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대하대첩 (9)
‘야리소연.’
[첫 번째 은월: 적 증원군 달려오려면 몇 분은 걸릴 거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애들이 제대로 방향 잡고 달려온다고 해도 말야. 혹시나 그렇게 되면 곧바로 알려줄게.]
‘좋아.’
그렇듯 나에겐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나투아의 총 지휘관, 함호의 대가리를 깨는 것 말고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었다. 시간.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보고자 나는 입을 열었다.
“나는 그대들이 말하는 월국의 왕자로서-.”
다만 함호는 그런 내 개수작을 두고 보지 않았다.
“쳐라.”
네 명의 검병이 곧바로 튀어나왔다. “염병,” 나는 곧장 담장 바깥으로 굴러내려 몸을 숨겼다. 검병들은 담장을 넘으려 들었지만 그 전에 함호가 말했다.
“두 명만 쫓아라. 그나마도 멀리 쫓지 마라.”
빌어먹을.
‘진짜 만만찮은 개새끼네.’
하긴 ‘함호’라는 칭호를 받은 만큼 당연한 것인가.
나투아 최초의 함장이며 최초의 침몰자가 되었다는 ‘심해에 가라앉은 아버지를 대리하는 해웅(海雄)의 직속 부하들.
처음으로 배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었다는 ‘계곡의 노파’, 그녀의 지혜를 따라 최초로 항해술을 알려주었다는 ‘강의 처녀’, 그녀의 인도를 따라 물길을 장악하고 땅에서 나는 것을 취해 살아갔다는 ‘개울의 소녀.’
나투아의 세 여신, 그녀들을 대리하여 노략질을 총괄하는 이들이 바로 세 명의 함호(艦豪)들이다.
나투아 결사대의 총지휘관은 바로 그 세 명의 함호 중 한 명이었다. 당대의 왕국으로 갈음하면 공작급에 해당하는 거물인 것이다. 만만치 않은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떻게 한다?’
호위로 붙은 12명의 정예 검병.
하누리와 시우, 비류아 셋이 보장하길 모조리 달인급이라고 했다.
‘스킬 Lv로 치환하면 Lv.3 내 도끼술이랑 동급이란 뜻이지 이거.’
그렇다면 1 대 1로 붙을 때 이길 가능성은 절반. 그리고 2 대 1 이상으로 붙는다면 필패다.
‘이쪽에는 사호가 있긴 하지만….’
저승 입주자의 시야로 적의 움직임을 감시하듯, 아군인 사호의 위치 역시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투입 신호도 정해놓은 만큼 원하는 시점에 투입시킬 수 있는 셈이었다.
‘3 대 1까진 가능하겠는데… 그 이상은 무리일 거야.’
아니, 정말 내 도끼술 수준과 비슷하다면 한 명이 사호를 전담하여 방어에만 치중한다고 해도 5분은 벌 수 있을 것이다. 이 또한 북벽에 있을 때 비류아가 지적했던 부분이다. 그리고 그 5분 안에 사호를 떨어뜨릴 수 있는 지혜와 병력을, 함호는 지니고 있을 것이다….
‘음.’
[첫 번째 은월: 쟤네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어. 경계는 하고 있지만 아무튼 계속 동문을 향해 이동 중.]
‘나 추적하던 움직임은?’
[첫 번째 은월: 끊어짐. 다시 움직여도 되겠어.]
‘좋았어.’
나는 천천히 소리를 죽이며 뒤따랐다. 사호 역시, 저승 입주자들에 의하면 도시 안에서 불탄 건물과 그림자 사이를 오가면서 함호 일행을 잘 따라붙고 있다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와 사호, 그리고 함호 일동은 한동안 조용히 걸었다. 동행은 아님에도 보조를 맞추며 서로가 가까이 있다는 걸 아는 기묘한 여정이었다. 그런 우리들이 남겨놓고 온 뒤에서는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달빛이 유독 피처럼 축축한 밤이었다.
‘어떻게 죽이지?’
그 밤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생각했다. 저승 입주자들도 의견들을 내놓았다.
[최초의 성녀: 야리소연으로부터 정확한 위치를 받아 지금 이 담장 너머에서 도끼를 던져 죽인다는 건 어떤가요?]
‘착탄점 받아 곡사인가. 도끼가 좀 많다면 시도해 볼 만 하겠소만 하나밖에 없군.’
[첫 번째 은월: 거기다가 계속 이동하고 있기도 하니까… 으으음. 이거 어렵네. 다시 담장 위로 조용히 기어 올라가서 몸을 던지는… 아니다. 그러기엔 또 담장 안쪽에 붙어있질 않아.]
‘그리고 아마 호위병들로 자신을 두르고 있겠지?’
[개천의 시왕: 맞다. 털끝만큼도 방심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군. 적으로서 올바른 판단이다만, 아군 입장에서는 그래서 더 어렵군.]
세 은월뿐 아니라 다른 입주자들도 그녀들을 통해 의견을 내놓았지만 특별히 돋보이는 것은 없었다. 애초에 쓸 수 있는 패가 너무 한정되어 있었다. 그런 가운데 상대가 특단의 경계심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망할 노릇이었다.
‘그나마 해볼 만한 팻감은 보급품을 호위하게 남겨뒀던 병사들을 데리고 다 함께 덮친다는 건가.’
하지만 기도비닉에 능한 자는 보급품을 숨겨둔 장소에 두 명씩밖에 없었다. 보급품을 세 군데 분산시켜 두었으니 모두 끌어 모아도 6명을 넘기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이 왕국궁을 지닌 채 숨어 사격하면 어떻게든… 아니, 앞질러가 끌어 모은다는 것부터 무리수인 데다가 신호탄을 날릴 틈을 주는 순간 저 쪽의 승리가 된다….
[간신 조련사: …어렵군요.]
[최초의 성녀: 쉬울 수가 없는 일이겠어요. 예언자님도, 저 사람도. 자신이 속한 집단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는 만큼요.]
[간신 조련사: ….]
천사님은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말할 것이 있지만, 지금은 말하지 않겠다는 분위기. 왜 그런 지에 대해서는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저승에 돌아가서 이야기 좀 해봐야겠지.’
그러자면 우선 임무를 성공시켜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상대도 떠올릴 수 있다. 떠올릴 수 있다면 대비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저승 입주자들 의견이 대부분 통용되지 않은 것도 이유가 있다면 이유가 있었다. 몇 번이나 말해왔듯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일은 사람이 생각하여 따라잡을 수 있는 법이니까.
그건 곧 사람이 대비할 수 없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사람으로선 떠올릴 수 없는 것을 떠올려야 한다는 의미인데, 내가 사람인 이상 그런 것은….
‘….’
잠깐만.
[첫 번째 은월: 가리비수?]
‘잠깐만. …음. 잠깐만.’
잠시 후, 나는 고개를 들었다.
‘좋아.’
한 가지 방법이 떠오른 것 같다.
◈ ◈ ◈
동문 주변에 도착했을 무렵, 나투아 탐색대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나라면 여기서 덮칠 것이다.”
함호가 중얼거렸다. 자신의 호위들에게 대비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화살을 쏘는 것이다. 대비해라. 내게 날아오는 화살이 있다면 몸으로 막아라.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생존시켜라.”
그 말에는 어떠한 사심도 없었다.
그러므로 반발도 없었다.
“예, 함호님.”
“알겠습니다.”
나투아 검병들이 대답했다.
각오가 서린 그 말들에, 함호 또한 각오를 밝히는 것으로 대답했다.
“내가 반드시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겠다.”
비장하기 그지없는 각오였다.
하지만 물론, 비장한 각오는 다른 사람 또한 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조소당하기 쉬운 것이다.
“누구 맘대로냐요?”
여인의 목소리, 동시에 쉭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허공을 갈랐다.
“함호님!”
방금 나누었던 말처럼, 미리 대비하고 있던 검병 하나가 함호의 앞을 막았다. 퍽 소리와 함께 그의 어깨에 단검이 틀어 박혔다. “큭,” 인상을 찡그렸으나, 검병은 무력화되지 않는 것으로 자신이 정예라는 사실을 당당히 증명했다.
모든 검병들이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그리하여 단검이 날아든 방향을 바라보려 했을 때였다.
“넷은 그 반대 방향을 대비해라!”
함호가 말했다. 검병 넷은 그렇게 했고, 그리하여 동문 위로부터 펄쩍 뛰어내리는 한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월국의 왕자!”
반대쪽에서는 단검을 던진 여인이, 그리고 하늘에서는 도끼를 든 남자가 덮쳐 들어왔다.
“우습군!”
함호가 외쳤다. 그는 정예병들 중심에 서서 완전한 경호를 받고 있었다.
“고작해야 이건가! 이걸로는 나를,”
“아가리 싸물라요!”
여인이 달려드는 기세 그대로 단검 두 개를 동시에 던졌다. 하나같이 머리를 노린 투척이었으나, 표적이 된 검병 한 명은 역시나 몸을 틀어 어깨에 맞았고, 나머지 한 명은 아예 칼날로 튕겨냈다.
“고절한 솜씨지만,”
상처 없는 여섯 검병이 검진을 짠 채 여인을 향해 흘렀다.
“그 정도로는 무리다!”
여섯 자루의 검이 여인을 향해 쏘아졌다.
“너는 무왕이 아니다!”
“젠장,”
여인은 무술보다는 곡예에 가까운 동작을 펼쳐 그 검격들을 피했다. 그나마도 완전히는 피하지 못했다. 한 쪽 눈을 내내 감고 있었는데, 아마 그로 인해 시야가 제한된 것이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여인은 피륙에 상처를 입은 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여섯 검병이 한 걸음 나서 여인을 둘러쌌다.
그것으로, 여인과 함호 사이에는 칼과 사람의 장막이 생겼다. 완벽한 차단이었다.
남은 것은 도끼를 든 월국의 왕자였지만, 이쪽은 훨씬 더 쉬웠다.
“하앗!”
날다람쥐처럼 활공하는 월국의 왕자를 향해, 네 명의 검병이 동시에 검을 내질렀다. 양측 모두 결사의 각오를 실체화한 공방이었다.
교차했다.
쾅…! 검병 한 명의 머리가 쪼개졌다. 그와 동시에, 세 자루의 검이 각기 월국 왕자의 왼쪽 어깨, 아랫배, 그리고 허벅지에 쑤셔 박혔다.
“커헉,”
월국의 왕자는 무릎을 꿇었다.
◈ ◈ ◈
사호는 포위당했고, 나는 칼침 세 방으로 무력화당한 바로 그 순간.
함호의 입가에는 야트막한 미소조차 없었다. 그는 그저 냉철하게 나를 노려보며 내 뒤에, 혹은 주변에 또 다른 습격자가 있지 않을지 경계했다.
‘감탄스러운 녀석.’
하지만, 나에 대해서는 더 이상 경계하지 않았다.
‘무력화했다고 생각할 테니.’
독심술을 쓰지 않아도 그쯤은 알 수 있었다. 사람의 생각은 사람이 알 수 있는 법이니까.
그리고, 그 생각은 분명 올발랐으리라.
‘내가 아니었다면.’
나는 스킬을 썼다.
[ 불굴의 인내력(Lv.4)을 사용합니다. (1/3) ]
[ 30초 동안, 모든 고통을 무시하고 움직일 수 있습니다. ]
그리고 나는 칼에 꿰인 그대로 목 놓아 울부짖었다.
“우오오오오오오오오!!”
내 아랫배에 칼침을 쑤셔 박은 채 히죽 웃고 있던 나투아 검병 한 명의 안면을 도끼 뒤축으로 쳐 날렸다. “억,” 코뼈와 이빨이 부서지며 나투아 검병이 뒤로 쓰러졌다.
[ 불굴의 인내력(Lv.4)의 효과가 종료될 때까지 28초 남았습니다. ]
그와 동시에, 나는 튀어나갔다.
[ 27초 남았습니다. ]
사람의 몸은 쉬이 상한다. 상하면 상한 만큼 둔해지고 약해진다.
몸 곳곳에 칼이 박힌 남자가 갑자기 전성기의 움직임을 보이는 것 따위는, ‘사람’으로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노릇이었을 거다.
“나는,”
이는 이미 법왕가 망나니 유미 시절, 인성 쓰레기를 상대로 증명한 바 있었고,
“너를,”
심지어 혼자서는 도저히 상대할 수가 없던 괴물, 사호를 상대로 정통으로 유효타를 먹일 수 있었던 전법이었다.
“죽인다아아아!”
이 세상에서 오직 내게만 가능한 방법이었다.
“어찌,”
함호가 중얼거렸다. 이 순간에도 그는 냉철했다. 모두의 사고가 굳어버려 움직임이 멎어버린 속에서도 그는 삐그덕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 24초 남았습니다. ]
뒤로 물러나진 않았다. 뒷걸음질을 쳐서는 달려오는 나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다.
[ 23초 남았습니다. ]
뒤로 돌아서지도 않았다. 그렇게 뒤를 보이는 순간 내가 도끼를 집어 던지면 방어할 수가 없다.
[ 22초 남았습니다. ]
냅다 나뒹굴지도 않았다. 마찬가지로 내가 도끼를 집어 던지면 방비할 수가 없는 것이다.
[ 20초 남았습니다. ]
그러므로 그는,
“심해에,”
모시는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검을 빼냈다. 지금 내 몸에 박혀 있는 것들과 동일한 검. 나투아인들의 장신을 닮은 세검이 밤바람을 가르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 18초 ]
달리던 나는 가슴을 열었다.
[ 17초 ]
반사적으로, 내 가슴을 향해 함호의 검이 쏘아졌다.
[ 16초 ]
내 심장이 정통으로 꿰뚫렸다.
“아하,”
나는 웃었다. 그 웃음을 보자마자 함호가 이를 악물었다.
그는 검 손잡이를 놓으며 뒤로 물러서려 했다.
나는,
[ 15초 ]
“늦었어.”
[ 14초 ]
“처음부터,”
500년 뒤, 대륙에서 대흥행을 맞이하게 될 어떤 경극 악역의 대사를 그대로 빌려오자면-
“내 목을 날렸어야지!”
나는, 도끼를 휘둘렀다.
[ 13초 ]
달빛을 되비쳐 형형한 도끼날이, 함호의 머리를 정통으로 찍어 쳤다.
쾅 소리와 함께, 밤이 세로로 쪼개졌다.
일순간, 시간이 얼었다.
아무도 반응하지 못했다. 사호조차 반응할 수 없었는지 멈춰서 있었다.
그 정적은, 남자의 신음으로 깨졌다.
“아,”
함호가, 신음하며 턱을 젖혔다.
그는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했다. 그러나, 꾸룩, 그 입술에서 흘러나온 것은 피거품뿐이었다. 냉정하고 철저하던, 그리하여 잘 다듬어진 금속처럼 윤기가 번들거리던 눈동자로부터 빛 무리가 흩어졌다. 탁해진 눈동자는 통째로 빙글 돌아갔다.
털퍼덕. 함호가 무릎을 꿇는 소리였다.
나투아의 국운이 무너지는 소리이기도 했다.
그제야, 시간이 흘렀다.
“■호님!”
비명.
“어,”
“아니, 어■, 심■을,”
당황.
“이 ■■식이!”
노호.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폭발했다
“아하,”
아마도 나는 계속 웃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나를 향해, 무수한 칼날이 날아들었다. 뒤늦은 비명이, 늦어진 당황이, 때를 놓친 노호가, 나를 쑤셨다. 저몄다. 썰었다.
다져버렸다.
그리고 그 중의 하나는 아예 내 눈을 꿰뚫고 뇌를 파헤쳤다.
“■■■!!”
사호의 목소리,
비명 같은,
그리고,
[ 불굴의 인내력(Lv.4)의 효과가 끝났습니다. ]
■■,
■, ■라■, ■■■■,
여왕■■ 포■■■ 카한■ ■아가야■,
■■맞은 가슴이 타는 ■ ■■■.
나는 ■ 속에,
아,
[ 당신의 빙의체가 사망했습니다. ]
흩어지고 무너져 문장이 되지 못하는 단어들 속에,
이 삶의 끝을 알리는 무미건조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 미션이 종료됩니다. ]
그리고, 어둠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