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154화 (154/261)

154. 공주 전하 사용 설명서 (1)

삶은 지루하다. 괴롭다.

지루함을 견디고 괴로움을 잊기 위해 사람들은 도취한다. 도취의 가장 오래된 방법으로 사람들은 '거짓말'을 발명했다. 거짓말이 모여서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가 모여서 신화가 된다. 그래서 모든 신화는 세상살이의 지루함과 괴로움을 담고 있다.

나투아 사람들도 지루했다. 괴로웠다. 덤으로 구라도 잘 쳤다.

당연한 귀결로, 나투아의 신화가 생겨났다.

말하길, 태초에 '흐름'이 있었다.

하얀 흐름이 있었다. 검은 흐름이 있었다. 하얀 흐름과 검은 흐름은 뒤섞이지 않아 매번 충돌했는데, 어느 날 두 흐름은 공생하길 선택했다. 그리하여 검은 흐름은 땅으로 솟았으며, 하얀 흐름은 물이 되어 떨어졌다.

땅에서는 사람들이 태어났다. 물에서는 용이 태어났다. 사람들 중 가장 용감한 이가 물을 향해 나아갔다. 노파와 처녀와 소녀가 그 용감한 이를 도와 물 위를 나아가게 했으니, 이 용감한 이가 바로 최초의 항해자였다.

물에 살던 용은 그를 질시했다. 그리하여 용은 끝없이 그가 탄 배를 뒤집으려 들었으며, 항해자는 버텼는데, 이 두 개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용이었다. 그 용 역시 차후 노파와 처녀와 소녀의 복수를 당해 호수라는 감옥에 갇히게 되지만, 어쨌든 그렇게 배는 뒤집혔고 최초의 항해자는 물에 빠지게 된 것이다.

최초의 항해자는 그렇게 ‘심해에 가라앉은 아버지’가 되었다.

그렇게 가라앉는 내내, 그는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흐름이다! 흐름이야!”

“후, 후작 각하…?!”

경비대장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가,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간 떨어질 뻔했습니다….”

“미안. 내가 가끔 신기를 내려 받아 나도 모르게 소리치곤 그러거든.”

“신기요? 참말이십니까?”

“당연히 구라지, 이것아. 넌 어떻게 된 게 귀가 모시조개껍질보다 얇냐?”

경비대장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헤엄을 치다가 미역한테 싸대기를 맞은 해달과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늙은 경비대장의 시무룩함을 못내 즐기면서 산호 옥좌에 허리를 푹 파묻었다.

‘아, 허리 아파.’

왜 산호 따위로 옥좌를 만든 걸까? 이걸 만든 자식들은 진심으로 이게 옥좌에 어울리는 소재라고 생각한 걸까?

‘신화도 그렇고 하여간 나투아 이 미친놈들….’

하지만 거기서도 건져 먹을 것은 있었다.

그렇다.

흐름이었다!

“각하. 알현이 허가된 바, 이렇게 모습을 비추나이다.”

시아람 경이 알현실에 들어섰다. 그 뒤로는 ‘제함도 후작군’이 뒤따랐다.

시아람 경을 중심으로 영지기사들을 재편한 지 어언 2주일. 경비대장 휘하 내 직속 경비병들과 영지기사들의 사병 일동을 잘 버무려 만들어낸 제함도 후작군 역시 오늘로 2주일을 맞이했다.

[ 통솔(Lv.3)이 발동 중입니다. ]

[ 당신의 지휘 하에 들어온 병력은 그 숙련도가 빠르게 상승합니다. ]

시아람이 이승에서 군기를 잡고, 저승에서 건물 효과가 그것을 뒷받침했다.

“명하신 대로 산두름 구역을 순찰을 돌고 왔습니다.”

결과: 시아람 경이 허리를 굽힐 적에 후작군의 병사들은 무릎을 꿇었다. 이 존망 영지의 비참한 상황을 잠시 잊게 해줄 만큼 깔끔한 제식 동작이었다.

“수고했어.”

나는 엄지를 척 치켜세워주었다.

“해서, 성과는?”

“벌목이 금지된 구역에서 나무를 베던 영민이 둘 있었습니다. 즉시 영주성으로 찾아와 대죄하지 않으면 경을 치겠다고 일렀으니, 곧 찾아올 것입니다.”

아니면 찾아오지 않고 죽든지.

그 뒷말을 시아람 경은 덧붙이지 않았다. 나도 구태여 말하지 않았다.

“좋아. 계속해서 순찰을 돌도록.”

“예.”

“영지의 치안에 공헌했으니 민망한 규모로나마 포상하지 않을 수 없다. 밀 한 섬과 면포 세 필을 내릴 테니 알아서 분배하도록.”

“감읍하옵니다, 각하.”

시아람 경이 경례하고 후작군과 함께 나섰다.

[첫 번째 은월: 비수야. 이거 의미가 있어? 기껏해야 선 너머 나무하는 나무꾼 몇 명한테 주의 준 것 뿐이잖아?]

[간신 조련사: 저도 동감합니다. 치안에 공헌했다고 말하기 힘들지 않을지요?]

‘어허. 소연이야 그렇다 쳐도 천사님까지. 아니죠아니죠. 이건 말이에요.’

[최초의 성녀: 길들이기네요.]

[개천의 시왕: 길들이기로군.]

‘역시 둘은 아시네!’

[최초의 성녀: 네! 왜냐면 소모라 살 적에 고돔 그 잡놈이 우리들한테 그랬거든요.]

[개천의 시왕: 음! 왜냐면 개천식 직전 도읍지를 세울 적에 내가 잡놈들에게 그랬기 때문이다.]

‘어… 알게 된 경로는 정 반대 같지만 어쨌든….’

일순 한적해진 저승이야 어쨌건, 두 지도자의 통찰이 옳았다.

나는 병력을, 그리하여 제함도를 길들이는 중이었다.

‘병력이란 생산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진 이들입니다. 부지런히 굴려야 수지가 맞지요. 단, 이 때 그냥 지들이 알아서 일하는 게 아니라 윗사람한테 명령을 받아 일을 해야 돼요. 그래야 체계가 서죠.’

순찰을 도는 것 자체에는 야리소연 말마따나 별 의미가 없다. 하지만 제함도 후작군은 위에서 내려온 명령을 수행하게 된다. 잘 해내면 상을 받고 잘 못하면 벌을 받는다. 자신들이 뭔가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거다.

‘그리고 방금 제식 보셨죠? 체계가 선 병력은 그 자체로 볼거리가 되지요.’

이제 영지민들은 ‘후작군이 결성됐다’,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듣게 된다.

보게 된다.

그러므로.

[첫 번째 은월: 범법자들을 자꾸 영주성으로 불러들이는 건 왜 그러는 거임?]

야리소연의 질문은 정확히 내 심계를 묻고 있었다.

나는 간단히 대꾸했다.

‘안면 좀 트려고.’

[첫 번째 은월: 응?]

‘까놓고 말하자. 순찰에 걸린 영지민들이 무슨 범법자겠어. 벌목 금지 구역이라고 해 봤자 명목상 정해놓은 구역에 불과하지, 그걸 지난 수십 년 동안 누가 지켰겠냐고.’

[첫 번째 은월: 아무도 안 지켰다?]

‘앙. 그러니까 나도 그냥 봐줄 거임.’

정확히 말하면 ‘그냥’ 봐주는 것은 아니었다.

“네 이놈! 네 죄를 네가 알렷다!”

나는 더럽게 불편한 산호 옥좌에 앉아 호통을 내지른다.

이때 대체로 영지민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자기가 뭘 저질렀는지 진짜 모르거든.

하지만 말하지 않았는가. 나투아 신화에서 주워 먹을 게 있다면 그건 ‘흐름’ 뿐이라고.

늙은 경비대장이 노호한다.

“어허! 후작 각하께서 네놈의 죄를 묻지 않더냐! 왜 대답이 없는가!”

촉새 같은 영지기사가 추임새를 넣는다.

“이거 아무래도 죄악이 아주 나쁜 놈 같습니다. 각하! 주리를 트시지요!”

그러면 제함도 후작군이 맞장구를 친다.

“주리 대령이오!”

이쯤에 이르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영지민들은 넙죽 엎드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이고오, 나리! 쇤네는 아무것도 모르옵니다! 용서해주시옵소서!”

주리를 트네 마네, 아무것도 모르네 마네, 하는 고함과 통곡이 한동안 이어진다. 그동안 나는 묵묵히 얘기를 듣다가 척, 오른팔을 든다. 그러면 그때까지 소리치던 경비대장과 영지기사, 후작군이 한꺼번에 입을 다무는 것이다.

이제 내가 다시 말한다.

“내 얘기를 들어보니 네 사연이 딱하여서 참작할 여지가 없잖아 있다.”

최대한 엄격 진지한 얼굴로.

“너는 돌아가서 네 마을 동료들에게 일러라. 앞으로는 나무를 벨 때도 그것이 네가 베어도 될 나무인지, 내게 속한 바 장차 후손을 위해 남겨두어야 할 나무인지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이를 어기는 자는 크게 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이다.”

“아이고오! 감사합니다! 감사하옵니다, 나리!”

“물러가거라.”

아무것도 모르고 끌려온 영지민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 채, 그러나 아무튼 자기가 목숨을 구했으며 몸도 멀쩡히 돌아가게 되었다는 사실만 알고서 돌아간다.

자.

이제 마을로 돌아간 영지민은 뭐라고 말할까?

< 1 내가 죄를 저질렀는데 영주님이 용서해주시더라. 참 너그러우신 선군이시다. >

< 2 아따, 고것들이 영주님 말씀에 넙쭉넙쭉 고개를 숙이더구만! >

‘당연히 2번이지.’

경비대장부터 시작해서 기사단원까지 모조리 내게 복종하는 광경.

그 장면이 소문나는 것 자체가 바로 내가 목표하는 것이었다.

‘겸사겸사 영민들이 제 얼굴을 직접 보는 효과도 있고요.’

내가 천사님에게 말했다.

‘얼굴 한 번 보는 거, 이거 있고 없고가 되게 중요합니다? 한 번도 못 본 영주는 영주새끼지만 한 번이라도 얼굴 뵌 영주는 영주님이라고요.’

치안이란 공권력에 의해 가능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권력의 기반은 신뢰에 있지요.’

잊지 말자. 나는 지금 없는 병력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원기윤 제독한테서 빌려온 왕국군. 이미 있던 후작령 경비대. 영지기사들이 갖고 있던 사병. 모두 이 섬에 있던 것들을 한 차례 가공했을 뿐이다.

‘신뢰를 부여하기 위해.’

설령 이 섬에 백만 대군이 있어봤자 뭐하나. 영지민들이 신뢰하지 않으면 백만 개의 허수아비가 있는 거나 다름없다. 흑구가 나타나도 제 때 출동할 수가 없고, 대낮에 도둑질이 벌어져도 고발이 없고, 살인이 일어나도 추포할 수 없는 거다.

‘멀리 수평선에서 흑구 선박이 보이면, 영지민들이 생각하겠죠. 아. 엿 됐다. 얼른 산으로 튀자. 돈 될 만한 것들은 전부 싸들고 튀어 버리자.’

그것이 제함도에서 지난 25년간 벌어진 일이었다.

‘저는 거기에도 딱 한 가지만 더할 겁니다.’

마을사람들이 전부 튀는 와중에 이런 소리가 딱 한 번이라도 나오는 거.

‘너! 너는 얼른 영주성 가서 나리님한테 알려!’

그것이 약속이다. 치안이다. 안보다.

요컨대 신뢰인 것이다.

이 신뢰를 통해, 그리고 신뢰에 의해, 신뢰로서 공권력은 비로소 가동하기 시작한다.

가령 탐욕에 눈이 멀어 신뢰를 깨는데 가담하는 상인들은 흑구와 다름없는 바, 마땅히 그들을 참벌하고 그들이 사취한 이익을 적몰한다거나. 어디까지나 예를 들자면 말이다….

[간신 조련사: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습니다.]

‘넹.’

그리하여 시간이 흐른 결과, 임무 창은 다음과 같은 상태로 바뀌어있었다.

[ 임무명 : 정복지 안정 ]

[ 달성점수 : 18점 / 100점 ]

[ 점수표 ]

*정식 왕국령 +25점 (이 땅은 왕국에 정복당한지 25년이 흘렀습니다.)

*관심 영지 +20점 (이 땅은 폐하께서 다대한 관심을 기울이는 영지입니다.)

*새로운 매력! +20점 (당신은 올해 작위를 승계하였습니다!)

*와! 공주 전하! +3점 (은월의 피를 이어받으신 공주 전하께서 무기한으로 머무르실 예정입니다!)

*심해에 가라앉은 아버지의 분노 -30점 (당신은 감히 여인의 몸으로 산호 옥좌에 앉았습니다!)

*매우 심각한 불화 -40점 (뭔가… 뭔가 시작되려고 하는군요.)

*어느 정도 나아진 치안 상태 +20점 (오, 땅개님들 시동 걸리셨네요!)

‘좋았어!’

시작 당시만 해도 -60점에 달하던 치안 점수가 +20으로 돌아섰다. -60점이던 불화 역시 -40점으로 줄어들었다.

그 결과 총 점수도 +18점!

[첫 번째 은월: 오. 흑자 됐네!]

‘하필 흑자가 된 점수가 좀 미묘하긴 하지만 말야….’

[최초의 성녀: 축하드려요! 적자보다는 훨씬 낫지요!]

‘고맙소.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라오.’

[개천의 시왕: 짐작이 간다. 치안이 바로 서면 흐름이 생겨나지.]

‘그 말대롭니다, 시왕님.’

치안을 먼저 챙긴 이유가 있었다.

‘항목 상세 표시.’

[ *어느 정도 나아진 치안 상태 +20점 ]

: 흑구들의 주요 목표 -20점 (후작 각하…. 제함도가 맛집이라는 게 소문나버렸습니다….)

: 영지기사 장악 +10점 (제함도 기사들이 당신의 권위에 복종합니다!)

: 군제 개편 +10점 (세 갈래로 나뉘어 있던 병력들이 왕국군-후작군 2갈래로 단순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왕국군 중 5분의 1이 당신을 따릅니다.)

: 왕국 제독과의 공조 관계 +10점 (유유는 상종이요, 초록은 동색이라….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습니다.)

: 정예병 획득 +10점 (왕국식 대전함 1척, 알실라식 중형선 3척, 흑열도식 소조선 7척, 중앙해군 350명을 얻었습니다!)

흐름이 생긴다.

[ *매우 심각한 불화 -40점 ]

: 인종 갈등 -10점 (제함도 토착민들과 왕국 이주자들 사이에 불화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 세대 격차 -10점 (정복당하기 전에 태어난 세대와 정복당한 이후 태어난 세대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 종교 분쟁 -20점 (나투아 토착 종교와 왕국 달의 여신 교단 사이에 치열한 영적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기름이 빠진다.

[ *심해에 가라앉은 아버지의 분노 -30점 ]

: 나투아 토착 종교의 교리 -30점 (나투아 토착 종교관은 ‘해웅’이 앉아야 할 자리에 여인이 앉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이 영지가 처해 있던 ‘엿 같은 처지’가 ‘명확하게 나눌 수 있는 문제들’로 정제되는 것이다.

[첫 번째 은월: 인종 문제랑 세대 문제.]

[개천의 시왕: 흑구.]

[최초의 성녀: 그리고 종교 문제….]

그렇다.

‘심해에 가라앉은 아버지의 분노 항목도 결국 종교 문제니까, 종교 문제가 가장 큰 셈인데.’

[간신 조련사: 어렵군요.]

천사님의 목소리에 난색이 배었다.

[간신 조련사: 인종 문제랑 세대 문제야 어디서나 벌어지는 일. 여러 가지 대책을 내는 것이 가능합니다. 흑구 문제는 흑구라는 명백한 적이 있는 만큼 그걸 깨부수면 되지요. 하지만 종교 문제 같은 경우는….]

‘함부로 죽여 버리면 다들 순교자가 되어버리죠. 저번에 이단자 놈들을 가두기만 했던 것도 그래서였고.’

[간신 조련사: 해결할 방법이 있습니까?]

‘생각해 둔 건 있습니다요.’

나는 산호 옥좌에서 일어섰다.

“자문사. 잠깐 좀 가자.”

귤을 까먹던 구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딜 가?”

“공주 전하 뵈러.”

은월의 피.

달의 여신의 대리인, 신관 중의 신관으로 자라날 수밖에 없는 성스러운 핏줄을 한 차례 더 굴려 먹을 시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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