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142화 (142/261)

142. 나라가 목적하는 곳 (2)

나는 턱을 긁적였다.

“천사님. 저는 저승이란 게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내가 지금 턱을 긁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여기는 그저 텅 비어 공허만 가득했고, 나도 그 공허의 한줌에 지나지 않는 양했다.

“더 정확히는,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옛날 태학관 학생들과 나누었던 대화와 그 내심을 떠올리면서 나는 말을 이어갔다.

“지옥이니 천국이니. 윤회니 뭐니…. 있으면 뭐. 불행하게 태어난 사람한텐 좋겠지요. 착하게 산 사람한테도 나쁘지 않을 테고. 근데 제가 그렇진 않았잖습니까? 저는 말하자면,”

“가문을 잘 타고나서 인맥으로 출세한 간신이요, 권신의 말단으로 행세하던 돈밖에 모르는 소인배였지요.”

음.

“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저였습니다. 그러다가 재물 좀 더 챙겨보겠답시고 깝치다가 마지막에 결국 그렇게 됐는데…. 이거 요약하면 완전 금수저 물고 태어나 갑질하며 살다가 한심하게 뒈진 놈 아닙니까?”

“요약하지 않아도 그렇긴 하지요.”

“근데 만약 천국이니 지옥이니 하는 게 있다고 쳐보자고요. 아니면 윤회라거나요. 사후에 모든 선악을 판별할 수 있으신 절대자님께서 그걸 주관한다 쳐봅시다. 그런 분께서 자기 앞에 선 저란 놈을 어떻게 할까요?”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일단은 지옥에 처넣고 보겠지요. 그리고 윤회가 있다면….”

“예에. 적어도 ‘아이고 고객님 어서 오세요. 이번 삶은 마지막이 좀 아쉬웠지요? 그런 고객님을 위해 이번에는 마무리까지 보완한 인생을 뽑아드리겠습니다. 좋은 집안에서 곱상한 외모랑 똑똑한 머리 갖고 사랑 듬뿍 받으며 자라면서 한 150년쯤 불로장수하다가 침대에서 편히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갑질하는 삶이에요. 헤헤 고객님 좋으시겠다 이 인생 이번에 새로 나온 건데.’ 같은 말은 안 하겠지요.”

기껏해야 ‘아가리 벌려라, 일단은 구더기로 3천 6백번 전생 들어간다.’ 정도가 아닐까?

아니면 아예 선악을 판별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기계적으로 ‘자~ 환생 돌림판 돌아갑니다~ 과연 이번에도 희박한 확률을 뚫고 금수저 인생을 맞추실 수 있으실지, 아니면 농부의 셋째 아들쯤으로 태어나실지, 아니 아예 인간으로 태어나실 수나 있으실지! 원하시는 순간에 돌림판을 멈춰주세요~ 띠리리라라라라~’ 이 따위 개삽소리나 지껄이겠지.

“그러니까 저는 천국도 지옥도 윤회도 없다. 없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렇게 믿고 싶었으니까요.”

“그런데 그 믿음이 깨졌다 이거군요.”

“예. 말 그대로 눈 떠보니 저승이 있더란 말이지요. 그것도 말이에요. 누가 날 위해 미리 준비해준 게 아니라, 아니 준비된 임무들이야 있지만, 어쨌든 제가 이승에서 한 행동들이 실시간으로 반영이 되고, 입주자들이 늘어나고… 하여간 그런 저승에 왔더란 말입니다.”

나는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야리소연이 있고. 아리야가 있고. 비류아가 있고.”

생각할 것이 여럿이었으므로, 말 할 이들 또한 여럿이었다.

“시우가 있고. 하누리가 있고. 흑치사라가 있고. 제사장이 있고. 마나가 있고… 그 밖에도 여럿이 있게 됐지요.”

나는 한숨을 지었다.

“제가 망하면 저만 망하는 게 아니라 여럿이 망하게 됐다 이 말입니다.”

“책임감을 느끼게 됐다는 겁니까?”

“쉽게 말하자면 그렇네요. 캬, 모두의 미래를 짊어진 꿈나무가 된 기분이랄까요! 그렇게 기대를 받고 있으니 어찌 책임을 다하지 않을 쏘냐. 벗과 이웃을 위하니 어찌 힘쓰지 않을 쏘냐. 논경에도 나올 법한 주옥같은 말씀 아닙니까?”

“그럴 듯한 답이군요.”

천사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야리소연과 아리야, 비류아가 언급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대답이기도 합니다. 결국 가까운 이들을 위해 노력한다는 이야기니까요. 그 주체가 그대라는 것이 신선하기야 합니다만.”

“천사님이 만족할 정도는 아니라는 거군요.”

“예.”

천사님은 작게 몸서리를 쳤다. 몸짓을 따라 면포가 물결쳤다.

음.

“천사님.”

나는 천사를 바라보았다.

“천사님께서 왜 이러시는지는 대충 짐작이 갑니다.”

눈동자.

“함호의 그 눈동자겠지요.”

짊어진 사람 특유의 눈동자.

“왜냐면 저도 같은 것을 느꼈거든요. 저도 그 눈동자를 보고 누군가를 떠올렸단 말입죠. 구체적으로는 지금 저승에서 자신의 반려님과 주접을 떨고 있을 한 남자를요.”

천사님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우.”

“예.”

함호의 눈동자는, 아들을 무등 태운 채 서서 익사했던 남자의 눈동자와 똑같았다.

천사님은 거듭 몸서리를 쳤다. 그러면서 말했다.

“그야 겉보기에는 완전히 다릅니다. 함호는 거리낌 없이 동족을 주살하라고 명령했고, 마지막까지 자신을 살리라고 지시한데 반해서, 시우는 아들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사람이니까요.”

“사실 말입죠. 겉보기로도 썩 다르지는 않습니다. 시우는 분명 서로 이름을 기억하며 서로를 형제처럼 여겼을 직속 부하들에게 죽을 때까지 흙탕물을 마시라고 명령했으니까요.”

이렇게 초를 치지 않고서는 견디기 어려우니 태학관 시절 내 주둥이가 그렇게 수난을 겪은 것도 이해가 갔다.

그렇지만 천사님은 내 주둥이를 당기려 드는 대신 허탈하게 웃었다.

“예, 그렇지요. 두 사람의 본질은 결국 똑같습니다.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그 무언가를 위해, 나머지 모든 것을 깎아내고 버렸다는 부분이 말입니다.”

부하.

체면.

자존심, 명예, 우정….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도, 두 남자는 던져버릴 수 있었다.

그렇게 보면 시우와 관련된 스킬을 통해 함호가 죽음을 맞게 된 것을 두고 일종의 인연이라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천사님은 한탄하듯 말했다.

“시우의 경우에는 이세라는 실체라도 있었지요. 자신의 아들 말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방금 말한, 벗과 이웃을 위해 힘내자는 식으로 이해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투아의 함호의 경우에는… 나라라는 것에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뭐 이세를 실체라고 하신다면 똑같이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함호 자신의 가족이 약탈당하는 걸 막기 위해….”

“함호는 결사대를 이끄는 역할을 맡기 전에 자신의 가족들을 모두 죽이고 나왔다고 합니다.”

음.

“그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함호의 부관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사호를 놓친 검병들이 돌아와 함호의 부고를 전하자 꺼낸 이야기였습니다.”

과연, 그랬던 것인가.

하기사 그럴 만한 남자였다. 적에게 이로운 것을 남겨두지 않고자 자국을 불태운 자들의 우두머리가 가족들만 안전한 곳에 빼돌려 두었다면 이상했으리라.

새삼스럽게 깨달음을 얻고 있자니, 천사님이 두 손을 들어 자신의 목에 난 상처를 매만졌다.

“나라라는 것은, 대체 뭘까요.”

나는 시선을 돌렸다.

“천사님. 저한테 그걸 살려 달라고 말하신 분이 그게 뭔지 여쭈셔도 곤란합니다요.”

“예, 간신이여. 제가 바로 당신에게 말했습니다.”

‘살려 달라’고, 그녀는 말했다.

“나라를 살려 달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의미를 좀 더 곱씹어보고 싶어 진 것입니다.”

나라란 무엇인가.

“글쎄요, 천사님.”

나는 시선을 돌린 그대로 답했다.

“제가 자주 말하는 방식으로 정리를 하자면… 아무리 커다란 집단이라고 해도 결국 작은 집단들의 결합체에 지나지 않는 바…. 뭐 그런 식으로 정리할 수야 있겠지요.”

천사님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간신이여. 그리하여 야리소연의 시대에 그것은 가족과 이웃이었습니다. 아리야의 시대에 그것은 가족과 이웃과 다시 그 이웃의 가족들과 다시 그 이웃이었습니다. 비류아의 시대에 그것은 비로소 왕국이라 불릴 만큼 커졌습니다.”

“나투아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나투아라 불릴 만큼 커진 것일 테고요.”

“커지다 보면 엷어집니다. 흐려집니다. 잘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더욱 이해하기 어려워졌습니다…. 간신이여, 그대의 말처럼 자그마한 부속품들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라면-.”

“-대체 왜 부속품들이 스스로를 죽여 가며 그런 잘 보이지도 않는 것을 위해 그만한 희생을 치르는지 말이죠?”

“답을 압니까?”

애국심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정당한 감정이 맞는가. 그저 허황된 공상에 불과한가.

“글쎄요.”

나는 두 무릎을 감싸 안았다.

“저도 그것이 참 궁금했던 사람입니다.”

구체적으로는 태학관에 다니던 무렵부터 궁금했다.

“돈이란 것은 눈에 보이지요. 비단옷은 입을 수 있지요. 음식은 먹을 수 있지요. 음악과 서화와 희곡은 즐길 수 있지요. 가족과 친구조차도 범벅하게 분류하자면 ‘즐길 수 있는 것’ 안에 들어갈 겁니다.”

그것들은 만질 수 있다.

“만질 수 있는 것들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이해하기 쉬웠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처럼 구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있었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해하기 어려울수록 비웃기는 쉽지요.”

그냥 ‘멍청하니까 휩쓸리는 거야’, ‘무슨 영광을 누리겠다고 저런 짓을 해’, ‘나라면 절대로 저런 병신 같은 짓은 안 해.’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는 것뿐이라고, 왜냐하면 하는 것이야말로 우둔한 일이며 하지 않는 것은 실로 현명한 일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쾌감을 얻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해왔습니다만은….”

그렇지만 나는 어느 임무 중에 한 남자의 최후를 보았던 것이다.

더 이상 비웃기 어려워졌다.

“거기 있는 것을 없다고 여기는 것은 멍청한 일이지요.”

이미 한 차례 그렇게 했다가 20만이 넘는 개떼들에게 나라째 뜯어 먹혔으니, 그보다는 좀 더 똑똑하게 굴어야 할 것이었다.

“그러니까 더는 외면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시우였기 때문에 특별하게 할 수 있었던 일이 아니었다.

당장 시우의 부하들이 해냈던 일이었다.

생전에는 내 동기가 해오던 일이었고 내 선배가 해왔던 일이었으며 여왕님이 하려던 일이었다. 사후에는 야리소연이 하던 일이었고 아리야가 했던 일이었으며 비류아가 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심지어 마나, 그 등신 언니조차 해냈던 일이었다.

거듭, 나투아의 함호가 하던 일이기도 했다.

더 많은 이들이 있을 것이다. 개중에는 역사에 발자국을 새긴 영웅들도 있을 것이고 누구의 기억에도 남는 일 없이 사라진 민초들도 있을 터였다.

“이미 많은 이들이 해오던 그 일을, 앞으로도 많은 이들이 해나가겠지요.”

나라를 살리는 것.

“답을 아느냐고 여쭈셨지요, 천사님.”

“예, 간신이여.”

천사님 역시 나처럼 고개를 흘기고 있었다. 시작했을 때만 해도 눈빛을 마주친 채였던 우리는 어느덧 그렇게 나란히 앉아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말했다.

“나라가 무엇인지.”

“나라를 살린다는 게 뭔지.”

잠시간 침묵이 흘렀고,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까….”

천사님이 고개를 수그렸다. 힘 빠진 목소리였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그러니까 알아가야죠.”

천사님이 고개를 들었다. 나도 고개를 들었다.

우리는 다시 시선을 마주쳤다.

다시 한 번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나도 그렇고 천사님도 그렇고, 이런 상황에서 무어라 더 말을 덧붙이긴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사실 덧붙일 말이 더 없기도 했다. 앞으로 알아가야 할 것들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덧붙여본들 태학관 시절처럼 돼냥이들의 한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알아갈 시간은 많다. 알 수 있을 사건들도 많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 중 하나에 집중하기로 했다.

“사호가 탈출했다고… 함호가 자신의 가족을 죽이고 나왔다고 나투아의 부관이 말하는 걸 들으셨다고 하셨지요.”

천사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간신이여. 그리 말했습니다.”

“흠. 그럼 밖에서는 아직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는 뜻이겠군요.”

천사님의 면포가 살짝 물결쳤다. 오래지 않아 그 물결은 끄덕임 속에 수속되었다.

“예. 당신의 빙의체는 죽었습니다만 전장에는, 아직 죽지 않은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임무 표시가 왜 갱신이 안 되는가 싶었는데 그런 이유였군요.”

아직 주사위가 멈추지 않은 것이다.

‘자모신 시스템은 실패든 성공이든 더 이상 변수가 없다고 여길 적에 표식을 찍어주지.’

내가 빙의해있던 시현군은 죽었으므로 더 이상 전황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하거나 성공하지 않았다는 건 아직 전황이 미생 속을 헤매고 있다는 뜻이리라.

이제 전쟁은 의미 그대로 산 자들의 몫이 되었다. 나로서는 주저앉아 그 주사위 눈이 제대로 나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나를 지켜보던 저승 입주자들도 이런 심경이었겠구나.’

나는 새삼스럽게 깨달았고, 이내 그 심경을 더 잘 느낄 수 있을 방법 또한 깨달았다.

“천사님.”

“예, 간신이여.”

“저한테도 좀 보여주실 수 있으십니까?”

천사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습니다.”

그리고 천사님은 그렇게 했다.

◈          ◈          ◈

사호와 시현군이 함호와 영혼의 한판 대결을 벌이는 동안, 왕국군 후방 부대와 나투아 결사대 또한 폐허가 된 도시에서 부딪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