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암살자, 사호 (1)
귀찮은 일을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상사는 어디서건 환영받는 법이다. 나 또한 쌍수를 들어 현성대군을 환영했다.
“예, 전하. 그 쪽 팔 좀 잡아주십시오.”
“응.”
그렇게 나와 현성대군은 열심히 사호를 빨래질했다. 사호는 축 처진 채로 우리 둘에게 몸을 맡겼다. 이따금 나와 현성대군을 흘끔거리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나조차 이세의 눈빛이 느껴질 지경이니….’
사호로선 내내 목덜미에 칼날이 닿아있는 듯한 기분일 것이다. 나나 현성대군에게 위해를 가하는 건 물론이고 관능적인 느낌을 받을 상황도 아니었다.
“좋아. 그럼 이제 옷 입고… 손 좀 줘봐.”
나는 천과 부목을 들어올렸다.
[ 의약(Lv.1)이 발동됩니다. ]
얼마 안 있어 나는 부러진 오른손 손가락을 비롯하여 사호의 상처들을 대강 치유하는데 성공했다.
“끝. 좀 편할 거야.”
“고맙다요….”
사호가 기 빨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세는 대검으로 허수아비를 두드리던 걸 멈추고 사호를 돌아보았다.
“다시 하겠나?”
사호가 진저리를 쳤다.
“잘 거다요!”
“그런가. 그럼 자고 나서 하지.”
이세는 다시 대검으로 허수아비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사호는 한숨을 지으면서 바닥에 뻗어버렸다. 내가 한 손을 들었다.
“폐하, 계구들 가져와서 채울까요?”
“쉬게 두어라. 본좌가 지켜보고 있으니.”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현성대군도.
그렇게 이세가 허수아비를 두드리는 소리만 울려 퍼지는 가운데, 바닥에 뻗어있던 사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으,”
한 차례 더.
“으으으….”
그리고 한 차례 더 몸을 떤 사호가 벌떡 일어섰다.
“아-정말! 뭐냐요 정말!”
나와 현성대군, 이세가 사호를 돌아보았다.
여태 전투 외침의 영향이 남아 카랑카랑하게 울리는 목소리로 사호가 쏘아붙였다.
“뭐하자는 거냐요! 이따위 개짓거리를 한다고 해서 내가 뭐… 마음으로부터 승복하기라도 할 거라고… 굴복시키고 싶거든 차라리 고문을 할 것이지, 정말 왜….”
“앞서 말했던 것처럼, 그대가 강대한 전사이기 때문이다.”
이세는 담담하게 말했다.
“재능을 갖고 태어났겠지. 개중에서도 가려 뽑혔겠지. 그런 속에서 노력을 거듭했겠지. 가르침을 받아들이고자 안간힘을 썼을 것이며, 한 순간도 게을리 하지 않고 단련을 거듭했을 것이다.”
“…그래서, 동정하는 거냐요?”
사호가 잇소리를 냈다. 붙잡혔을 때에도, 인질을 대륙의 손으로 직접 죽이게 하자는 제안을 들었을 때에도 보이지 않았던 분노가 새하얀 입김에 섞여 새어나왔다.
“그야 노력했다요? 피를 토할 정도로 고생했다요! 그치만 그래서, 그게 뭐 대수냐요? 그런 거야 모두가 다 하는 것 아니냐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내가 특별한 것도 아니고 남들이 덜한 것도 아니다요! 그런 게 인생 아니냐요!”
세상은 이렇게나 넓다고 말했던 그 때처럼, 사호가 양팔을 펼쳤다. 바깥은 어느덧 밤이었다. 서서히 보름이 차오르는 시기, 고즈넉한 달빛이 바람과 함께 새어들어 연무장을 밝혔다.
“납득할 수 있는 운명 따위를 기대해선 안 된다요! 삶에 대고 떼를 써선 안 된다요! 죽음에 대고 앙탈을 부려선 안 된다요! 나는 이미 그걸 다 납득하고 있었다요! 내가 그렇게 잡혔다는 것도! 전사로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도! 전부 다 납득하고 있었는데, 왜 댁 따위가!”
부왕에 대한 폭언을 들은 현성대군이 눈썹을 찌푸렸다. 이세는 손짓으로 그런 현성대군을 자리에 앉히고는 조용히 말했다.
“동정하고 앉았냐는 건가?”
사호는 이를 갈았다. 채 누르지 못한 감정이 송곳니 틈새로 터져나왔다.
“그렇다요!”
사호는 어깨를 떨었다.
“뭐냐요, 정말…. 이게 지금 나한테 기회를 주는 거라고 생각하냐요? 날 붙잡은 저 시현군보다 훨씬 더 악질이다요. 나는,”
“본좌의 아버지는 사고로 돌아가셨다.”
이세가 말했다.
“땅이 크게 흔들리던 날, 산이 거세게 우짖던 날에 본좌와 본좌의 아버지, 아버지를 모시던 병사들은 동굴 안에 갇혔다. 그 동굴은 수로를 만들기 위해 파던 것이었고, 우릴 가둔 굴 안에는 서서히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지.”
[개천의 시왕: ….]
“본좌는 그 때 어렸다. 자주 아버지의 무등을 타고는 했지. 그렇게 하면 세상의 풍경이 달라지는 게 마냥 신기하고 즐거웠거든. 하지만 그 사고 때는 다른 이유로 무등을 타야만 했다. 차오르는 물로부터 조금이라도 본좌를 벗어나게 하고자, 아버지는 본좌를 무등 태운 뒤 선 채로 익사하셨다.”
이세는 연무장에 놓인 연못을 흘겨보았다. 산이 울부짖던 날로부터 어언 45년, 수로는 완공을 맞이했다.
지금 저 연못을 채운 물 또한 바로 그 수로로부터 흘러온 것이리라.
“본좌는 아버지가 비명에 가셨다고 생각했다. 다시없을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셨다고. 하지만 자라나며 본좌는 그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이세가 말했다.
“그 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 날, 평소와 다르지 않은 숫자의 사람들이 죽었다.
“그 날, 아버지는 죽어가며 본좌를 남겼다.”
그 날,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 죽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대가 말한 것처럼 만족할 수 있는 결말을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은 적다. 아무리 장대한 계획을 세웠다고 해도, 얼마나 원대한 꿈을 꾸었다고 해도, 아주 조금 운이 따라주지 않는 것만으로 그 모든 것은 도자기처럼 깨져버리고 만다.”
재해를 겪은 왕도에서 자라나야했던 남자는 그렇게 자신이 깨달은 바를 입에 담았다.
“본좌의 아버지와 같이 죽음 앞에 무언가를 남길 수 있는 호사를 누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을, 이 세계는 무심하며 부조리하다는 것을 본좌는 잘 알게 되었다.”
“알면 왜….”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륙의 전사여.”
이세는 팔짱을 끼었다. 단련된 근육 위로 달빛이 미끄러졌다.
“한이 남는다. 원망이 남는다. 자신의 삶이 여기서 이렇게 끝나서는 안 된다는 분노가, 지금까지 계속해온 삶의 궤적이 이렇게 무의미할 리 없다는 불신이 남는다.”
나직한 목소리가 달빛을 타고 연무장의 연못 위에 내려앉았다.
“성실히 살아온 자가 결국 마지막에 남기는 것이 저주라면 슬픈 일이 아닌가.”
어차피 이렇게 끝날 거라면,
그토록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좀 더 대충 살았어도 좋았다. 성실하게 사느라 아팠다.
“심지어 그 저주는 망자의 유해와 함께 스러지는 것이 아니라 산 자들의 품에 독으로 남는 것이다.”
어차피 저렇게 끝날 거라면,
그토록 공들일 가치가 없었다. 보다 편히 지냈어도 되었다. 느긋하게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런 이들과 같은 세대를 공유해야했던 왕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본좌는 납득할 수 있는 경과를 거치게 해주고 싶은 것이다. 납득할 수 있는 결말을 마련해주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누구든 본좌의 힘이 닿는 한 무언가가 되게끔 해주고 싶은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이들에게 언젠가는 무엇이 되어보라고 말했던 왕은 30년의 세월이 흘러 똑같은 말을 입에 담았다.
“그대들의 노력이 무의미하지 않았고 무가치하지 않았음을 증명할 기회라도 주고 싶은 것이다.”
달이 휘어감은 달무리처럼, 이세의 머리 위에는 왕관이 있었다.
무왕 이세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것이 왕관을 쓰는 자의 업이기 때문이다.”
정적이 흘렀다.
현성대군은 입을 꾹 다문 채 말이 없었다. 사호 역시 말이 없었다.
나는.
음.
나는 사호를 향해 말했다.
“사호.”
사호는 고개를 들었다. 말은 없었다. 붉은 눈동자 속에서 이글거리던 불길은 꺼진 지 오래였다.
나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너는 첩자이고 암살자였지. 누군가를 해치울 때도 정면에서 승부를 걸기보다는 덫을 놓거나 인질을 잡거나 기습을 하는 경우가 많았겠지.”
그것이 그들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결말이란 사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너는 자신이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추호도 방심하는 일 없이 노력하고 있다고, 도리어 그것이야말로 상대를 최대한 존중하는 길이라고 생각했겠지.”
“…그렇다요.”
사호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당한 시점에서 그들은 이미 최선을 다하지 못한 거다요. 방심한 거다요. 불만을 가질 자격조차 없는 거다요. 그렇게 생각했다요. 그리고 그러니까,”
“네가 당한 것도 같은 이치라고 납득했다 이거지.”
“그렇다요. …사실 남는 건 그뿐 아니냐요?”
“응.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니까, 폐하께서 네게 써주시는 선심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거겠지. 자신의 최선이 부정당하는 느낌일 테니까. 남들을 부조리하게 짓밟아 온 게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 테니까.”
사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숨을 흘렸고, 그것으로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하지만 그건 아니야.”
나는 말했다.
“폐하께선 강하신 분이야. 그러니 여유를 주실 수가 있고. 너는 그만큼 강하지 못했어. 그러니 여유를 줄 수가 없었던 거야. 단지 그것뿐이지.”
“….”
“그러니 정도 이상으로 속상해 할 필요도 없고, 필요 이상으로 날을 세울 필요도 없어. 네가 잘못해온 것도 아니고. 그냥 이렇게 강한 사람이 있고, 자신은 그 중 하나가 아니구나 하고 받아들이면 되는 일이야.”
사호는 한동안 침묵했다.
그러다가 툭 던지듯 말했다.
“왜 나를 위로하냐요?”
“이젠 내가 마음에 안들어?”
“납득할 수 있는 답이 안 돌아오면 그럴 것 같다요. 그래서, 왜냐요?”
“나도 과를 따지자면 네 쪽이거든.”
“아… 하긴 그렇겠다요. X발, 내가 무슨 참새 새끼도 아니고 돌멩이에 그물이라니….”
“끝내주는 생각이었지?”
“부정할 수 없다는 게 슬프기 그지없다요….”
사호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에는 더 이상의 독기가 없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사호는 먼저 이세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감사하다요, 폐하.”
이세는 한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사호는 그 뒤에도 한참을 이세에게 고개를 조아린 채 있다가 현성대군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말했다.
“협조하겠다요.”
현성대군이 눈을 깜빡거렸다.
“어… 적극적으로 말야?”
“그렇다요?”
“이 사람은 아직 자네의 친지를 데려오지 못했는데…. 적극적으로 협조하면 자네가 드러날 위험이 커지잖아. 그럼 자네의 친지가 위험에 빠지지 않을까?”
“참새처럼 잡혔다지만 첩자였고 암살자였다요. 적극적으로 협조하면서도 어떻게든 드러나지 않게 노력해 보겠다요.”
“그래도 무슨 일이 생기면….”
“감수할 수 있다요. 내가 선택한 거니까.”
뒷머리를 벅벅 긁은 사호는 고개를 비스듬히 틀었다.
“그보다 전하야말로 감수할 수 있겠냐요?”
현성대군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내가 해석해주었다.
“사호가 적극적으로 협조한다는 말은 사호에게 그만한 운신의 자유가 허락되어야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전하께서는 그것을 감수하실 수 있으십니까?”
현성대군이 팔짱을 끼었다. 곱상한 얼굴이 고뇌에 잠겨 찌푸려졌다.
“시현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나는 사호를 흘끗했다.
“저야 천상 사호 과니까요. 일이 삐끗할 경우부터 생각해보겠죠.”
사호에게 자유를 준 결과 잘못될 수 있는 일들 :
“1 사호가 그대로 도망친다. 이게 그나마 가장 최선의 경우가 될 겁니다.”
“응? 놓치는 게 최선이라고?”
“예에. 그 밖에는, 2 사호가 왕도에서 만나기로 했던 접선책과 접선하여 북벽의 일이 틀어진 것을 비롯하여 각종 정보들을 넘겨준다. 이것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경우일 테고.”
“…3번째는?”
“3 겉으로는 우리 편인 척 하면서 지속적으로 2를 수행하는 식으로 우리에 대한 정보들을 실시간으로 적들에게 노출시킨다. 이게 그럭저럭 나쁜 경우일까요?”
현성대군이 고운 얼굴을 찌푸린 채 손을 내저었다.
“잠깐만. 그 셋이 각각 최선, 나쁘지 않은 경우, 나쁜 경우라면 최악의 경우는 도대체 뭐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