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121화 (121/261)

121. 왕도에서 (2)

도읍지로 돌아온 우리들을 왕도 경비대장이 우리를 맞이했다.

“세자 전하, 어서 오십시오. 돌아오신다는 전갈은 이미 받았습니다.”

“음.”

“시현군 저하께서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북벽에서 별 일 없으셨는지요?”

우리가 왕도로 돌아간다는 전갈을 보낸 나시파 변경백도, 우리도 북벽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지금 역시 천과 가죽으로 사호를 덮어 가려놓은 상태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폐하께 직접 보고를 올려야 할 일이네.”

내 말에 경비대장이 난처해했다.

“어, 하지만 저하. 무슨 일인지는 알아야….”

“괜찮아. 이 사람이 잘 설명하겠어.”

나뿐이면 모를까, 세자까지 저렇게 말하는데 경비대장으로서는 용 빼는 재주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궁전 입구에서 우리를 맞이한 궁전 수비대장도, 그 너머에서 마주친 친위대장도 마찬가지였다.

“시현군. 일단 마차는 여기에 세워두도록 하지.”

“예, 전하.”

그렇게 왕궁 안뜰에 세워놓고 나서, 우리는 마차를 인수받은 친위대원들에게 절대 마차 안쪽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나와 현성대군은 간단히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찝찝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래도 왕을 만나러 가는데 꼬질꼬질한 상태로 갈 수는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이세에게 향했다.

“왔는가.”

궁전 한 쪽에 마련된 널따란 연무실. 그 안에서 커다란 검을 휘두르며 몸을 단련하던 이세가 턱, 검 끝으로 바닥을 짚고 서서 우리를 돌아보았다.

“북벽에서 무언가 일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오직 본좌에게만 보고하겠다고 했다지?”

이세가 말할 때마다 떡 벌어진 대흉근과 부풀어 오른 광배근이 꿈틀거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감탄했다.

‘입술이 아니라 근육이 말하는 것 같네.’

49세, 이 시대에선 결코 젊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육신은 여전한 황금기 속에 있었다. 꼭 무신(武神) 같았다.

그 무신 앞에 나는 고개를 수그렸다.

“예, 폐하. 긴밀하고 화급한 일인 터라.”

“시현군이 그리 판단함은 알겠다. 하지만 대장군과 재상, 제사조차도 들어선 아니된단 말인가?”

“그 셋뿐 아니라 법왕과 친위대장이라고 해도 아니됩니다. 우선은 폐하께서 먼저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무왕 이세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현성대군을 돌아보았다. 바짝 긴장해있던 현성대군은 곧장 고개를 수그렸다.

“소자 또한 시현군과 동일한 의견이옵니다, 아바마마.”

이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옷가지를 하나 꺼내어 턱을 타고 흐른 땀을 닦으면서 그가 말했다.

“말하라. 본좌가 듣도록 하겠다.”

현성대군은 나를 돌아보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성대군이 말했다.

“첩자를 잡았사옵니다.”

이세가 짙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세자는 상세히 말하라.”

현성대군은 북벽에서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이따금 말이 꼬이거나 건너뛰었다 싶은 부분이 있으면 내가 거들었다. 나무창문을 삐걱거리게 만드는 삭풍 위로 말과 말이 포개어졌다.

그렇게 차 한 잔 마실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이세는 스스로 말하듯 헤아림이 늦된 편이었지만 그만큼 의도를 곡해하거나 잘못 받아들이는 일 또한 없었다. 눈썹만큼이나 짙게 자란 턱수염을 매만지면서 생각에 잠겨있던 무왕 이세는 잠시간 흐른 뒤 입을 열었다.

“그대들이 큰일을 해냈구나.”

치하의 말이었다. 현성대군이 안도하는 한편 뺨을 상기시켰다.

그는 고개를 조아린 그대로 말했다.

“예, 폐하. 나시파 변경백이 화를 자초한 바가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말씀드렸다시피….”

“변경백의 거취에 대해서는, 그대들은 물론이고 변경백 본인도 염려치 않아도 좋으리라. 북벽을 책임지는 자가 타국민을 사사로이 입관시키며 친분을 쌓고 뇌물을 받았다는 것은 좋게 들리지 않는다만, 애초에 모왕(母王)께서 북벽의 수호자에게 자치권을 내주었던 데에는, 그 융통성 역시 수호의 대가로서 응당 누려야할 권리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것이 열매를 맺어 화를 피했고, 때마침 달의 여신께서 도우사 첩자를 잡을 수 있었으니 공이 과를 덮고도 남는다.”

현성대군은 깊이 읍했다.

“이해해주시니 그 성총이 실로 하해와 같습니다, 폐하. 짐작하셨겠지만 재상이나 대장군, 제사 등이 없는 자리에서 이 일에 대해 보고 드리고자 한 것은, 그렇게 잘 마무리된 일을 두고 괜히 시끄러워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 또한 이해하노라. 첩자가 잠입한 경로에 대해서도 본좌와 변경백, 그리고 세자와 시현군 이렇게만 알면 족할 일이겠다.”

“감사합니다. 변경백이 감사히 여길 겁니다.”

현성대군이 안도하여 말했다.

한편,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이세를 바라보았다.

“실례입니다만 폐하. 사호에 대한 건을 이렇듯 폐하께만 보고 드리려 한 연유에는 방금 세자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변경백이 구설수에 휘말리는 것을 염려했던 바에 더하여 한 가지 까닭이 더 있습니다.”

“어떤 까닭 말인가?”

“소자는 사호를 붙잡았다는 사실이 누설되는 것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듣고 있던 현성대군이 동조하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마차를 타고 오면서 현성대군에겐 대충 이야기를 전해놨던 터였다.

무왕 이세는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

“시현군은 왕성 내에 또 다른 첩자가 있다고 여기는가?”

“왕성 내에는 모르겠으나 왕도 내에는 있으리라 여깁니다. 있을 수밖에 없는 노릇입니다.”

이세는 침음을 흘렸다.

“그대들이 잡았다는 첩자로부터 책을 전달받기로 약조된 자 말이로군.”

“예. 그것이 왕도 내에 들어와 있는 타국민들인지, 왕국을 배신하고 부귀를 누리려는 종양덩어리들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책과 전달자가 있으니 전달받을 자 또한 있을 것이고, 그 자의 뒷세력 역시 존재할 것입니다.”

나는 한 차례 숨을 돌리고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첩자를 잡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 자와 그 자의 뒷세력에게 정보가 누설될 가능성 또한 커집니다.”

“시현군은 제사와 재상, 대장군 등을 믿지 않는가?”

“그들 본인들을 의심한다기보다는, 그들이 너무 많은 이들을 대표하고 있다는 사실을 경계합니다.”

현재 왕국 정치의 핵심들은 각자 외척 세력들, 다시 말해 4대 공작가로 수속될 수밖에 없다.

전대 제사장이 잔월후였으므로 도란 제사는 잔월 공작가 쪽에 연줄이 있다. 다물 재상은 내가 하현 공작가 대행을 맡겼다는 데에서 알 수 있듯 하현 공작가와 연줄이 있으며, 현재 법왕 역시 마찬가지. 두오 대장군은 상현 공작가와, 친위대장은 신월 공작가와 연줄이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니 누군가가 알면 곧 그 아랫사람도 알게 되겠지.’

그 짓거리가 몇 번만 거듭되면 왕도 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될 것이다. 나는 이런 이치를 직설적으로 설명했다.

“…하여, 되도록 폐하께만 직접 보고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세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첩자를 잡는데 동원했다는 병사들은?”

“그 부분은 변경백이 잘 단속하기로 했습니다. 혹시 그쪽으로 이야기가 새어나간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겠습니다만, 그래도 최대한 막을 수 있는 구석을 막고자 했습니다.”

“알겠다. 고생하였다.”

이세는 내 머리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뒤이어 현성대군의 머리도.

반백에 달하는 세월동안 붓이 아닌 칼을 가까이한 왕의 손은 솥뚜껑처럼 커다랗고 단단했다. 그러기에 더욱 믿음직스러운 손이었다. 아비의 손길을 받은 현성대군의 입가에 해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제야 나도 미소 비슷한 것을 머금을 수 있었다.

‘겨우 좀 일단락됐네.’

이제 사호한테 책을 예약했다는 녀석을 잡아서 조지든, 대하대첩에 대비를 하든 하면 된다. 그것도 만만찮은 일이 되겠지만 조금쯤 숨 돌린 틈은 생긴 셈이었다.

‘난 되도록 왕도 바깥에 자리 잡게 해달라고 해야지.’

[첫 번째 은월: 대하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 말이지?]

‘응. 이유는 북벽으로 가던 무렵에 전달했던 바와 같음. 대하를 건너온 병력이 상륙할 적에 왕도에 있고 싶지 않아.’

[간신 조련사: 정말이지 한결같군요….]

[개천의 시왕: 길잡이여. 그대 빙의체의 안전을 생각하면 마땅히 그래야 하겠다만, 임무 달성을 생각하면 오히려 대하 유역에 딱 붙어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야리소연으로 하여금 대하를 감시케 하면 용이하게 적의 접근을 알아차릴 수 있을 터인데.]

‘으음… 그것도 그렇긴 하네요.’

[최초의 성녀: 대하를 도하해 오는 거니까 육안으로도 충분히 보이지 않을까요? 수평선 위로요.]

‘상대도 바보가 아니니 그걸 생각하겠지. 어떻게든 기습 효과를 누리기 위해 안개와 어둠이 짙은 시간을 노려서 건너올 거요. 그러니 시왕님 말마따나 대하 유역에 붙어 입주민들 눈으로 감시하게 하는 건 유효한 선택지겠소.’

그렇게 대하 유역에 붙어있으면서 내가 안전할 수 있는 방법은 또 따로 궁리를 해야 할 것이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아직 시간은 충분했다. 사호의 책에 적혀있던 암호문대로라면 도하해 오는 예정일은 1월 1일, 아직 20일 가까이 남아있는 것이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뜨거운 물 한 번 더 받아달라고 해서 목욕이나 해야겠다….’

그런 생각에 슬슬 퇴청하겠다고 말하려던 때였다.

“본좌가 그 첩자를 직접 볼 수 있겠는가?”

무왕 이세가 말했다.

나와 현성대군이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현성대군도 슬슬 퇴청을 요구하려던 참이었는지 이 뜻밖의 요구에 당혹한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헛기침을 했다.

“음… 폐하. 폐하께서는 군왕이십니다. 따라서 보려 하신다면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만….”

“그럼 보도록 하겠다. 첩자를 이쪽으로 데려오도록 하라.”

“그… 첩자는 현재 폐하를 알현할 수 있을 만한 상태가 아니옵니다. 북벽까지 긴 여행을 했던 데다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계구를 풀어주지 않았던 터라….”

“상관없다.”

나와 현성대군은 다시금 시선을 마주쳤다. 곧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에 따르겠나이다.”

◈          ◈          ◈

궁전이 대륙풍으로 증축되면서 좋아진 것을 꼽자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지금은 2두 마차가 지날 수 있을 만큼 복도가 넓어졌다는 부분을 들고 싶다. 그렇지 않았다면 계구 채 천과 가죽으로 둘둘 싸맨 사호를 나와 현성대군이 들것으로 옮겨야했을 테니까.

연무장의 입구 역시 연무장의 크기만큼 충분히 넓었고, 그래서 나와 현성대군은 이세 앞에 사호를 마차 째 대령할 수 있었다.

“꺼내라.”

이세가 명했다. 나는 현성대군을 물러나게 한 다음 사호를 끄집어냈다. 지금 내 빙의체의 키와 체격이 나쁘지 않은 터라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었다.

온갖 계구에 결박당한 채 연무장 바닥에 무릎 꿇은 첩자를, 이세는 묵직한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본좌는 무왕, 이세라 한다.”

사호로서도 이 만남은 얼떨떨한 것이었나 보다. 그녀는 나와 현성대군을 번갈아보다가 이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월국의 왕께서 어쩐 일로 이 비루한 첩자를 찾으셨냐요?”

“듣자하니 성 제국이 그대를 손톱과 이빨로 삼아 내 나라에 해를 끼치려 했다더군. 서로 문호를 개방한지 30년, 성 제국은 대륙을 다스리고 내 나라는 반도 일대를 통치하며 돈독한 세월을 보냈거늘 어찌하여 벗 간의 우애를 깨고자 하였는가?”

사호는 한 쪽 눈썹을 찡그렸다. 그녀가 답했다.

“그걸 천한 첩자에게 여쭈어도 별 수 없는 일이다요? 말씀하셨듯 이 천한 것은 다만 손톱과 이빨에 지나지 않는다요.”

“짐작하는 바가 있겠지. 편히 말하라.”

“…이 천한 것은 짐작도 생각도 해선 안 되는 존재다요. 그저 위에서 내려온 지시를 이 천한 것은 이행할 뿐이다요.”

사호가 조용히 답한 말에 이세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짐작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재갈이 씌워진 말조차도 절벽으로 몰아가면 몸을 비틀거늘 하물며 사람이 어찌 짐작도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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