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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이 나라를 살림-161화 (161/261)

161. 달의 여신 vs 심해에 가라앉은 아버지 (3)

삼라만상 모든 것에는 그 이유가 있다.

‘그것도 엄청나게 많지.’

당장 내가 지금 이 존망섬의 영주 자리에 앉아 있는 이유를 예로 들어보자.

‘이것이 내게 주어진 임무이기 때문에. 이 임무를 달성해야 저승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임무를 거듭하면 다시금 살아날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죽은 채로 남아있길 바라지 않기 때문에.’

하지만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 빙의체 휘영이 영주의 딸로 태어났기 때문에. 장성할 때까지 살아남았기 때문에. 숙부인 시현군이, 이 녀석 역시 나인데, 왕국에서 기리고 싶어 할 만한 공을 세웠기 때문에.’

또 다르게 말할 수도 있다.

‘나투아가 정복당했기 때문에. 왕국에서 보다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고자 했기 때문에. 그냥 단순하게 선대 후작이 죽었기 때문에….’

사실이라는 측면에서 이 모든 이유들은 동일하다.

‘하지만 그 가치는 전혀 달라.’

중요한 이유를 추려낼 수 있는 능력이 그 사람의 지성을 판가름하는 척도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얼마나 제대로 된 거름망을 마련할 수 있는가와 일맥상통한다.

‘제대로 된 질문.’

나투아 토착 종교 집단이 여태껏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          ◈          ◈

‘석마갈’은 나투아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나투아인이라고 말하기 껄끄러웠다.

멸망한 나라여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냥 나투아가 가진 매력이 대단히 부족했다.

노인은 이를 박박 갈면서 말했다.

“25년 전, 나투아는 월국을 도모하여 반도의 패자가 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운이 따라주지 못한 통에 도리어 참화를 입고 말았지요. 그러나 나투아인들은 그 운명에 순순히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제 재산을 불사르고 자신들의 가족을 손수 죽이고 나아간 영웅들이 있었지요! 그 처절한 항거가 결실을 맺지 못한 것은 유감입니다만!”

찬동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이어졌다.

“역시 1함호!

“말 잘한다!”

“아주 그냥… 우리 1함호가 혓바닥에다가 그냥… 3단 노를 달았나… 말솜씨가 아주 그냥… 파도를 넘실~넘실~ 넘나드는 게 아주 그냥… 분명히 내가 지금 땅에 있는디… 콱… 배에 오른 것처럼 어질~어질~하네 그냥….”

하나같이 늙은이들이었다. 마지막 말은 특히 늙은이 냄새가 나서 석마갈은 자신도 모르게 코를 감싸 쥘 뻔했다.

나투아가 멸망한 지 25년.

이 늙은이들 대부분은 석마갈과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것 같은 이들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의 세상 속에서는 나투아가 아직 멸망하지 않은 듯 했으며, 그 관직 체계 또한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는 듯했다. 서로를 함호입네 상주입네 부르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하긴 나도 지금 해웅이라 불리고 있다만은.’

나투아가 망하지 않았다면 꿈도 꿀 수 없는 호칭이었으리라. 그러나 해웅의 사생아는 도무지 그 호칭을 기꺼워할 수가 없었다. 나투아를 사랑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37대 해웅 석마갈은 1함호라 불린 노인의 말을 보다 객관적으로 해석했다.

‘25년 전, 나투아는 월국을 기습하려다가 실패했다. 그 결과 역공을 당해 위기에 놓이자 곱게 패배를 인정하는 대신 청야전술을 동원하여 결사전을 펼쳤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한 보람도 없이 결국은 정복당하고 말았다.’

해석을 마친 석마갈은 기가 질렸다.

‘미친놈들이지, 이거 완전… 무능한 새끼가 주제 파악도 못하고 나대다가 개털렸다는 거 아냐? 그걸 뭐 이리 비장하게 말해?’

기습했다는 거야 괜찮았다. 석마갈은 적이 대하를 건너와 진을 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 군자가 아니라 등신이 할 법한 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논리에 동의한다면 기습 역시 동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둘 모두 상대가 준비를 갖추지 못할 때 치자는 것이니까.

청야전술을 펼쳤다는 것도 봐줄 수 있었다. 석마갈로서는 그 와중에 굳이 가족을 죽여야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것이 어떤 동기부여가 됐다면야 봐줄 수 있는 일이었다. 유효한 전술은 아름다운 법이고 석마갈은 아름다운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월국은 준비를 갖춘 상태에서 나투아의 기습을 받아쳤다. 기습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셈이다. 청야전술은 월국의 발목을 잡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손해 본 장사를 한 것이다.

그리하여 나투아의 기습은 한낱 비열한 소행으로 남았고, 청야전술은 그저 한심한 발악에 그쳤다. 비열함과 무능함이 손에 손을 잡고 막춤을 추는 속에서 나투아는 멸망했다.

‘그런 나라를 곱게 봐주기는 어려운 일이지. 나투아를 정복한 월국도 그랬을 테고….’

전에도 썩 호감 가는 인상은 아니었는지 월국에는 ‘배 타는 놈들은 다 사기꾼들이다.’라는 속담이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일까지 겹치니 도무지 나투아를 사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월국은 그 감정을 담백하게 표현했다.

- 이런 명예도 모르는 뱃놈들 같으니.

- 너희가 스스로를 아니, 우리 또한 너희를 너희가 아는 대로 대접해주겠다.

기습을 했으니 전사로서 명예롭지 않다는 말이었고, 결사대들이 자신들의 가족을 죽이고 전쟁에 나섰으니 치가 떨릴 독종들이라는 소리였다. 그런 명예롭지 못한 독종들은 마땅히 쓰레기 취급을 받아야 하는 바, 지금부터 시작될 지옥 구경을 기대하라는 뜻이었다.

당시 해웅 자리를 맡고 있던 나투아의 최고 권력자는 월국에 대고 이렇게 대거리했다고 한다.

- 이런 미친 땅개 새끼들. 명예 좋아하네. 니들이야말로 기습 전문가들이잖아? 그리고 염병, 인륜? 그렇게 인륜을 좋아해서 니들 시왕이란 작자가 지 동생부터 시작해서 가는 길마다 시체범벅을 만들고 다녔냐? 더러운 새끼들, 상종 못할 개자식들 칵 나가 뒈져버려라….

석마갈로서는 그 또한 머리를 감싸 쥐고 싶은 노릇이었다.

‘아니 어떻게 패배자 주제에 그딴 소리를 하지? 자존심 세우는 게 그렇게 중요한가?’

중요한 모양이다. 1함호가 다시금 입을 오물거리면서 말했다.

“저 월국 놈들의 말발굽 앞에서도 선대 해웅 합하께서는 실로 당당하셨지요. 죽여라. 아, 죽여라! 너희가 날 죽이기밖에 더하겠느냐…. 어딜 감히 해신의 가호를 받는 이를 핍박하느냐! 죽음의 순간 앞에서도 그리 당당하다니. 정말이지 위대한 분이셨습니다….”

또 다시 찬동하는 소리가 잇따랐다.

“선대 해웅 합하… 믿고 있었습니다요, 썩을….”

“그립습니다….”

“아주 그냥… 선대 해웅 합하께서 내지르신 그 벽력같은 고함에 그냥… 월국 저 쌍노무 새끼들… 간담이 쿵~! 떨어져 가지고서는 그냥… 안절~부절~ 못했을 모습이 그냥… 눈에 훤~하다 훤~해, 그냥…!”

석마갈은 할 말이 많았지만 하지 않았다. 다만 조심스레 이 일화가 꾸며 내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석마갈 생각하시기에, 그런 상황에서 욕설을 지껄일 수 있는 것은 미친놈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치만 미친놈이었지….’

석마갈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석마갈이 보았던 선대 해웅은 스스로의 분노를 조절하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그리하여 가정을 대하는데 문제가 많았더랬다.

‘그러니 나라 경영도 난항을 겪을 수밖에.’

전쟁에 패한 이후에도 그 난항은 이어을 겪었을 것이다.

월국은 승리자들처럼 굴기로 했다. 패배자로부터 설교를 들으며 기분 잡치느니 패배자를 엽기적으로 처형하기로 한 것이다.

‘무슨 부족장도 아니고 한 나라의 군주를 그렇게 보내 버리면 나중에 문제 생기지 않을까요?’ 하는 의견을 낸 사람도 있었다는 모양이지만, 월국민 모두의 기분 좋은 내일을 위해서는 그 사람이 좀 이해해 줄 필요가 있었다.

결국 나투아의 해웅은 시대를 기준으로 보아도 처참하게 죽었다. 향년 51세. 반도 서쪽과 그 일대의 뱃길을 지배하던 군주이자 집 안에서 폭군으로 군림하던 남자의 몰락이었다.

해웅의 가족들도 그 못지않은 꼴을 당했다. 그 친딸은 망나니와 결혼하여 애를 낳는 신세가 되었다. 그밖에 장성한 이들은 모조리 죽었으며, 아이들은 노예로 분배되었다.

석마갈 또한 그렇게 노예로 분배된 아이들 중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간신히 도망쳐 이 자리에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위대한 분이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패했다는 것.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죄다 저 신의도 없는 대륙놈들이 중간에 빠져나갔기 때문입니다! 천벌 받을 놈들 같으니!”

1함호가 말했고 또 한 번 찬동의 소리가 이어졌다.

석마갈은 보고 있기 괴로웠다. 무슨 일이건 끝이 좋아야 하는 법이다. 그리고 나투아의 끝은 석마갈 보시기에 심히 아름답지 못했다. 심지어 지금도 패배에서 교훈을 얻긴 커녕 군사동맹을 빠져나간 대륙을 탓하다니. 아전인수라는 말이 이보다 어울릴 수 없었다.

‘안쓰러운 노친네들….’

석마갈은 복잡한 기분을 내색하지 않은 채 근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잘 말해주었소, 1함호. 이 석마갈 보시기에도 대륙놈들은 실로 천벌 받을 놈들이지. 한 달쯤 전에 이 석마갈의 휘하 단체인 ‘검은 손’이 바다를 대신하여 대륙 상인 놈들을 응징한 바 있소. 감히 성역에 발들인 대륙놈들이 가진 재물을 모조리 거둠으로써 말이오.”

기실 석마갈의 휘하 단체가 그런 짓을 한 이유는 그저 외지인의 재물이 있길래 얼싸 좋다 하면서 먹어버린 것이었지만, 석마갈 앞에 모인 늙은이들은 그저 기뻐했다.

“과연 해웅 합하!”

“실로 탁월한 지도력이십니다!”

“아주 그냥… 우리 해웅 합하… 오지는 지도력으로다가… 이 성지를 들었다~ 놨다~ 하시면서 그냥… 선정을 베푸시는 모습이… 이 늙은이 보기엔 아주 좋아가지고 그냥… 눈물이 다 나네…. 더러운 월국 새끼들… 나쁜 놈들… 니들이 배워야 할… 참된 지도자의 모습이다 이것이~!”

그렇게 고개를 끄덕인 늙은이들은 다시금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여간 대륙놈들도 월국놈들도 그렇게 천인공노할 잡놈들입니다. 먼 옛날, 대륙을 뒤덮은 큰 비는 분명 놈들을 벌하기 위해 내렸을 것입니다. 그런 흉한 것들이 세상천지 어디 있습니까?”

“옳소!”

“천한 놈들!”

“아주 그냥… 추잡한 문어 불가사리 말미잘 같은 놈들이 그냥… 바다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심판의 날이 오면, 두고 봐라, 뒤질 놈들… 뭍과 물이 오지게 뒤바뀔 거여! 월국 땅개놈들, 카아아악, 퉤…!”

“하니, 석마갈 해웅 합하께서는 합하의 어깨에 나투아 부흥의 업이 걸쳐져 있음을 한 시라도 잊어선 아니되실 것입니다.”

“옳으신 말씀!”

“상주인 나 또한 그 말에 동의하오, 1함호!”

“역시~! 우리, 1함호가 아주 그냥… 오지게 논리적으로다가…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염병, 기품이 철철, 넘쳐흐르고~! 크으, 들리느냐, 월국 이 개호로잡것들아~! 월월 개소리 그만들 짖구… 목 단디 씻구… 기다려라… 정의의 심판이, 다가온다~!!”

소란을 떠는 늙은이들을 석마갈 해웅 합하께서는 가만히 쳐다보았다.

“월국에 대한 뜨겁고도 마땅한 성토 고마웠소. 이 석마갈 보시기에, 1함호께서 격문을 쓰는 솜씨가 나날이 발전하는 것 같구료.”

함호는 타고난 얼굴로 좌중을 둘러보고는, 늙은이들의 얼굴에 미소가 떠있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 현안으로 넘어갔다.

“1함호께서 그렇게 과거를 비추어 보여주신 것은 앞으로 나아가야 할 우리의 미래를 염려했기 때문일 거요. 그리고 미래를 염려하는데 있어 월국의 후작에 대해 논하지 않는 것은 눈 먼 물고기와 다를 바 없겠지. 이 석마갈도, 여기 계신 우국지사 여러분들도 현명하므로 그런 우를 범할 리는 없을 것이오. 하니 새로 작위를 이었다는 월국 후작에 대해 말해봅시다.”

무게감 있는 외모와 낮고 또렷한 목소리, 늙은이들이 그 동안 다듬어준 언변 덕에 석마갈은 정말 거물처럼 보였다.

그 거물에게 노친네들이 떠들었다.

“거 말할 것도 없습니다! 당장에 쳐들어가야지요!”

“감옥에 갇힌 형제들을 구출해야 합니다, 해웅 합하!”

“그리구, 성을 죄다~ 피범벅으로다가 만들어버리구…! 아주 그냥, 깽판 난리굿을 오지게 쳐버려서~! 산호 옥좌에 떡, 하니, 우리 석마갈 해웅 합하께서 앉으시면은 그냥… 나투아 부흥… 게 섯거라…! 우리가 간다아~!!”

석마갈은 서글픈 심정으로 기다렸다. 한바탕 그렇게 수다가 흘러가자 늙은이들은 제풀에 지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늘 그러했듯 늙은이들 중에 그래도 상식을 갖춘 이가 입을 열었다.

“실로 교활한 마녀입니다.”

석마갈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하여 그런지 말해보시오.”

“저 월국 놈들은 이 제함도를 말로만 정복했지, 권리는 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정복자로서 의무를 다할 만한 깜냥이 못 되니 권리를 누릴 수 있을 리 없지요. 그런데 이번 후작이 자리에 오르고서는 차근차근 그 의무를 이행하고 있단 말입니다.”

말하다가 말고 노친네는 이마의 땀을 훔쳤다. 나투아가 망하기 전만 해도 그래도 앞날을 촉망 받던 학자는 쓸쓸하게 말을 이었다.

“보통은 이렇게 일을 한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반향을 받지는 못했을 겁니다. 너무 오래 팽개쳐져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 마녀는 영리하게도 아랫것들에게 동의나 지지를 호소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묵묵히 해야 할 일들을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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