
“이 마녀는 그렇게 자신을 ‘적응해야 할 질서’로 제시하고 나서, 그 다음에야 아랫것들의 지지를 구했습니다. 아주 화려하게요!”
석마갈은 그 말뜻을 알았다. 직접 보았으니까.
노을이 지기 전에 항구를 나섰던 후작군 전함들은 달이 떠오를 무렵 돌아왔다. 나갈 때 없었던 배들을 거느리고서였다.
알실라 흑구들. 그 뾰족한 칼배들과 잔혹한 난쟁이 해적들은 제함도 내에서 공포의 상징 중 하나였는데, 악명이 무색하게도 줄에 꿰인 생선들마냥 엮여 들어온 것이다.
후작군 전함들 곳곳에서 박자감 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둥, 둥. 북 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쿵, 쿵, 발을 구르는 소리가 갑판을 두드렸다. 말발굽 소리를 닮아 낮고 깊게 울려 퍼지는 그것은 월국 특유의 개선가였다.
그렇게 개선가가 좌중의 심장 박동을 반 박자 앞질러 인도하는 가운데, 선단 가장 앞에는 월국의 공주가 흑구 한 놈의 머리채를 잡아 들고 있었다. 휘황한 달빛이 붉은 머리칼에 바스라지며 눈가를 휘광처럼 맴도는 그 광경은 석마갈에게조차 신성하게 느껴졌더랬다.
‘핏줄 따윈 결국 간판에 지나지 않지. 해웅의 피를 이은 나처럼. 그런데 그 간판을 제대로 쓸 줄 안다는 거야. 지금 이 단체를 대표하고 있는 나처럼.’
석마갈은 그렇게 그때의 광경을 머릿속에서 쪼개어 음미하면서 말했다.
“나 석마갈 보시기엔 참으로 효과적이었소. 공포의 상징을 부수고 희망의 상징을 세운 것 아니오? 누가 봐도 한눈에 알 수 있도록 말이오.”
“예! 정면에다 대고 그만한 충격을 꽂아버리면 효과가 없을 수 없지요. 자리를 막 이었다는 것, 제대로 된 통치가 없었던 기간이 길었다는 것…. 본디 약점이라 칭해야 할 것들이 모두 다 그걸 위한 연출처럼 작용하게 되니까요. 사람들이 들뜬 것도 당연한 노릇이지요.”
학자의 말처럼 제함도는 나날이 축제 분위기였다.
사람은 쉬이 익숙해지고 쉽게 질린다고 했다. 하지만 익숙해져도 질리기 어려운 것이 있으니 바로 ‘승리’하는 것이다. 25년 내내 패배해왔던 섬이라면 더더욱 그 달콤한 맛을 즐기고 싶어 하는 법이었다.
그래서 제함도 사람들은 즐겼다. 아주 이빨이 다 썩어 문드러지도록.
- 왈패 같은 영지기사 놈들이 단단히 버릇 고쳤다드만. 한 놈은 아예 뒈지기까지 했대!
- 저저 씹어 먹을 알실라 난쟁이 새끼들. 저기 열도에서 온 우라질 깜둥이 새끼들도 아주 완전 조져버렸다던데?
- 그 쌍놈들이 모가지 날아가는 꼴을 보니 아주 속이 시원하네 그래.
- 들었수? 이번 연회에는 돼지고기가 나온다드라. 흑구 놈들이 배에다가 싣고 온 걸 빼앗았대야. 쌍놈들, 마실 나온 줄 알았겄지만 사실 지들 제삿길이었던 거여.
이미 아는 사실들을 한 차례 더 확인하고, 상대가 알 것을 아는데도 또 한 번 언급하며, 굳이 맞장구 쳐 승인한다. 제함도 사람들의 얼굴에는 그렇게 웃음꽃이 피었다. 전혀 비밀스럽지 않은 동족의식은 빠르게도 퍼져서 제함도 사람들을 하나로 묶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 안에 수속된 것은 아니었다.
“그게 다 월국의 간악한 수작인데 놀아나기는!”
“옆집 할망은 신이 나서 어깨춤을 추더구만! 이게 다 자기네가 해웅 손녀님께 빌고 빌어서 그렇게 된 거라고 말야! 해웅의 적자는 바로 여기 계시거늘!”
“내 앞집 애새끼도 그래!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게 무슨 망발이냔 말이야!”
“주리를 틀어버려야지 아주 그냥… 못된 년들… 나쁜 새끼들… 하여간 염치라고는 아주~아주~ 오지게 없어 가지고…! 나투아가 망한 것도 다~ 니들 같은 매국노 새끼들 때문이다 이거야~! 이 천하의 호로잡것들아~!”
노인들이 침을 튀겨가면서 열을 올렸다.
석마갈이 그것이 싫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기다렸다.
‘말리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 점잖고 싶으면 나 혼자 점잖으면 될 것을….’
서자로서 유년기를 보내고 도망자로 소년기를 보내야 했던 그는 토해내지 못한 울분은 반드시 응어리로 맺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미 응어리진 것이 많은 노친네들에게 얼룩을 더하게 하는 것은 너무 안쓰러운 일이었다.
하여, 이번 역시 석마갈은 소란이 수그러들 때까지 기다리고 나서 말했다.
“노인장들의 말이 옳소. 하지만 어쨌든, 나 석마갈께서 3함호 말을 듣고 또 생각해보신 바, 그 간악한 수작은 효과적으로 먹히고 있단 말이오.”
노인들이 다시금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석마갈은 어떻게 하면 그 표정을 밝게 만들 수 있는지를 알았다. 그는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오직 우리만이 그 간악한 수작에 침식되지 않았으니, 오직 우리만이 거기에 대한 방책을 준비하여 시행할 수 있는 셈이오.”
노인들의 얼굴에 자긍심이, 중요한 일을 도맡은 사람 특유의 사명감이 떠올랐다.
석마갈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의견이 있다면 내보시오. 나 석마갈께서 들어보겠소이다.”
그러자 노인들이 다시금 열을 올려 떠들기 시작했다.
“후작성에 불을 질러야 합니다!”
“영지기사 딱 한 놈만 잡읍시다!”
“연회에 참석한 놈들 중 가장 극성맞은 놈을 잡아 매단 뒤 그 앞에 배신자라는 푯말을 세워놓읍시다!”
“그 놈들의 공주를 콱 그냥… 묶어 가지고 바다에 내던져버리면 아주 그냥…! 이 제함도 전체가 들썩~들썩~ 어깨춤을 추고 그냥…!”
영양가 있는 의견은 별로 없었다. 석마갈은 실망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이 생각할 시간을 갖기 위해 말하라고 했던 것이었다.
어지러이 널브러진 이야기들 속에서 석마갈은 생각을 정돈했다.
‘상대의 전력은 항상 최대치로 잡고 거기에 1할을 더해서 가정해야 해.’
그러지 않으면 아비처럼 된다.
‘상대가 항상 악의에 가득 차 있다고 가정해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아비처럼 된다.
‘계산하자.’
망국의 왕자는 계산했다.
‘상대는 머리가 좋다. 정치를 할 줄 알아. 상징을 이용할 줄 알고, 설법하여 논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는 성과로 보여줄 줄을 안다…. 그뿐인가. 돈 쓰는 법을 알고 인색하지도 않아.’
결론은 자명했다.
‘폭력은 어려워.’
가령 지금 이야기가 나온 것처럼 월국의 공주를 납치한다고 하자. 거기에는 분명 상징성이 있을 것이다.
‘만약 선대 후작마냥 삽질을 하고 있었다면, 공주를 납치해서 매다는 게 뭐 압제에 저항하는 상징이 됐겠지. 사람들의 호응도 기대할 수 있었을 테고….’
하지만 지금 후작은 인기가 좋았다. 공주 역시.
제함도 사람들의 지지를 기대하기란 힘든 것이다.
‘설령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해도….’
그렇게 얻어낸 지지는 결국 제함도 안쪽에 그칠 터였다. 대대적인 호응이 있다 해도 제함도 후작가를 뒤엎는 것 이상을 바라기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후작가 뒤에는 월국이 버티고 있지.’
나투아를 멸망시킨 월국은 명실상부한 반도의 패자로 자리매김했다. 반도 남동부의 알실라는 흑열도와의 교역을 확대하는 등 밀리는 티를 내려 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얼마나 갈지는 알 수 없었다.
‘월국은 잔혹한 나라니까.’
그런 나라가 자기네 공주와 귀족을 잃었다고 제함도의 독립을 인정해줄까? 그럴 리 없었다.
‘당장 전함을 보내 제함도 전체를 불사르겠지.’
석마갈은 몸서리를 쳤다. 그는 아비가 어떤 방식으로 죽었는지 전해 들었다….
‘폭력을 쓴다면 제함도뿐만 아니라 반도 안쪽의 호응을 얻을 수 있을 때 써야해.’
가령 반도 안쪽, 전 나투아 사람들이 똑같이 압제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리하여 제함도가 뒤집혔을 때 뒤이어 봉기를 일으킨다는 보장이 있을 때 써야만 했다.
‘그치만 그런 보장이 있을 리 없으니….’
자연히 폭력도 사용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외지인의 짐을 건드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아니, 이제 그것도 쉽사리 건드리지 못하게 되겠지.’
지금 후작은 치안을 챙기고 있다. 그리고 치안은 바다 위 흑구를 소탕하며 챙길 수도 있지만, 산 속 도적을 박살내면서 챙길 수도 있었다.
‘그 산 속 도적이 37대 해웅을 자칭하는 반사회단체의 우두머리이기까지 하다면 더 신이 나서 박살낼 테지.’
새삼 자신의 처지가 우울해졌지만, 석마갈은 계속하여 생각했다. 생각하는 걸 포기해선 안 되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 나랑 이 노친네들이 위기에 빠졌다는 거고.’
군사력은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돈이 든다. 후작은 돈 드는 군사력을 놀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바다가 조금만 조용해지면 후작군이 어디로 창끝을 향할지는 어렵지 않은 문제였다.
그러니 석마갈이 달성해야 할 과제는 두 가지였다.
‘당면의 생존과 조직의 앞날….’
전자는 쉬웠다. 당장이라도 내던지고 떠나면 그만이었다.
지난 25년은 험난했고, 멀쩡한 자들은 오래 살지 못했다. 지금에 와서는 몇몇을 빼면 정신 나간 노친네들이 대다수였다. 이제 석마갈 자신도 30대 중반을 눈앞에 둔 나이, 노인네들과 어울려 해웅이니 함호니 부르는 소꿉장난은 그만둘 때가 온 것이리라.
석마갈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말을 멎은 노인들이 하나 둘 고개를 들었다.
“아이고, 아이고 숨 차라….”
“어떻습니까, 해웅 합하…? 저희가 낸 의견들이 썩 쓸 만합지요?”
석마갈은 노인들을 보았다.
얼굴에 진 주름이 심장에도 졌는지 울분을 터뜨리는 것조차 힘들어 숨을 헐떡거리는 노인들. 살아갈 나날만큼이나 있을 곳도 얼마 없는 이들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자신은 어렸을 적부터 이들과 함께 했었다.
‘노친네들….’
석마갈은 속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그러나 겉으로는 근엄한 얼굴 그대로 말했다.
“모두 이 석마갈을 보시오.”
노인들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석마갈은 잠시 기다렸다가 말했다.
“귀한 의견들은 잘 들었소. 진주와 같은 지혜를 담아 희게 빛나는 조언들을 아낌없이 던져주어 늘 고맙게 여기고 있소.”
노인들은 가슴을 쭉 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더 있겠습니까!”
“아주 그냥… 해웅 합하께 도움만 된다고 하면 그냥… 이 몸 하나 오지게 불사르는 건 아무렇지도 않구만요 그냥….”
석마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충정어린 마음. 이 석마갈께서 분명하게 들여다보셨으니, 흐름을 타고 내려가 심해에 가라앉은 아버지께 닿을 것이오. 여러분들께서는 조금도 걱정하거나 염려하실 것이 없소.”
그리고 37대 해웅은 근엄하게 선언했다.
“기적을 일으키겠소. 언제나 그러했듯이.”
◈ ◈ ◈
“심해교(深海敎)라고 줄여 불러도 될까? 계속 나투아 토착 종교 집단이라고 부르자니 혀가 꼬이는 기분이라.”
자문사 구호가 말했다.
나는 손에 든 면포를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자문사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응, 각하. 솔직히 심해교는 인기가 좋아. 멋진 우두머리가 있거든.”
나는 코웃음을 쳤다.
“그래봤자 우리한텐 공주 전하가 있지.”
은월의 눈동자를 가진 공주 전하. 말하고 행동하는데 거침이 없는 소녀. 그 최상급 홍보탑을 들먹이는 내 말을 구호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건 맞아. 공주 전하는 예쁘지. 또 흑구를 토벌하고 있다는 실적도 있고…. 그치만 그 우두머리도 엄청 잘 생겼고, 실적이 있는 건 마찬가지야.”
“잘 생긴 걸 어떻게 알았는지는 차차 이야기하자꾸나. 어떤 실적을 가졌는데?”
“그거야말로 길어지니까 차차 이야기할게. 아직 말 덜 끝났거든.”
구호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심해교의 우두머리는 외모와 실적에 더해 한 가지 더 갖춘 것이 있어.”
“그게 뭔데?”
“기적.”
“응?”
내가 눈을 깜빡였다.
구호는 심호흡을 하더니 그런 나를 향해 말했다.
“심해교의 우두머리는 모자에서 토끼를 꺼낼 줄 알아.”
나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되물었다.
“토끼?”
구호는 긴장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토끼.”
“귀 길쭉한?”
“응. 귀 길쭉한.”
“살아있는?”
“응. 살아있는.”
나는 다시 한 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정리하여 말했다.
“그러니까 심해교 우두머리가, 잘 생기고 실적도 있는 사람인데, 자기 모자 안에서 귀 길쭉한 토끼를 꺼낼 줄 안다 이거지?”
“응. 그리고 갈매기도.”
“갈매기면 그 끼룩끼룩 우는….”
“맞아, 그 갈매기.”
“모자에서?”
“모자에서.”
뭐여 그게.
‘개쩔잖아….’
완전 보고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