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대하대첩 (1)
“자신들 손으로 터전을 망가뜨렸다고?”
무왕 이세는 납득이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다른 지휘관들도 납득이 안 된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대륙 출신의 첩자, 사호가 얼빠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응? 왜들 그런 반응이냐요?”
다들 서로를 마주보았다.
사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기본 중의 기본 아니냐요? 남겨두면 적을 이롭게 하는데 쓰일 테니 때려 부수는 게 당연하지 않냐요?”
현성대군은 사호의 인질을 대륙 측이 직접 죽이게 만들자고 말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이 자리에서는 가장 먼저 그 합리성을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반면, 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부(部)들로 나뉘어 일정량의 독립권을 소유했으며, 관제가 대륙식으로 개편된 지금도 완전히는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대다수의 지휘관들은 조심스레 말했다.
“거기 살던 백성들과 그 지배자가 반발할 것 아닌가?”
“까라면 까야지 별 수 있냐요? 국가의 군대라는 건 그 반발을 짓밟을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는 법이다요.”
“하지만 그 군대라는 게 곧 거기 살던 전사들로 이루어진 것인데….”
“…거기 안 사는 이들이 더 많을 테니까요.”
내가 답했다.
“그런 거다요. 그러니까 강제할 수 있는 거다요.”
말을 받은 사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댁들도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라요. 적들이 쳐들어 왔다요. 적도들의 군대는 잘 단합되어 있고 이쪽은 집결을 못한 상태라 정면으로 싸우면 각개격파당할 뿐이다요. 그럼 어떻게 할 거냐요?”
현성대군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장기전 체제로 전환해서, 말려 놓고 싸먹은 다음 가능하면 역공….”
그것은 북벽에 갔을 당시 나시파 변경백이 꺼냈던 말이었다.
‘공연에서 묘사되는 대하대첩 그대로.’
문제는 그 배역이 뒤바뀌었다는 것이다.
사호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설마 아예 예상하지 못한 거냐요? 월국의 시왕은 잔뼈가 굵은 전쟁군주였다고 들었는데.”
[개천의 시왕: …규모의 차이로군.]
‘네. 규모의 차이네요.’
개천 이전, 비류아가 수행했던 전쟁은 작게는 씨족, 커도 부족 단위였다. 회전 한 차례 크게 이기면, 또는 거점 한두 군데 점령하면 끝나는 전쟁.
그런 싸움에서는 이런 일 자체가 벌어질 수 없다. 상대가 가진 거라고는 자신들이 사는 거점 하나뿐이니까. 결사항전은 있을 수 있겠지만 스스로 거점을 파괴하고 물러나는 일은 벌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전투’의 승리는 곧 ‘전쟁’의 승리를 의미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개천의 시왕: 몇 개의 부족들이 동맹한 연합체와는 싸워본 바가 있었지만….]
느슨한 연합체가 아니라, 하나의 권력 아래 통일된 거대 집단.
몇 개의 거점을 내주더라도 다른 데에서 만회할 수 있는 여력을 갖춘 조직.
[개천의 시왕: 나투아와는 대하 너머로, 알실라와는 태산 사이로 국경을 맞대면서 몇 차례 교전을 벌이기도 했다만….]
하지만 그것들은 개천식 당시 언급된 것처럼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삼국 간의 균형 탓에 어느 쪽도 본격적인 전투력을 투사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개천의 시왕: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처음이다.]
국가 대 국가.
전투의 승리가 곧 전쟁의 승리를 약속하지 않는 싸움을, 왕국은 지금 처음으로 경험하고 있었다.
반면, 그런 규모의 싸움을 겪어왔을 대륙민 사호는 볼을 긁적이면서 말했다.
“뭐… 보통은 이렇게까지 지독하게 하진 않는다요. 적들을 몰아낸다고 해도 복구하는데 드는 시간이며 비용…. 배가 고프다고 제 손가락을 잘라먹는 꼴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했다.
“나투아 놈들은 장사치다요. 손해를 봤다는 건 그걸 상쇄할 만한 이문을 남기고야 말겠다는 의지일 거다요. 바짝 독이 올랐을 텐데…. 각오하는 편이 좋을 거다요.”
명쾌한 이치였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는지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 나투아가 왕도를 약탈하는 과정이 빠졌다.
- 왕국 전역으로부터 군사를 집결시켜 나투아에 반격하는 과정도 빠졌다.
‘너무 빨랐어.’
그 결과, 왕국 내부에 들어선 나투아병들의 절대수가 줄어든 것이다.
우리는 분명 나투아의 선봉대를 궤멸시켰다. 너무나도 완벽하게.
하지만 그 때문에 역사상의 대하대첩과 비교하여 나투아의 병력에 아직 여력이 남고야 만 것이었다.
[첫 번째 은월: 그치만 승전보들이 엄청 있었잖아?]
‘응. 그러니까 짜내고 짜낸 마지막 병력이겠지만….’
자신들의 도시를 파괴할 수 있는 병력, 따라서 아직 일전을 겨룰 수 있을 만한 규모라는 것은 분명했다.
사호의 말처럼 바짝 독이 올라있을 터.
‘그런 나투아 입장에서 제1목표를 꼽는다면….’
해답 역시 명쾌할 수밖에 없었다.
‘보급 역할을 맡고 있는 부대.’
즉, 내가 속한 이 후방 부대였다.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나는 소리 높여 외쳤다.
“모두 행군 준비를 갖추도록! 지금부터 방어 태세에 들어간다!”
◈ ◈ ◈
[개천의 시왕: 지금부터는 속도전이다.]
저승의 전쟁군주가 말하는 것과 동시에, 이승의 국왕 또한 말했다.
“방어 태세에 들어간다고?”
“예, 폐하.”
나는 고개를 수그린 채 말했다.
“적도들이 무슨 짓을 벌일지 불을 보듯 뻔하나이다.”
[개천의 시왕: 왕국의 주공 부대는 기병이 주축이다. 그만큼 많은 보급을 필요로 하는데, 심지어 시기는 세상이 척박해지는 겨울인 것이다.]
“적도들은 우리의 보급을 끊어 자신들의 영토에 들어선 우리 군세를 말려 죽이려 들 것입니다.”
“그것은 이해하기 쉬운 이치다.”
무왕 이세가 말했다.
“그러나 주공 부대는 기동력이 뛰어나다. 하루가 멀다하고 전령이 도착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기동력이 뛰어난 부대를 우회하여 보급선을 끊기란 지난하지 않겠는가?”
“왕국이라면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폐하. 나투아의 지형을 염두에 두셔야 하나이다.”
[개천의 시왕: 나투아의 영토에는, 이전 개천식 당시 언급했던 바와 같이 크고 작은 물줄기들이 거미줄과 같은 형국으로 난립해 있다. 말들은 건널 수 없는 곳을 사람은 건너올 수 있으므로, 속도의 차이를 거리의 차이로 뒤집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나와 비류아는 동시에 말했다.
[개천의 시왕: 속도전이다.]
“속도전입니다.”
[개천의 시왕: 적들은 총공세를 펼치려 하겠지.]
“적도들은 최대한 빨리 우리들을 치려 할 것입니다.”
[개천의 시왕: 그렇다면 남는 것은 표적이 어디냐 하는 부분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주공 부대를 칠 수는 없을 겁니다.”
[개천의 시왕: 빈집털이를 한답시고 왕도를 칠 수도 없다. 너무 오래 걸린다.]
“왕도 역시 어렵습니다. 강줄기를 따라 바다로 나가 다시 대하를 타고 들어오려면 반도를 반 바퀴 이상 돌아야만 합니다. 한편 우리는 왕도에 전서구만 몇 마리 날리면 됩니다. 왕도에 무장과 방비가 이루어지는 것이 빠릅니다.”
[개천의 시왕: 나투아의 함대를 통째로 나포한 만큼, 현재 대하를 장악하고 있는 왕국의 수군력 또한 결코 약하지 않다. 대하를 다시 장악하려 시도하기란 지난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적도들 또한 알 것이므로,”
[개천의 시왕: 따라서 나투아의 목표는 한 군데로 좁혀진다.]
“우리들, 후방 부대를 제1목표물로 둘 것입니다.”
나는 숨을 흘리고 말을 이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천천히 진군했습니다. 왕도로부터 대하를 타고 건너오는 보급 물자들 또한 꼬박꼬박 받아 챙긴 만큼 군량이 충분합니다.”
[개천의 시왕: 그 사실을 나투아 또한 머리가 있으니 알고 있겠지.]
“적도들이 우리를 치는데 성공하면, 그 군량을 모조리 없애 버릴 수 있습니다.”
[개천의 시왕: 그리고 대하를 장악할 필요도 없이 보급선을 통째로 끊을 수 있다.]
“우리가 없어지면 선발 부대들 역시 바싹 말라붙게 됩니다. 아니, 전령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미 반쯤 말라붙은 상황입니다.”
전령이 고개를 푹 수그렸다.
현성대군이 머뭇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할까? 이 부대의 말들을 모조리 징발해서 거기에 병량을 싣고 선발 부대에 전달하게 해?”
나는 그러라고 할 뻔했다. 비류아가 그 전에 나를 막았다.
[개천의 시왕: 불가하다. 그 긴급 수송대가 습격당하면 그 때는 정말 답이 없어진다.]
“안 됩니다. 그보다는,”
[개천의 시왕: 선발대를 이쪽으로 불러들여라. 두 부대를 하나로 합치는 것이다.]
“두 부대를 하나로 합쳐야 합니다. 선발 부대에,”
[개천의 시왕: 전령은 여섯 이상, 각자 다른 경로로 보내도록. 그 정도면 반드시 소식이 전해질 것이다.]
“전령 여섯을 보내소서. 그리하여 선발 부대들에게 최대 속도로 귀환을….”
[개천의 시왕: 안 된다. 병량이 부족하다고 했다. 오는 동안 병사들은 굶주리고 말들 또한 지칠 것이다. 그 상황에서 너무 서두르면 시야가 좁아진다. 서두르되 기습에 방비하며 와야 한다.]
“…서두르되 기습을 대비하며 오도록 하여, 우리와 합류하라 이르소서. 그 기간이….”
[개천의 시왕: 전령이 최고 속도로 달려 하루가 걸리는 거리다. 규모가 커지면 움직임도 굼떠진다. 선발 부대 전체가 도착하여 합류하기까지는… 전령이 가서 소식을 전하는데 하루. 소식이 선발 부대들 사이에 전파되는데 반나절. 오는데 사흘. 합계 나흘 반이 걸릴 것이다.]
나흘 반.
“나흘 반을 버틸 수 있는 병량이 선발 부대에 있는가?”
전령은 고개를 수그렸다.
“결코 넉넉하진 못합니다만, 나흘 반 정도는 어떻게든…. 그것이 한계일 것입니다만….”
“좋다.”
나는 이세를 돌아보았다.
“그들, 선발 부대들이 돌아올 때까지 우리는 버티고 또 버텨야만 합니다.”
한 손으로는 지도를 펼쳤다.
“나흘 반을 버팁니다.”
우리들은 현성대군이 투덜거릴 만큼 천천히 진군했다. 다시 말해 억지로 야영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최대한 지나기 쉬운 길을 지나 최대한 야영하기 편한 곳에 진을 쳤다는 뜻이다.
“어제 야영했던 곳으로 돌아갑시다.”
그리고 야영하기 편한 곳이란, 경계하기 편한 곳이며, 또한,
“그 곳에서 적도들의 습격에 대비하는 것입니다.”
맞서 싸우기 편한 곳이다.
◈ ◈ ◈
우리는 부리나케 전날 야영했던 곳으로 돌아왔다. 선발 부대가 5일도 전에 휩쓸고 지나간 작은 도시였다.
“나무로 된 건물들은 모두 부숩니다. 목재를 활용하기 위함이고 화공에 방비하기 위함입니다.”
“도시를 두른 흙벽의 높이가 치졸합니다. 보강합니다.”
“쌓을 수 있는 곳은 쌓습니다. 그러기 어려운 곳은 담장을 따라 땅을 깎아냅니다.”
“시내 곳곳에 함정을 파두어서….”
전투의 성질은 수성전. 방어전. 시가전.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어떻게’들을 시행하되, ‘어디’와 ‘언제’에 대해서는 비류아의 자문을 전적으로 따랐다.
[개천의 시왕: 그곳은 높이고, 그곳은 낮춘다. 함정은 이곳과 저곳이다.]
그 공사에 후방 부대 대다수가 투입되었다.
현성대군이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시현군.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는 건 알겠어. 실제 싸움이 벌어질 때 큰 도움이 되겠지. 하지만 이러다가 기습을 당하면 어떻게 해?”
“그것을 대비하고자 사호를 포함한 정찰대들 또한 내보내 둔 것입니다.”
“응. 그렇지만 모든 정찰대에 사호가 포함된 건 아니잖아. 정찰대가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 죽은 곳이 있고, 그 곳으로 적도들이 침공해 온다면….”
“안심하십시오. 거기에 대해서도 대비책이 있습니다.”
“어떤 대비책?”
“설명하기 어렵습니다만, 믿어주십시오.”
현성대군은 머뭇 고개를 끄덕였다. 내겐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저승에서 이 일대를 굽어보고 있는 사냥꾼의 존재를 어찌 알리겠는가.
그 사냥꾼이 말해왔다.
[첫 번째 은월: 아직.]
‘응. 계속 경계해줘.’
그런 와중에 차츰 해가 저물어갔다. 야영지의 요새화는 착착 진행되었다.
[최초의 성녀: 여기까지 하지요.]
그것이 궤도에 올랐을 즈음 아리야가 자르듯 말했다.
[최초의 성녀: 사람들 얼굴에 피로가 쌓였어요. 쉬게 하세요.]
[개천의 시왕: 동의한다. 이 부대에는 군량에 여유가 있지. 다소 후하게 풀어 독려케 하도록. 물론 술은 풀지 말고. 돌아가면서 좀 자두도록 해라.]
그렇게 했다.
그리하여 밤이 깊어 갈 무렵, 왕국의 병사들은 싸울 준비를 마쳤다.
야리소연이 입을 연 것은 그와 동일한 순간이었다.
[첫 번째 은월: 가리비수.]
‘응.’
[첫 번째 은월: 깨워.]
나흘간의 방어전, 그 첫 번째 날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