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자모신 3.0 패치 업데이트 (1)
저승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이번 역시 야리소연이 덮쳐 오리라고 예상했다. 여러 차례 반복된 일이 한 차례 더 되풀이될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합리적인 추론 아닌가? 그렇다면 덮쳐오는 바로 그 순간을 노려 화려하게 뒤집어 주리라. 나는 그렇게 다짐했다.
‘이번에는 반격기를 준비해 왔거든.’
하지만 그렇게 준비했음에도 실제로 뒤집어진 것은 바로 나였다.
“야, 이 바보야!”
야리소연이 아니라 마나가 나를 덮쳤던 것이다. 예상치 못한 각도로 날아든 회초리에 내가 비명을 질렀다.
“갹!”
아씨, 왜 이래 이 등신은?
“뭐하는 거야!? 왜 때려!?”
내가 빽 외쳤다. 그리고 마나는 산과 같아 외침을 받으면 메아리로 돌려주는 기질을 갖고 있었다.
“너야말로 뭐하는 거야!?”
“뭐가 뭐하냐는 건데!”
“목숨을 왜 그렇게 함부로 쓰고 앉았어, 멍청아!?”
“임무 깨려고, 등신아! 그리고 내가 목숨을 어떻게 쓰든 언니가 무슨 상관….”
아, 젠장. ‘니가 무슨 상관?’이라고 말해야 하는데 앞에 쓸데없는 글자가 하나 더 붙었다. 이것도 자모신 렌즈인지 뭔지랑 관련된 건가? 이거 완전 정신 오염 아닌가?
참으로 신경 쓰였지만, 나는 곧바로 거기에 신경 쓸 수 없게 됐다. 마나가 빽 소리쳤던 것이다.
“내 아들 목숨이기도 했거든!?”
아.
음….
“그건… 어, 그러고 보면… 아니, 그치만….”
나는 바로 할 말이 없어졌다. 그리고 할 말 없는 사람들은 보통 욕을 하는 법이다.
“아 나 젠장….”
내 마음 속 족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천명했음에도 정말이지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마나를 딸이라고 불러야하는지 언니라고 불러야하는지 엄마라고 불러야하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내 빙의체였던 시현군은 확실히 하현후 마나가 낳고 키웠던 아이였다.
나는 그런 아이를 자살 특공으로 써먹어버린 것이다. 심히 면목이 없었다.
‘어쩌지….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그치만 그러기에는….’
그렇게 내가 고심에 잠겨 있을 때였다.
“우후후….”
흑치사라였다.
“미안해하실 것… 없답니다….”
긴 소매를 너울거리며 다가온 그녀가 방긋 웃으면서 지팡이를 들었다. 그 지팡이가 하나의 차단 막대가 되어 나와 마나를 갈라놓았다.
“만약 미안해한다면… 마나에게만 하는 게 아니라… 그 전쟁으로 죽어 나간 모든 병사들의 어머니에게도 해야 겠지요…?”
흑치사라.
“그리고 그것은… ‘모두에게도 정말이지 미안합니다.’ 한 마디로 퉁쳐도 될 만큼 가벼운 일은 아니니까요…?”
나는 흑치사라를 바라보았다. 이 몸으로도 키 차이가 나서 나는 여전히 그녀를 올려다 보아야 했다.
“당신의 손주이기도 했는데….”
흑치사라는 웃었다. 그리고 모두를 위해 딸에게 담담히 죽어 달라 말했던 그 만월의 밤과 같은 어조로 말했다.
“예에… 그리고 모든 병사들에게 어머니가 있는 것과 같은 이치로… 할머니들 역시 있겠지요…. 그들이 존재했다는 게… 곧 그 사실을 증명하니까요….”
누군가가 낳아야만 사람은 비로소 존재할 수 있게 되는 법이므로.
“따라서 유일하게 가능한 논리적 귀결은… 그저 뻔뻔해지는 것….”
외팔의 대학장은 방긋 웃으면서 지팡이를 거두었다.
“누구에게도 외따로 사과하지 않는 것… 죽어야 했던 목숨들을 차별하지 않는 것… 최소한 그렇게라도 공정할 것… 그것이 나라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목숨을 갈아 넣는 권력자… 위에 서는 자가 짊어져야 하는 짐… 그런 무거운 업을 말 몇 마디로 내려놓고 편해지려 드는 건… 으응, 많이 비겁한 일이지요…?”
흑치사라는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말해두지만 저, 그런 비겁한 사람과 결혼한 것 아니니까요…? 그런 사람을 딸로 두지도 않았고… 손주로 두지도 않았으니까… 비겁하지 말아주세요…?”
나는 다른 의미로 할 말이 없어졌다.
뛰어난 지성을 가진 자는 그것으로 자신을 속일 수도 있고, 반대로 그러한 모순을 용납하지 않으려 들 수도 있다.
어느 쪽이냐면 나는 전자라고 볼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차마 나보다 똑똑한 사람, 흑치사라 앞에서 궤변을 펼칠 수는 없었다.
마나가 잇소리를 냈다.
“하지만…!”
“마나.”
흑치사라는 마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어미로서 딸을 향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장으로서 하현후를 향해 말했다.
“당신도 한 나라의 왕비였답니다…. 훌륭한 권력자였지요…. 당신이 지금 끌고 다니는 추종자들의 숫자는 곧… 그만큼의 사람들이 당신으로 인해 영향을 받았다는 자기증명…. 그 중에는 파멸한 사람도 있을 테지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그건….”
“떼를 쓰지 마세요…. 보기 나쁘답니다….”
마나는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수그렸다.
이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치만… 아팠을 거 아냐.”
“….”
“아까도 아팠잖아…. 회초리로 맞았을 때. 그치. 유미야.”
마나가 나를 돌아보았다. 울 것 같은 얼굴. 역시 만월의 밤에 한 차례 보았던, 여동생을 바라보는 언니의 표정이었다.
“회초리에 맞는 것만도 그렇게 아픈데… 칼에 찔리는 건 얼마나 아프겠어. 하물며 베이고 썰리고 그렇게 몇 번을… 진짜 이 바보 멍청아….”
아, 결국 울어버린다.
‘진짜 얘는….’
됐다.
마음 속 족보에 연연하지 않기로 한 것처럼, 호칭 같은 데에도 더는 연연하지 말자.
“언니.”
나는 마나를 불렀다. 마나는 훌쩍이며 말았다.
“왜 불러, 미친년아….”
하여간 이 등신 언니.
“나 하나라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어?”
“그건 또 뭔 개삽소리인데….”
“그냥 이승에 발붙이고 살던 사람들도 자기 목숨을 그렇게 던지고는 하잖아.”
시우의 부하들.
나투아의 함호. 부관. 물귀신이 되었던 나투아 결사대와 불귀신이 되었던 왕국 특공대.
“나처럼 저승에서 빙의한 게 아니야. 죽어 본 적도 없어서 저승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작자들이 하나뿐인 자기 목숨을 그렇게 쓴단 말야.”
천사님과 공허 속에서 나누었던 대화처럼, 그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으며 그렇게 죽었다.
“그러니까 나는 뭐라고 하나… 더 아까워하지 말아야지. 이 한 몸 바쳐 임무 달성할 각이 보이면 냅다 질러야지 않겠어?”
“미친년 진짜….”
“아, 욕 좀 하지 말고. 언니 말마따나 나 몸 고생하고 돌아 왔어. 언니 욕 들어가면서 마음고생까지 해야겠어?”
마나는 그 말에 따랐다. 거듭, 보통 욕은 할 말 없는 사람들이 하는 법인데 욕도 못하게 하니 마나로선 닥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언니 꼬라지가 보고 있기 처량했으므로, 나는 다독이듯 말했다.
“뭐 물론 개선의 여지가 있기야 했지. 가령 그게 임무 달성에 최선이긴 했나부터… 함호를 죽이더라도 자살특공밖에 정말 방법이 없었는지, 거기서 안 죽었으면 전쟁 1등 공신으로 차후 임무 해결도 완전 쉽지 않았을까 등등… 생각할 부분이야 많지만은, 전장이었잖아. 더 생각할 시간이 없었단 말이야.”
“그래도….”
“그리고 언니. 나도 사람이야, 사람. 실수도 하고 막 그런다고. 천사님한테 듣자니까 냉철함의 화신처럼 굴던 나투아 함호 걔도 방패병들 통째로 싸잡아 먹혔다매? 그게 걔가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어? 그냥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고, 그 상황에서 그래도 결과를 내려고 분투한 거지.”
호소하듯 말해주니 마나는 얌전해졌다. 코를 한 차례 훌쩍였을 뿐 더 뭐라 책망해 오진 않게 된 것이다.
그런 마나에게 나는 말해주었다.
“그러니까 해주려면 그냥 칭찬이나 해주라. 캬! 역시나 내 동생! 쩐다! 내가 인정한다! 뭐 이런 식으로. 어려운 거 아니잖아. 안 그래?”
“우….”
어깨를 추스르던 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뭘 알아.”
“용 쩔어, 너….”
음.
“그, 용 쩐다는 말 어째 쫌… 듣자니까 부끄럽고 그렇다….”
“니가 만든 말이라매?”
“응… 근데 쪽팔려….”
뭘까.
왜 쪽팔리는 걸까…. 뇌를 안 거치고 만들었던 말을 차분하게 되새겨서 그런가? 아니면 마나한테 들어서 그런 걸까?
‘마나는 뭐랄까… 그런 게 있지.’
대하고 있자면 참 스스로 겸허해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등신미가 있다고 해야 할까….
차라리 천사님이 끼어들어 ‘당신은 죽어서도 흑역사를 쌓는군요. 대단합니다.’ 따위라도 말해주면 좋겠다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없었다. 하긴 날 안타깝게 만드는 게 천사님이 맡은 천직이기야 했다.
‘그 와중에 야리소연 저건 멀찍이서 히죽거리고 앉아있고….’
나중에 놀림당할 게 느껴져서 위장이 아팠다.
흑치사라가 다시금 어미의 표정을 짓고서 우후후 웃었다.
“뭐어… 이런 이야기들 자체가… 마나에겐 좀 많이 이르긴 하겠지요….”
자신의 딸을 내려다보면서, 그녀는 한 팔로 뒷짐을 졌다.
“그러니까 제가 여는 강의에도… 좀 참석하세요…. 이승에서는 서로 바빴다지만… 여기는 저승…. 가르쳐줄 시간도 배울 시간도… 그럴 여유도 충분하니까….”
“응, 엄마….”
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겨우 좀 다른 저승 입주자들이 끼어들 수 있는 각이 나왔다.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이 개노답 족보 가족 중 한 명인 하누리였다.
“잘 봤다.”
음.
“네, 잘 싸웠죠?”
“그렇더라.”
“이기고 왔어요. …엄마.”
하누리는 팔짱을 낀 채 씩 웃었다.
“그럼 됐지.”
참 변함없는 사람이다.
◈ ◈ ◈
“하여간 흑치사라도 마나도 말이 많단 말이야. 그냥 이기면 된 거 아니냐? 근데 무슨 권력자의 짐이니, 아프지 않았냐느니. 생각이 많아, 생각이.”
“하누리… 당신도 생각은… 제법 많은 편 아닌가요…?”
“너보다는 적다고. 여기까지 와서 너무 복잡하게 군다니까 참. 야리소연, 안 그래?”
내가 임무 수행하는 와중에 사이가 좋아졌는지 하누리가 야만인을 끌어들였다. 야리소연이 낄낄거렸다.
“대박 공감함. 근데 뭐 괜찮지 않아? 내 서방 쩔쩔매는 모습 보는 건 언제나 옳다고.”
‘임마가….’
“아앙? 지금 내 딸 개고생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했냐? 한 번 더 뒈질래?”
‘아니 사이좋은 거 아니었냐, 니네!?’
“그래, 한 판 뜨자!”
‘왜 웃으면서 말하는 거야 이 야만인은?’
“좋았어!”
‘다시 보니 하누리 얘도 웃고 앉았네.’
그렇게 야리소연과 하누리가 흑표범과 고양이처럼 엉겼다. 흑치사라가 그런 둘을 보면서 하나 남은 손으로 뺨을 짚은 채 한숨을 내쉬었고, 마나는 추종자들에게 돌아가 부둥부둥을 주고받았다.
“보기 좋은 모습입니다.”
그제야 천사님이 나타났다. 하얀 면포로 온몸을 뒤덮은 채 뒷짐을 지고서 평하는 그 모습이 꼭 모든 것의 흑막, 구체적으로는 사교(邪敎)의 우두머리 같았다.
‘하긴 천사니까 틀린 말은 아닐 지도….’
“듣기 싫은 생각이고요, 간신이여.”
“아니 천사님. 저승에서 생각 읽는 건 그만해달라고 부탁드리지 않았습니까요?”
“이래봬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번번이 실패할 뿐이지요.”
“성공해주십쇼, 좀….”
구체적으로는 내가 임무에 대고 그렇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 축하드립니다! ]
마치 이 분위기가 일단락되길 기다린 것처럼 폭죽이 터졌다.
[ 왕가의 안위를 보우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메인 미션 클리어! ]
[ 왕국의 강토를 수호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메인 미션 클리어! ]
[ 왕국이 지배하는 영역을 넓히는데 성공했습니다. 메인 미션 클리어! ]
과연.
늘 임무에 들어있던 ‘은월을 지켜라’는 어쨌든, 북벽수성은 왕국을 보호하는 것으로, 대하대첩은 타국을 정복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모양이었다.
[ 인과(因果) 포인트를 산출합니다. ]
언제나와 같이 번쩍이는 문자열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언제나와 달리 그 문자열을 바라보는 내 표정은 기대보다 불안에 차있었다.
‘좀 걸리는 게 있단 말이지.’
임무 성공 내역이 빈한하게 뜰까봐 걸린다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도 인과 포인트는 넉넉하게 들어왔다.
[ 은월을 지켜라 달성 성공에 따라, 인과 포인트를 3p 획득합니다.]
[ 북벽수성 달성 성공에 따라, 인과 포인트를 5p 획득합니다.]
북벽수성의 경우에는 5포인트.
[ 대하대첩 달성 성공에 따라, 인과 포인트를 8p 획득합니다.]
대하대첩에 이르러서는 무려 8포인트였다.
‘고생한 보람이 있네.’
하지만 내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걸리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걸리던 부분을, 조심스레 다가온 아리야가 짚어주었다.
“예언자님, 이 인과 포인트를 어떻게 쓴다지요?”
그렇다.
“그러게 말이오, 아리야. 빙의체가 죽어버렸으니….”
우리가 해석하기로, 인과 포인트는 빙의체가 차후 어떻게 움직일지에 대해 지정해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빙의체가 죽어버린 것이다.
‘천벌 받을 나투아 검병놈들 손에 그만….’
생각만 해도 분루가 차올랐다.
“아니요, 당신이 저지른 자살 특공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천사님은 생각 좀 읽지 마시고 좀…. 그리고 방금 말씀하신 부분은, 일리는 있습니다만 학계의 정설은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 옳으니까요.”
“간신이여. 왜 흑치사라한테는 찍소리도 못하던 주제에 저한테는 이렇게 뻔뻔하게 굽니까? 제가 만만합니까?”
“에이 그럴리가요. 아무튼 어떻게 되려나, 음….”
바로 그 순간, 기다리던 문자열이 떴다.
다만 인과 포인트를 분배해달라는 말은 아니었다.
[ 현상 확인. ]
[ 자모신 3 패치가 업데이트됩니다. ]
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