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120화 (120/261)

120. 왕도에서 (1)

‘북벽수성은 끝났어.’

마찬가지 이유로 내가 여기 머무를 필요도 없어진 셈이었다. 절로 명랑한 목소리가 나왔다.

“그럼 저와 세자 전하는 이 간첩과 왕도로 돌아가겠습니다. 압송에 쓸 병사들만 좀 지원해주십시오.”

오는 길에 데리고 온 수행원들이 있기는 했지만, 사호와 관련된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서 두고 갈 생각이었다.

이 요청에 대해 나시파 변경백은 팔짱을 끼었다.

“저를 믿으십니까? 제가 병사들에게 으슥한 곳에서 저하, 전하, 사호를 산적의 소행으로 꾸며 죽이라는 밀명을 내릴 수도 있을 텐데요. 그 편이 저하께서 함구하시는 것보다 더 확실하지 않겠습니까.”

“막으셔야 할 입들이 늘어나겠군요.”

“그 병사들도 죽이면 되겠지요.”

“그리고 그 병사들을 죽이는데 동원한 병사들도 모조리 죽이고 말입니까?”

“잘 아시는군요. 그렇게 죽이고 또 죽이다보면 결국 저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게 되지 않겠습니까?”

“동감합니다, 나시파 변경백. 이거 저와 세자 전하가 아주 큰 위기에 처했습니다.”

“예. 그러니 자신에게 닥쳐올 삭(朔)을 두려워하십시오.”

“그래야겠습니다. 그나저나 성시황제의 무덤은 유잔 지방에 있다지요?”

나시파 변경백이 쓴웃음을 지었다. 성 제국의 초대 황제는 자신의 황릉을 지키기 위해 인부들을 산채로 파묻고 그 인부들을 죽이는데 동원한 병사들까지 모조리 죽여 없앴다. 초대 황제가 죽어 묻힌 뒤에는 2대 황제가 유지를 받들어 장례에 동원한 이들마저 몰살시켰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이 무색하게 30년도 지나지 않아 황릉을 도굴당하고 만 것이다.

이 세상에 비밀은 없다. 아무리 철저하게 묻어버리려 해도 누군가는 살아남고 만다. 그쯤이야 나시파 변경백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냥 한 번 던져본 농짓거리였으리라.

“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그리하여 북벽을 떠나는 날, 나시파 변경백은 악수를 건네 왔다. 그 악수는 진심이었고, 나도 현성대군도 진심어린 악수로 거기에 대답했다.

손이 묶인 사호는 악수 대신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어졌다.

“언제 네가 달의 여신의 품에 완전히 안기게 되면 다시 보도록 하지.”

사호는 사람 손길을 거부하는 고양이처럼 머리를 젖히면서 그 손길을 피했다.

“그러지 않게 되어도 다시 보자요.”

혹시 탈출하면 죽이러 오겠다는 그 선언에 대해서 나시파는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 현성대군, 사호는 북벽을 떠나 왕도로 향해갔다.

◈          ◈          ◈

왕도로 가는 동안, 사호는 엄격한 관리체제 하에 놓였다. 밧줄은 물론 공(?), 추(杻), 가(枷), 질(桎), 항쇄(項鎖) 등 온갖 계구(戒具)를 총동원해 결박한 다음 같은 마차에 태운 것이다.

“도착하기도 전에 죽을 것 같다요….”

내가 해줄 말은 별로 없었다.

“네가 강한 걸 원망해.”

“죽을 것 같다요….”

“재갈도 물려줄까?”

사호는 합죽이가 됐다.

현성대군은 그런 사호가 안쓰러웠는지 조심스레 말했다.

“5일… 아니, 4일만 참아. 최대한 서둘러 가라고 지시했으니까.”

“4일….”

“응, 4일. 목마르면 말하고. 물을 좀 마시게 해주겠네.”

“지금 달라요.”

현성대군은 물주머니를 꺼내어 사호에게 물려주었다. 다양한 계구들로 인해서 곡예하는 것 같은 자세로 고정당한 사호는 흘리는 것 절반 마시는 것 절반으로 물주머니를 비웠다.

“젠장, 좀 살 것 같다요.”

과연 나도 좀 사호가 딱해졌다.

“물은 조금만 마시는 게 좋을 텐데.”

“왜 그렇냐요?”

“사람 몸이라는 게 들어간 만큼 나오게 되어있으니까.”

“그 때만 살짝 이 계구들 벗겨주면 되지 않냐요?”

“그 헛소리 재미있니?”

“별로 없다요?”

“그럼 왜 했니?”

“그냥 해 봤다요. 하긴 뭐 개가 똥을 싸면 개가 고생하냐요? 개 주인이 고생하지. 기껏 비단 깐 마차가 참 아깝게 됐다요.”

현성대군이 얼굴을 붉혔다. 나와 사호 간에 오간 대화 탓이었다.

“그… 시현군. 정말 살짝만 계구를 벗겨주면 되지 않겠어?”

“용변을 보겠다는 말에 선선히 자리를 피해주는 악당들. 그 틈을 타 탈주해서는 악당들을 모조리 썰어버리는 주인공. 옛 이야기에 자주 나오는 구절이지요? 그 구절에 등장하는 악당 1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건… 음. 그렇지만, 그래도 그, 뭐랄까. 그런 게 있잖아.”

“없습니다.”

“있지 않을까…?”

“없습니다. 굳이 덧붙여 말하자면 사실 여기에 용변 냄새가 추가되든 말든 별 상관없을 겁니다. 씻은 지 꽤 되었잖습니까? 우리는 지금 굉장히 지저분한 상태입니다.”

허허롭게 말하자 현성대군은 몹시 신경 쓰인다는 얼굴로 자신의 몸 곳곳을 들여다보았다.

“이, 이 사람은 잘 모르겠는데….”

“그건 지금 우리들의 코가 마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궁전에 도착해서 잘 씻은 다음 다시 이 마차 안에 얼굴을 들이밀어보면 곧장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아, 잘도 이런 거름지게 같은 걸 타고 왔구나, 아니 우리가 곧 거름이었구나 하고 말입니다.”

현성대군이 입을 다물더니 쪼그라들었다. 그걸 보면서 나는 새삼 깨달았다.

‘왕국에 기초적인 위생 관념이 스며들긴 했나보네.’

물론 현성대군이 금수저 중의 금수저, 즉 은월의 눈동자를 가진 적자라는 사실도 감안해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고무적인 일이었다.

‘수로와 저수조가 완공된 덕도 있겠지.’

수리시설은 잘못 관리하면 질병과 해충의 온상이 되지만, 잘만 관리하면 거꾸로 공중위생을 크게 증가시켜준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런 경향성은 더욱 커져갈 것이다.

‘아주 좋아.’

[첫 번째 은월: 그게 그렇게나 좋아?]

[최초의 성녀: 음… 씻으면 병에도 잘 안 걸리고… 하여간 그렇다고 하니까요. 잘은 모르겠지만 흑치사라가 하는 말이니….]

[개천의 시왕: 약탈을 나서면 식수도 보급할 겸 반드시 물가를 끼워 경로를 잡게 되지. 덕분에 전장 한복판에서도 멱을 감을 기회는 부족하지 않았다. 다만 세탁까지 하는 것은 과연 힘에 부치는 경우가 많더군.]

‘자, 여러분? 스스로 입에 담은 말들을 한 번씩만 되새겨봅시다. 그리고 여러분들보다 최대 수천 년, 최소 수백 년 뒤 사람인 제가 지금껏 임무에 들어서면서 무엇을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했을지 자신의 마음속에 물어보도록 합시다.’

[첫 번째 은월: 양심?]

[최초의 성녀: 난방 잘 되는 집?]

[개천의 시왕: 맛있는 먹거리?]

‘대답이 됐으리라 믿습니다.’

어쨌든 고무적인 일이었다.

이렇게 몇 차례 더 임무를 해결하면 수도관 시설까지 완비된 집에서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뿐인가, 거기서 몇 차례 더 임무를 해결하면 마침내 더는 사람냄새 나는 사람들과 만나지 않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벌써부터 그 날이 기대되기 시작한다….

“자네는 어쩌다가 첩자 노릇을 하게 됐어?”

그렇게 내가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가슴을 부풀리는 동안, 현성대군은 사호와 대화를 나누었다.

“어쩌다가도 뭣도 있냐요? 그냥 기억날 무렵부터 비영각에 있었다요. 동생이랑 같이.”

“동생은 어떤 애야?”

“세자 전하보다 나이 많은 애다요. 여자애고…. 머리가 좋다요. 몸 쓰는 일은 잘 못하고. 그래서 비영각 중에서도 필경(筆耕) 계통으로 빠졌다요.”

“필경….”

“그렇다요. 가령 내가 들고 다니던 책들도 전부 내 동생이 필사한 거다요.”

“늘 동생과 함께 다니는 느낌이었겠네.”

“으음… 그렇게 낯간지러운 생각을 직접 떠올린 적은 없지만. 생각해보면 맞는 말 같다요. 걷고 또 걷다가, 어쩌다 야생마 한 마리 잡아타서 신나게 달리다가, 별들 가득한 밤하늘을 향해 드러누웠을 때 책 보따리를 베고 누우면 뻥 뚫린 가슴 속에 편안한 것이 차오르는 느낌이었다요.”

사호가 말했다. 현성대군은 그런 사호에게 물주머니를 하나 더 건네면서 말했다.

“함께 있을 수 있게 해줄게. 꼭이라곤 못해도 최대한 노력해서.”

“거기서는 꼭이라고 말해야 하는 거 아니냐요?”

“아바마마께서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는 남자는 사내가 아니라고 했어. 잡놈이랬지.”

“하. 그럼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는 여자는 뭐냐요?”

“여자는 그럴 수도 있대. 이해해야 된대.”

“나 참. 건국도 여왕이 했고, 모시는 신도 여신인 주제에 뭐 그리 남존여비가 심한…….”

“할마마마께서 오래 살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 못 지키고 일찍 가셨대.”

사호가 입을 다물었다.

[개천의 시왕: ….]

이승과 저승이 고요해진 가운데, 현성대군은 자신의 소매를 접어 사호의 턱을 타고 흐른 물을 닦아주었다.

“시현군 저하의 어머님. 하현후라고 하는데, 그 분도 아바마마와 한 날 한 시에 눈을 감겠다고 했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했어. 하현후의 이복동생이자 아바마마의 벗이었던 전대 법왕도 여자였는데 일찍 갔다고 했고. 그런 일을 자주 겪다보니까 여자가 약속을 깨는 건 이해해야 된다고 하셨어.”

사호의 턱에서 비단이 떨어졌다. 사호는 잠깐 현성대군과 나를 번갈아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런 말을 꺼냈냐요?”

“자네가 물어봤잖아.”

“그래도 뭐 대충 대답할 수도 있었지 않냐요?”

“가령 어떤 식으로?”

“뭐 아무렇게나…. 대충. 적당히. 그렇게 잘.”

사호의 말에 현성대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떠오르는 것도 없고 그러기도 싫었어.”

“어째서?”

“말했잖아. 이 사람은 자네를 수하로 거두고 싶다고. 그런 상대한테 거짓말을 해서야 몹쓸 일이잖아.”

“흐음.”

“그리고 이런 식으로 친근감을 형성해두면, 혹시 알아? 뭔가 일이 잘못되어 자네가 탈출했을 때 이 사람만 살려줄지.”

“아, 그런 일은 없을 거다요.”

“탈출할 일이 없다는 거야, 탈출했을 때 이 사람을 살려주는 일은 없으리란 거야?”

사호는 대답 대신 몸을 뒤틀었다. 그렇지 않아도 계구들로 뒤덮여 불편한 몸이 한층 더 불편해졌다는 것처럼.

내가 헛기침을 했다.

“지금은 괜찮은데, 왕도에 도착하면 너무 들썩이진 마. 지금 이 마차 안엔 나랑 세자 전하 둘만 있는 걸로 하고 싶으니까.”

사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성에 도착하면 날 어쩔 셈이냐요?”

“몰라. 세자 전하께 여쭤보는 건 어때?”

“어차피 짐작은 가지 않냐요? 저하께서 말해 달라요.”

“…뭐 비밀리에 가둬두게 되겠지. 네 동생을 이 왕국에 불러올 때까지.”

“불러오지 못하면? 나는 평생 비밀리에 갇혀있게 되냐요?”

“죽는 것보다야 낫잖아. 세자 전하 성격에 널 학대하시진 않을 테고….”

사호는 이마를 짚으려 했다. 덕분에 나는 양 손목과 목이 형구에 매인 사람이 무의식중에 그런 행동을 하면 목이 부러질 뻔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현성대군이 깜딱 놀랐다.

“괜찮아!?”

“음, 괜찮다요… 아니, 생각해보니 안 괜찮다요. 기왕 말 나온 김에 다 물어 보자요. 비공식 조직 안에 필경사로 일하고 있는 사람을 어떻게 월국 수도까지 불러올 생각이냐요?”

“아, 걱정 마. 거기에 대해서는 이 사람이 생각해둔 바가 있어.”

현성대군은 가슴을 펴더니 엣헴, 헛기침을 했다.

“조만간 전쟁이 벌어지잖아? 그 때 딱 대륙 쪽의 요인을 붙잡는 거야. 그 다음 이 요인을 돌려보내줄 테니 댁들도 사호의 동생을 내놓으시오, 하는 거지. 어때? 대륙 쪽에도 머리가 있다면 일개 필경사와 교환하다니 완전 개꿀이네 하면서 거래에 동의하지 않겠어?”

사호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나 역시 비슷한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생각보다 제대로 된 발상 아닌가.

한 가지 문제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제국 요인은 누가 어떻게 붙잡냐요?”

“음? 전쟁에서 이기면 알아서 몇 명 붙잡혀있고 그런 것 아냐? 이 사람은 그렇게 들었는데….”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내가 헛기침을 했다.

“어, 전하. 그런 요인을 붙잡았다고 해도 말이죠. 비공식 조직, 그러니까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조직의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 한 명을 딱 찝어 교환해달라고 하면 대륙 쪽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생각하려나?”

“생각하겠죠. 그다음에는 순순히 들어주기보다는 뭔가 막 개수작을 부리고 그럴 것 같은데요.”

“으음… 그렇겠네.”

현성대군은 고운 얼굴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가, 따악, 손가락을 튕겼다.

“그럼 좀 큰 놈을 잡아야겠다.”

그리고 세자, 왕자, 첩자가 탄 마차는 왕국의 도읍지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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