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푸른 들판 (4)
나투아의 영토에 들어선 월족의 군대는 두 무리로 나뉘었다.
첫째 무리는 주공(主攻). 선발 부대였다. 두오 대장군과 아신군을 비롯한 강경파들이 속해 있는 집단이었다. 왕국 안에서도 가장 호전적인 자들로 구성된 이들은 가장 앞에서 싸우기를, 그리하여 가장 많은 고깃덩이를 분배 받을 수 있기를 바랐다.
둘째 무리는 조공(助攻). 후방 부대였다. 강경파에 속하지 않거나 앞에서 싸우기 어려운 사정이 있는 이들이었다. 특히 나처럼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안전한 후방 지역에서 안전한 싸움을 해야 했다.
그리고 500년 뒤 사람인 내 상식에 따르면, 무왕 이세는 마땅히 후자에 속해야만 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의 상식으론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폐하! 저희를 이끌어 주십시오!”
“폐하께서 함께 하는 한 왕국은 결코 패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두오 대장군과 아신군이 소리 높여 부르짖었다.
몹시 띠용스러운 일이었다.
왕에게 최전선에 서 달라고 하는 놈들이 세상천지 어디에 있는가?
‘혹시 또라이들인가?’
그런데 그 또라이 대표, 두오 대장군이 나를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며 외쳤다.
“대하에서 있었던 싸움을, 그 곳에서 시현군 저하께서 내셨던 계책을 떠올려 보소서!”
“그때 도란 제사와 다물 재상이 어찌 반응했습니까? 잔월공과 법왕은 또 얼마나 우려했습니까? ‘어찌 폐하를 일개 수병처럼 부려 배를 기어오르게 한단 말이외까!?’라고 그리 부르짖었지요! 하지만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폐하께서 나서지 않았다면 과연 기함을 그리 빨리 정리하고 모든 배들을 나포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 나 염병….’
[첫 번째 은월: 가리비수의 적은 가리비수….]
‘아니… 그때는… 나도 불안에 젖어 있었고… 또 가장 강한 패를 써서 기함을 정돈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비류아랑 시우, 흑치사라 조언 참조해서 몇 겹이나 되는 안전 장치도 쳐둔 상태였고… 사호도 같이 보냈구….’
[첫 번째 은월: 그래서 다르다고?]
‘다름…. 완전 다름…. 비슷해 보일 뿐이지 진짜 완전 절대적으로 다름….’
그렇게 다른데 겉보기 비슷하면 같은 걸로 치는 것은 아직 왕국의 문화가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탓일까?
내가 원하지도 않는 상찬을 받는 모습을 꼬나보던 아신군이 다른 견지에서 한 발 거들었다.
“무릇 시왕 폐하께서도 친정(親征)을 자주 다니셨다 들었습니다. 폐하께서는 그 피를 이어받으셨으니, 마땅히 만천하에 은월의 광휘를 떨쳐 주소서!”
무왕 이세는 팔짱을 낀 채 듣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목소리 크기 때문에라도 왕이 주공 부대 최선두에서 달리게 될 것 같은 상황이었다.
나는 다급하게 말했다.
“폐하. 시왕 폐하께서 친정을 자주 다니셨다 하나, 그것은 그분께서 아직 하늘을 열기 전의 일이옵니다. 하늘이 열린 이후로는 친정을 삼가셨던 걸 기억하소서.”
족장과 왕은 그 입장이 다르다. 그러니까 안전한 후방 부대에 짱박혀 있으라는 간언이었다.
그런 지당한 의견을 강경파들은 황당하게 여겼다. 특히 두오 대장군은 숫제 배신이라도 당한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시현군 저하. 저하께서는 폐하의 용력을 믿지 못하십니까?”
‘도대체 왜 이 또라이가 대장군이야?’
“두오 대장군, 전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염려할 뿐입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야 저 타오르는 태양처럼 자명한 것 아닙니까! 승리! 승리! 그리고 또 승리만이 있을 것입니다!”
‘뭐라는 거야 진짜….’
다행히 모두가 또라이는 아니었다. 나를 편들고 나서는 인물도 있었다.
“태양은 달의 여신의 그림자야. 죄인들이 갇혀 아우성치는 감옥이지.”
현성대군은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하필이면 그런 흉한 것을 비유의 대상으로 들다니. 두오 대장군, 좀 더 생각하고 말해 줘.”
‘어… 편들어주는 건 고맙긴 한데 뭔가 초점이 어긋난 느낌이….’
“죄송합니다, 세자 전하. 제가 그만 흥분하여 사려 깊지 못한 발언을 입에 담았나이다.”
‘왜 또 그게 먹히고 앉아있지…?’
내가 신화를 너무 잘 만든 건가? 아니면 전사라서 머리보다 가슴이 뜨거워서 그런가?
‘나 때문인 건 싫으니까 저 놈이 전사라서 그런 걸로 하자.’
잠깐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러는 동안, 몇 차례 두오 대장군을 면박 주던 현성대군이 나를 돌아보았다.
“시현군. 그대는 늘 위에 서는 자는 몸가짐을 신중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지. 부왕께서도 더 신중하게 행동하셔야 한다는 거야?”
음.
“예, 그렇습니다.”
나는 고개를 조아린 채 말했다.
“왕이 앞장서 병사들을 이끄는 일이 미덕이 될지언정 어찌 허물이 되겠습니까. 하오나 폐하께서는 국본(國本)이십니다. 존재만으로도 적도들의 예봉을 부러뜨리고 아병들의 사기를 끌어올릴 것이지만, 그만큼 표적이 되기 쉽습니다. 설혹 참람된 사태가 벌어졌을 경우를 마땅히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현성대군은 고개를 끄덕이고 이세를 돌아보았다.
“폐하. 시현군의 의견을 옳다고 여기나이다. 지금 이 곳은 적지입니다. 옥체를 보존하셔야 합니다.”
이세는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왕국은 신관들의 나라이며, 또한 전사들의 나라이다. 따라서 왕은 신관 중의 신관이며 전사 중의 전사여야 한다. 선두에서 이끌며 싸우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거기에는 현성대군과 내가 나란히 대답했다.
“달이 빛을 비추기 위해서는 멀어서도 가까워서도 안 됩니다.”
먼저 현성대군이 그렇게 신관의 논리를 펼쳤다.
“이야기된 바와 같이 여기는 적지입니다.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는 것은 폐하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면서 또한 아병들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도 될 것입니다. 예기치 못한 순간 예상치 못한 위기가 닥쳐왔을 때 언제라도 투입될 수 있게끔, 가장 강한 전사께서 마땅히 예비로 남으셔야 할 것입니다.”
내가 전사의 논리로 말을 받았다.
“으음….”
강경파들은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대하에서 있었던 전투에서 가장 큰 공훈을 세운 것은 작전 입안자 및 정보 제공자였고, 그것은 좁게는 나였으며 넓게는 현성대군이었다. 그런 우리 둘이 이치를 갖춰 말하는 이상 논박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이세는 조언을 받아들일 줄 아는 왕이었다.
“시현군과 세자의 조언에 따르겠다.”
그렇게 부대가 나뉘었고, 진격이 개시되었다.
◈ ◈ ◈
왕국의 주력 병과는 기병이다.
하지만 나투아의 영토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대하를 건너야만 한다. 그리고 나포한 나투아의 배와 왕국의 배를 모조리 동원해도 건너올 수 있는 말들의 숫자는 제한되게 마련이다. 시기가 겨울인 만큼 말들이 뜯어먹을 목초가 부족하리라는 예상도 있었다.
회의 결과, 그 제한된 말들 상당수는 선봉 부대에게 돌아갔다.
“이길 수 있을 때만 싸우라. 후퇴하는 것은 패배가 아니니, 용맹과 만용을 착각하지 마라.”
“명을 받드옵니다!”
그리하여 선발 부대는 기병 위주로, 후방 부대는 보병 위주로 편성되었다. 어차피 대하를 지키고 보급로를 유지해야 하는 만큼 후방 부대는 차근차근 전진할 수밖에 없기도 했다.
다만 그것 역시 내 상식에 의거한 판단이었던 모양이다.
“시현군. 우리들, 후방 부대라지만 너무 느린 것 아냐?”
며칠이 흘렀을 때 현성대군이 꺼낸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차근차근 가야 합니다.”
“으음, 신중하자는 거지? 알겠어. 다만 이 사람은 우리 부대가 도착할 즈음에는 아예 더 싸울 적이 남아있지 않을까봐 그래.”
아닌 게 아니라 연일 승전 보고가 들어오고 있었다.
“아신군이 이끄는 별동대가 1백에 달하는 수급을 취하는데 성공했나이다!”
“두오 대장군이 3백의 궁병이 포함된 적도들을 상대로 신묘한 전술을 펼쳐 화살을 고갈시킨 뒤….”
“보고드립니다! 아삼 후작이 이르기를….”
그야말로 승승장구.
그럼에도 어째서 임무 성공이 뜨지 않는지에 대해 논의하던 와중에, 비류아가 신박한 말을 꺼냈다.
[개천의 시왕: 어쩌면 아예 반대의 경우를 고려해야 할지도 모른다.]
‘반대의 경우라면요?’
[개천의 시왕: 이대로 아무 일 없이 나투아를 정복해버리는 것이다.]
비류아의 말은 아리야를 황당하게 만든 것 같았다.
[최초의 성녀: 어… 그게 왜요?]
[개천의 시왕: 그렇게 되면 선봉 부대에 속한 강경파 전사들이 정국의 주도권을 갖게 되겠지. 자모신의 시스템은 그것을 실패로 여기는 것일 수도 있다.]
[최초의 성녀: 아예 이기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말인가요?]
[첫 번째 은월: 그러게. 그건 좀 어처구니없는 소리처럼 들리는데….]
야리소연이 아리야에게 동조했다.
그러나 천사님은 비류아의 말에 손을 들어주었다.
[간신 조련사: 개천식 임무 당시에도 말했던 것처럼, 아리야. 당신은 짧은 시간 단위와 긴 시간 단위의 차이에 대해 알아야만 합니다. 상처 없는 승리가 단기적으로는 득이 되더라도 거시적으로는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최초의 성녀: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간신 조련사: 와 닿게 이야기하자면, 그렇군요. 소모라 인들은 당신들을 쉬이 때리고 핍박했지요. 어린애들조차 쫓겨나는 당신들을 향해 돌을 던졌지요. 그렇게 한들 자신들이 아무런 해를 입지 않고, 도리어 쾌감을 얻었기 때문에 ‘이래도 된다’는 걸 누세대에 걸쳐 학습한 셈입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최초의 성녀: 자연이 그들의 죄악을 벌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요?]
[간신 조련사: 아니요, 자연은 인간의 행동에 관심이 없지요. 하지만 인간은 인간의 행동에 관심이 많습니다. 소모라 인들이 당신들을 아껴주었다면, 당신들이 피난을 갈 적에 경고라도 한 마디 던져주지 않았겠습니까? 친하게 지내는 이들이 있었더라면, 그들이라도 살리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을까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인생사, 사람이 사람에게 선하게 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 은월: 오, 좋은 이야기다….]
야리소연이 감탄했다. 한편 비류아는 자신의 편을 들어준 천사님의 뒤통수를 날렸다.
[개천의 시왕: 천사의 말은 너무 낭만적인 이야기군. 걸러 듣도록.]
[최초의 성녀: 그러게요, 걸러주세요, 비류아.]
[첫 번째 은월: 니들 진짜 양심이 없는 거 아니냐?]
[간신 조련사: ….]
야리소연의 투덜거림과 천사님의 소연이 짓이야 어쨌건 비류아는 꿋꿋하게 말했다.
[개천의 시왕: 승리하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다. 하지만 항상 승리하는 전사, 결코 패배하지 않는 군대 따윈 없다. 내가 전설적인 전공을 쌓아 오긴 했으나, 내 몸에 쌓인 흉터를 보면 그 과정이 순탄치 못했음을 알 것이다. 이기고 또 이기는 통에 강경파들의 기세가 올라, 차후 왕국에 전쟁 지상주의가 자리잡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바로 그때였다.
“선발 부대로부터 전령이 도착했나이다!”
현성대군이 난색인지 희색인지 판가름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었다.
“또 한 차례 승전 보고가 들어왔나 보네.”
아니었다.
말을 죽일 기세로 황급히 달려온 티가 나는 후줄근한 몰골로 전령이 보고했다.
“폐하! 외람된 말씀이오나 보급을 서둘러 주실 수 있겠나이까?”
이세가 침음을 흘렸다.
“역시 말들을 먹일 풀이 부족한가?”
“그것도 있습니다만….”
전령이 머뭇거렸다.
현성대군이 눈썹을 찡그렸다.
“폐하 앞에서 우물쭈물 거리다니. 무례한 데에도 정도가 있어. 똑바로 말해.”
“죄, 죄송합니다. 그것이… 병량(兵糧)도 그렇게 풍족하지 못한 터라 그 부분도 화급히 지원을 해주신다면….”
이 말에는 다들 의아한 기색이 강해졌다.
이세 역시 고개를 기울였다.
“바로 어제 나투아의 주요 도시 중 한 곳을 떨어뜨렸다는 보고를 받았다. 왕국과 나투아의 문화가 같지 않다고 하나 나투아인이 먹을 수 있는 것은 왕국민 또한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전령의 목소리가 졸아들었다.
“도시를 떨어뜨리고 확인해보니 곡식 창고는 물론이요, 멀쩡한 가옥조차 몇 채 남아있지 않을 만큼 파괴당한 터라….”
지휘관들이 당혹에 빠졌다.
“뭐라고?”
“이미 누군가가 약탈했다는 거야?”
“나투아 땅에 우리들 말고 다른 나라 병사들이 있다는 건가?”
“알실라가 틈을 노렸나? 아니면 성 제국이 나투아의 뒤통수를 쳤나?”
분분히 오가는 의견 속에 전령이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것은 아니옵고… 아무래도 나투아 놈들이 도시가 떨어지기 직전 자기들 손으로 모조리 망가뜨린 것 같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온몸의 피가 식는 것을 느꼈다.
‘이런 젠장.’
청야전술(淸野戰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