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대하대첩 (7)
양측의 기병대가 부딪히는 동안, 나투아의 부관이 물었다.
“어떻게 합니까, 함호님? 쏩니까? 아니면,”
교전이 시작된 순간부터 시간은 어그러진다. 공간이 허물어진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모호해져 모든 것이 흐드러지고 또한 흐트러진다. 완생 없이 미생만이 산재한 십구로 위에 지휘권을 가진 이들은 실시간으로 돌을 놓아야만 한다.
그러기에 모든 판단은 한 순간에 내려져야 하며, ‘조금만 기다리라.’는 말은 무엇보다 용납할 수 없는 말이 된다.
“이미 얽혔다. 하므로,”
나투아의 지휘관이 말했고 부관이 그 말을 받았다.
“아군째 쏴야겠지요. 쏩니까?”
“아직.” 지휘관은 생각하는 것과 동일한 속도로 말을 이어갔다. “위치가. 이대로 쏘면,”
“아군 기병들의 피해가 훨씬 크겠군요. 도시 남문이 장해물 역할을 해서,”
곡사를 방해하고 있다. 뒤에 대고 직사를 할 수밖에 없는데, 부관의 말마따나 아군 기병들의 꽁무니에 대고 쏘는 꼴이 된다. 안 된다. 이 모든 생각을 지휘관은 떠올렸지만,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시간이 없었다.
같은 이유로, 기병대를 먼저 돌격시킨 것 자체가 실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리에 스쳤지만 그것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이미 착수한 돌이다. 그렇다면,
“모두 돌격하라!”
거기에 맞는 돌을 계속 놓아갈 뿐이다.
아직은 미생이다. 자신들도 그렇다. 상대방도 그렇다.
완생 없는 전장이어서 거꾸로 활로가 있었다.
◈ ◈ ◈
“우선 하나!”
내가 도끼를 집어 던져 나투아 기병의 머리를 쪼갰다. 튀어 오르는 피와 뇌수, 그리고 안구. 육편의 폭죽 속에 나는 두 번째 도끼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 둘,”
“누구 마음대로 둘이여!”
노호한 나투아 기병이 창대로 내가 탄 말 대가리를 후려쳤다. 말이 고개를 젖히며 비명을 지르고, 다음 순간 크게 몸을 뒤틀었다. “이런 젠,”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창촉이 살아있는 뱀대가리처럼 휘어들며 내 머리를 향해 쏘아졌다.
“워메!”
나는 곧장 말에서 떨어지듯 굴러 내렸다.
시야가 뒤바뀌었다.
말 위에서 보이는 것과 말 아래에서 보이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이 춤사위를 추듯 날뛰는 속에서 먼지와 말 다리 외에는 아무것도 안 보였다.
나한테는 안 보였다는 뜻이다.
[첫 번째 은월: 가리비수! 아주 약간 오른쪽, 그리고 조금 위!]
“씨벌, 어디서 나려타곤(懶驢打滾)이여 그것도 말 위에서! 왕자라는 새끼가 쫀심도,”
“없다 이 새끼야!!”
보지도 않고 도끼를 집어 던졌다. 퍽! 야리소연이 말해줬던 방향에서 박살나는 소리와 함께 감히 내 쫀심을 공격하던 자존감 흡혈귀도 쪼개졌다. 그와 동시에 승마자를 잃은 내 말도 구슬픈 비명과 함께 누군가의 창에 맞아 쓰러졌는데, 그건 나를 감정의 이중 나선 속에 빠뜨리는 일이었다.
물론 나는 냉정하게 자신을 다잡고 감상했다.
“난 이제 뭐 타라고 뒈지고 지랄이야 빌어먹을 말새끼야!”
‘지금까지 날 태우느라 수고했다, 나의 말아. 편히 쉬거라.’
[간신 조련사: 어… 말이랑 생각이 바뀐 거 아닙니까?]
‘그딴 건 아무래도 좋, 아 염병! 잠깐만요! 쫌만 있다가!’
나를 짓밟으려 드는 말발굽을, 옆으로 펄쩍 뛰어 구르면서 피했다.
“에이 진짜,”
말발굽들이 나를 너무 좋아했다. 자꾸 쫓아왔다. 나는 말하다 말고 계속 굴러야했다.
그 와중에 몸이 흙과 피로 범벅이 되었지만 창빵 먹는 것보다야 좀 더러워지는 편이 나았다.
어차피 난 이미 더럽기도 했다. 전장에서 무슨 청결? 부상자 사망률이 높은 이유 중 하나가 이렇게 비위생적인 환경이라 날붙이에 스치기만 해도 감염 올라 뒈질 수 있어서였다.
이렇게 또 한 차례 내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니 똥구멍에 불 붙은 망아지 새끼마냥 자존감이 울뚝불뚝 솟아서 다 죽여 버리고 싶어지네 아주 그냥. 이 말발굽 주인새끼부터 죽여 버려야지 빌어 처먹을 진짜 염병.
[간신 조련사: 저 간신 지금 뭐라는 겁니까…?]
[개천의 시왕: 냅둬라. 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간신 조련사: 어… 그래도 우리 간신이 그럭저럭 전투 경험은 있는 편입니다만….]
[개천의 시왕: 길잡이가 언급했듯 말 위의 풍경과 말 아래의 풍경은 같지 않다. 딱 봐도 이기고 있는 싸움과 이기는지 지는지 감도 안 잡히는 난전은 더욱 다르지. 그보다 길잡이여, 빈 말이 그대의 뒤에 지금 한 마리 지나가고 있다.]
‘캬! 역시 우리 시왕님! 천사님 진짜 우리 시왕님 본 좀 받으세요! 오랜만에 튀어나오셨다 싶더니만 집중 안 되게 삽소리 주절거리시는데 아주 그냥 입에 숙련 노잡이를 붙여놓으셨나 떠벌떠벌 말이 많아요! 말이 많은 건 좋은데 도움이 되는 말을 해주셔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요 안 그래요? 우리 천사님 반성 좀 하시고.’
[간신 조련사: 예…. 나중에 이야기하지요….]
그렇게 천사를 물리친 나는 시왕님이 말했던 말에 올라타고자 펄쩍 뛰었다. 실패했다. 말새끼가 이게 뭔 극혐이냐는 듯 고개를 젖히면서 내 손길을 거부한 것이다.
“아니 이 빌어먹을 축생 놈의 자식이?”
세상의 부조리에 절규하자마자 누군가 내 뒷덜미를 붙잡았다.
“진짜 가지가지한다요, 우리 왕자님….”
읏차하는 소리. 절묘한 균형으로 이루어진 조력이 있고, 다음 순간 나는 말 모가지를 붙잡은 채 어찌어찌 올라탈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말 위의 시야를 되찾았다. 여전히 적아가 뒤섞여 개판이 펼쳐져 있었지만 피아조차 구분되지 않던 아래보다는 단연 나았다.
음.
“고맙구나 사호. 이 공은 장차 역사가 크게 평가….”
“아, 지랄 말고 싸우기나 하라요!”
“넹.”
나는 그렇게 했다. 싸웠다. 구체적으로는 도끼를 던지고 또 던졌다. 아무리 도끼술 Lv.3이라도 평지가 아니라 요동치는 말 위에서는 한계가 있는지 백발백중은 아니었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다만 투척용 도끼가 다 떨어졌을 뿐.
“도끼 가지신 분?”
“있을 리가 있냐요!? 무기 떨어졌으면 빠지라요!”
나는 눈을 부릅떴다. 어찌 일국의 왕자로서 무기가 떨어졌다는 이유로 물러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마음을 담아 나는 준열하게 꾸짖었다.
“싫어! 나 혼자 떨어지면 화살 맞을 거 아냐!”
“아 이런 미친, 아니 원래 이런 작자였지. 그럼 뭘 어쩌자는 거냐요, 미친 왕자 전하!?”
“도끼! 도끼 구합니다! 도끼 있으신 분 양보 바랍니다!”
문명인답게 나는 도움을 청했다. 이렇듯 냉정하고 이성적인 내 판단에 야만군주가 주제도 모르고 딴지를 걸었다.
[개천의 시왕: 길잡이여. 그대의 지금 상태는 알겠지만 개소리 하지 말고 그냥 빠져라.]
‘아니 왜요! 그러니까 지금 물러나면 화살받이,’
[개천의 시왕: 1. 지금 기병 싸움에서 이기고 있다. 2. 나투아 지휘관의 성향을 봐라. 3 왕국 기병들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다 여겨지는 순간 나투아 궁병들이 곧바로 직사를 시작할 거다.]
‘아! 인정!’
과연 시왕님. 전설적인 전쟁군주 아니랄까봐 현명함이 뚝뚝 묻어나는 조언이었다. 나는 곧바로 말을 얼러 뒤로 물러났다.
어디까지나 나 혼자만 슬쩍 빠졌다. 모두와 같이 빠지면 적 기병들이 쫓아올 테고 그러다가 뒤꽁무니 잡히면 숫자 차이가 있든 말든 학살당하는 건 시간문제니까 말이다.
그렇게 호다닥 물러나는 와중에도 전설급 시왕님의 분석이 이어졌다.
[개천의 시왕: 4 적 보병들도 몰려오고 있다. 5 도끼가 다 떨어진 지금 그대가 해야 할 일은 후방에서 우리들의 시야 보조를 받아 전황을 지배하는 일이다.]
‘맞는 말, 인정 또 인정합니다!’
거리를 두니 아수라장이 된 채 얽혀 싸우는 기병 무리가 한층 잘 보였다. 내가 대체 무슨 정신으로 저 지랄 난장에 한 다리 끼었던 건지 감도 안 잡혔다.
잠깐 처돌았던 건가? 아니면 왕자로서 용맹함을 보이기 위해 솔선수범했던 건가?
‘처돌이는 싫으니까 후자로 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끓어오르는 정념을 빠르게 가라앉힐 수 있는 나야말로 곧 논경에서 말하는 군자가 아닐까? 대륙에 있다는 성현의 전당에 내가 모셔질 날도 머지않은 듯했다….
[첫 번째 은월: 임마 비수야, 염병 그만 떨고 집중하자.]
‘그래 소연아. 하지만 필요한 과정이었단다.’
그리하여 안전거리를 확보한 나는 야리소연으로부터 나투아 측의 전황을 보고 받았다.
◈ ◈ ◈
기병들이 얽혀 싸우는 동안, 왕국의 병사들은 동문과 북문으로부터 들이닥쳤다.
전면에서 검병, 도끼병, 창병 가릴 것 없이 창을 앞세운 채 진격해 들어왔다. 그 뒤로는 왕국궁을 든 궁병들이 달렸다.
“야리소여어어어언!”
“시우우우우우!”
각자가 기리는 별들을 모시며 달리는 왕국병들의 기세는 실로 나투아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지진 해일과도 같았다.
나투아 병대에게 한 가지 행운이 있었다면 그것은 시간의 차이였다. 만약 왕국병들이 1분만 빠르게 들어섰다면 나투아 병대는 그야말로 앞뒤가 꽉 막혔을 것이다. 기병들만 남문으로 돌격시킨 상황에서 우면과 후면으로부터 들이닥치는 적들을 대비해야 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사람이 하는 일이다. 모든 것이 척척 들어맞는 일 따위는 없다.
그러기에 1초, 또 1초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며 전장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덕분에 나투아 병대는 하던 것에 전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 바로 남문을 뚫는 것.
나투아 기병대가 무너지기 직전, 나투아 창병들이 남문 앞에 도달했다. 화살을 시위에 메긴 채 대기하던 궁병들에게도 지시가 떨어졌다.
“던지고 쏴라!”
나투아 지휘관은 어차피 이미 ‘얽혀버린’ 나투아 기병대에게 후퇴 명령을 내려봤자 전달되지도 않을 것이고, 혼란만 가중될 것이라는 말을 생략했다.
생략된 말을 나투아병 모두가 잘 받아먹었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 모두가 도시 방화자였고, 동족 살해자였으며, 조국을 위해 죽음으로써 속죄하기로 맹세한 자들이었다.
결사대였다.
“알아서 피해!”
부관의 그 외침이 그나마 아군 기병들을 위한 것이었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창이 날았다. 화살이 날았다.
날카로운 쇠붙이가 나투아 기병과 왕국 기병을 가리지 않고 꿰었다.
“악!”
“크악!”
사람보다 말들이 크다. 간단한 갑주라도 걸친 사람과 달리 말들이 두른 것은 가죽뿐이기도 하다.
당연히 사람보다 말들이 더 많이 상했다.
“히이이이잉!”
길게 울부짖은 말들은 몸을 뒤틀거나 아예 나뒹굴었다. 위에 타고 있던 이들로선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화살에 직격당하는 걸 피한 이들 중 상당수는 나가떨어지거나 내동댕이쳐졌다. 몸이 날랜 이들은 그 와중에도 몸을 굴려 피해냈지만, 떨어진 위치나 부위가 좋지 않았던 이들은 말발굽에 짓밟혔다.
“크억!”
“어어어억!”
비명과 피와 먼지와 소란과 살점과 뼈와 뇌수와 내장이 어우러진 속에서 나투아 지휘관이 명했다.
“창 바꿔 들어! 전진! 계속 쏴!”
나투아의 결사대는 미친 듯한 고함을 지르면서 그 명에 따랐다.
“우와아아아!”
“호수의 용이여, 당신의 용맹을 빌려주소서!!”
“나는 땅에서 죽지 않는다!”
“가자! 심해에 가라앉은 아버지의 품으로!”
그리하여 왕국병들이 도시 중앙 부근쯤에 도달했을 무렵에, 나투아 보병진은 왕국 기병과 나투아 기병들 대부분을 주살하고 남문 앞에 진을 치는데 성공했다.
다만 그리 되자 말들과 사람의 시체가 자연적인 장해물이 되어 남문을 틀어막게 되었다.
“빌어먹을,”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나투아 지휘관으로서는 염병할 노릇이었다. 남문을 아예 빠져나간 다음 반전하여 포진을 제대로 잡아 왕국병들을 맞이할 수 있다면 최고였을 텐데, 그게 어려워진 것이다.
물론 시체로 이루어진 장해물인 만큼 완전히 막힌 것은 아니다. 그러니 어떻게 잘 빠져나간 다음 제 때 포진을… 안 된다, 약 2,000에 달하는 보병들, 덩어리가 너무 컸다… 그렇다면….
“방패병들!”
나투아 대궁처럼 나투아 방패 또한 그 크기가 크다. 그런 걸 들고 뛰자니 자연히 가장 뒤처질 수밖에 없다.
그 배치를 지휘관이 귀신같은 책략으로 의도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말과 사람의 시체로 쌓인 장해물들이 왕국군 지휘관이 신묘한 셈으로 의도한 것이 아닌 것처럼, 방패병들의 낙오는 그저 전장의 흐름에 따라 우연히 거기 놓인 돌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저 거기에 놓인 돌을 어떻게 쓰느냐가 또한 바둑꾼의 실력을 결정짓는 법이다.
“돌아! 모여! 박아!”
나투아 지휘관이 외쳤다. 부관이 그 말을 받아 더 크게 외쳤다.
“버텨!”
나투아 지휘관이 다시 부관의 말을 받아 외쳤다.
“여기서 싸운다!”
시체더미를 뒤에 두고서, 나투아 결사대는 결전 준비에 들어갔다. 방패병들은 뒤돌아 모여 터를 잡으려 했고, 창병들은 그런 방패병들을 뒤에서 받치고자 달려갔으며, 궁병들은 일제히 일제히 살을 메겼다.
그 모든 것이 제때 맞아 떨어졌는지는 객관적으로 모호했으며, 그러기에 조금 더 시간이 지나야만 판가름이 날 무언가였다.
왕국병들의 선두가 달리던 기세 그대로 나투아 방패병들과 부딪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