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133화 (133/261)

133. 대하대첩 (2)

우리가 방어진을 치고 있는 마을 주변의 지형은 평야였다. 아니, 이 일대 자체에 고지대도 저지대도 없었다. 그것이 바로 이 마을을 방어 거점으로 고른 이유였다. 만약 언덕이나 동산 따위가 있었다면 마땅히 거기에 진을 쳤을 것이다.

그렇게 평평한 땅을 걸어 나투아병들은 조용히 접근해왔다. 우리가 진을 친 도시의 서쪽으로부터였다.

[첫 번째 은월: 셋이 하나씩 뭉쳐 있네.]

3인 1조.

[첫 번째 은월: 겁나게 큰 활 든 애 하나. 겁나게 큰 방패 든 애 하나. 칼 든 애 하나.]

궁병. 방패병. 검병.

[첫 번째 은월: 칼 든 애가 횃불도 들었네.]

조마다 횃불 하나씩.

[첫 번째 은월: 그게… 대충 400개.]

약 1,200명의 병사.

‘우리 후방 부대가 전부 해서 대략 1,500명이었지.’

1,200대 1,500 수적으로 300가량 우위에 있는 셈이지만, 그렇다 해서 병력차로 이길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1 300이란 차이는 적다.

2 저게 모든 병력이 아닐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3 병과 상성.

[개천의 시왕: 좋지 않군.]

비류아가 말했다.

[개천의 시왕: 창병이 없다는 건 가까이는 붙지 않겠다는 뜻일 거다.]

과연 그랬다. 나투아병들은 자신들의 활이 닿을 법한 거리에 이르자 멈추어 선 것이다.

[개천의 시왕: 본 부대에 속해 있는 기병의 수효가 103기였지. 지형은 평야. 땅이 무르다 하나 선발 부대가 휩쓸고 지나간 것으로 보아 기병이 돌진하는 무게를 버틸 수 있는 굳기. 굴리기 적합한 지형인 셈이다. 그런 속에 적들에게 창병이 없으니 이득을 많이 볼 수 있겠지만….]

‘다짜고짜 내보냈다간 화살 꽂이가 되겠죠.’

[개천의 시왕: 먼저 보병을 보내 난전을 유도한 뒤에야 가능하겠는데, 그러자면 3차례 정도는 화살을 뒤집어써야 할 것이다. 보병들로서는 도달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야기가 그리 오갈 즈음 나투아 방패병들이 쿵, 커다란 방패를 바닥에 찍었다.

나투아 영토에는 강줄기가 많았다. 그러기에 대부분의 땅이 물을 많이 먹었는지 그 토질이 물렀다. 그렇게 바닥에 꽂힌 방패들이 모이자 그것은 사람 가슴 높이까지 오는 즉석 방벽이 되었다.

그 뒤에 서서, 나투아 궁병들이 활을 들어올렸다.

방패를 바닥에 꽂은 나투아 방패병들은 허리춤에서 철퇴를 꺼내 들었다.

[개천의 시왕: …정예병 둘이 궁병 하나를 호위하는 형국이군. 역시 좋지 않다.]

동시에, 검병들이 들고 있던 횃불을 궁병들에게 들이밀었다.

대삭월로부터 시간이 흘러 달이 차오른 터라 어둡지 않은 밤, 야리소연의 시야에 의거할 것도 없이 그 활촉이 타오르기 시작하는 것을 나는 알아보았다.

‘불화살.’

나투아 궁병들이 활시위를 당겼다.

빠아아아아-!!

진홍 빛깔 나무가 휘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고문당하는 죄인이 내지르는 것처럼 몸서리쳐지는 소리, 그와 함께 타오르는 화살촉이 서서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타오르는 화살 400개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별들과 겹쳐졌다가, 유성우가 내리치는 기세로 짓쳐 내려온다.

따가가가각…!

나투아 대궁은 왕국궁만큼 연사력이 좋지 않았다. 대신 사거리가 길었고 그 위력이 강했다. 금속으로 만든 촉 대신 둥글게 말아 놓은 천을 달았음에도 불구하고, 땅바닥을 때리는 순간 들려오는 소리는 마치 한 섬의 콩을 통째로 튀겨버린 양했다.

땅에 부딪힌 충격만으로 화살대가 부러지고 깨어졌다. 화살대조차 기름을 먹여 둔 것인지 그것이 또한 곧 장작이 되었다.

불이 엎질러졌다.

“물러나라!”

내가 명했다.

‘요새화하는 와중에 목조 가옥들을 대충이나마 철거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도시 전체가 불지옥으로 변할 뻔했다. 그럼에도 우리를 살라 먹고 싶다는 듯 불길들이 넘실거렸지만, 곳곳에 파두었던 이랑들과 거기에 찰박거리는 깊이로나마 채워 놓은 물들이 그 접근을 가로막았다.

결국 그렇게 첫 번째 불화살 세례는 도시 서쪽 담장과 그 일대를 사르는데 그쳤다.

우리 측의 병력 손실은 없었다.

[개천의 시왕: 다만 거리 손실이 생겼군.]

그 말대로였다.

“방패-들어-!”

나투아병의 지휘관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철퇴를 다시 허리춤에 매어 놓은 방패병들이 방패를 힘차게 들어올렸다.

쑥 뽑혀 나온 방패들을 앞세운 채, 터벅, 터벅! 방패병들이 접근해왔다. 그 옆을 검병이 받쳤으며, 궁병은 그 뒤에 바싹 숨어 따라왔다.

그리고, 멈췄다.

[첫 번째 은월: …25보.]

나투아 인들은 장신이다. 그것을 감안해 보폭을 따지면 대략 66척가량 가까워진 셈이 된다.

‘대륙식 도량형으로 환산하면 약 20미터….’

그것은 나투아 대궁이 1할 더 가까워졌음을, 따라서 조금 전의 사격에 비해 사거리가 1할 더 증가했음을 뜻했다.

“다시 물러나라!”

내 명령에 따라, 왕국병들이 물러섰다.

그와 동시에, 쿵! 무른 땅을 다시금 나투아병들의 방패가 파고 들었다. 방패병들은 의식을 치루듯 허리춤에서 철퇴를 꺼냈으며, 검병들은 화살촉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궁병들이 활시위를 당겼다.

불화살이 하늘을 날아 바닥을 때렸다. 이번 역시 이랑에 가로막혔으나, 불이 지배하는 영역은 확실하게 한 단계 넓어졌다.

“방패-들어-!”

그것은 다시금 나투아병들이 접근해 올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뜻했다.

‘이런 젠장.’

나는 잇소리를 냈다. 단순하지만 효율적이다. 낭비가 없다. 확실하게 거리를 좁혀가면서 우리를 조금씩 밀어내고 있다. 그러면서 사이에 놓여 있던 방벽을 불의 들판으로 만들고 있다. 나투아병들을 향한 장해물들을 우리들에 대한 장해물들로 바꾸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시현군, 어쩌지!?”

현성대군이 다급하게 물어왔다. 요새화 계획을 주도했으며, 지휘관들 중에 그나마 가장 군사적 식견이 있어 보이는 내게 의견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군사적 식견 따윈 나한테도 없는데.’

하지만 다행히 그것을 가진 자가 있었다.

[개천의 시왕: 도리어 잘됐군.]

저승의 비류아가 늑대의 웃음을 짓고 있을 것이 선했다.

[개천의 시왕: 지금 즉시 기병을 남문으로. 조용히. 불과 매연과 소음이 이동을 가려줄 것이다.]

“마호라 자작, 휘하 기병들을 추슬러 남문으로 향하십시오.”

[개천의 시왕: 적이 다가오고, 방패를 박기까지 기다려라. 그리고 촉에 불을 붙이고, 활시위를 당긴 바로 그 순간에 뛰쳐나가게 만들어라. 그리고-]

이어진 말들을 나는 그대로 옮겼다.

“다짜고짜 돌격할 필요는 없습니다. 마치 적의 방진을 우회하여 뒤를 치려는 듯 이동하십시오. 우회는 실제로 해도 좋으나 우회에 성공하였다고 해도 들이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이목을 끄는 것입니다. 창병이 없는 적들은 그것만으로도 부담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화살이 닿을 법한, 닿지 않을 법한 거리를 사이에 둔 채 부지런히 움직이며 궁병들을 묶어 놓으십시오….”

지시 전달을 마치자마자 나투아병들이 움직여왔다.

다시금 25보.

20미터를 가까워진 나투아병들이 방패를 박았다. 화살촉에 불을 붙였고, 그 불화살을 시위에 먹였다.

그와 동시에, 도시 남문을 통해 왕국 기병대가 튀어나갔다.

◈          ◈          ◈

왕국 기병대는 모두 103기였다. 손에는 장창을 들고, 허리춤에는 왕국궁을 패용했다. 보병 200이 그 뒤로 장창을 추가로 들고 따라붙었다.

나투아병들은 곧바로 반응했다. 파바바바바밧! 빠르게 시위를 놓아 불화살을 쏟아 붓고는, 곧바로 금속촉을 단 화살을 시위에 매긴 것이다.

만약 왕국 기병대가 돌진해왔다면 곧바로 한 발 먹여줄 수 있었을 테지만, 왕국 기병대는 그러는 대신 나투아 궁병들의 사거리가 닿을락 말락 하는 지점에서 나투아병들을 우회하여 움직였다.

“후오오오! 호오, 후오오오!”

“오호, 오호, 휘오오오! 휘오, 휘오오오오!”

왕국 기병대를 지휘하는 마호라 자작이 휘파람을 불었다. 그 휘파람을 뒤의 기병들이 받았다. 때로는 날카롭고, 때로는 구슬픈 음조가 밤바람을 타고 허공을 갈랐다.

[개천의 시왕: 여기서 적 지휘관의 역량이 시험대에 오른다.]

비류아가 말했다.

[개천의 시왕: 형편없는 역량을 가진 자라면 어어 하다가 기병대를 향해 화살을 쏠 것이다. 그러면 일이 편해진다만은.]

[최초의 성녀: 그러진 않네요. …하긴 저들 입장에서는 정말 짜내고 짜내어 만들어진 정수(精髓), 국운을 짊어진 정예 중의 정예일 테니까요]

[개천의 시왕: 어중간한 역량을 지닌 자라면 활에 시위를 먹여둔 채 대기할 것이다. 그리고 기병대가 자신들의 후위로 돌아가게끔 하겠지. 이렇게 해도 일이 편해진다. 북문으로 보병들을 내보내 접근시키면 된다. 그리 하면 저들로서는 다가오는 보병대를 향해 화살을 쏘는 것 외에 선택지가 없어진다.]

아무리 방패로 받친 채 접근시킨다고 해도 나투아의 대궁이다. 보병대는 피해를 입을 것이다.

[개천의 시왕: 나투아 대궁의 연사 속도는 분당 3발 가량. 유효 사거리는 약 70척.]

대륙식 단위로 200미터.

평지 위에서 200미터 달리기. 장비 무게와 화살 세례로 인한 속도 저하를 감안한다 해도, 거기에 전장의 흥분과 취기를 더한다면-

[개천의 시왕: 보병대는 70척의 거리는 1분 안에 좁힐 수 있다.]

왕국 보병들이 접근하는 동안 나투아 궁병들은 3번의 사격 기회를 갖는다.

[개천의 시왕: 한 발의 화살로 한 명을 죽일 수 있다면 보병대가 접근하기도 전에 일제 사격으로 쓸어버릴 수 있겠지. 그러나 물론 그렇게는 안 되는 것이다.]

국가 단위의 전략에는 능하지 못했다고 하나, 부대 단위의 전투에 있어서는 아마도 최고의 능력을 갖고 있을 전쟁군주는 냉정하게 인간의 목숨을 셈했다.

[개천의 시왕: 최선의 경우 2할, 최악의 경우 4할 가량의 손실을 입힌 채 보병대를 접붙일 수 있다. 적에게 창병이 없으므로, 붙는 순간 아군 보병대는 더 이상의 손실 없이 모루가 된다. 나투아병들이 세운 방패 장벽이 거꾸로 그런 저지력을 더해주겠군. 물러설 수 없게 된 나투아병들의 후면을 우회한 왕국 기병이 망치가 되어 후려치면 그것으로 끝난다.]

“우후, 후, 후우, 우! 우후, 후, 후우, 우!”

“호오오! 오, 오! 호오오! 오, 오!”

기병대가 우짖었다. 양떼를 둘러싸고 어슬렁거리는 늑대 떼처럼.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이 바닥을 박찰 때마다, 무른 땅은 발굽을 깊게 새기며 그 소리로 밤공기를 할퀴었다.

[개천의 시왕: 적 지휘관이 출중한 역량을 지녔다고 한다면 지금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다.]

“방패-들어-!”

와라라라락! 나투아 병대가 방패들을 빼냈다.

[개천의 시왕: 그렇다. 후퇴다.]

거추장스러울 만큼 커다란 방패를 짊어진 채 서서히 뒤로 물러났다. 궁병들은 한 손에 화살, 한 손에 활을 든 채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검병들이 횃불을 들고 있어 그 모습은 마치 하나의 별무리가 오와 열을 맞춘 채 차분하게 물러나는 것처럼 보였다.

[개천의 시왕: 어차피 오늘 끝낼 수 있으리라곤 피차가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왔을 때처럼, 나투아병대는 조용히 물러났다. 왕국 기병들은 그런 그들 주변을 몇 차례 얼쩡거리다가 도시로 복귀했다.

나투아 병대는 멀리 물러나지 않았다. 내가 선 곳을 기준으로 반경 8리, 야리소연의 시야를 그야말로 아슬아슬하게 벗어난 곳에서 그들은 멈추었다. 대하와는 육지 하나를 사이에 두고 격절된 강가, 그들을 싣고 왔을 나투아 함선들이 몰려 있는 곳이었다.

“야영지가 이미 차려져 있었다요.”

차후 정찰하러 다녀온 사호의 보고에 따르면, 3인 1조로 구성된 총 400조, 1,200명의 병력은 그들의 주력(主力)이되 전력(全力)은 아니었던 듯했다. 나투아병들은 야영지에서 숙영을 취했다. 겨울에 둥지를 튼 뱀이 그러하듯, 조용하게. 그래서 더욱 불길하게.

서쪽 방면 4분의 1 가량이 타오른 도시 안에서, 왕국병들 역시 그 날 밤을 버텼다.

불온한 공기 속에 양측 모두 첫 번째 밤을 흘려보냈다.

아무도 죽지 않았지만, 살았다고도 할 수 없는 미생(未生)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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