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151화 (151/261)

151. 잡배들의 영주 (1)

모든 시대, 무엇을 하려 해도 돈이 든다.

이 시대에는 전체적으로 화폐 경제가 불황을 맞이했으니(이는 그나마 신용력 있는 주화鑄貨를 돌리던 나라가 나투아와 성 제국인데, 나성 군사동맹의 실패로 나투아는 붕괴했고 성 제국은 혼란기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면포와 금속, 곡식이 든다고 해야겠다.

공주님은 셋 모두 가져오셨다. 면포에 더해 비단, 은괴뿐 아니라 금괴까지.

‘곡식에 이르러선 매달 초일에 주둔군 봉록선을 통해 배달 받을 예정이지.’

공주님, 공주님의 호위기사, 그 기사 휘하 금군들, 모두 합해 30명 분의 봉록이 다달이 왕실 종친부 예산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거 완전 꿀덩이 아닌가?’

물론 그것들을 냉큼 집어먹을 수는 없었다. 가령 왕궁기사와 금군들을 모조리 죽여 버린 다음 공주님을 어디 등대탑 같은 데에 감금해버릴 수는 없다는 뜻이다.

하물며 그 다음 공주님을 고문하고 세뇌하여 ‘본인은 행복하답니다, 제함도 후작의 곁에서 빛과 함께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에요.’ 같은 편지를 보내어 왕도를 속인다는 것 역시 어불성설이었다….

[첫 번째 은월: 그냥 묻는 건데 양심 때문은 아니지?]

‘어허. 사람을 뭘로 보고. 당연히 양심 때문이지.’

[첫 번째 은월: 응. 진짜 이유는 뭐임?]

‘아리야.’

[최초의 성녀: 일단 원기윤 제독의 눈이 있겠지요. 아무리 제독 같은 간신이라도 그런 짓을 거들거나 묵인한다면 그 뒷배까지 발칵 뒤집힐 테니까요. 서른 가량 되는 친위대에 쫄아가지고 공주님 털어먹기에서 발을 뺐던 보신주의자가 감수할 수 있는 위험은 아니네요.]

‘비류아.’

[개천의 시왕: 더해서, 매달 봉록선이 온다는 이야기는 매달 시우 증손녀의 안위를 확인하겠다는 뜻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노릇이겠지. 시우 증손녀는 시우 증손자에게 혹시 모를 일이 생겼을 때를 위한 보험으로서 대비될 필요가 있으니까. 또한 시우 증손녀는 후작성의 중진인 구호의 조카이기도 하다. 감금까진 몰라도 고문과 세뇌에는 동의하지 않을 거다.]

‘이상. 그러니 할 수가 없음요.’

[첫 번째 은월: 나는 그냥 니들이 무섭다….]

[간신 조련사: 야리소연, 당신의 양심이 곧 진정한 왕국입니다.]

[첫 번째 은월: 하누리랑 투기장에서 한 판 뜨러 가야지….]

[간신 조련사: 아니아니! 가지 마십시오, 야리소연! 이 VIP채팅방이란 이름의 지옥에서 제 동료는 당신뿐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가장 간단한 방법이 막힌 지금, 제함도 후작령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바가지 씌우자.”

자문사 구호가 자문사 노릇을 했다.

“내 조카님이랑 그 일행들 죄다 반도 한복판에서 왔잖아. 머리에 박힌 물가표도 반도 한복판 그대로… 는 아니고, 예상은 하겠지만 오차가 많을 거야.”

여기는 섬이다. 본토에서 보물로 취급받는 산호와 진주가 그럴 수 없이 헐하다. 한 10상자를 진상해야 3상자쯤 썩지 않고 도착하는 특급 진상품 귤은 굴러다닌다. 조개며 게, 낙지, 물고기 같은 것도 부두가 후작성 30분 거리에 있으니 신선하기 그지없다.

거꾸로 본토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은 여기서는 비싸다. 일단 곡식부터가 말도 안 되게 비싸고, 면포도 비싸다. 금속? 바닷바람이 쌩쌩 부는 이 섬에선 녹만 좀 덜 슬었으면 귀물(貴物)을 넘어 귀물(鬼物)로 취급받는다.

무역으로 먹고 살던 곳이 망하면 이리도 비참해지는 것이다.

구호 말마따나 공주님 일행 역시 이런 이치는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을 거다. 그래봤자 10배 바가지 쓸 걸 3~4배 바가지 쓰는 정도에서 그칠 뿐이다.

물론 경험이 쌓이다 보면 그마저 교정되게 마련이지만….

“우선은 정보 은폐.”

“외부 접촉을 최대한 막는다 이거지.”

“이건 쉬워.”

“실제로도 치안이 개판이니.”

“할머니들 잘 풀어줬네.”

“그치. 내일 또 후작성 앞에 진 치고 괴상한 소릴 늘어놓을 거야.”

“후작성 바깥은 위험하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막.”

“그럼 남는 건 우리 후작성 가신들 입단속인데.”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경비대장 얘 영 앞뒤 구분을 못하더라?”

“미안, 후작 각하. 경비대장이 아직도 고지식하지. 내 잘못 인정.”

“됐어. 뭐 얘넨 어차피 내 직속이니까 정신없을 일거리 만들어주면 그만이기도 하고…. 뭐 꺼리 없어?”

“영지기사들 소집시키자.”

“아, 하긴 걔네도 조져야 되니까.”

“응. 그 다음엔 속도전.”

“대충 일주일?”

“영지기사들 소집에도 그쯤 걸릴 테고.”

“그럼 일주일. 쟤네가 본토에서 갖고 온 재산들 한껏 뽑아 먹는 거야.”

“좋아, 후작 각하.”

“응, 구호 자문사.”

나와 구호는 서로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마주보았다.

“조지자!”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했다.

◈          ◈          ◈

제함도는 망해버린 섬이었다.

나투아가 지배하던 시절만 해도 당당한 해상 무역 거점이던 이 섬은 왕국의 정복지가 되면서 모든 것이 망가졌다.

왕국은 다른 정복지는 몰라도 섬을 관리할 만한 능력은 없었던 것이다.

당장 전쟁으로 인한 약탈을 피하지 못했다. 그러니 민심의 이반도 막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치안 문제가 뒤따랐는데, 이를 해결하려던 시도는 대부분 삽질이었으며 좌절되었다.

그런 저주받은 섬에 선대 후작과 함께 보내어진 왕국의 충복들이 있었다. 많았다.

하지만 어언 25년에 달하는 바닷바람은 그 많은 것을 녹슬게 만들기 충분했다.

많은 이들이 죽었다. 죽지 않은 이들은 변했다.

가령 이 섬의 땅뙈기들을 영지랍시고 나눠 받은 기사들과 그 자리를 이은 2대들. 그들은 자신의 이권만 챙기느라 바빴다.

하지만 누군가 한명쯤은 존재하는 법이다. 망가진 것들에 책임을 느끼고, 이보다 더 나빠지지 않을 수 있는 방향으로 유도하지 못한 데에 죄책감을 느끼며, 자신에게 기회가 주어졌다는 데에 은혜를 느끼는 이들이 말이다.

제함도 후작성 경비대장 바나훌도 그런 손해 보는 사람 중 하나였다.

“바나훌.”

바나훌이 기억하는 휘영은 불행한 인물이었다.

외모부터 매력이 없었다. 안색은 수척했고 움직임도 힘이 없었다. 그러니 기껏 이어받은 커다란 키는 오히려 휘영을 더욱 빈상으로 만들었다.

성격 역시 문제가 많았다. 어느 날은 손에 잡히는 대로 내던지면서 짜증을 부리는가하면, 어느 날은 반대로 방에 틀어박혀 한 마디도 꺼내지 않고 우울해했다. 그렇게 되면 구호 외에는 달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바나훌은 그것 역시 자신의 책임으로 여겼다. 자신이 조금만 더 선대 후작을 잘 보필했더라면 모든 것이 나아졌을 것이다….

“제함도 내의 영지기사들을 소집해 와.”

하지만 2대 후작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휘영은 완전히 달라졌다.

퀭한 안색과 짜증에 가득한 눈매는 그대로인 듯 했지만 명령을 내리는 목소리에 활력이 실렸다.

“영지기사들을 말씀이십니까?”

“응. 이 잡놈들 좀 조져버려야겠어.”

말하면서 후작은 두 주먹을 쿵쿵 부딪쳤다.

바나훌은 마른 침을 삼켰다.

“어… 조지신다면….”

“경비대장. 쫌.”

쫌이라는 한 마디에 엄청나게 많은 의미가 실리기도 한다. 바나훌이 헛기침을 했다.

“크흠. 하지만 후작 각하. 선대 후작 각하의 상(喪)에도 대리인이나 보내던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오라고 말한들….”

“안 들어 처먹을 거라 이거지? 주둔하던 왕국군이 없었다면 대리인이 아니라 병력을 보내 후작성이랑 날 선점하려 들었을 잡것들이니까. 그 다음에는 뭐 나랑 결혼식 올려서 어떻게 해보려고 했겠지? 이 존만한 땅덩어리 처먹어봤자 뭐하겠다고. 씹새끼들이.”

바나훌은 깊이 읍했다. 1차적으로는 후작의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었고, 2차적으로는 ‘역시 변하셨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가씨 시절의 휘영은 이만한 통찰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적이 외람된 말씀이오나, 말씀하시는 바가 옳습니다. 후작 각하. 그런데 그런 불경한 자들을 어찌….”

바나훌의 목소리에 기대감이 서린 것도 그런 생각 덕이었다. 무언가 방도가 있으리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과연 방도가 있었다. 그 방도가 바나훌로서는 좀 의외였을 뿐.

“병력을 끌고 가.”

“하오나 제 병력이라고 해도….”

“아니 내 친위대 말고. 이번에 왕국군 병사들 지원받은 거 있잖아. 걔네 데리고 가.”

후작이 이번에 왕국군 기지 측에서 병력을 지원받았다는 사실은 바나훌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왕국 중앙군이 아닙니까, 후작 각하.”

“응. 흑구 쫓아내는 것도 아니고, 이런 후작가의 사적인 내부 정리에 쓸 수 있냐 이거지? 하물며 경비대장인 네가 지휘권을 쥘 수 있는 건지도 궁금하다 이거고.”

“역시 외람된 말씀이오나….”

“그게, 지원을 받은 만큼 쓸 수가 있단 말이지. 법리적으로 말하자면….”

그 뒤로 이어진 설명은 너무 현학적인 것이어서 바나훌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실 이해했다고 해도 별 알맹이는 없었을 것이다. 왕국군법의 빈틈과 영주의 자치권 사이를 교묘하게 오가는 말장난에 가까웠으니까.

하지만 어쨌든 가능하긴 가능한 모양이다. 이런 일이 가능했다면 왜 선대 후작은 하지 않은 것인지는 모르겠다는 생각이 잠깐 스쳐갔지만, 어차피 그는 한 일보다 하지 않은 일들이 많았던 인물이었다.

바나훌은 고개를 수그렸다.

“가능하다는 것이군요. 알겠습니다.”

“응. 일주일 줄게. 모아 와.”

“예.”

그렇게 경비대장 바나훌은 왕국군 200명을 이끌고 제함도 내의 영지들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 병력이 깡패였다. 섬 안에 자리한 영지들인 만큼 그 숫자는 모두 일곱에 불과했으며, 영지기사들이 갖고 있는 사병이라고 해봤자 각자 100명 규모를 넘어설 수 없는 바, 영지기사들은 모두 부름에 응했다.

“아니 대체 무슨 일로 부르시는 겁니까?”

“지금 일들이 얼마나 쌓여 있는데….”

“뭍과 물이 뒤바뀌니 어쩌니 지랄발광을 해대는 이단자 새끼들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한다 아입니꺼. 제가 자리 비우는 동안 그 새끼들이 제 땅에 뭐 난장질이라도 치면 후작님이 책임져 주신데예?”

바나훌은 속이 터졌다. 그래도 기사라는 것들이 입이 댓 발만큼 튀어나와 중얼거리는 이 꼬라지라니. 후작이 이들을 조지고 싶어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말 그대로 ‘니들 조지려고 부르신다’고 전할 수야 없었다. 아직은.

그러기에 바나훌은 나서기 전 후작가 자문사 구호가 알려주었던 대응법대로 답했다.

“은월의 피께서 이 섬에 발을 딛으셨지 않은가. 마땅히 문안을 드려야 하지 않겠나.”

그 말은 과연 효과가 있었다.

“와! 은월의 피!”

“공주 전하께서 오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참말이었나보구만요.”

“으와따. 우리 아버지가 꼴까닥, 아니 졸(卒)하시기 전에 지금 왕위에 계시는, 현왕 폐하? 를 곁에서 모셨다 하셨는데, 참말로 눈에 총기가 좔좔 흘러서 와 정말 달에서 온 분이로구나 하셨었다는데. 기대가 크네예.”

“하믄. 정말이라니까. 거 젊은이. 내가 무왕 폐하로부터 술잔도 받아봤는데 말이야….”

“하이고, 또 노랑내나는 말 하시는 거 보소. 아재예! 그만 좀 하시라예. 거 귀에 곰팡이 슬것소.”

곧바로 희희낙락하여 떠들어대는 이 모습을 보고 누가 저들을 기사라 할 것인가? 25년 전 선대 후작과 함께 섬에 왔던 동료들과 그 아들딸들은 이제 영락하여 시정잡배와 다를 바 없어졌다. 바나훌로서는 처참한 기분을 숨기기 어려웠다.

‘그럼 후작님은 잡배들의 영주님인 셈인가.’

하긴 나투아 시절만 해도 보물, 패물, 귀물들이 넘쳐난다는 이유로 붙었던 삼다(三多)의 섬이라는 별명은 이제 사생아, 부랑아, 고아들로 넘쳐난다는 조롱으로 그 의미가 바뀌어 있었다.

‘그런 섬의 영주라면 잡배들의 영주라고 불려도 할 말이 없겠지…. 나도 다를 바 없는 신세고.’

하지만 그렇게 자조적인 기분 속에 영지기사들을 데리고 후작성에 돌아온 바나훌은 깜짝 놀랄 만한 광경을 눈에 두게 됐다.

그리하여 그는 자조적인 의미가 참된 의미로, 지금 후작성 산호 옥좌에 앉아있는 인물이 잡배들의 영주가 아닌지 의심하게 되었다.

◈          ◈          ◈

[ *이 개쓰레기 사기꾼들 같으니! +10점 (넉넉한 예산! 제함도 후작령의 약 2년 치 세입에 해당하는 여유 자금을 확보하는데 성공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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