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달의 여신 vs 심해에 가라앉은 아버지 (2)
내가 꺼낸 이야기의 요체는 간단하면서 명료했다.
1 제함도 후작령은 상현 공작가 측과 가까이 지내고자 합니다.
2 그러니까 상현 너희가 내 편 좀 들어주라.
3 유리아 니가 다리 역할 해.
제함도가 가치 있는 거라고는 귤 밖에 없던 존망섬 그대로였다면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제안이었을 거다. 하지만 방금 나는 그 제함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 사실은 유리아가 말하려다가 만 것처럼 어떤 경로로든 왕도에 전달될 것이다.
세력을 불리고 싶은 상현 공작가로서도, 나름의 야심을 가진 유리아 개인으로서도 욕심이 날 법한 제안.
그렇지만 유리아는 낮게 신음했다.
“어렵습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 유리아는 어려운 이유를 설명했다.
“먼저 그렇게 되면 제함도에 있는 군세 모두가, 그러니까 주둔군과 후작군 모두 상현 공작가의 깃발 아래 서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왕실로서는 달가워하기 어렵겠지요.”
“흐응, 왕실이 달가워하기 어렵다니. 우리 왕궁기사 나리 솔직하시다아.”
“무, 물론 저도 왕궁기사의 한 사람으로서 달가워하기 어렵고 말이죠.”
곧장 덧붙이는 유리아에게 나는 웃어주었다.
“정확히 말하면 군세 모두는 아니지. 내가 말한 사업 있잖아. 적선 나포 허가장을 가진 이들이 따개비처럼 잔뜩 돋아날 거야.”
“뭡니까 그거…. 상상해보니 좀 징그럽군요….”
“인정….”
“그렇다고 해도 결국 그들 모두가 상현의 비호를 받게 되는 셈 아닙니까? 상현의 군세가 더 커진다는 의미일 텐데요.”
“그 부분이 달라. 이 사업에는 왕실을 더 크게 끼워줄 생각이거든. 그러면 상현에 대해 적당한 견제도 될 테고, 왕실도 크게 이득을 볼 거야.”
실제로 400년대 초 왕실이 주도한 사업이기도 했다.
‘사략선 사업.’
이에 대해 설명하자면 300년대 벌어진 흑열도 통일과 그로 인해 벌어진 대대적 동란, 그에 대한 전후 복구 및 해상 전력 육성의 필요성 따위를 구구절절하게 이야기해야 할 텐데, 지금은 이 말만 하면 될 것이다.
“나투아 정복은 절반에 불과했잖아?”
“각하….”
“땅만 먹었을 뿐이지 바다는 먹지 못했어. 당장 이 섬도 제대로 먹지 못했고…. 폐하께서 이 섬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그래서 아냐?”
임무 창의 점수표.
[ *관심 영지 +20점 (이 땅은 폐하께서 다대한 관심을 기울이는 영지입니다.) ]
해당 항목을 떠올리면서 내가 꺼낸 말에, 유리아는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합법 해적들은 완전한 정복에 도움이 될 거야. 왕실은 그 과정에 이득을 볼 테고, 해로 확보에 애를 먹고 있는 왕국 또한 물론이겠지.”
“…그 연관성을 직관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비은공주 전하께서 선두에 서신다?”
“응. 더불어 그건 공주 전하께 적당한 흠이 되겠지. 세자 전하의 입지를 공고하게 만들어 불모한 권력 투쟁이 더는 벌어지지 않게끔 될 거야. 해적 노릇을 하신 공주 전하를 추대하려 드는 미친놈들이 있을 리 없잖아?”
말하면서 내가 좀 웃어 보이니, 유리아는 한 차례 몸서리를 쳤다.
“하지만 해적 공주라니, 재미있고 기이하며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런 이야기에 사람들은 쉬이 홀리게 마련일 텐데요.”
“그래서? 장차 그렇게 유명해진 공주 전하께서 역란을 일으킨다면 그 이야기에 심취한 민초들이 호응해줄 거다? 그런 말을 진심으로 입에 담은 건 아니겠지, 왕궁기사?”
유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손끝을 들여다보았다. 눈 아래 드리워진 눈 그늘과는 정 반대로 반달이 거의 없는 손톱.
“이야기 거리는 이야기 거리일 뿐이야. 저들의 열광 또한 연회 속의 열광에 불과해. 올바른 명분과 먹고 사는 문제… 그 두 가지는 세자 전하께서 갖고 계신 것이고, 잘 해결해주실 일이지. 그러니 왕실에서는 마음을 놓아도 좋을 거야. 공주 전하께서 흑구들을 모조리 일통하여 대선단을 거느리게 된다 한들 왕국을 뒤집어엎지는 못한다는 거니까.”
“확신하십니까?”
“응. 내 자문사 거쳐서 적검후께 직통 편지 넣기도 할 거고.”
왕후로서는 불안의 싹이 알아서 수그러든다는데 수긍할 것이고, 어머니로서는 딸이 좀 더 신나게 살 수 있게 된다는데 만족할 것이다.
“달리 궁금한 거 있어?”
유리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응, 그럼 이제 나가봐. 상현 공작가랑 관련된 실무 조정은 천천히 하자고.”
하지만 유리아는 나가는 대신 내 눈치를 보았다. 그 모습에 시아람이 조용히 말했다.
“각하께서 나가라 말씀하셨소만.”
유리아는 고개를 젓고 입을 열었다.
“그… 각하. 이건 질문이 아니라 그냥 여담입니다만….”
시아람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딜 감히 후작 각하 앞에서 여담 따윌 입에 담으려 하느냐 하는 내색이 훤히 드러나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런 시아람을 제지하고서 말했다.
“여담 좋지. 편하게 해봐.”
유리아는 머뭇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폐하께서 이 섬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가 해로 확보 때문만은 아닙니다.”
흠.
“그러면?”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폐하께서는 손득보다 더… 감정을 가까이 하시는 분이십니다.”
자기가 거느린 왕궁기사에게 이런 평가를 받다니 우리 현성이 아직 멀었다. 나는 한숨지었다.
“이 섬이 관심 영지인 게 감정적인 조치라고?”
유리아는 거듭 고개를 끄덕였다.
“이 영지가 각하의 아버님께 주어진 것은, 각하의 작은 아버님의 공훈을 치하하는 의미였습니다. 여러 정치적 사정이 얽혀 있습니다만, 아무튼 계기가 된 것은 그래서였지요.”
시현군.
“그건 알아. 그런데?”
“…폐하께서는 각하의 작은 아버님을 무척 아끼셨습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본디 그 분께 가야 했을 영지에 관심을 기울이실 만큼.”
음.
“그래.”
나는 시선을 흘겼다.
“그렇구나.”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기에 나는 그저 그렇게 입을 다물었다.
◈ ◈ ◈
흐름을 타기까지가 어렵지, 타고 난 다음에는 순식간이다.
큰 조정들이 끝나자 그 뒤의 일은 일사천리였다. 내가 지시했다.
“자문사. 날뛰던 새끼들 따로 적어놨지? 그 새끼들 중심으로 병단 하나 편성해. 흑구 토벌로 얻은 배에 배치하고.”
“이미 했어, 각하.”
“좋았어! 시아람 경, 그대에게 적선 나포 허가증을 발부한다. 편성된 병단을 이끌면서 후작가의 이득과 근해의 안정에 이바지하도록.”
“저는 각하의 곁을 지키고 싶습니다만….”
시아람이 조용히 말했지만 이쯤이야 이미 예상한 바였다. 나는 말했다.
“걱정 마, 시아람 경. 그대는 여전히 내가 서임해준 기사야.”
“각하께 서임 받은 기사….”
“응. 거기에 후작가 직속의 사략선장을 겸하게 되는 거고.
“후작가 직속….”
“내가 임명한 첫 번째 사략선장이지.”
“각하께서 첫 번째로 임명해주신….”
“마지막으로, 이건 내가 내리는 직접적인 명령이야.”
“명을 받들겠나이다.”
시아람은 조용히 고개를 수그렸다.
저승에서 지켜보던 아리야가 신음을 흘렸다.
[최초의 성녀: 이름이 ‘ㅅ’자로 시작되는 사람들한텐 뭔가 강아지 기질이 있는 걸까요? 시우도 그렇고, 사호도 그렇고….]
‘글쎄 말이오. 편해지니 좋긴 하오만.’
[개천의 시왕: 인정 욕구에 굶주린 이들은 인정만으로도 부릴 수 있으니 말이지. 하지만 길잡이여, 조심히 다루도록. 그런 이들은 또한 쉬이 질투하게 마련이다. 시우 역시 질투가 심했다.]
‘알고 있습니다. 시아람은 저보다 강하기도 하고, 가족사가 하나 있기도 하니까 어차피 조심히 다루어야 합니다.’
[첫 번째 은월: 어떤 가족사인데?]
‘그건 좀 나중에. 나도 천사님 과거시로 알아낸 거라서. 천천히 기다려줘.’
[첫 번째 은월: 궁금한데….]
‘궁금해 하거라.’
다음 사안. 원기윤 제독에게 기름칠.
“제독님, 안녕하세요! 차암. 무기들 지원해주신 덕분에 승전했어요. 이건 얼마 안 되지만 제독님께 감사를 표하고자….”
“으허허허허! 아니요아니요. 그게 어디 이 원기윤이 덕이겠습니까. 후작 각하께서 실력으로 승리하신 거지요!”
“정말, 제독님은 다정하시다니깐요….”
“자! 마시지요! 오늘은 제가 좋은 술을 올리겠습니다, 후작 각하!”
그렇게 웃는 낯으로 술을 마신 다음에는 후작성으로 돌아와 지시했다.
“자문사. 포로 정리. 자기들 본거지와 그 인근 물길에 대한 정보를 불게 해.”
“회유할 거야?”
“한 차례만. 가장 밑바닥 애들 중심으로. 중간 간부 이상부터는 받지 말고.”
“하긴 그쯤 되면 본거지에 두고 온 게 많겠지. 알았어, 각하.”
“응. 회유에 응한 애들은 시아람이 밑으로 넣고, 나머지는 고문으로 싹 털어내고, 그렇게 얻어낼 것 얻어낸 다음에는….”
“제함항 광장에서 처형할게. 한 번에 다섯 명씩 조져도 부족하지 않겠다.”
“역시 내 자문사!”
이 시대, 처형식은 볼거리를 제공하는 축제 중 하나다.
처형 대상이 섬 주민들을 괴롭혀온 흑구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제함도의 영민들은 날마다 열리는 축제에 행복해했다.
[ *연회다! +5점 (공통된 적의 처단! 섬 내의 다양한 불화가 사그라집니다!) ]
그 자그마한 축제가 끝나고 나면 나는 실제로도 연회를 열어주었다. 예산이야 넉넉했으니까.
“공주 전하께서 베푸신 연회로 해두겠습니다. 분위기를 주도해주십시오.”
“엣헴, 맡겨주세요! 잘 해낼게요!”
비은공주는 실제로도 잘 해내었다. 앞서 증명했던 것처럼 그녀에겐 무대 재능이 있었다.
“그건 그러니까 노을이 지던 순간이었는데 말이죠….”
공주 전하께서 썰을 풀 때마다 좌중은 열광했다.
“역시 공주 전하!”
“작은 달빛께서 이 섬을 가호하신다!”
공주 전하께서 푸실 썰이 부족할 일은 없었다. 내가 알실라 흑구 선단을 격파한 것이 널리 퍼지기까진 아직 며칠이 남아 있었다.
며칠 동안 똑같은 생각을 한 군벌형 흑구가 이 섬에 얼쩡거릴 거라는 뜻이다. 마치 제철을 맞이한 물고기들처럼 말이다.
“아이고, 후작 나리! 흑구 놈들이….”
“좋았어! 조지러 가자!”
그렇게 흑구들을 박살내고 나면 영지민들의 지지, 공주 전하께서 푸실 썰, 처형식에 쓸 포로, 장차 사략 사업에 쓸 배, 집행할 수 있는 예산 등이 한 번에 들어왔다. 아낄 필요가 없었다.
[간신 조련사: 일종의 수확제 기간이군요.]
‘그렇습니다. 영영 이럴 수야 없겠지만 당분간 신나는 일 만들기에는 부족하지 않죠.’
제함도 전체가 신이 나 들썩거렸다.
“오늘도 처형이 열린다더만. 이번에는 불에 끄슬려 죽인대야.”
“재미가 넘쳐흐르겠네 그려!”
그렇게 한바탕 들썩이고 나면 응어리가 풀리는 법이다. 이 섬을 잠식하고 있던 불화 상당수는 결국 심정적인 응어리였던지라, 섬 내 갈등을 완화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물론 달의 여신 교단 홍보에도 말이다.
“좋아. 밑밥은 충분히 깔렸으니 신전 지원 확대해. 다소 노골적으로.”
“응, 각하. ‘인종 문제와 세대 문제를 일으키는 계층’이 ‘종교 문제를 일으키는 계층’과 더 뚜렷하게 나뉘도록 말이지?”
“바로 그거야.”
오래지 않아 섬 곳곳에서는 이런 이야기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이 섬이 이렇게 태평한 적이 있었당가?”
“거 나 젊을 적에, 해웅께서 다스리실 적에도 이만큼은 평안했던 것 같긴 한데… 다시 평안해지니 좋긴 좋네.”
“후작 각하는 진짜 바다가 올려주신 분이시구만.”
“아니 거 노랑내 나는 소리를…. 바다가 올려주신 분이 아니라 달이 내려주신 분이시지. 거 공주 전하께서 말씀하시잖어. 태초에 달의 여신이 계셨는디….”
“그건 아니지! 이번 후작 각하께서 좋은 분이라는 거랑 공주 전하께서 예쁘시다는 거야 인정을 하지만은, 아무리 그래도 달에 무슨 신이 있어!”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다.
[ *흑구 토벌 5승! +15점 (현재 5연승을 기록 중입니다….) ]
[ *우오오옷! 공주 전하! +15점 (은월의 피를 이어받으신 공주 전하께서 이 섬을 가호하고 계신다구…! 굉장하지 않냐구 이거…!) ]
[ *종교 분쟁 -30점 (나투아 토착 종교와 왕국 달의 여신 교단 사이에 벌어지는 영적 전쟁이 격화되고 있습니다….) ]
1승이 5승으로 진화했고, 종교 분쟁이 다른 모든 불화를 흡수하여 존재감을 키웠다.
그리고 나투아 교단의 잔당들이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