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공주 전하 사용 설명서 (2)
삶은 심심하다. 울적하다.
심심함을 견디고 울적함을 버티고자 사람들은 도피한다. 도피의 가장 오래된 방법 중에 ‘식사’가 있다. 배고프지 않음에도 거듭되는 식사를 군것질이라 하고, 그 군것질이 이어지면 먹부림이 된다.
비은공주도 심심했다. 울적했다. 공주 전하 아니랄까봐 먹을 것도 많았다.
당연한 귀결로, 비은공주는 한껏 먹부림을 부리는 중이었다.
“귤이 맛있네요.”
솜씨 좋게 귤껍질을 벗겨 입에 넣은 비은공주는 그 다음엔 숟가락을 들어 굴을 파먹었다.
“굴도 맛지고요.”
귤과 굴을 번갈아 까먹는 공주 전하를 쳐다보던 왕궁기사가 헛기침을 했다.
“공주 전하. 귤의 과육은 혀에 달지만 그 껍질에서는 눈을 아리게 하는 즙이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굴의 속살은 부드러우나 그 껍데기는 날카로워 손이 다치기 십상입니다. 둘 모두 껍질을 까는 수고를 들이지 않고 먹을 수는 없으니, 공주 전하의 눈이 아리고 손이 다칠까 염려됩니다.”
해석하자면 ‘품위가 없지 않나요?’하고 책하고 있는 것이다.
뼈대 깊은 명가 출신으로 풍림위 4조 조장을 맡은 인물다운 돌려까기에, 비은공주 역시 돌려까기로 대답했다.
“눈이 아리고 손이 다친들 무슨 상관일까요? 본인은 섬 안에 있는데.”
- 아무도 안 보는데 왜 체면을 찾니?
왕궁기사는 한 차례 더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전하께서는 섬 안에 있지요. 그리고 성 안에 있습니다. 창밖으로 고개만 내밀어도 달이 차고 기우는 이치에 따라 저 광활한 바다가 일렁이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니 저는 우려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공주 전하께서는 달무리를 짊어지고 계시는 몸인 바, 그 몸에 상처가 나면 바다가 고요할 수 없는 이치를 헤아려주십시오.”
- 님 은월의 피잖아. 왕실 체면을 좀 생각하세요.
“말해주신 건 참으로 우려할 만한 일이네요. 하지만 달무리는 오라버님께서 짊어지고 계시지요. 여기 있는 본인으로서는 다만 그 안태를 빌 뿐이에요.”
- 나 유배 온 몸이거든?
왕궁기사는 세 번째 헛기침을 했다. 과연 이것은 두고 볼 수 없는 말이었다.
“오라버님이 아니라 세자 전하이십니다. 공주 전하. 그리고 이 섬에 오셨다고 해도 공주 전하께서는 홀몸이 아니십니다.”
비은공주는 수저를 땅!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과연 이것은 좌시하지 못할 말이었다.
“아이 썅.”
쌍소리를 내뱉는 공주 전하의 모습에 왕궁기사는 네 번째 헛기침을 해야 할까 고민했다. 불필요한 고민이었다. 비은공주가 쏘아붙였다.
“유리아?”
“…예, 공주 전하.”
“댁 임무가 뭔지 지껄여보세요.”
유리아는 난처한 얼굴로 공주 전하를 쳐다보았다. 비은공주는 명령을 철회하지 않았고, 그래서 유리아는 일단 무난한 것부터 대답했다.
“물론 공주 전하의 안위를 보우하는 것입니다.”
은월의 피를 이은 비은공주를 사수할 것.
왕궁기사로서 유리아가 완수해야 할 과업이었다.
“그리고요?”
“…공주 전하께 혹시 엉뚱한 생각을 가진 자가 다가오지 못하도록 주변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비은공주와 불온한 세력이 접촉하지 못하도록 방해할 것.
풍림위 4조장으로서 유리아가 수행해야 할 업무였다.
“그리고요?”
“…공주 전하의 미모에 홀린 자가 혹여라도 은월의 위엄에 누를 끼치지 않게끔 방지하는 것입니다.”
비은공주에게 정인(情人)이 생기는 일이 없도록 할 것.
상현 공작가의 지원을 받는 명가의 자손으로서 유리아가 부여받은 임무였다.
“그런데도 홀몸이 아니니 뭐니 하는 그 개소리가 나오는 것이에요? 유리아?”
하현 공작가에 의해 추대되었다가 오라버니에게 패배해서 섬으로 떠내려 온 비은공주가 눈을 부라렸다. 유리아는 즉각 눈을 내리깔았다.
“죄송합니다.”
정인이 생기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은 적나라하게 말하면 비은공주가 회임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뜻이다. 공주를 홀몸인 상태 그대로 유지하라는 뜻이었고, 그럼으로써 또 다른 은월의 피가 태어날 가능성이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굳이 여성인 유리아가 호위로 붙어 온 이유가 있다고 할 것이다. 호위기사와 왕녀 사이에 무슨 옛날 이야기마냥 정분이 벌어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정분이야 어쨌건 그 결과물로 아이가 태어나는 일을 용납할 수가 없었으리라. 그래서 여성이 후작으로 있는 섬에 여성이 호위로 붙어간다는 이치였다.
“진짜, 본인이 무슨 들개도 아니고.”
비은공주가 투덜거렸다.
정치적 사정이란 인간을 이렇게 가축처럼 취급하곤 한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면 그 목줄의 죄임은 해괴하게 강해진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유리아는 비은공주를 동정했다. 그녀는 네 번째 헛기침을 대신 시선을 흘겼다.
“귤과 굴을 함께 드시니 맛있습니까?”
비은공주는 귤 한 조각을 와작와작 씹었다. 그리고 다시 수저를 들어 굴을 까먹었다.
“귤은 달지만 시지요. 굴은 고소하지만 비리고요. 둘이 합쳐지면 어떨게 될까요?”
“달고 고소해집니까?”
“시고 비려져요.”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 왜….”
“1 본인의 인생 같은 맛이라서요. 2 이것밖에 할 짓이 없어서요.”
둘 다 대답이어도, 둘 중 하나를 고르라는 대답이어도 반응하기 곤란했다. 유리아는 어물쩡하니 선 채 머리를 매만질 수밖에 없었다.
굴을 꿀꺽 삼킨 비은공주가 그런 유리아에게 눈총을 보냈다.
“3 놀아주겠다고 하면 되는 것이에요.”
“어, 어떻게 놀아드립니까?”
“글쎄요. 구슬치기? 우리 진주 많잖아요.”
얍 소리와 함께 진주 주머니를 들어 올리는 비은공주의 모습에 유리아가 질겁했다. 다른 수행원들처럼 유리아 또한 이 섬에 오면서 가져왔던 물건들 대부분을 진주들과 맞바꾸었다. 유리아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대단히 이득을 본 거래였으며, 그러기에 진주는 소중하게 아끼고 또 아껴야 할 물건이었다.
그런 명가 출신 왕궁기사의 내심이 비은공주에겐 뻔히 읽혔다. 공주는 이마를 짚었다.
“한심하기는.”
“예?”
“아니요, 됐어요…. 하긴 집개 따위가 똑똑할 필요는 없지요…. 똑똑해서도 안 될 것이고.”
유리아는 그 말을 잠시 머리속에서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항의했다.
“저는 집개가 아닙니다. 그러니 집개처럼 대하지 말아주십시오.”
“본인도 들개가 아닌데요. 그런데 들개처럼 대하고 계시잖아요.”
유리아는 비은공주에게 말로 해선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하기사 비은공주는 현왕을 아버지로, 적검후를 어머니로 두었다. 그리고 현왕은 아랫사람을 갈구는데 능했고, 적검후는 그런 현왕을 갈구는데 도가 텄다. 그 두 가지 사실은 두 사람의 금슬이 좋다는 데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지만, 비은공주의 말빨에는 영향을 끼쳤다….
그렇다고 해도 자신보다 열 살은 어린 애한테 말빨로 밀렸다는 사실은 유리아를 우울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나도 귤이나 까먹을까.’
이미 비은공주는 진주 주머니를 내려놓고 귤 까먹기에 들어가 있었다. 유리아가 그 옆에 앉아 귤을 집어 들려던 때였다.
제함도 후작 휘영이 자문사 구호를 데리고 방문해왔다.
◈ ◈ ◈
나는 활짝 웃으면서 물었다.
“공주 전하. 먹거리는 좀 입에 맞으십니까?”
비은공주는 바구니에 수북하게 담긴 귤껍질 하나를 들어 내게 즙을 날려 보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는 잽싸게 구호를 방패로 삼아 막았다. 눈을 감싼 구호가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으시는 것 같군요. 다행입니다.”
비은공주는 발을 굴렀다.
“젠장! 아까워라.”
“심심하신가보군요.”
“예. 아무튼 지금 본인이 갖고 있는 거라고는 진주들뿐인 것이에요. 구슬치기 하실래요?”
나는 비탄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못된 대륙 상인들…. 참으로 상도덕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게 말이어요.”
비은공주는 새침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말했다. 비은공주와 함께 온 왕궁기사는 이 대화가 이해되지 않는지 눈을 껌뻑거렸지만 그거야 알 바 아니지.
내가 말했다.
“심심하시다면 즐길 거리를 하나 드릴 수 있습니다. 구슬치기는 아닙니다만.”
“어떤 것인데요?”
“자문사.”
내가 부르자 구호는 두 눈을 감싼 상태임에도 자문에 응했다. 여전히 굉장한 재주였다.
“조카님. 무술 좀 할 줄 알지?”
“조금은요. 본인이 이모님 조카라는 건, 이모님 언니가 본인의 어머님이란 뜻이거든요.”
“같이 바람 좀 쐴래?”
“후음?”
비은공주가 짧게 친 붉은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 때 오가는 대화에 당황하던 왕궁기사가 끼어들었다.
“은월의 피를 이으신 공주 전하께 공대를 하지 않다니 이 무슨 불경한…. 그래도 된다고 생각합니까?”
구호는 그제야 두 눈에서 손을 치웠다. 시울과 자위와 동자 모두 붉어진 눈이 기사를 향했다.
“조금은. 조카님이 내 조카님이라는 건, 적검후께서 내 언니라는 뜻이거든.”
“어어… 하지만.”
왕궁기사는 손에 든 도토리를 빼앗긴 다람쥐 같은 표정을 지었다. 뭔가 아닌데 뭐가 아닌지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은 그런 얼굴을 하게 마련이다.
비은공주가 말했다.
“소금 먹은 바람이 심하게 불던데요. 지린내와 비린내도 진동을 하고요. 또 바깥은 위험했던 것 아니었나요?”
“바닷가니까요.”
“납득할 수밖에 없는 답변 고마워요, 후작. 다만 본인은 본인 피부의 상태와 본인 옷에 스밀 냄새와 본인에게 닥칠 위협을 염려하는 것이에요.”
“앞의 두 가지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어차피 보여줄 사람도 맡을 사람도 없지 않습니까.”
“본인이 있고 본인이 있는데요.”
거듭된 도발에도 비은공주는 뚱한 얼굴로 대꾸할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손에 든 귤껍질로 부지런히 사격 각을 재고 있었다. 과연 사호 딸내미였다.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 않았다.’
얼굴도 못 본 사호 아들내미 또한 감탄스러워졌다.
‘이런 공주전하를 깨뜨리고 세자 자리에 올랐다 이거지.’
장자 상속과 차대 은월의 피 생산을 위해 성별을 고려한 결과라고 해도 다음 대 폐하는 제법이리라.
하지만 그건 일단 이번 미션을 해결한 다음의 일.
나는 웃으며 말했다.
“여기 있는 것보다는 재미있으실 겁니다. 그리고 안전하실 거고요. 그것 두 가지는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지루한 사람이나 귤껍질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법이다. 더 재미있는 놀이을 제공해주겠다는 말에 비은공주는 귤껍질을 조물딱거리면서 말했다.
“후음. 어딜 가서 뭘 하는 것인데요?”
“고, 공주 전하. 바깥은 위험합니다.”
왕궁기사가 당황해서 말했다. 비은공주는 바로 왕궁기사에게 귤껍질 즙을 쏘아 보냈다.
“후작이 안전하다잖아요.”
왕궁기사는 조금 뒤에야 대답했다.
“후작이… 안전하다고 한들, 제게는… 공주 전하를 수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럼 댁이 본인을 지켜주세요. 뭐가 문제인 것이에요?”
“음, 그건….”
왕궁기사는 입을 다물었다. 비은공주가 나와 구호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어딜 가서 뭘 하는 것인데요?”
구호가 대답했다.
“영지민들에게 조카님을 선보일 거야.”
“3주일쯤 전에 대륙 상인들한테 그랬던 것처럼요? 아니면 2주일쯤 전에 영지기사들한테 그랬던 것처럼요?”
“더 본격적으로. 더 극적으로. 더 멋지게.”
“어떻게요?”
그 질문에 구호가 대답하려던 때였다.
딱 맞춘 것처럼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시아람 경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각하. 그리고 전하. 탄원자가 찾아왔습니다. 화급한 사안이라고 합니다.”
◈ ◈ ◈
흐름.
흐름이 중요하다.
나는 제함도 내의 치안을 우선시 했다. 하나 얻어걸린 인재 시아람 경을 중심으로 하여, 공주님 일동으로부터 벗겨낸 재산들을 아낌없이 던져주었다. 일단은 외관을 그럴싸하게 만들어낸 것이다.
[개천의 시왕: 실로 효과적인 통치다.]
비류아가 평가했다.
[개천의 시왕: 길잡이여. 영지민들은 제함도 후작군을, 그리고 그대를 믿기 시작했지.]
그 결과 흐름은 뚜렷해졌으며 문제들 또한 명백해졌다.
[개천의 시왕: 하지만 그대의 ‘흐름’이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점이 필요하다.]
‘예.’
알고 있다.
‘믿음의 대가를 줘야지요.’
임무 창 상세표시에 나와 있는 것처럼, 제함도는 인근 근해의 해적들한테 널리 알려진 맛집이었다.
그리고 지금쯤이면 정보력이 좋지 않은 해적들 역시 이 섬에 공주님 일행이 도착했다는 소문을 들었을 터, 평소보다 더 빨아먹을 육즙이 많겠구나 침 흘리기 딱 좋은 상태였다.
“나리! 아이고, 나리!”
탄원을 자청한 영지민이 넙죽 고개를 수그렸다. 며칠 전 담벼락을 함부로 헐었다는 죄목으로 붙잡혀 왔다가 풀려난 백성이었다.
“큰일입니다요! 흑구 새끼들이 왔구만유!”
나는 공주 전하의 방에서 슬쩍한 귤 한 조각을 입에 던졌다.
“내 갑옷을 가져와.”
첫 전투를 치를 시간이었고.
“가시죠, 공주 전하. 안전하면서 주목받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드리겠습니다.”
또한, 우상을 세울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