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푸른 들판 (2)
자신의 부덕함이 크다는 이세의 말이 가진 무게를 아신군은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방금 내가 떠올린 모든 것들을 아신군이 생각할 수는 없었으리라. 그냥 그럴 만한 상상력이 없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있다.
아신군은 다만 어두운 부왕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조아렸다.
“아니옵니다…! 저와 형님이야말로 감히 부왕을 신뢰치 못한 죄가 크나이다. 벌을 내려주소서!”
음.
나는 헛기침을 했다.
“폐하께서는 그렇게 스스로를 탓하실 필요 없사옵니다. 왕관은 무거워 고개를 틀기 어렵게 하며 옥좌는 드높아 굽어보기 힘들게 만드는 법이나이다. 폐하께서 두루두루 의견을 들으시는 것은 시야를 드넓게 가져가기 위함이신 바, 그것은 허물이 아니라 미덕이라 할 것입니다.”
“시현군의 말이 곱구나. 본좌는 다만 본좌보다 그들이 현명하다는 사실을 알 뿐이다.”
“같은 이치입니다. 자신을 알고, 자신에게 부족함을 채우고자 노력을 기울이는 시점에서, 이미 그 부족함은 메워진 것이나 다름없는 일입니다. 하오니 심려치 마소서.”
그렇게 이세를 다독인 다음, 나는 아신군을 돌아보았다.
“아신군은 스스로 말한 것처럼 감히 폐하를 신뢰치 못한 죄악이 크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왕국을 위한 일이었고, 왕국의 국본은 폐하이시니, 부족한 깜냥으로나마 충심을 다한 것 아니겠습니까? 핀잔의 대상일지언정 처벌의 대상이 아닐 터입니다.”
아신군은 표정을 찡그렸다. 왜 너 따위가 자기 변호를 해주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그런 소릴 지금 여기서 지껄이지 않을 정도의 분별은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진 가운데, 나는 물어야 할 것을 물어보았다.
“아신군께서는 어찌하여 적도들로부터 신뢰를 얻어낼 수 있었습니까?”
아신군은 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세를 보았다.
이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신군은 물음에 답하라.”
아신군은 고개를 조아렸다.
“그것은 제 형님이 더 자세히 설명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신월공으로부터도 들을 것이다. 하지만….”
“예… 형님은 지금 병세가 깊지요.”
아신군은 우울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세는 아비의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했다.
“그리고 아신군 그대로부터도 듣고 싶구나. 편히 말하라. 편히 들을 터이니.”
“예, 폐하.”
아신군은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때마침 친위대원 한 명이 그의 포박을 풀어준 바, 아신군은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보고를 시작했다.
◈ ◈ ◈
그로써 아신군이 보고한 것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1 신월후가 살아있을 무렵부터 신월궁은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2 이는 신월후가 30년 전에 벌어졌던 역란에 대해 부채감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그 기조 자체는 신월후 사후로도 이어졌다.
3 그렇게 전쟁을 준비하던 가운데, 대륙 쪽으로부터 이상 기류를 감지하게 되었다….
“30년 전, 역란을 주도했던 친위대장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아신군은 아직 자신이 태어나지도 않았을 무렵의 일을 입에 담았다. 이세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한다.”
“그 남자는 성 제국에 망명했다고 합니다. 성 제국의 왕가 중 하나가 그를 받아주었지요. 그 남자는 무재(武才)는 몰라도 군재(軍才)는 타고났던 모양으로, 성 제국을 안정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알고 있다. 본좌의 벗이 아직 살아 법왕으로 있을 적에 그녀로부터 보고받은 적이 있다.”
“황송하나이다. 그렇다면 그 역도가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들으셨나이까?”
“듣지 못하였다. 그렇게 안정된 성 제국이 자신들의 정보에 암막을 드리웠기 때문이다. 본좌의 벗이 여러모로 노력했으나 결국은 그 막을 뚫지 못하였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복잡한 심경에 빠졌다.
‘유미 이야기지, 저거….’
내 빙의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부분도 그렇고, 유미의 외교적 수완이 썩 뛰어나지 못했다는 부분도 그렇고, 정말 뭐라 반응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제 형님께서는 그 막을 뚫는데 성공했습니다.”
하물며 그녀보다 뛰어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한 인물이 있었다는 이야기까지 듣게 되니 내 심경이 얼마나 복잡하겠는가.
이세는 턱수염을 매만지며 침음을 흘렸다.
“신월공이 뛰어난 인물임은 안다.”
그 말에는 이세 특유의 정직한 경의가 실려 있었다.
배배 꼬인 성깔을 가진 아신군 또한 이세를 대할 때처럼 극진한 태도로 신월공을 언급했다.
“예, 정말이지 형님은 뛰어난 분이지요. 건강만 좋으셨더라면….”
“본좌가 물려주지 못한 것이지.”
이세는 한숨을 지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달의 여신께서는 공정하셨다. 신월공은 본좌가 갖지 못한 것들을 받았으니까. …그리고 아신군은 그 중에 외교적 수완 또한 있다고 말하는 것이구나.”
“적어도 그 역도의 동향에 대해서는 파악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 자가 제국을 부추겨 이번 전쟁을 선도한 것인가?”
이세의 목소리는 무겁기 그지없었다.
그럴 만했다. 친위대장을 비롯한 역도들을 방면한 것은 이세의 결단이었다. 그가 이번 전쟁을 주도한 것이라면 이세 자신이야말로 30년에 걸쳐 외환을 유치한 셈이 되는 것이다.
‘이세 마음대로 하라고 한 건 나니까, 정확히 말하면 이마저도 내 탓이 되는 거겠지만….’
[개천의 시왕: 그러자면 내가 단명한 것부터 탓해야겠지.]
[최초의 성녀: 아니면 제가 예언자님으로부터 계명을 받아온 것부터 탓해야겠네요.
[첫 번째 은월: 또는 내가 너랑 결혼한 것부터 탓해야하나?]
‘그렇군. 천사님이 나를 임무에 내보낸 것부터 탓해야겠구나.’
[간신 조련사: 그러자면 왕 곁에서 죽어버린 당신을 탓해야겠지요.]
‘그리고 제가 죽은 건 카한이 끌고 온 야만인들 탓이지요. 카한 개새끼.’
하지만 그런 책임 소재 공방 따위는 이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들로선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기껏해야 이세가 친위대장을 살려주었고, 친위대장이 살아 환란을 끌고 왔다는 게 이 시대에 붙박힌 자들이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인식 한계선일 것이다.
아신군 또한 그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가 한층 조심스러워졌다.
“외람되오나… 형님께서는 그리 추측하셨나이다.”
“그러한가….”
“다, 다만 어디까지나 정황에 지나지 않사옵니다. 그 자는 대륙으로부터 나투아로 자리를 옮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두 나라 사이에 군사동맹이 체결되었다는 것이군.”
“…예.”
이세는 깊이 침묵했다.
아신군은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레 말했다.
“그 뒤 그 남자가 나투아에서 어떤 직위를 얻었는지는 형님께서도 알아내실 수 없었습니다만… 그렇게 그 남자의 소재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여러 연줄을 만드신 바, 이번 첩보 역시 그 경로를 통해 입수하셨던 것입니다.”
“음.”
“대륙 놈들은 형님을 꾀어낼 수 있는 자로 보았습니다. 저도 그렇고요! 하! 정말이지 잡신들을 모시는 잡놈들 같은 생각이지요. 형님께서 어디 그럴 분이십니까? 저는 어떻고요?”
“신월공의 충심에 대해서는 잘 안다.”
이세는 숨김없이 말했다.
“신월공은 어린 나이에 공작위에 올랐음에도 자신이 자리에 모자라지 않은 인물임을 증명했다. 다른 공작가들의 군살을 빼내는데 공헌한 것이다. 그뿐이었는가? 그 과정에서 신월 공작가 스스로의 군살 또한 빼냈던 것이다. 신월공은 그렇듯 내치(內治)에 뛰어났고, 왕국을 위해 빛나는 공정함을 발휘했다. 본좌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아, 과연.’
저승에서 보았을 때, 급격하게 불어났던 외척 세력들이 적정선으로 졸아들었던 것은 신월 공작 덕분이었나 보다.
‘그 정도면 진짜 뛰어난 인물이라는 건데.’
그것은 두 가지 사실을 의미했다.
1 아신군이 이 따위 녀석인 건 형제 간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구나.
2 그렇게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비둘기파가 아니라 매파로구나.
두 번째 사실이 중요했다.
‘어쩐지 책이나 이야기를 통해서만 전쟁을 배운 유형….’
직접 만나보지 못했으니 부당한 평가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있는 정보들로 판단해보자면 그런 인상이었다.
[개천의 시왕: 마나와 그 추종자들 이야기를 들어보자면, 썩 어긋난 인상은 아닌 것 같다.]
[개천의 시왕: 추찰해본다면 어릴 적부터 몸이 약했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나 허약하길래….’
[개천의 시왕: 마나의 아버지… 그러니까 그대가 속했던 초대 법왕보다 약했다더군. 알만할 테지.]
‘진짜 저질 몸뚱아리라는 거네요.’
심지어 지금은 병석에 누웠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속에서도 암중에서 왕국을 한 방향으로 수속시키고 있었다는 거다.
‘나긴 난 놈이네.’
내가 그런 감상을 품고 있는 동안에도 아신군과 이세는 계속하여 대화를 나누었다. 그 이상 새로운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새로운 다짐도 나오지 않았다.
“폐하. 이건 이길 수 있는 전쟁입니다!”
아신군이 외쳤다.
“우리는 놈들이 공격해 올 시기를 압니다. 그리고 놈들이 어떤 전략을 쓸지에 대해서도 압니다.”
정보의 선점.
“어전 회의에서 결정된 것에 따르면, 폐하께서는 현명하게도 적도들의 성동격서에 휩쓸리지 않으셨습니다.”
선점한 정보를 통한 만전의 방비.
“그리고 지금, 북벽의 사령관인 나시파 변경백 또한 실상은 건재하며, 저 첩자 또한 달의 여신의 품에 안겼고, 그로 인해 폐하 또한 적도들의 참람된 전략을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소자 또한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만전의 방비에 불안 요소가 될 수 있었던 오해의 해소.
“왕국은 지금 하나로 굳건합니다.”
결속의 재확인.
“적도들이 도하해 오는 시기에 맞추어 미리 매복합니다. 그리하여 강을 건너온 놈들을 단매에 몰아쳐 쓸어버리고, 놈들이 타고 온 배를 거꾸로 취하여 몰아치면 그만입니다!”
필승의 전략.
“폐하, 전쟁을 허하소서!”
그야말로 차려진 밥상이었다.
이세가 아닌 누구라도, 심지어 내가 왕좌에 앉아있다고 해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 터였다.
과연, 이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는 긍정적인 답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지금 바로 승인하지 않는 것은 이세 특유의 성품 때문일 터였다. 결국은 이 계책대로 따르게 될 것이다.
‘사실 사호에게 이중 첩자 노릇을 시키려고 하기 전에 내가 진언한 것도 이거랑 똑같은 거였으니….’
그런 내 생각까지야 아신군이 알 수 없는 노릇일 것이다. 하지만 누가 보아도 작전이 승인되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아신군은 감격에 젖어 외쳤다.
“감사합니다, 폐하!”
오가는 대화로 상황을 파악한 친위대원들 역시 감격에 젖어 있었다. 사호 역시 나쁘지 않다는 듯 휘파람을 불었다.
다만, 나만은 도저히 밝은 표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
‘문제는.’
북벽에 갔을 때 떠올렸던 것과 똑같은 문제가 하나 있었다.
‘대체 왜 대하대첩에 달성 표식이 찍히지 않고 있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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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월을 지켜라 / 난이도 B ]
[ ★북벽수성(北壁守城) / 난이도 A ]
[ 대하대첩(大河大捷) / 난이도 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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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무 창을 쳐다보면서, 나는 그렇게 시름에 잠겼다.
◈ ◈ ◈
밤마다 달이 기울어갔다.
그 동안 나는 여러 가지를 했다. 구체적으로는 대체 왜 대하대첩에 방점에 찍히지 않는 건지 알아내기 위해 움직였다.
‘뭔가 변수가 남았다는 건가?’
가령 어떤 변수가 있을까?
‘아신군이 구라를 쳤다거나?’
가장 가능성 높은 변수였다. 절절한 모습이야 꾸며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천사님은 말했다.
[간신 조련사: 과거시를 통해 교차 검증을 마쳤습니다. 아신군의 이야기는 모두 사실입니다.]
‘뭔가 이상한 부분은 없었습니까?’
[간신 조련사: 직접 보겠습니까?]
그렇게 했다. 그 결과 나도 천사에게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아신군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럼 또 다른 반역 세력이 있다거나?’
다음으로 가능성 높은 변수였다. 나는 곧장 행동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