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고구마를 캐러 가자 (2)
매국노를 잡겠다며 왕도를 헤매던 내가 신월궁이 훤히 올려다 보이는 위치에 와서 멈추었다. 그 사실이 많은 것을 시사한 바, 내 뒤를 따라오던 친위대원들 사이에 동요가 벌어졌다.
그것이 혼란으로 번지지 않은 까닭은 오로지 무왕 이세가 발하는 압도적인 존재감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 사실에 감사하면서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사호 지금 어쩌고 있어?’
[첫 번째 은월: 음, 직접 보는 게 낫겠는데…. 천사님?]
[간신 조련사: 안 그래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보여드리지요.]
내 의식이 훅 빨려 들어갔다.
◈ ◈ ◈
다음 순간, 나는 신월궁 안에 있었다. 이전 제사장과 주온 왕자의 밀담이나 시우의 최후를 보았을 때처럼 시야를 제공받은 것이다.
입구가 하나뿐인 밀실에서 아신군과 사호가 탁자를 사이에 둔 채 마주앉아 있었다.
아신군이 말했다.
“네가 책장수냐?”
사호는 고개를 조아렸다.
“그렇다요. 약속의 주관자 엔릴을 모시는 몸으로서 예약된 책을 배달하러 왔다요.”
“꺼내 봐.”
아신군이 거만하게 요구했다. 사호는 순순히 품속에서 책을 꺼내 놓았다.
밀실 안에는 아신군의 부하로 보이는 사내들이 네 명 더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아신군의 곁에 서있었고, 한 명은 사호의 뒤에 서서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다른 둘은 입구를 가로막고 서 있었다. 네 명 모두 솔로마 특제 방패와 석궁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책을 받아 뒤적이던 아신군은 이내 짜증스러운 얼굴로 그 책을 곁에 선 부하에게 넘겼다.
“확인해.”
부하는 헛기침을 하더니 책을 펼쳤다. 그리고 그 옆에 새로운 논경 양화편을 꺼내 놓았다.
두 권의 논경을 번갈아 보던 부하의 이마에 진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아신군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뭐 그리 오래 걸려?”
부하가 난처하게 말했다.
“어, 저하. 죄송합니다. 빨리 하긴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왜? 너 태학관 다녔었잖아. 그럼 대륙 문자 처읽을 줄 알 것 아니야?”
“그렇습니다만, 그, 대륙 문자란 것이…. 일단 책이란 것 자체가 제법 두께가 되지 않습니까? 거기에 빼곡히 문자가 들어차 있는 것인데, 이걸 일일이 비교해서 걸러내자면… 거, 거기다가 두 책에 쓰인 필체가 달라서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게 필체 탓에 다른 문자로 보이는 것인지, 정말 다른 문자를 쓴 것인지… 일단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시간이 필요한 것이고, 또 이게 중요한 암호 아닙니까? 만전을 기하려면 여러 차례 비교 검증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할 터여서….”
아신군이 송곳니를 드러냈다.
“엿같이 주절대네.”
“죄, 죄송합니다 저하.”
“하여간 먹물 처먹은 새끼들은 이게 문제야. 나불거리는 소리마다 아주 그냥 먹먹해서 알아 처먹질 못하겠다니까. 그래서? 이 망할 놈의 새끼야. 내가 대신 읽어줄까?”
“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조금만 시간의 여유를 주신다면….”
“아, 됐고. 야. 책장수.”
아신군이 턱짓으로 사호를 불렀다.
사호는 조아렸던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
“예, 저하.”
“뭐라고 적혀 있냐?”
사호는 살짝 입을 벌렸다.
‘이런 질문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어이없겠지….’
어쩐지 같은 왕국민으로서 내가 다 부끄러워지는 느낌.
그런 내 마음을 알 수야 없었겠지만, 사호는 벌렸던 입을 오므리면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하, 저는 한낱 배달부에 불과할 뿐이다요? 그런 제게 여쭈셔도 곤란할 뿐이다요.”
“모른다고?”
“그래야 보안이 유지되지 않겠냐요? 애초에 그럴 거면 이렇게 복잡한 방식으로 전달할 필요도 없을 거다요. 내가 직접 말로 전달하면 그만인 걸.”
사실 여부야 어찌 됐건 합리적인 설명이었다.
아신군은 그 말에 대해 생각해 보는 듯 하더니 팔짱을 끼었다.
“그럼 도와.”
“예?”
“너 책장수라매? 그럼 책도 많이 읽었을 거 아냐? 도우라고. 저 머저리 자식이 빨리 좀 끝낼 수 있게.”
“어어….”
사호는 손을 들어 양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지금 이 상황을 도무지 씹어 삼키기 어렵다는 모습이었다.
원래 부족한 사람일수록 남들이 내비치는 못마땅한 기색을 귀신같이 알아채는 법이다. 아신군이 송곳니를 드러냈다.
“뭐냐, 그 태도는?”
“음… 저하. 조금 전 제가 말씀드린 것에서 짐작하실 수 있으시겠지만, 저는 되도록 여기에 대해 적게 아는 편이 바람직할 거다요?”
“그래서? 못 도와주겠다는 거냐?”
사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요. 이렇게 월국의 왕자님께서 직접 도움을 청하시는데 제가 어찌 외면할 수 있겠냐요? 돕도록 하겠다요.”
한심함 반 부끄러움 반 속에서 지켜보던 나는 사호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 수 있었다.
만약 사호가 북벽에서 붙잡히는 일 없이 계획대로 책 배달을 했던 거라면 그냥 물러나왔을 것이다. 아니, 그 전에 그냥 신전 뒤에서 첫 번째 접선책에게 책을 넘긴 시점에서 손을 뗐을 것이었다.
‘사호로선 그것만 해도 임무를 완수한 셈이니까.’
그러나 지금, 사호는 현성대군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이중첩자 노릇을 하게 됐다.
접선책들 사이를 오가면서 직접 이 신월궁까지 오게 된 것 역시 우리가 뿌리를 캐는데 도움을 주기 위함이었다.
‘같은 이치에서 암호에 대한 반응을 보고 싶겠지.’
1 이 매국노 자식들이 어떻게 대처하는가?
2 이미 알고 있는 게 있는가?
3 자기보다 윗선에 보고한다는 말을 흘리지는 않는가?
‘4 지금 좀 어이없다는 웃음을 띠고 있는 걸 보면 어디 한 번 갈 데까지 가보자는 마음도 있을 테고.’
어찌 됐건 이중첩자로서는 더 깊이 파고들 수 있는 기회를 잡은 셈이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사호는 책 두 권을 붙든 채 낑낑거리던 부하 곁에 붙어 도와주었다.
“이 문구와 이 문구가 다르다요.”
“아하, 과연. 그러니까 글자들을 모아보면….”
이내 암호가 풀렸다.
아신군이 팔짱을 끼었다.
“임오년 영일에 건너오겠다고?”
사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책 속의 암호문에는 그렇게 적혀 있다요. 그 때 내부에서 호응하라고도.”
“아… 물론 호응을 해줘야지. 바로 지금부터 말이야.”
아신군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은 순간, 철커덕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입구를 막고 섰던 부하들이 사호를 향해 석궁을 겨누었던 것이다.
“음….”
사호는 다시금 이마를 꾹꾹 눌렀다. 입가에 떠오른 헛웃음이 더 짙어져 있다.
“이건 또 뭐하는 짓이냐요?”
“뭐하긴 이 새끼야. 첩자를 때려잡는데 이유가 필요하냐?”
아신군이 비웃었다.
“아주 보통 첩자도 아니지. 듣자하니 나시파 그 말괄량이를 아주 떡으로 만들어 놨다면서? 그걸 우리 신월궁이 갚아준다 이거야. 상현 놈들도 염치가 있으면 우리한테 빚을 졌다는 걸 알겠지.”
“…염치는 댁들이야말로 가져야하는 거 아니냐요? 그 첩자와 내통한 건 댁들이다요? 이제 와서 날 죽여 증거를 없애려고 해봤자….”
헛웃음을 지으면서 말하던 사호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아신군이 버럭 역정을 냈던 것이다.
“내통은 무슨 내통! 다 너 같은 잡것들 낚으려고 연극 때린 거다 이 말이야!”
오호.
‘이건 좀 흥미로운 이야긴데.’
그런 내 생각이 사호에게 전해지지야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흥미를 가질 만한 이야기였다.
사호 역시 예외가 아니었는지 고개를 기울였다.
“연극?”
“그래 임마. 몰랐지? 아주 그냥 꼼짝없이 걸려든 기분이 어떠냐? 응?”
“다시 말해 처음부터 월국을 배신할 생각은 없었다는 말이냐요?”
“당연하지 새끼야. 내가 왜 왕국을 배신해? 뱃놈들이랑 대륙놈들이 뭐가 이쁘다고?”
“흐음….”
사호는 길게 신음을 흘렸다. 그러며 자신을 향해 겨누어진 석궁들을 한 차례 둘러본 그녀의 시선이 다시금 아신군을 향했다.
“그치만 그 뱃놈들과 대륙놈들이 당신을 왕으로 만들어줄 수도 있다요?”
“꼴값을 떨고 있네. 그 놈들이 퍽이나 그러겠다. 생각을 해봐라. 지들이 다 처먹을 수 있는 걸 왜 나한테 주겠냐?”
나로서는 아신군이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다는 게 거꾸로 놀라웠다. 하긴 가리비수가 던진 도끼는 가리비수가 알아본다고 아신군 같은 성격을 가진 자가 의심을 품는 것은 당연한 노릇일지도 모르겠다.
사호는 은근슬쩍 탁자로부터 몸을 떼면서 말을 흘렸다.
“맞는 말씀이다요. 하지만 대륙으로서도 나투아로서도 단시간에 월국을 집어삼키는 건 어려운 일이다요? 그러니 자신들을 대리하여 월국 전역을 지배할 인물을 세운다는 것은 유효한 선택지라고 생각한다요.”
“꼭두각시 말이지?”
“옥좌에 앉고 왕의 침소에서 자는 꼭두각시라면 할 만하지 않냐요?”
“지랄하고 있네. 내 의자랑 내 침대도 충분히 편안하거든? 무엇보다 나한테는 빌어먹을 은월의 눈동자가 없단 말이다. 신월 공작을 맡고 계신 형님께서도 그렇고.”
그러니 자신이 괴뢰가 되어봤자 왕국으로부터 지지받을 가능성 따윈 없다는 이야기였다.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이 자식 왜 이래.’
놀라우리만치 정확한 판단이 거듭되자 입을 다물기 어려웠다.
‘마치 제정신 같잖아.’
아신군은 기세등등하여 으스댔다.
“임오년 영일이라고! 하! 임오년 영일은 개뿔. 새해 첫날은 대삭월(大朔月)이야, 대삭월! 어디 잡놈들 아니랄까봐 거지같은 역법을 쓰고 X랄이야 X랄이? 뒈지려고 확 그냥. 하긴 뒈지게 될 것이다 그 날. 어디 건너와 보라지. 약탈하기 딱 좋게 텅 빈 왕도에서 우리가 아주 쌍수 들고 환영해 주길 기대하겠지만… 그리고 실제로 환영해 주겠지만… 그쪽이 바라던 그림은 아닐 거야. 지금 널 환영하는 것처럼 환영해줄 생각이거든.”
“….”
“도하해 온 잡놈들을 확 기습해버리는 거야. 싸먹어버리는 거지. 한 놈도 도망치지 못하게 말이야. 우리 신월궁의 병사들이 주축이 되어서… 그러면 이제 부왕께서도 알게 되시겠지. 많고 많은 아들딸들 중에 진정으로 왕국을 위하는 게 누구인지…. 부왕을 진정으로 존경하는 것이 누구인지…. 상현후도, 하현후도, 잔월후도 아니라 내 어머님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왕후셨다는 것도….”
열에 들떠 중얼거리던 아신군은 으르렁거림을 닮은 신음으로 말을 흐렸다.
고개를 든 아신군의 눈동자는 차갑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만 뒈져라, 첩자새끼야.”
“으흠.”
사호가 폭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과는 종류가 다른 미소가 그 입가에 맺혀 있었다.
“솔직히 기대가 좀 빗나갔지만은… 뭐, 나쁘지 않다요.”
“앙?”
“되도록 다치지 않게 잡아 주겠다요.”
“처돌았냐? 무슨 개소리를-”
다음 순간, 사호가 움직였다.
탕! 바닥을 옆으로 차며 튕겨 나간 것과 동시에, 자신을 향해 겨누어 졌던 석궁 하나를 위에서 아래로 후려쳤다. “어,” 팡! 반동으로 날아간 쇠뇌가 불똥을 튀기며 천장을 긁었다. 그 쇠뇌가 채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사호의 주먹이 균형을 잃은 부하의 코를 뭉개 놓았다. 바로 직후에는 다른 부하의 코도 뭉개졌고, 장전된 석궁이 통째로 사호의 손에 넘어갔다.
“어,”
아신군이 당혹한 소리를 냈다. 그나마 그것이 사호의 움직임에 ‘반응했다’는 의미로는 가장 빠른 것이었다. 대륙문자를 읽을 줄 알아 사호와 함께 암호를 해석했던 부하도, 사호 곁에 서서 그녀의 움직임을 견제해야 했을 부하도 삽시간에 벌어진 일에 그저 멍청히 서있었다.
“충고 하나.”
사호가 말했다. 그 말이 떨어지는 것과 동일한 순간에, 팡! 석궁에서 날아간 쇠뇌가 아신군의 뺨을 스치고 날아가, 벽을 강하게 때렸다.
“힉,”
아신군의 입장에서는 가로로 친 벼락이 자신을 스치고 지나간 느낌이었을 것이다.
사호는 그대로 석궁을 둔기처럼 쥔 채 휘둘렀다. 퍽 소리와 함께 아신군의 부하 한 명이 무너졌다.
“다 꼼짝 말라거나, 넌 뒈졌다거나, 이제 끝났다거나, 그러니 포기하라거나,”
사호가 석궁을 집어 던졌다. 암호를 해석했던 부하가 머리를 감싸며 주저앉는 것을,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짓쳐 들어 머리를 후려치고는,
“그런 소리들은 말이다요. 저하.”
그렇게 아신군과 1 대 1로 대면한 채 서서, 사호는 뒷짐을 졌다.
“팔이든 다리든, 일단 쏜 다음에 하는 거다요.”
그렇게 말하는 암살자의 입가에는 정말이지 상쾌한 미소가 떠있었다.
◈ ◈ ◈
그리하여 나와 친위대, 그리고 이세가 들이닥쳤을 때에는 이미 모든 상황이 정리된 후였다.
“아, 다들 왔냐요?”
꽁꽁 묶인 아신군과 그 부하들 위에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사호가 우리를 맞이했다. 대단히 계면쩍은 표정이 그 얼굴에 떠있었다.
“어서오라요. 설명할 것이 조금 많다요.”
“응.”
아마 나도 비슷하게 계면쩍은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대충 알겠지만, 설명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