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공주 전하 사용 설명서 (3)
흑구(黑寇)란 반도 주변 바다에서 날뛰는 해적들을 말한다. 흑열도의 흑구들이 유명하지만 바다와 인접해 있기만 하면 어디든 흑구들의 출하지가 될 수 있다.
이유는 크게 네 가지가 있다. 이 이유에 따라 흑구들의 형태 또한 결정이 된다.
[첫 번째 은월: 먹고 살기 고단해진 애들이 흑구된다 그러던데. 그러니까, 하누리가.]
‘첫 번째 이유지.’
1 생계형 흑구.
야리소연의 말처럼 궁지에 몰린 민초들이 흑구가 된다.
‘구체적인 이유는 뭐든지 좋아.’
기근이 들어서일 수도 있고, 권력자들의 착취가 심해서일 수도 있다. 나 같은 녀석조차 눈물이 줄줄 흐르지 않고는 못 배기는 구구절절한 사연일 수도 있다.
‘들에 야적이 생기고 산에 산적이 생기는 것과 같은 이유로 바다에는 해적 떼가 생겨난다 이거지.’
하지만 그것만이 바다가 흑구로 넘쳐나는 이유는 아니다.
[최초의 성녀: 첫 시작은 그렇게 내몰린 피해자들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도적질이 몇 차례 성공하면 이야기가 달라지지요.]
‘두 번째 이유요.’
2 산업형 흑구.
아리야의 말처럼 민초는 선량하지 않다.
‘민초라는 이름이 상징하는 바가 있지. 잡초처럼 질기고 성가시거든.’
그들은 무력한 피해자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이 받은 학대를 기억한다. 자신의 피붙이가 견뎌야 했던 모욕을 갚아줄 기회를 노린다. 그리하여 그런 기회가 왔을 때, 그들은 기어이 그렇게 하고야 만다.
민초들은 복수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자신을 탄압한 자들, 권력자들이 악랄한 만큼 악랄해질 수 있소.’
한 차례 해적질을 성공시킨 흑구들은 주린 배를 달래는데 성공한다. 그들은 선량하지 않으므로, 그 성공이 유효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농사짓는 고단함이나 권력자들에게 구걸하는 번잡함 없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 수단이 성공하기까지 했다. 두 번 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세 번은? 왜 네 번은 안 될까?
‘[자, 이제 먹고 살 만하군요. 그만 해산하고 다시는 보지 맙시다.] 라고 말하는 산적단 두목을 상상할 수 있소? 희곡가 기질이 있다면 상상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 기질이 있다면 [그래서 산적단은 해산하고 모두 생계로 돌아갔답니다]보다는 [아뇨, 너만 보지 맙시다] 하면서 칼빵을 놓는 산적단 부두목의 모습이 더 쉬이 떠오를 거요.’
그런 산의 이치가 바다에서도 통한다.
연달아 해적질을 성공시킨 흑구들은 재화를 축적한다. 그들은 바보가 아니므로, 그 재화를 유효하게 사용한다. 단순한 호구지책을 넘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강화하기 위해 사용한다. 그 결과 그들은 견고해지며 강해진다. 해적질은 당당한 지역 산업 중 한 가지가 된다.
하지만 그것 역시 바다가 흑구로 넘쳐나는 이유는 아니다.
[개천의 시왕: 산업은 권력을 낳게 마련이지. 그리고 권력이란 ‘양해 받는 힘’으로 규정할 수 있다.]
‘세 번째 이유지요.’
3 군벌형 흑구.
비류아의 말처럼, 이권화된 무력집단은 다양한 곳으로부터 ‘양해’를 받을 수 있다.
권력자들이 권력자로 남으려면 바보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 또는 바보짓을 하더라도 상쇄할 수 있을 만큼 축적한 권력이 많아야 한다. 따라서 당대의 권력자들은 바보가 아니거나, 바보여도 좋을 만큼 선대들이 쌓은 권력이 많기에 그 자리에 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무력 집단을 다른 무력 집단과 부딪혀 상하게 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면 해야겠지요.’
흑구들을 토벌하는 것이 더 큰 이익이라는 결론을 내린 자가 있을 수 있다. 인근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을 확인하길 바라는 자가 있을 수 있다. 자신의 감정을 상하게 했다는 이유로 토벌을 명령하는 자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유가 있다면 한다는 소리는, 이유가 없다면 안 한다는 거니까요.’
이익을 좇는 자는 흑구들과 손을 잡음으로써 더 큰 이익이 생겨난다면 협력할 것이다. 지배권을 원하는 자는 흑구들이 예속을 청하면 받아들일 것이다. 감정을 신경 쓰는 자는 자신에게 아첨하는 흑구들을 기꺼워할 것이다.
그렇게 세력을 이룬 흑구 집단과 인근 권력자들의 성향에 따라, 흑구들은 그 존재를 ‘양해’받는 위치에 오른다.
‘새로운 권력자의 탄생.’
양해는 공짜가 아니다. 흑구들 또한 권력자들을 양해해 주어야 할 것이다.
양해와 양해가 얽힌 결과, 그들은 자신을 양해해 주는 권력자들의 적을 공격하거나, 다른 흑구들과 싸우면서 자신의 입지를 키우게 된다. 개중에는 아예 전문적인 투자를 받는 흑구들도 생겨난다. 아름다운 세계.
‘실제로도 유명했던 흑구들 상당수가 흑열도의 명가들로부터 지원받는 자들이었지요. 아예 대륙 왕가가 각 잡고 지원하는 자들도 있었고. 왕국의 해안가 인근 영주들도 [흑구 때문에 골치라니까]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개인 사병처럼 부리는 흑구들이 따로 있었을 정도입니다. 일종의 용병화가 이루어지는 건데….’
그렇다. 까놓고 말해 비류아와 그 선조들이 월족을 끌고 다니며 했던 짓거리다.
‘바다를 터로 삼은 야만인 부족인 거죠.’
하지만 그것 또한 바다가 흑구로 넘쳐나는 이유는 아니다.
[간신 조련사: 그 부족이 커져서 이윽고 흑구로 이루어진 국가가 생겨나기도 한다 이겁니까?]
‘네 번째 이유입니다.’
4 국가형 흑구.
천사님의 말처럼 충분히 쌓인 성공은 일상이 된다.
배를 띄워 물고기를 잡는 것처럼 틈이 나면 해적질을 한다.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숨 쉬는 것처럼 그 짓거리를 하는 조직은 자연히 전문화된다. 그 과정에서 무수한 달인, 간혹 초인이 만들어진다.
그리하여 초인을 수장으로 모시는 순간 조직은 특이점을 맞이하게 된다.
‘멀리는 나라를 망하게 만들었던 야만 족장이 있지요.’
카한 개새끼.
‘가까이는 비류아가 올렸던 개천식이 그 예입니다.’
신화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요소가 있었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마적 떼가 특이점을 맞이해 세워진 곳이 작금의 왕국이다. 그리고 산적 떼가 특이점을 맞이해 세워진 곳이 알실라일 것이다.
‘해적 떼가 특이점을 맞이해 세워진 해상왕국도 있을 수밖에 없지요.’
당장 바다 건너의 흑열도가 있다. 왕국이 정복한 나투아 역시 그렇게 특이점을 맞이한 국가 중 하나일 터였다.
‘뭐 [우리는 그저 선량한 상업 민족이고, 흑구들의 준동에 맞서다 보니 그에 따른 군사력이 생겨나게 됐을 뿐]이라고 말하겠지만요. 이 시대엔 아직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하는 문제죠. 농업국가라고 전쟁 각 나오는 걸 마다하겠습니까?’
무력을 유지하는 데에는 비용이 든다. 기회가 오면 빼앗게 되는 것이다.
‘이전 임무 때 나시파 변경백과 이야기한 것처럼, [기회가 왔을 때 약탈하는 것보다 장기적인 신뢰를 쌓는 것이 장기적인 이득을 보장한다]는 게 일대의 상식이 되기까지는 그렇습니다.’
사실 상식이 되고 난 뒤로도 그렇게 흐르기 십상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어느 시대의 어떤 이들도 도둑과 강도를 뿌리 뽑을 수 없었다. 3 패치 이후의 저승처럼 무제한 무노동으로 욕망을 충족시켜주면 모를까, 자원이 한정된 이승에서 그것은 단순히 불가능한 일이다.
둘째, 치안이 무너지면 법이 기능하지 않는다. 법 없는 곳에서 사람으로 남으려면 개인의 인품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데, 선량한 사람은 악랄한 자들에게 쉽게 사냥 당한다.
‘보는 눈이 없는 바다라면 말할 것도 없죠.’
그 결과물이 작금의 위대한 항로다.
생계형, 산업형, 군벌형, 국가형.
이 네 가지가 흑구의 모든 진화 형태이자, 이 바다가 놈들로 넘쳐나는 모든 이유들이다.
◈ ◈ ◈
“흐음. 강좌는 잘 들은 것이에요, 후작.”
바다 위, 노을을 뱃머리로 가르면서 나아가는 가운데 비은공주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맞이하러 가는 흑구들은 어떤 흑구들인가요?”
“일단 생계형은 아닙니다.”
제함도는 섬이다. 다른 곳에서 생계형 흑구들이 오기엔 너무 멀다. 따라서 제함도를 치는 생계형 흑구들은 제함도 내에서 자생하는 이들이 주축을 이룰 수밖에 없겠으나….
“왕국군을 임대 받고 나서 제가 주력한 사업 중 하나가 바로 제함도 내 배들의 실태를 조사하는 거였습니다.”
“아하, 과연.”
그렇게 고깃배부터 급수 좀 되는 배까지 제함도 내의 함선들 목록을 모조리 갱신했다. 무릇 드러난 것들은 운신에 제약을 받는 법. 덤으로 넉넉해진 예산을 통해 구휼도 풀었다. 그렇게 외적으로 가두고 내적으로 거두어 생계형이 돋아나지 못하게 밟았다.
“음. 그치만 그것, 재산 조사하는 거랑 똑같은 것이지요? 싫어하는 사람들 많았을 텐데. 호족이라거나 뭐 없었나요?”
“보시다시피 개판 난 섬이라서요. 호족이라 할 만한 것들이 영지기사들인데, 제가 다 먹어버렸죠.”
“그럼 산업형도 아니겠네요.”
“예, 아닐 겁니다.”
산업형은 호족이 주축을 이루게 된다. 영지기사들 중 상당수가 이 산업형 흑구들을 굴려가며 재미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놈들을 집어삼켰으니, 그 산업형 흑구들은 고스란히 제함도 후작군으로 재편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상이 최근 제함도가 조용했던 이유일 겁니다.”
빙의 당시만 해도 하루에만 몇 번이고 흑구 준동이 벌어졌던 걸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생계형을 밟고 산업형을 삼킨 뒤로 제함도는 상대적으로 고요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이대로 쭉 고요할 수도 있었을 테지요.”
내가 뱉은 말을, 비은공주가 생각에 잠긴 채 받았다.
“1 치안 유지능력을 잃어버리거나. 2 구휼을 더 풀지 못하게 되거나.”
요컨대, 생계형을 더 밟지 못하게 된다면.
“3 영지기사들에 대한 통제를 잃어버리거나.”
요컨대, 산업형을 다시 토해내게 된다면.
“4 반도나 흑열도에서 각 잡고 출항한 흑구들이 오거나.”
요컨대, 군벌형 이상이 원정을 오게 된다면 고요는 깨질 것이다.
그리고 지금, 고요가 깨졌다.
1번부터 3번까지는 오늘 아침만 해도 지켜지고 있었던 바, 4번이 원인이라는 걸 짐작하기란 쉬운 일이었다.
“어라. 그럼 좀 위험한 상황인 것 아닌가요? 각 잡고 원정 왔다는 소리인데….”
“위험하겠지요.”
나는 인정하고, 또한 정정했다.
“잡지 못한다면 말입니다.”
그러는 동안 우리가 탄 배는 신고가 들어온 지역 가까이 접근했다. 황혼에 젖은 바다 위에 자리 잡은 흑구들이 보였다.
내내 조용하던 구호가 말했다.
“실라구들이야.”
반도 남동부, 알실라 측에서 출항해 왔을 흑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여덟 척의 알실라식 첨저선이 번들거리는 빛을 발했다.
◈ ◈ ◈
‘야리소연 시야 가동!’
반경 10리 내의 지형과 적 배치를 모조리 머릿속에 박아 넣고, 나는 곧장 전투를 개시했다.
“왕국군 퇴로 끊어! 소조선 이하 거기 합류! 나머지 배 접근!”
구호가 그 명령을 나팔과 북으로 바꾸어 전했다. 왕국군으로부터 빌려온 전함들이 제 나름의 진형을 갖추어 퍼져 나가는 가운데, 후작군 전함들 중 소조선 이하도 그 포위망에 합류하여 달음박질쳤다.
자연히 중형선 여섯 척이 남았다.
“개 호, 똥 호는 좀 더 빨리! 각각 하나씩 우측 두 개 맡아! 제 정신 호, 꼰대 호는 좌측 두 개! 촉새 호는 중간에서 천천히! 맡아 지원할 것!”
“배 이름들이 왜….”
각 중형선의 선장을 맡고 있는 영지기사들이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게 귀에 선했지만 그거야 내가 알 바 아니다.
“후작님 호!”
나는 내가 탄 배에 지시했다.
“방패수 방패 들어! 나머지 대궁 잡아! 불화살은 사전 지시대로 조 당 한 명만! 시아람 경은 유리아 경이랑 같이 공주 전하 보호! 이후 눈치 봐서 백병전에 낄 것!”
“예, 각하.”
시아람 경은 조용히 고개를 수그렸다. 반면 왕궁기사 유리아는 출항 직후부터 그랬듯 굴과 귤을 같이 씹은 표정으로 말했다.
“후작 각하. 이 일은 반드시 왕도에 알릴 것입니다. 공주 전하를 보호해야 하실 입장이시면서 위험한 전투에 공주 전하를 데려오시다니, 저 유리아는 왕궁기사로서 이 같은 횡포를 도저히 좌시할 수가….”
“다들 당겨!”
빠아아아아! 활 당기는 소리에 유리아가 귀를 틀어막았다. 빠아아아! 내가 끌고 온 모든 배로부터, 빠아아아! 심지어 갑판 위 정원이 8명에 불과한 소조선에서도 어김없이 그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시대 최강의 원거리 병기, 나투아 대궁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