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128화 (128/261)

128. 푸른 들판 (1)

“시현군!? 네놈이 여긴 어떻게 온 거냐!?”

아신군이 으르렁거렸다.

‘기세만 보면 꽁꽁 묶인 채 의자 대용품으로 쓰이지 않는 줄 알겠네.’

하지만 기세야 어쨌건 그에게 닥친 현실은 냉혹했고, 따라서 아신군의 꼬라지란 현재 그런 것이었다. 나는 헛기침을 했다.

“사호, 일어서라. 그래도 왕자님을 대하는 데 뭐냐 그 취급은.”

“여긴 내 왕국이 아니다요?”

말대꾸를 하면서도 사호는 읏차, 엉덩이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총총 걸어와 내 곁에 섰다.

아신군이 송곳니를 드러냈다.

“염병, 뭐야!? 아까부터 왜 둘이 아는 척하고 난리야!? 설마 시현군 네놈, 왕국을 배신한 거냐!?”

내가 이 상황을 오해없이 설명하기 위해서는 많은 말을 해야 할 것이다. 다행히 여기에는 나 대신 설명해줄 사람이 있었다.

무왕 이세가 복면을 벗으며 한 걸음 나섰다.

“아신군은 고개를 들라.”

아신군이 눈을 부릅떴다.

“폐하…!?”

“그렇다. 본좌다.”

“폐, 폐하께선 여기 어쩐 일로….”

아신군이 말을 더듬었다. 이세는 우직한 눈길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왕에게 설명을 요구하기 앞서, 아신군 본인부터 지금 이 상황을 해명해야 할 것이다.”

아신군은 확 움츠러들었다. 이번에는 아신군이 이 상황을 오해없이 설명하기 위해 많은 말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리고 아신군은 말주변이 좋다고는 할 수 없는 남자였다. 그래서 무어라고도 대답하지 못한 채 입술을 우물거릴 뿐이었는데, 꼭 이빨 빠진 개가 육포를 씹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나야 저승 입주자들의 시야를 공유받아 사정을 아는 데다가 무왕 이세는 늦어지는 대답을 기다려줄 만한 도량을 가진 사나이였지만, 함께 온 친위대원들은 그 얼굴이 험악해졌다.

그들이 폭발해서 산통 다 깨기 전에 내가 한 걸음 나섰다.

“사호. 설명해 준다매?”

“음음, 그렇다요.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말해드리겠다요.”

그렇게 사호는 설명에 들어갔다. 나로서는 이미 보았던 상황들을 한 차례 더 전해 듣는 셈이었으나, 친위대원들은 시시각각 표정을 바꾸어야 할 만큼 놀라운 이야기였다.

“아신군 저하께서….”

“세상에. 왕국을 위해 이중 첩자 노릇을 하셨단 말입니까?”

“저희는 그런 줄도 모르고….”

무왕 이세 또한 굵은 눈썹을 한 차례 꿈틀거렸다. 다만 친위대처럼 감격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아신군은 그것을 충심이라 여겼는가?”

사호의 설명 덕에 오해를 벗어 화색을 띠던 아신군이 그 말에 당혹했다.

이세는 그런 아신군의 얼굴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좀 더 정돈하여 말하겠노라. 아신군은 그것을 공연히 외환을 불러들인 것으로 여기지 않았는가?”

그 말 역시 아신군은 곧장 알아듣지 못한 채 버벅거렸다.

별 수 없이 내가 해설해주어야 했다.

“아신군. 요컨대 신월궁은 적들이 공격해 오리라는 것을 내내 알고 있었다는 뜻 아닙니까?”

“그렇다만….”

“이는 다시 말해 적들이 가진 패를 알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역수로 잡아 전쟁 자체를 피할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아신군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어떻게? 우리가 너희들의 움직임을 훤히 아니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식으로 압박을 가한다거나 해서 말이냐?”

“예. 그렇게 자신들의 계획을 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북벽 앞에 진을 치는 것도, 대하를 도하해오는 것도 망설이지 않았겠습니까?”

“하! 꿈같은 소리를! 계획을 수정해서 쳐들어왔겠지!”

“말씀하신 것 역시 물론 가능성 있는 일 중 하나지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알실라를 끌어들이는 식으로 제대로 압박을 가했다면 전쟁 자체를 포기할 가능성이 더 높았을 겁니다. 산이 울던 날 증명된 것처럼 나투아는 승산이 높지 않다 여기는 싸움은 하지 않는 치들이니까요.”

아신군은 이를 갈았다.

나는, 대충 아신군이 무슨 말을 할지에 대해서는 짐작이 갔지만, 계속해서 말했다.

“이는 아신군께서도 알고 계셨을 겁니다. 아신군이 모르더라도 신월 공작께서는 알고 계셨겠지요. 그럼에도 신월궁에서는 이 정보들을 공유하여 ‘외교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독점하여 ‘군사적으로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이를 무왕 폐하께서는 공연히 외환을 불러들인 것 아니냐고 질타하신 겁니다.”

그리고 아신군은 과연 내가 짐작한 그 말을 했다. 내가 아니라 무왕 이세를 돌아보며 소리친 것이다.

“어차피 벌어질 전쟁입니다!”

아신군은 절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폐하! 다물 재상이니 시현군이니 하는 저 먹물 먹은 치들이 방금처럼 ‘외교적 해결’따위를 운운합니다마는, 어찌 주먹과 칼로 할 일을 혀와 붓으로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대신한다고 한들 그것이 언제까지 이어지겠습니까! 싸울 수 있을 때 싸워야 이길 수 있을 때 이기지 않겠습니까!”

무왕 이세는 팔짱을 끼었다. 그는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왕자는 전쟁이 벌어지길 바라는가?”

“예, 바랍니다!”

아신군은 쿵 소리가 나도록 이마를 돌바닥에 찍었다.

“싸우길 바랍니다! 이기길 바랍니다! 적들의 피와 놈들이 가진 땅으로 제가 나고 자란 왕국을 살찌우길 바랍니다! 부왕께서 시왕과 같은 영광을 누리기를, 거기에 제가 일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저는 전사입니다! 제 어머님 되시는 신월후께서도 전사셨구요! 신월 공작위를 맡고 계신 형님께서도 전사입니다! 무릇 전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싸우는 것 아니겠습니까! 싸우게 해주십시오!”

“그 싸움이 꼭 전쟁이어야 하겠는가?”

이세의 목소리에는 서글픔이 묻어 있었다.

“본좌는 부족한 왕이다. 왕국을 안정시켰으나 안전하게 만들지는 못하였다. 기근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산에 들어가 도적이 되는 일이 잦았고, 동쪽 해안에는 섬에서 온 흑구(黑寇)들이 노략을 일삼고는 했다. 왕자가 싸움을 바란다면 휘하의 전사들을 데리고 왕국을 돌면서 그들과 싸울 수 있으리라.”

“그들과 싸운다고 저 하늘의 별이 될 수 있겠습니까!?”

아신군의 목소리에는 비통함이 묻어 있었다.

“시왕께서 말을 달리시면 그 말발굽 자국들은 하나하나가 서사시를 이루는 낱말이 되었습니다! 시왕께서 검을 휘두르시면 그 은빛 궤적들은 하나하나가 전설로 남아 번쩍였고요!”

아신군은 다시금 쿵 소리가 나도록 이마를 돌바닥에 찧었다. 이미 한 차례의 활극으로 붉어진 바닥이 터져 나온 피로 한층 더 붉어졌다.

“저도 같은 것을 바랍니다! 아니, 더 많은 것을 바랍니다! 비단 저뿐만이 아닙니다, 폐하! 형님께서도! 상현후와 두오 대장군도 바랄 겁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젠장.’

[첫 번째 은월: 어… 가리비수. 나 잘 이해가 안 되는데….]

‘그야 넌 이해가 안 되겠지. 이해 못하는 게 낫기도 하고.’

하지만 비류아나 시우는 이해할 것이다.

그런 내 생각을 증명하는 것처럼, 비류아가 중얼거렸다.

[개천의 시왕: …평화가 길었다.]

너무나도 긴 시간, 전사들은 할 일이 없었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지 못하는 나날을 보내온 것이다.

‘장장 60년에 걸쳐서.’

그 뿐인가, 초대 법왕의 생전에는 군권을 빼앗겼다. 그 다음에는 역란을 주도한 자들이 속해 있다는 부채감까지 더해졌다.

[첫 번째 은월: 그래서 뭔가 좀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는 거야?]

[첫 번째 은월: 그 뭔가가 전쟁이고?]

‘응.’

[첫 번째 은월: 미친 거 아냐?]

야리소연의 목소리가 거칠었다. 그녀는 부족간 전투로 인해 마을을 버려야만 했다.

[첫 번째 은월: 평화가 길면 좋은 거잖아? 할 일 없으면 그냥 편히 퍼질러 꿀 빨 것이지 뭘 전쟁에서 활약하고 싶다는 거야?]

‘왜냐하면 말이야.’

[최초의 성녀: -전쟁을 겪어본 적이 없는 세대니까요.]

아리야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그녀는 박해받던 자들의 우두머리였다.

[최초의 성녀: 전쟁의 민낯을 알기 위해서는 한 차례 그것을 겪어 보아야만 해요. 그 전에는 그저 분칠된 얼굴만 접할 수 있죠. 어느 전투에서 어떻게 이겼다더라, 어떤 영웅이 어디서 활약했다더라…. 선남선녀가 노니는 것처럼만 보일 걸요.]

[개천의 시왕: …평화가, 너무 길었다.]

다시 한 차례 비류아가 반복했다. 그녀는 전설적인 전쟁군주로서 월족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개천의 시왕: 내가 이끌던 시기 월족은 약탈을 통해서만 경제를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죠.’

[개천의 시왕: 그렇다. 네가 법왕으로서 맞선을 보던 무렵 시우에게 말했듯이, 왕국은 더 이상 전선을 벌릴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약탈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경제를 돌려야 했고, 수 십 년간 왕국은 그렇게 해왔다.]

약탈 경제를 벗어난 사회에서, 본디 군부의 우두머리일수록 매보다는 비둘기에 가까워지는 법이다. 하지만 그것은 정확히 말하면 ‘군부의 우두머리’여서가 아니라 ‘가진 것이 많은 권력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화가 길었고, 전술한 사건들로 인해 왕국에서 ‘군부의 우두머리’들은 ‘가진 것이 많은 권력자’와 거리가 멀게 되었다. 그런 속에 아리야가 말한 것 마냥 실전을 경험해본 적 없는 세대로 물갈이된 것이다.

‘심지어 그 세대는 어릴 무렵부터 과거의 영광이니 선조들의 위업이니 하는 뽕에 절어 자랐을 테고….’

두오 대장군이 전쟁을 입에 달고 산다는 걸 좀 더 진지하게 들었어야 했다. 아니, 임무에 들어오기 전부터 예측해야 했던 일인지도 모른다. 나시파 변경백처럼 젊은 나이에 군부 요직을 맡았음에도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이는 드물다.

‘그 나시파 변경백조차 흑치사라 강의를 안 들었으면 훨씬 더 눈앞의 이득에 휩쓸렸을 거라고 했었지….’

그런 상황이니, 젊은 전사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앉았겠는가.

‘전쟁 대박.’

[첫 번째 은월: 뭐야 그 등신 같은 생각은?]

‘등신 같다는 걸 본인들은 모르거든.’

[첫 번째 은월: 왜? 좀 상상을 해보면….]

‘상상이 안 되니까.’

나는 이마를 짚었다.

‘내가 살아있던 시절에도 비슷했어.’

[간신 조련사: ….]

모르는 것은 모르는 채로 남는다. 겪어본 적 없는 것은 알 수 없다.

알게 됐을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저는 전쟁을 바랍니다!”

아신군이 소리쳤다. 그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우리 모두가 전쟁을 바랍니다! 전쟁에서 활약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늘에 닿는 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신군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 눈동자에는 충심이 가득했다.

“폐하께 미리 보고드리지 못한 것을 용서하소서. 하지만 보고드렸더라면, 폐하께서는 사안을 공유하셨겠지요. 그리하여 도란 제사니, 다물 재상이니 하는 이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칼로 할 일을 붓으로 하려 들었을 겁니다! 그것이야말로 싸우지 않고 이기는 길이라며 으스댔을 테지요! 그 꼴을 어찌 두고 보겠습니까? 진실로 왕국에 해가 되는 길입니다!”

“아신군.”

그렇게 충심 어린 아들의 눈동자를 무왕은 착잡하게 들여다보았다.

“그대는 물론이요 신월공 또한 어전회의에서 똑같은 주장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가 아니라. 그리하여 그대와 신월공이 도란 제사와 다물 재상보다 올바르다 여겼다면 본좌가 어찌 그 의견을 좇지 않았겠는가?”

“…거기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없사옵니다. 다만 이야기가 퍼지면 도무지 이로울 것이 없다고 판단하였나이다. 그래서 되도록 기밀을 유지하며, 가까운 시기가 되면 전해드리고자 한 것입니다.”

이미 충분히 난처한 기분이었지만, 그 말에는 다른 의미로 난처한 기분에 사로잡혀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건 뭐 거울을 마주보게 만든 것 같다요. 이중첩자가 이중첩자를 만났는데, 그 이유가 정보통제와 정보통제 때문이라니.”

사호가 휘파람을 불면서 꺼낸 말 그대로였으니까.

[최초의 성녀: ‘파벌이 갈린다’는 건 ‘같은 파벌이 되지 못한다’는 뜻, 곧 ‘상대를 신뢰하지 못한다’는 의미니까요….]

‘다시 말해 부당한 손해를 보기 싫다는 말이기도 하지.’

공을 다툰다. 내 노고를 공정하게 보답받지 못할까봐 염려하기 때문이다.

잘못을 숨긴다. 내가 저지른 것 이상의 처벌과 비난을 받을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기밀을 지킨다. 나 아닌 누군가가 천치 짓을 하는 바람에 일을 그르칠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윗사람들과 조직체계를 신뢰하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세상만사가 이성적으로, 그래서 이상적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 여기기 때문에, 사람들은 파벌을 짜는 것일 게다.

[간신 조련사: 딱 당신의 마음가짐이군요.]

‘부정하지 않겠습니다요.’

[간신 조련사: 살아있을 적에 당신은 그래도 사회지도층의 일원이었습니다. 당신이 그 이성적인, 그래서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고자 노력할 수는 없었습니까?]

‘에이, 말이 쉽지 어떻게 그럽니까. 그러다가 뒤통수 처 맞으면 그건 뒤통수 때린 놈만 좋으라는 소리잖아요. 그 꼴은 죽어도 못 보죠.’

나는 결국 남이 될 수 없고, 남도 결코 내가 될 수 없다.

그것이 대전제인데, 그런 속에서 나의 손해가 곧 남의 손해이며 남의 이익이 곧 나의 이익임을 보장해줄 만한 어떤 것이 필요하다.

[첫 번째 은월: 가족?]

[최초의 성녀: 같은 처지?]

[개천의 시왕: 강력한 지배.]

‘다 받고, 흑치사라가 가르쳤던 사회적 합의 같은 것도 있겠죠.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사람이 모여 살기 위해서는 참 많은 게 필요한 거예요.’

[간신 조련사: 그저 상대를 믿고 존중하면 족함에도, 그 간단한 것이 안 되기 때문에… 인세가 지옥인 이유는 단지 그것으로 족하다는 거군요.]

‘사람의 한계지요. 파벌의 한계고요.’

왕국의 한계이기도 하다.

왕국을 짊어진 남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무거운 숨을 꺼내 놓았다.

“본좌의 부덕함이 크고 또 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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