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왕도에서 (3)
이세는 특유의 곧은 눈빛으로 사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대는 사방을 떠돌아다녔다 하였으니 필히 견문이 넓을 것이고, 짐작하는 바 또한 크고 깊을 것이다. 본좌는 내 나라에 닥쳐 올 횡액을 타개하고자 그 지혜를 빌리고 싶은 것이다.”
사호는 햇볕에 쏘인 것처럼 인상을 찡그린 채 몸을 뒤틀었다.
“아는 것은 이미 다 이야기했다요? 그 이상은….”
“그 이상을 본좌는 요구하는 바이다.”
사호는 입을 다물었다. 가늘게 뜬 눈 틈새로 홍옥을 닮은 붉은 눈동자가 번뜩거렸다.
“좀 더 적극적으로 협력해달라는 것이냐요?”
이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나는 이미 내줄 수 있는 것들을 모두 내주었다요? 심문에도 협조했고 접선지와 위치까지 모두 알려줬다요. 그 이상을 바란다고 해도 뭘 어떻게….”
이세는 대검을 들어 올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짓씹듯 말하던 사호는 이세의 그림자가 자신을 뒤덮은 다음에야 움찔하여 고개를 들었다.
다음 순간, 이세의 대검이 허공을 내달렸다.
육중한 대검이 마치 몸부림치는 용처럼 기괴한 곡선을 그리면서 떨어졌다. 쾅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나무 조각들이 튀어 올랐다. “힉,”현성대군과 사호가 짜기라도 한 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반면 눈을 뜨고 있던 나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이세는 사호를 옥죄고 있던 계구들을 모조리 박살낸 것이다.
“폐하…!?”
나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나왔다. 저 괴물을 포획하기 위해 얼마나 개고생을 해야 했던가? 무려 마흔 명 이상의 병사들이 완벽한 작전을 짜서 기습한 다음에야 성공할 수 있었던 일 아닌가.
뒤늦게 눈을 뜬 현성대군도 눈을 부릅떴다.
“폐, 폐하. 어찌하여….”
“시현군도 세자도 놀라지 말라.”
나직한 목소리에 나와 현성대군이 숨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사호의 움직임을 제약하던 계구들이 사라진 것이다.
사호 역시 자신이 속박으로부터 풀려났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덤벼라.”
얼떨떨한 얼굴로 얼어있는 사호를 향해, 대검을 어깨에 짊어진 무왕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대는 강대한 전사라고 들었다. 솜씨를 펼칠 기회조차 없이 당했다는 것도 들었다. 그렇다면 마땅히 아쉬움이 남았겠지. 그 아쉬움을 풀어주도록 하마.”
이세는 사호를 향해 말했다.
“모왕과 태부의 적자이며 이 시대의 달무리를 짊어진 본좌가 여한이 없을 때까지 상대해주겠다.”
◈ ◈ ◈
사호는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눈길이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굳이 독심술을 쓰지 않아도 그녀의 머릿속에 스쳐갈 생각들이 손에 잡힐 듯 그려졌다.
<연무장.> <목검.> <문.> <연못.> <나무 창문.> <도끼.> <허수아비.> <채찍.> <현성대군.> <시현군.> <인질?> <무왕.> <월국의 왕.>
나는 허리춤의 도끼를 움켜쥐면서 현성대군의 앞을 가로막았다. 사호는 그런 나와 현성대군을 한 차례 흘끗하더니 이세를 바라보았다.
사호가 말했다.
“무슨 장난이냐요?”
이세는 말없이 양 팔을 벌려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완전히 무방비한 자세.
현성대군이 소리쳤다.
“아바마마! 위험….”
그 소리가 중간에 끊어진 것은, 사호가 자리를 박차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북벽에서 포획당할 적에 사호는 돌팔매질을 당해 오른손 손가락이 하나 부러졌었다. 계구들을 채우면서 간단히 부목을 대주었지만 아직 낫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왼손은 멀쩡했고, 사호는 불편한 오른손을 방패로 삼듯 들어 올린 채 멀쩡한 왼손을 단검처럼 그 뒤에 숨겼다.
“(아아아아아아!)”
천마리의 까마귀가 동시에 우짖는 듯한 괴성, 성대 손상을 전제한 전투 외침이 연무장을 찢어 갈랐다. 나와 현성대군이 반사적으로 두 귀를 틀어막으며 경직된 순간, 팡…! 사호의 왼손이 공기를 터뜨리면서 이세를 향해 쏘아졌다!
붙잡혔다.
“읏…!?”
사호가 주춤했다. 이세의 커다란 손이 사호의 왼손을 붙잡아 멈춘 것이다. 이세는 특유의 우직한 눈빛으로 사호를 내려다보았다.
사호가 잇소리를 냈다.
“하앗…!”
조금 전 전투 외침을 내지른 탓에 피가래가 섞여 칼칼해진 기합성을 터뜨리며, 사호가 허리를 뒤틀었다. 무술보다는 차라리 곡마단의 기예에 가까운 동작으로 사호의 발뒤꿈치가 이세의 턱을 향해 날아갔다.
빗나갔다.
이세가 붙잡았던 사호의 왼손을 절묘한 시점에 뒤틀었고, “아,” 무리한 공격을 하느라 균형이 흐트러진 사호의 전신이 그 단순한 동작에 끌려가듯 움직였다. “흐악…!!” 공중에서 한 바퀴 회전한 사호는 어깨부터 연무장 바닥에 부딪혔다. 쿵 소리와 함께 먼지가 피어올랐다.
“더 해보겠나?”
이세가 말했다.
사호는 한동안 쓰러진 채 숨을 헐떡였다. 그녀는 이세를 올려다보았다. 곧 볼에 괴임이 생길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사호는 튕겨나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앗!”
일어서는 것과 동시에 내질러진 사호의 걷어차기를, 이세는 피하지도 막지도 않았다. 도리어 자신도 자리를 박차 덤벼들어 그 걷어차기가 제대로 궤적을 그리기도 전에 사호의 목을 붙들었다. “읏,” 허를 찔린 사호는 그대로 헛발질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세는 그런 사호를 목째 살짝 들어 올렸다가, 바닥에 내찍었다.
쿵……!
“카흡……!”
다시금 피어오르는 흙먼지 속에, 사호의 비명이 침몰하듯 가라앉았다.
이세는 사호의 목으로부터 손을 뗐다. 이어 뒤로 물러섰다. 그럼에도 사호는 바닥에 누운 채 한참을 켁켁거리며 몸부림쳐야만 했다. 그런 사호를 향해 나직한 질문이 또 한 차례 던져졌다.
“더 해보겠나?”
사호의 붉은 눈동자에 불똥이 튀었다.
그리고 벌어진 일들이란 것은 앞서 있었던 두 차례의 격돌과 대동소이했다.
‘아니, 격돌이라기보다는 그냥 유린….’
놀랐던 나도, 경악했던 현성대군도 얼마 안 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 얼떨떨한 표정은 조금 뒤에는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에는 심드렁한 심정이 되고 말았다.
연무장에는 의자가 있었다. 나와 현성대군은 나란히 앉아 벌어지는 일들을 지켜보았다.
“폐하… 강하시네요.”
“그러게 말야. 아, 저건 좀 아프겠어.”
“그러게요. 목 부러진 것 같은데… 아닌가?”
“아닌 모양이야. 너무 다치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보아하니 적당히 봐주시면서 하시는 모양입니다. 저 괴물 상대로 저게 되는군요. 세상에. 폐하께서 강하다는 거야 알고 있었지만….”
“저리 강할 줄은 몰랐겠지. 괜찮아. 이 사람도 몰랐는걸.”
30년 전, 당시의 솔로마 부장과 친위대장을 일격에 제압했을 때도 이미 초인적이었던 이세의 무술 솜씨는 지금에 이르러선 뭐라고 할까, 사람의 영역을 뛰어넘은 무언가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첫 번째 은월: 개 쩌네….]
[최초의 성녀: 그러게요… 하누리조차 입을 못 다물고 있어요….
[개천의 시왕: 과연 내 아들이다.]
그 비류아의 아들내미를 정면으로 상대하게 된 사호는 마치 가을 바람에 휘말린 솔방울처럼 날아다니고 부딪히면서 연무장 곳곳을 몸으로 쓸고 닦는 신세가 되었다. “컥,” “읍,” “아,” 비명과 신음과 악이 거의 구분되지 않을 즈음에 이르러서야 사호는 완전히 대자로 뻗어버리고 말았다.
“폐하, 대단하십니다.”
“아바마마, 굉장하십니다.”
나와 현성대군이 동시에 손뼉을 쳤다. 이세도 양 손을 손뼉 치듯 마주쳐서 손에 묻은 피와 먼지를 털어냈다.
이세는 묵묵한 눈빛으로 사호를 내려다보았다.
“원한다면 더 덤벼보도록.”
신나게 개 박살났을 뿐인 사람에게 던지는 질문이 저렇다니. 실로 천사님조차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법한 질문이었다….
[간신 조련사: 예?]
눈과 입을 멍하니 벌린 채 뻗어있던 사호는 한참 후에야 쿨럭, 피거품을 토해냈다. 털뭉치 토해내는 고양이마냥 그렇게 몇 차례 쿨럭거리던 그녀는 잇소리를 내며 말했다.
“배….”
배?
“배가 고프다요….”
갑자기 배가 고프다니.
‘이건 또 왠 가리비수 도끼춤 추는 소리래.’
거듭하며 패대기질 당한 끝에 몸 전체의 열량이 급격하게 연소된 것인가, 아니면 죽음을 앞둔 결과 내재되어있던 생존 본능이 용솟음친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둘 다 아니었다.
사호는 더듬더듬 말했다.
“배가 고팠다요…. 나 식사… 제대로 못한지 벌써 며칠… 계구들… 제대로 눕거나 앉지도 못했고… 휴식도… 잠도 잘…. 부상도 있었고….”
그렇게 말하면서 이세를 올려다보는 그 두 눈에는 여전한 독기가 어려 있었다.
나와 현성대군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잠시 후, 현성대군이 헛기침을 했다.
“그… 사호. 자네 지금 몹시 추한데….”
“만전의 상태가 아니었다요! 무기도 없었다요! 그, 그리고 나는 암살자라서! 지형지물과 도구를 못 쓰면 제 실력을 발휘하기 어렵다요…!”
“사호….”
“그러니 진 게 아니다요…!”
현성대군은 난처한 눈으로 사호를 내려다보았다. 아마 내 시선도 비슷하지 않을까? 사호 스스로도 그렇게 느끼는지 얼굴이 달아올라 있었다. 눈동자와 머리카락에 더해 얼굴까지 그렇게 빨개지니 마치 피칠갑을 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 자리에는 그렇게 본인조차 믿지 않는 말에 제대로 반응해주는 인물이 있었다.
“그렇겠구나.”
이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현군, 바깥에 전하도록. 조금 이른 시각이지만 석수라를 들겠다. 시현군, 세자, 나, 이렇게 셋이 먹을 것이니 든든히 준비하여 이 자리에 들이라고 하라.”
나는 손에 든 천과 가죽으로 사호를 뒤덮어 가리면서 답했다.
“예, 폐하. 그대로 전하겠나이다.”
◈ ◈ ◈
그렇게 연무장에 저녁 식사가 들어왔다.
이전 임무 시절과는 비할 데 없이 개선된 왕궁의 식사, 그 중에서도 임금이 먹는 밥이니 두말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오가는 와중에는 불린 육포와 건빵을 씹고 북벽에 가서는 개밥과 씨름해야했던 나와 현성대군이 환호성을 질렀다.
“맛있군요….”
“먹는 것이 충실하고 온몸이 따뜻하면 그것이 곧 행복이란 걸 이 사람은 이제야 알겠어.”
나와 현성대군이 그렇게 행복에 잠겨있는 동안, 사호는 구석에 쪼그려 앉아 얌전히 밥을 먹었다. 북벽의 개밥을 잘도 받아먹던 데에서 유추할 수 있듯 행상 노릇을 하며 거친 식사에 익숙해졌을 그녀에겐 천상의 식사나 다름없었을 테지만, 하도 개 박살났기 때문인지 영 활력이 없었다.
현성대군이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것도 먹도록 해.”
현성대군이 사호의 빵 위에 고기를 한 점 집어 올려주었다. 사호는 움찔했지만, 곧 얌전히 빵으로 고기를 싸서 먹었다.
그 때 이세가 말했다.
“먹고 바로 하겠나?”
“크흡…!”
사호가 사레가 들러 켁켁거렸다. 현성대군이 사호의 등을 두드려주면서 이세를 돌아보았다.
“아바마마…. 소화될 틈이 필요할 것이옵니다.”
“그렇겠구나.”
이세는 더 말없이 식사를 재개했다. 사호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이세의 눈치를 보면서 밥을 먹었다.
그렇게 식사가 끝난 뒤에는 내가 사호를 돌보았다.
“일단 좀 씻자.”
“알겠다요….”
더 뭐라 하기도 지쳤는지 사호는 순순히 그 말에 따랐다. 나는 바깥에 일러 팔팔 끓인 물과 콩가루, 청결한 천을 들여오게 했다. 그 다음에는 누더기와 괄목할 차이가 없는 그녀의 옷을 벗기고 박박 씻겼다.
[첫 번째 은월: 이건 니 정절관념 어쩌고에 안 걸림?]
‘안 걸림.’
정도 이상으로 지저분해진 인간은 개와 다를 바 없다. 밑줄 쫙 치자.
‘머리카락도 딱 개털 같네.’
태학관 1년생 무렵 기숙사 터줏대감이던 누렁이를 빨래해주던 기억이 났다.
그렇게 개털을 빨래해주고 있자니 한 발 늦게 식사를 마친 현성대군도 소매를 걷어붙였다.
“이 사람도 도울게.”
정말이지 호감 가는 세자 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