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대하대첩 (3)
해가 밝았다.
나는 잠깐 눈을 붙이고 나서 막사 바깥으로 나왔다. 저승 입주자들로부터 보고를 받아야 했기에 깊게 자진 못했다.
‘젠장, 안 그래도 전장이라 신경이 곤두서있는데. 잠도 제대로 못 자니까 뒈지겠네 진짜.’
야전은 진짜 사람 할 짓이 아닌 것 같다.
그런 내 생각은 날 향해 던져진 상쾌한 인사로도 증명되었다.
“이제 깼냐요?”
“조금 덜 깬 것 같군. 한 바퀴 구보라도 해보겠는가?”
사호는 단도를 내리면서, 이세는 대검 끝으로 바닥을 짚으면서 그렇게 한 마디씩 던져왔다. 이 와중에 서로 대련을 하는 걸 통해 자신들의 비인간성을 자랑하는 그 모습에 나는 기가 질렸다.
“됐고 회의부터 합시다.”
“음.”
오래지 않아 회의장에 지휘관급 이상이 모여들었다.
물을 한 모금 마셔 잠기운을 덜어내면서 나는 말했다.
“적이 진을 친 강변과 아군이 진을 친 이 도시 사이에 놓인 거리는 대략 6리입니다.”
무장한 병사들이 도보로 한 시간 내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
“어제는 불화살만 몇 차례 쏘다가 물러났지?”
현성대군이 물었다. 그 또한 긴장하여 잠을 잘 자지 못했는지 눈 밑이 퀭했다. 조금 전 사호와 이세를 보아서인지 그런 인간다운 모습이 나는 참 반가웠다.
“예, 탐색전을 걸어온 것이지요. …피차가 서로의 병력 구성을 파악한 셈입니다.”
무왕 이세는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어둠 속에 횃불들이 일렁이는 통에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겉보기에 병력은 비등해 보였다. 하지만 시현군, 우리들의 병력이 더 많다고 그대는 판단했었다. 그 판단에 틀림이 없는가?”
“예. 어제 싸움을 걸어온 이들만 치면 말입니다. 강변에 정박시켜두었다는 배, 그리고 설영(設營)에 힘을 쓴 이들을 보면 그 전체적인 숫자는 더 많다고 보아야겠습니다만….”
“우리가 미세하게나마 우위라는 의미인가.”
“제가 판단하기로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몰아쳐 쳐들어가는 것은 어떤가?”
“하지만 그리 되면 적도들에게 방어의 이점이 생겨버리지요.”
나는 비류아로부터 들은 이야기들을 내 식으로 각색하여 옮겼다. 이마를 꾹꾹 누르면서.
“적도들이 어제 잠자코 물러난 것 역시, 우리가 기병을 내보내어 후면을 점거하려 한 탓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때문일 겁니다. 수적으로 밀리는 상황에서 우리에게 방어의 이점까지 더해주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요.”
어느 쪽도 어느 쪽을 압도할 수 없는 이상 먼저 치는 측이 불리할 수밖에 없고, 그 불리함은 이 비등한 균형 속에서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현성대군은 그것을 간단하게 요약했다.
“먼저 치는 쪽이 진다는 거네.”
이세는 고개를 끄덕이고, 턱수염을 매만졌다.
“하다면 적도들의 병력을 최대한 깎아내거나 훼방하는 식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겠군.”
“예. 별동대를 써서 괴롭히는 것이지요. 정찰도 할 겸요. …이 부분에 있어서는 우리가 이점을 갖는다고 해도 좋을 겁니다.”
우리는 현재 100여기의 기병을 지니고 있다. 그들 모두가 말 위에서 왕국궁을 다룰 수 있는 정예들이다.
이를 통해 지속적으로 적들을 견제하고, 적들이 야영지에서 나오려는 움직임 자체를 제한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건 상대도 이제 알고 있을 거란 말이지….’
알 테니 대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너무 깊이 들어가면 안 된다.
‘그리고 가는 김에 제대로 정찰도 하고 싶고.’
그러자면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폐하, 제가 별동대를 이끌겠나이다.”
이세는 그 말을 예상한 듯 말이 없었다. 다만 기병대를 이끌던 마호라 자작이 난색을 표했다.
“저하. 괜찮으시겠습니까? 별동대란 곧 소수의 유격대이며, 조금 규모가 큰 정찰대이고, 필연적으로 결사대입니다. 기동력이 뒷받침해주고 있다고 하나 아주 사소한 변수로 불귀의 객이 될 수 있습니다.”
“괜찮지 않아도 해야 하지 않겠나. 이대로 틀어박혀 있는 게 더 못할 일일세.”
“…저하의 웅심과 충심이 실로 바르십니다.”
“그리 여긴다면 혹시 눈먼 살이 날아왔을 때 대신 맞아주게나.”
“하하하! 예, 반드시 그리 하겠나이다.”
농으로 여겼는지 마호라 자작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지휘관들도 따라 웃었다.
‘진심으로 한 말인데….’
얼마 후,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은 얼굴로 말에 올랐다. 거지같았다.
◈ ◈ ◈
별동대는 모두 30기의 기병으로 구성되었다.
어제와 달리 장창은 들지 않았다. 별동대라는 성격 상 장창을 보충해주기 위해 뒤따르는 보병들도 없었다.
대신 별동대는 왕국궁과 손에 익은 무기를 패용했다. 나야 궁술 Lv.1, 마상 궁술 같은 건 선보일 수 없으므로 투척용 도끼만 주렁주렁 달았다.
“그거 던져 닿는 거리면 이미 엿 됐다는 거다요. 던지려고 염병하지 말고 말머리부터 돌리라요.”
말 한 마리 얻어 타 별동대에 낀 사호가 말을 던졌다.
“말 안 해도 그럴 거다.”
나는 투덜거리며 그 말을 받았다.
그렇게 별동대는 천천히 적들의 야영지를 향해 나아갔다. 얼마 안 가 야리소연 통신이 들어왔다.
[첫 번째 은월: 경계 잘 서고 있네.]
야리소연의 시야에 적들의 야영지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어때?’
[첫 번째 은월: 어… 잠깐만. 보이는 대로 말하자면 말야….]
야리소연의 이야기를 비류아가 한 차례 걸러주었다.
[개천의 시왕: 야영지 외곽에 장창와 울타리를 결합시킨 장해물이 있다. 튼튼해 보이지만 홈을 따라 떼어내면 분리할 수 있게 되어 있군.]
거마창. 분리하면 곧장 단독으로 쓸 수 있는 창이 생기는 셈이다. 야영지에 남아있던 예비대에 그것을 하나씩 들려준다면 약 300에 달하는 창병까지 보강된다는 뜻이겠다.
[개천의 시왕: 그 밖에는 궁병들이 교대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활에서 손을 떼지 않고 있다.]
섣불리 접근하면 안 되겠고.
[개천의 시왕: 정박해 있는 배는 모두 6척. 병력 총 수는 어제의 1,200과 야영지에 있던 300을 더해 약 1,500이다.]
‘어라. 그럼 배 한 척당 약 300명을 날라왔다는 소리일까요? 나투아의 배가 아무리 넓고 좋다고 해도 그건 좀 무리인 것 같은데.’
[개천의 시왕: 그럴 리 없지. 배가 더 있다는 소리일 거다.]
‘그럼 그 배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개천의 시왕: 가장 가능성 높은 것은 추가 병력을 싣고 오기 위해 떠났다는 것이겠군.]
‘젠장.’
시간을 편으로 삼은 건 우리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앞으로 대략 사흘. 그 정도 시간이 흐르면 선발 부대가 돌아와 우리와 합류하게 된다.
적들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를 싸먹을 수 있는 기회는 딱 지금밖에 없는 셈. 무리를 해도 이상하지 않다 싶었지만, 적들 역시 믿고 있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비류아의 분석이 이어졌다.
[개천의 시왕: 야영지의 규모로 볼 때 대략 500명 정도가 추가되는 선에서 그칠 거다.]
‘그럼 총 병력이 2,000이 되네요.’
[개천의 시왕: 정예는 어제 모습을 보였던 1,200이겠지. 거기에 그럭저럭 한 명 몫을 할 수 있는 병사들이 800 추가된다고 보아야 하겠다.]
2,000대 1,500
500의 병력 차.
[개천의 시왕: 여기에 기병이 얼마나 추가될 지가 관건이겠다만… 많아도 100을 넘기진 못할 거다. 왕국 기병에 비하면 그 숙련도는 확실히 떨어질 테고. 다만 어설프게라도 적들에게 기병이 추가된다면, 그리고 병력의 숫자가 그만큼 불어난다면 어제처럼 100여기의 기병을 우회시키는 것만으로는 싸먹을 수 없게 된다. 하므로.]
비류아는 결론을 내놓았다.
[개천의 시왕: 나투아는 그 증원군을 실은 배가 도착하는 즉시 태세를 추스르고, 곧바로 우리 병대를 치려 할 것이다.]
‘그리고 그건 선발 부대가 우리와 합류하기 전에 반드시 벌어질 일이겠죠….’
입 안이 바짝바짝 마른다. 어쩌면 바로 오늘 밤에 그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내일 해가 뜨기 전에 결판이 날 것이다.
‘500의 병력 우위… 방어의 이점을 더한다고 해도 그 정도면 나투아 측에서 나서 볼 만 해.’
거기에 기병과 창병도 추가된다면, 정말 격전이 될 거다.
‘이건 수를 좀 써야겠네.’
[첫 번째 은월: 무슨 수?]
‘응. 솔직히 마음에 안 들지만….’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마음을 정리한 나는 병사들에게 말했다.
“일단 조금 더 가까이 가봅시다.”
“도중에 말들을 빠뜨리기 위한 함정 같은 게 파여 있진 않을까요?”
기병 중 한 명이 의문을 제기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시간은 없었을 겁니다.”
“너무 낙관적인 게 아닌가 싶습니다만….”
“괜찮습니다. 저를 믿으십시오.”
내가 우리 진영에 있을 무렵부터 야리소연의 시야가 닿았던 곳이었다. 그런 뻘짓을 하는 나투아병들이 있었다면 곧바로 기병들을 내보내 쓸어버렸을 것이다.
‘저승 입주자 시야가 사기는 사기란 말이지.’
거꾸로 말하면 이런 보조도 없이 단박에 전황을 파악하고 부대들을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녀석들은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걸까? 나도 머리가 좋다고 자부하는 편이지만 그런 작자들은 다른 의미로 머리를 타고 났다고 해야겠다.
[개천의 시왕: 어떤 것이든 통달하기 위해 거쳐야 할 경로는 같다. 경험. 그리고 그 경험을 쌓는 과정에서 죽지 않을 수 있는 행운.]
‘어려운 조건이네요.’
[개천의 시왕: 그러니 전쟁의 귀재는 거기에 더해 ‘재능’이 있어야하겠지. 그렇게 따지면 그대가 가진 이 조언들 역시 하나의 재능인 것이다.]
‘예. 그러니 죄책감 없이 꿀 빨랍니다.’
그런 사연까지야 알 수 없었을 테지만, 내 자신감을 알아본 덕인지 기병은 더 이상 반론하지 않았다. 나는 앞장서 말을 달렸고, 사호가 그 옆을 따랐다. 기병들 역시 나란히 따라왔다.
오래지 않아 우리는 나투아 야영지가 보이는 곳까지 왔다.
왕국민의 시력이 타 국민의 그것보다 월등하다지만 이곳은 평지. 나투아 경계병들 또한 우리를 알아보았다. 그들은 손짓을 하여 궁병들을 불러 모았다.
거마창을 겸한 야영지 울타리와 200여 미터의 거리를 사이에 둔 채, 별동대와 나투아병들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불온한 침묵.
그것은 나투아병 가운데 제법 지위가 있어 보이는 녀석이 고함을 지르는 것으로 깨졌다.
“무슨 일로 왔냐, 이 염병할 땅개 새끼들아!”
음.
‘이거 받아줘야 되죠?’
[개천의 시왕: 당연하지. 사실 네가 받으려 하지 않아도 너와 같이 온 자들이 가만히 안 있을 거다.]
그 말대로였다.
왕국 기병대가 탄 말들 대부분은 각자가 키워 나온 사유물들이다. 말을 키울 만한 여력을 가진 자들이었고 마상 무예를 연마할 만한 깜냥을 지닌 자들이었으며 영양 섭취를 골고루 하여 좋은 체격을 갖출 만한 여유가 있는 자들이었다.
요컨대 기병 하나하나가 명가의 전사들인 셈이다. 그리고 전사들은 칼질만큼이나 욕질에도 나름 일가견이 있었다.
내 곁에 서있던 기병 한 명이 곧장 대거리를 했다.
“니들이 왔길래 우리도 왔다, 이 뱃놈 새끼들아!”
처음 목소리를 높였던 나투아병이 더 목소리를 키웠다.
“우리가 가긴 어딜 갔냐! 빌어 처먹을 새끼들아! 듣자하니 땅 한 번 제대로 밟아보지도 못했다더만! 꼭 이렇게까지 해야 속이 후련했냐!”
“아주 그냥 뻥 뚫린 것처럼 후련하다 새끼들아!”
“니놈들이 그리 사람 죽이길 좋아하는데 그 업보를 그냥 넘길 수 있을손 싶으냐 이 짐승 새끼들아!”
“우리가 짐승이면 니들은 자기 집도 처먹는 벌레새끼들이냐? 왜 자꾸 자기 도시를 태워 먹고 지랄이냐? 어제도 그러더만, 니들 땅에서 살기 겁나겠다 야!”
“겁나면 돌아가시든가! 돌아가다 풍랑을 맞아 물귀신이 되더라도 바다에 가라앉은 아버지께서 니들 같은 놈은 물고기밥으로도 못쓰겠다며 퉷 뱉어버릴 것이다!”
“웃기고 앉아있네. 저기 해 뜬 거 보이지? 저게 왜 이글거리는 줄 아냐? 니들 애미 애비들이 저기서 아주 그냥 비명 지르고 난리를 치고 있어서다 이 후레자식들아!”
‘와.’
둘 모두 입에 아주 그냥 4단 노를 달아 놓은 것 같다.
[최초의 성녀: 말은 예언자님께서도 잘 하시지 않나요?]
‘나야 말을 잘 하는 거지. 욕은… 뭐 못하는 것도 아니오만.’
나는 심호흡을 했다.
‘덕분에 하려던 것이 좀 편해지긴 했군.’
[최초의 성녀: 아, 뭔가 수를 내신다고 하셨죠. 어떤 건가요?]
‘보면 곧 아실 거요.’
심호흡을 마친 나는 앞으로 나섰다.
물론 아주 조금만, 나투아 대궁이 절대로 닿지 않을 범위에서 멈추어 섰다.
외쳤다.
“나는 무왕 폐하의 피를 이은 왕자, 시현군이다!”
욕지거리를 내뱉던 나투아병이 주춤하여 멈추어 섰다. 대거리를 하던 기병도 그런 내게 놀랐는지 속삭였다.
“저하…?”
나는 그것을 무시하고 소리쳤다.
“나투아! 너희 중에 용사가 있거든 앞으로 나서라!”
나는 도끼를 들어올렸다.
“방해하지 않으며! 따라서 방해받지 않는 결투를 제안한다! 너희에게 왕자의 목을 딸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