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암살자, 사호 (2)
최악의 경우라. 그거야 어렵지 않았다.
“4 3을 하는 와중에 틈틈이 우리 편 요인들을 암살한다.”
나는 현성대군과 나를 번갈아 가리켰다. 그리고 북쪽도.
“뭐 구체적으로는 세자 전하나 제가 목표물이 될 수 있겠군요. 아니면 나시파 변경백에게 했던 말을 지키기 위해 북벽으로 여정을 떠난다거나…. 기타 등등, 이렇게 상상할 수 있는 일들이 벌어질 수 있을 테고 차마 상상할 수 없는 일도 벌어질 수 있겠지요. 선의를 담아내기엔 턱없이 부족하지만 악의는 한 톨의 남김없이 담아낼 수 있는 게 이 세상이니까요.”
현성대군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는 머뭇거리는 눈으로 사호를 바라보았다.
사호는 턱을 추어올렸을 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으므로, 현성대군의 시선은 자연히 부왕을 향했다.
이세는 묵묵히 그 시선을 맞받았다.
“세자가 거두고 싶다 말했던 인물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세자가 결정할 일이다.”
현성대군은 망설임 속에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이 잘못된 결정을 내릴까 두렵습니다.”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면 그 결과를 감수하면 되는 일이야. 감수할 자신이 없으니 두려움이 솟구치는 것이고 손해를 염려하니 무서워지는 것이다.”
“이 사람의 결정으로 인해 이 사람 아닌 다른 이가 다칠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세자의 말은 언뜻 기특하게 들리지만 전제가 그릇되었다. 자신의 결정이 온전히 자신에게만 영향을 끼치는 일은 범부들 사이에서도 드문 일이다. 하물며 세자는 다음 대의 달무리를 짊어질 몸. 세자의 결정이 항상 왕국 전체에 영향을 끼침을 알아야 할 것이다.”
[개천의 시왕: …정말 잘 컸구나.]
비류아가 부지불식간에 흘린 말처럼 이세의 목소리에는 30년간 왕관을 짊어져온 이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
다만 현성대군은 그 무게를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다. 그가 되물었다.
“…아바마마께서 이 사람이라면 어찌 하셨겠습니까?”
그 질문에 이세는 왕이 아닌 아버지로서 대답했다.
“본좌는 본좌가 현명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따라서 본좌였다면 우선 재상, 제사, 대장군을 불러들였을 것이다. 법왕과 친위대장도. 살아있는 왕비들도. 왕비의 자리를 대신해 파벌을 대표하는 공작들도. 본좌는 그들 모두로부터 조언을 구했을 것이고, 그 중 가장 옳다고 여겨지는 것을 좇았을 것이다.”
“그것은 조언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일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다. 그들은 조언을 했을 뿐 결국 결정을 내린 것은 본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책임 또한 본좌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무겁군요.”
이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시 아버지가 아닌 왕으로서 말했다.
“그것이 세자가 물려받을 자리의 무게다.”
“이 사람이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 느껴진다면 보다 노력해야 할 것이다. 세자는 적자이고 적통이어서, 마땅히 부족한 몸으로도 왕의 책무를 다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현성대군은 한참을 침묵했다.
사호는 기다려주었다. 이세 또한.
현성대군은 나를 돌아보았다.
“자네의 조언을 듣고 싶어.”
음.
바로 얼마 전, 북벽으로 향할 때만 하더라도 현성대군은 나를 불신어린 눈으로 노려보았었다. 그러나 지금 현성대군의 눈빛은 신뢰하는 이를 향한 그것이었다.
[간신 조련사: 그게 참 신기한 노릇이란 말이지요.]
천사님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간신 조련사: 당신이 임무에 들어가 있는 시간은 객관적으로 보아 극히 짧단 말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 짧은 시간 동안 당신은 여러 사람으로부터 신뢰를 얻어내어 버리지요. 임무의 목표물인 은월들은 물론이고 시우, 흑치사라, 하누리, 심지어 마나 등등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솜씨를 상찬해야할까요? 아니면 신뢰의 가벼움을 탓해야할까요?]
‘글쎄요. 천사님은 저를 신뢰하십니까?’
[간신 조련사: 어라, 지금 좀 감상적인 기분인 모양이군요. 답지 않은 질문을 하는 걸 보니.]
‘어떠십니까?’
[간신 조련사: 어느 정도는.]
‘예.’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천사님과 달리 나를 완전히 믿고 있을 현성대군에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한정되어 있었다.
“저라면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천사님이 어느 정도는 나를 믿고 있다 말한 이유일 것이다.
“다시 계구를 채울 겁니다. 그대로 감옥에 가둘 거고요. 사호의 인질이 될 인물을 왕국에 데려올 때까지 그 상태를 유지할 것이고, 그렇게 인질을 데려온 뒤에는 인질에 대한 감시를 늦추지 않을 겁니다.”
“늘 강조하던 것처럼 이번 역시 신중하게 굴 거라는 말이지.”
“예.”
나는 겁이 많기 때문이다.
“저는 사호를 믿지 않을 겁니다.”
사호는 코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에는 ‘나라도 그랬을 것’이라는 함의가 담겨 있었다. 누구라도 그 함의를 알아보기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현성대군 역시 그 함의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잠시간 침묵하고 나서, 현성대군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호.”
“예, 세자 전하?”
“밥값 할 자신 있어?”
사호는 기지개를 켰다. 초인의 영역에 이를 만큼 잘 다져진 잔근육들이 한 차례 꿈틀거렸다.
이리저리 몸을 틀면서 뼈와 근육의 위치를 정돈한 대륙의 암살자는 대담하게 웃었다.
“오는 길에 전하께서 말씀하셨지 않냐요. 내 동생과 교환하려면 제법 큰 놈을 잡아야겠다고.”
“그랬지.”
“그렇다면 그 큰 놈을 아예 내가 잡아버리는 게 깔끔하지 않겠냐요?”
그 말에, 현성대군은 결정을 내렸다.
+
[ ★은월을 지켜라 / 난이도 B ]
[ ★북벽수성(北壁守城) / 난이도 A ]
[ 대하대첩(大河大捷) / 난이도 A ]
+
동시에, 시스템 또한 현성대군의 결정에 응답했다.
◈ ◈ ◈
시간이 흘렀다.
“급보입니다!”
북벽으로부터 나시파 변경백의 명을 받고 달려온 전령이 어전에 무릎을 꿇고는 고했다.
“나른한 벌판에 북부 야만부족들이 진을 쳤습니다! 그 숫자, 약 3백!”
도란 제사가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허, 300이라. 아무리 달의 여신의 복음을 전달받지 못한 이들이라 난폭하기 이를 데 없소이다. 사람이 300이나 되면 더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을 것인데…….”
두오 대장군은 열불을 내며 소리쳤다.
“내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 누누이 말하지 않았소이까! 평화로운 시기는 오래 가지 못하는 법이오!”
다물 재상은 털털하게 웃었다.
“자아자아, 진정들 하십시다. 야만족들답다면 야만족들다운 일 아닙니까. 허허. 300명이라니. 거 어차피 변변찮은 무기도 없을 것을. 보나마나 겨울을 맞아 군입을 줄이기 위해 솎아내기 당한 무리일 테지요.”
그렇게 한 마디씩 던진 왕국의 세 수뇌부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래서 나시파 변경백은 어찌 대응하고 있소?”
“이미 이때를 대비해 변경백령 전체 병력을 소집해놓았다고 하오이다. 참으로 이 몸의 인척이자 상현후의 조카님다운 혜안이시지.”
“흐음. 변경백령 전체 병력이라? 그럼 총합 800명 가까이가 북벽에 진을 쳤다는 것 아닙니까? 평소 주둔 병력의 약 10배에 달하는 이들인데. 그건 좀 과한 게 아닐는지….”
“내 말이 그것이외다. 내가 경전을 읽느라 군사 일에는 어둡지만 수성하는 측이 공성하는 측에 비해 3배의 이점을 갖는다 하지 않았소? 더구나 북벽 같은 천혜의 요새라면 그 이점이 3배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5배, 10배 가까이 되지 않겠소? 그리 계산하면 야만인 300명 대 왕국 정예병 8,000명이 되는 셈인데, 허어. 배보다 배꼽이 커지는 게 아닐는지….”
“과한 것이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이 있소만, 전장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말이오! 무조건 과한 것이 낫소!”
“두오 대장군의 말이 뜻하는 바는 이해를 합니다. 다만 대장군께서도 도란 제사의 말을 이해해 주셔야지요. 어쨌든 병력이 먹지도 싸지도 입지도 않고 머무를 수는 없지 않습니까? 800명의 병력이 북벽에 머무른다는 것은 그만한 돈이 든다는 뜻이에요. 변경백령 측에서 자체적으로 처리한다면 모르되 왕국 차원에서 그 주둔비를 지원해주길 바란다면 그건 좀 생각을 해봐야만….”
그렇게 어전에서 삽질하는 소리가 오가는 동안 이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현성대군도 얌전히 앉아 있었다.
[첫 번째 은월: 왜 정보 공유 안 함? 재수 없어서?]
[최초의 성녀: 설마요… 음, 아직 기밀을 유지해야 하는 단계여서? 맞지요, 예언자님?]
[개천의 시왕: 그리고 사정을 아는 입장에서는 이들이 삽질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즐겁기도 하겠지.]
‘셋 모두 ‘좋아요’ 하나씩 드리겠습니다.’
저승의 세 은월이 말한 바와 같이 나, 현성대군, 이세는 물론이요 나시파 변경백 또한 사호로부터 얻은 정보를 공유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사호의 존재 자체를 알리지 않았다.
‘당분간은 기밀로 유지해야 해.’
이는 물론 철저하게 실리적인 이유에서였다. 이 셋이 영 재수 없는 건 사실이었지만, 설마 그런 유치한 이유로 정보를 차단했을까.
따라서 세 수뇌부가 삽질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건 기쁜 부작용에 가까웠다.
이틀 뒤, 새로운 전령이 도착하여 새로운 보고를 올렸다.
“나른한 벌판에 성 제국의 병력이 출현! 그 숫자 약 500! 성 제국 측에서는 야만부족들을 토벌하기 위해 왔다면서, 왕국 또한 북벽의 병력을 일부 빌려주면 좋겠노라 전해왔습니다! 병력 지원에 대한 대가는 준비하겠다고 합니다!”
세 수뇌부가 각자 다른 각도로 뒤집어졌다.
“500이라! 야만인 300이 이미 진을 치고 있다 했지요. 성 제국병 500 대 야만인 300 나른한 벌판이 붉은 벌판으로 바뀌겠구료. 참담한 일이외다.”
“이는 전조요! 제국병이 나른한 벌판에 진을 치다니! 시현군 저하께서 북벽에 다녀오시기 전에 나-성 군사동맹에 대해 언질한 바가 있지 않소이까!”
“나-성 군사동맹이라니 거 언제적 이야기를…. 결국 시현군 저하께서도 왕세자 전하께서도 북벽에는 헛걸음을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지금도 부끄러운지 입을 꾹 다물고 계신데, 허허, 두오 대장군께서 짓궂은 부분이 있으십니다.”
“성 제국 측에서 병력 지원을 요청했다니 말인데, 제국병과 야만족 사이에 전투가 벌어질 경우 멀뚱멀뚱 구경하기보다는 성 제국병을 돕는 것이 옳겠소. 우방이지 않소? 그렇게 군사적 교류가 이루어지면 사이도 한 층 돈독해질 것이고, 달의 여신의 말씀을 전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소?”
“도란 제사는 또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성 제국병을 도우려거든 북벽의 문을 열어야하지 않소이까! 그 틈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줄 누가 안단 말이오!”
“말씀드렸듯 두오 대장군이 염려하는 바는 제가 잘 압니다. 하지만 이걸 생각해 보아야 해요. 엊그제 이야기가 나왔듯 지금 북벽에는 800명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800명의 전사들이 일없이 그저 군량을 축내고 앉아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어차피 언젠가는 북쪽의 야만족들을 소탕하긴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제국 측에서 병력 지원에 대한 대가도 약속을 했다고 하니, 정확히 어떤 대가를 치를 것인지 이야기를 들어보고 그 대가가 얼추 균형이 맞는다 싶으면 실전 경험도 쌓을 겸 일부를 파병하여 일석이조를….”
이승의 세 수뇌부가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은 저승의 세 은월을 암 걸리게 만들었다.
[첫 번째 은월: 뭐야 얘네? 혹시 등신인가?]
[최초의 성녀: 이 무슨 적폐들….]
[개천의 시왕: 아니아니… 모두 새로이 입주해온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지 않은가. 개천 이래 60년간 평화가 이어졌다. 물론 그 동안 역란도 벌어지고, 소소한 동란도 있었다지만, 어쨌든 본격적인 전쟁 없이 6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