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괴물 사냥 (4)
[간신 조련사: 간신이여. 저 지금 뭔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습니다만.]
‘환청입니다.’
[간신 조련사: 그렇습니까, 환청이군요. 환청이라면 어쩔 수 없지요.]
저승에서 천사님이 환청에 괴로워하는 동안, 나시파 변경백은 지금 상황 자체를 괴로워했다.
“하지만, 그래도 제 잘못입니다.”
나시파는 숨을 몰아쉬었다.
“저하. 이 세작이 뭘 했을지 이제는 제게도 짐작이 갑니다. 벌써 몇 번이나 왕국 곳곳에 밀서를 옮겼겠지요. 그뿐만이 아니겠군요. 북벽 내부의 정보. 왕국 내부의 첩보. 그런 식으로 첩자질을 하며 돌아다녔겠어요. 왕국의 정보들이 저로 인해 대륙으로 흘러간 셈입니다….”
“그 또한 변경백의 잘못이 아닙니다. 당신이 북벽에서 사호를 입관시키지 않았더라면 그냥 서해뱃길을 따라 배 타고 왕도에 와서 비슷한 짓을 했겠지요. 실제로 그런 이들도 있을 테고요. 사람이 오가면 세작은 어디로든 어떻게든 스며들게 마련입니다. 사호는 그 중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음 편히 가지십시오.”
나시파는 나를 돌아보았다.
현성대군이 내게 내가 했던 말을 되돌려준 것처럼, 나는 그녀에게 그녀가 했던 말을 되돌려주었다.
“앞으로 있을 일들을 당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대비하면 됩니다. 명쾌하지요.”
“…예, 저하.”
나시파는 고개를 수그렸다. 여전히 칼에 힘을 주고 있었지만 호흡을 안정시킨 것이다.
나는 사호에게 물었다.
“나시파 변경백을 죽인 다음에는 어쩌려고 했지?”
사호는 잠시간 숨을 골랐다. 나는 말없이 도끼를 든 채 서 있었다. 만약 사호가 “그대로 병사들과 합류할 생각이었다.” 어쩌고 하면 곧장 손가락을 하나 잘라버릴 생각이었다.
그럴 필요는 없었다. 현성대군의 눈치를 살피던 사호가 고개를 떨구었던 것이다.
“책을 마저 배달하러 갔을 거다요.”
좋아.
“무슨 책?”
“암호를 해독했다고 말하지 않았냐요? 그렇다면….”
“응. 그러니까 네가 거짓말을 해도 알 수 있어. 그러니까 말해. 세자 전하랑 내 말이 허풍 같으면 그냥 거짓말 하던가.”
사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논경 양화편.”
좋다.
“더 자세히.”
“월국의 병력이 북쪽으로 쏠린 틈을 타 대군이 대하를 건너 올 거다요.”
“책은 누구한테 건네기로 했지?”
“그건 나도 자세히는 모른다요. 접선 시간과 장소를 알고 있을 뿐이다요.”
“그거라도 말해.”
“달이 망에서 초승을 오갈 즈음 월국 도읍지의 신전 뒤편에서 만나기로 했다요.”
12월 15일부터 25일 사이인가.
“만약 책을 전하지 못 한다면? 작전 자체가 취소되나?”
“그렇진 않을 거다요…. 내가 능력 있는 첩자인 거야 사실이지만, 이만한 규모의 전쟁이다요. 첩자 한 명한테 모든 걸 의존할 리 있겠냐요? 없으면 없는 대로 어떻게든 굴러가게 해놨을 거다요.”
“포석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거군.”
“그렇다요. 기대했다면 미안하다요.”
그 뒤로도 나와 나시파는 번갈아가며 사호를 심문했다.
“나른한 벌판에 진을 칠 적들의 규모는?”
“대략 3천 정도 예상한다요. 보급대와 지원을 합하면 약 1만.”
“지휘관의 특색은?”
“정확히는 모른다요. 추려낸다면 아마 삼보, 추조, 하신 이 셋 중 한 명이 아닐까 싶다요. 각 장군의 특징은….”
물어보는 것마다 사호는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그렇게 뽑아낼 정보를 모두 뽑아내자 남은 것은 사호의 거취뿐이었다.
내가 물었다.
“뭘 바라나?”
“음음… 이렇게까지 협조한 거, 이제 좀 풀어주면 좋겠다요.”
“그럴 수는 없어. 이유는 스스로도 알겠지?”
“내가 너무 강하다는 것 말이냐요?”
그 대답은 오만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담담한 사실이었지.
나 역시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 정도 인원이 이만한 준비를 갖춘 다음에야 겨우 붙잡았다. 그마저 건물 복도처럼 한정된 곳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겠지.”
사호는 이를 악물었다. 그렇지만 자신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말도 안 된다느니, 집단으로 몰려와 돌이며 그물을 던져대는 식으로 비열한 수단을 쓰다니 전사로서 부끄럽지 않냐는 식으로 소리치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이토록 강해질 수 없는지도 모른다.
사호는 담담하게, 최소한 그렇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멀쩡하게 풀어달란 소리는 아니다요.”
“그러면?”
“발목 한 쪽을 자르라요.”
“…죽을 텐데?”
사지가 잘려나갔다는 충격. 실혈. 감염으로 인한 발열과 괴저.
7할 이상은 죽는다.
“저하. 아까 보니 도끼 잘 던지던데 어떻게 잘 단번에 잘라 달라요. 싸매도 주고. 그럼 뭐… 운이 좋다면 살 수도 있지 않겠냐요?”
아니면, 이라고 사호는 대륙민 특유의 빨간 눈동자로 나를 보았다.
“그 밖에 내가 살 수 있는 방법이 또 있냐요?”
음.
“발목을 자른다고 해도 손이 있잖아. 이렇게 된 거 한 사람이라도 길동무로 데려가자는 마음으로….”
“그럼 손목까지 자르면 되겠다요.”
기묘한 침묵이 퍼졌다.
나시파 변경백이 미간을 찡그렸다.
“왜 그렇게 살고 싶어 하지?”
“이미 말할 거 다 말한 상황 아니냐요… 이대로 죽기에는 억울하지 않냐요?”
“그걸 감안해도. 살려주는 대신 손과 발을 자른다면 보통은 죽음을 택할 거다.”
“죽는 것은 언제든지 가능한 일이다요? 굳이 지금이 아니어도, 발 한쪽 손 한쪽 없는 나중이 되더라도. ‘아, 사는 거 엿같구나.’ 싶어지면 그 때 가서 죽어도 늦지 않다요. 그러니 그 전까지는 살려고 발악하는 게 당연한 일 아니냐요?”
“죽는 것보다 못한 삶도 많다.”
“그런 말을 입에 담으려거든 우선은 살아 있어야 할 거다요.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은 아직 자살하지 않았다는 것이니, 자신이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걸 자백하는 셈이다요.”
“…정말로 죽음보다 못한 삶을 말하는 거다. 사지를 모두 자른다. 혀를 뽑는다. 눈을 지지고 코를 뜯는다. 귀에 녹인 은을 흘려 넣는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힘과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모든 기관을 제거해주지. 그 때 가서도 살아있는 게 더 낫다고 말할 수 있겠냐?”
“그건… 확실히 좀 무섭다요.”
어느덧 황혼이 질 무렵이었다. 바람이 불어 나무 창문을 덜컹이게 만들었다. 겨울은 여름보다 노을이 선명했으므로, 어둑하던 방 안은 새어든 어스름으로 금세 붉게 물들었다.
온통 붉은 허공에서 암살자의 숨이 하얗게 부서졌다.
“그러지 말아 달라요… 방금 하신 말씀은 사적인 감정의 영역이다요. 그렇게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요.”
“공적인 이유 따윈 나중에라도 갖다 붙일 수 있어. 왕국에서 첩자 노릇을 하다가 잡히면 이렇게 된다는 사실을 과시할 수 있지.”
“그러실 것이냐요…?”
보통은 여기서 나시파가 “그건 너 하는 데에 달렸지.” 하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사호는 해버릴 대로 해버린 상태였다.
사호 역시 고개를 수그린 채 그것을 입에 담았다.
“조사에도 심문에도 최대한 협조했다요. 자결이 가능할 정도라면 어디를 어떻게 부수고 잘라도 상관없다요. …그마저 불가능하다면, 좋다요. 죽여 달라요. 다만 내가 배신했다고 제국에 알리지만 말아 달라요….”
나시파는 혀를 찼다. 그녀가 나를 보았다.
“어찌 합니까?”
나는 대답 대신 현성대군을 바라보았다. 현성대군은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사호는 협조했는걸. 이 사람은 약속을 했고. 그러니 귀의를 받아들여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 일단 왕도로 압송한 다음 대륙에서 얘 가족들을 데려오고….”
나시파가 뒷머리를 긁었다.
“그 다음에는? 그냥 풀어줍니까? 어딜 자르거나 하지도 않고?”
“이 사람 생각은 그래. 인재를 거두는 건데 무술 솜씨가 그대로인 상태로 거두는 게 좋잖아.”
“세자 전하…. 성심은 알겠으나 이 여자는 너무 위험합니다. 만약의 경우가 생긴다면 통제할 수가….”
“변경백도 살아 있잖아.”
나는 그 말을 방금 전에 오간 대화의 연장선상으로 해석하려 했다. 사호가 나시파를 몇 번이나 죽이지 않았으니 그걸 참작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말이다.
아니었다.
현성대군이 말했다.
“왕가는 변경백을 살려두고 있어. 만약 변경백이 왕국을 배신하고 북벽을 활짝 열어버리면 그거야말로 통제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기는데도 말야.”
나는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500년 뒤 수문장이 비슷한 짓을 저질러서 왕국을 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 미래를 모르는 나시파는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그건… 저와 제 일족이 지금껏 왕가에 증명해온 충성심 때문….”
“그리고 왕국을 배신하면 변경백의 소중한 것들이 부서지기 때문이겠지.”
“…그렇습니다. 재산. 친구. 인척. 지위. 모든 것이 왕국에 있으니, 왕국을 유지하는데 조력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지요.”
“응. 즉 인질이 잡혀 있어 그런 거야.”
“그것을… 인질이라 표현하신다면 그건 너무….”
“아니야? 이 사람이 보기에 변경백과 사호는 참 닮았는데.”
그 평가에 나시파와 사호가 서로를 마주보았다. 나시파는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고, 사호 역시 그렇게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현성대군의 말이 옳다는 사실을 알아서였을 것이다.
그 말이 이어졌다.
“응. 그러니 변경백과 비슷한 상태로 만들어주면 된다고 생각해.”
현성대군은 사호를 바라보았다.
“약속을 이행해 줄게. 우선은 대륙에서 소중한 이들을 왕국에 오도록 해주겠어. 그 다음에는 이것저것… 많이 줄게. 버릴 수 없는 것들을 잔뜩.”
“…그냥 가족이면 된다요. 무거운 것들은 딱 질색이다요. 나는….”
사호는 잠시 말이 없다가, 뒷머리를 벽에 기댄 채 숨을 흘렸다.
“난 그냥 좀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싶을 뿐이다요. 마음 편하게, 자유롭게, 부담 없게…. 태어나 지금까지 간절히 바라게 된 게 있다면 그냥 그것뿐이었는데.”
“그렇겠지.”
현성대군은 사호의 양 어깨를 잡았다.
미안하다는 얼굴로, 유감스럽다는 목소리로, 은월의 눈동자를 가진 소년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주겠다는 거야.”
사호가 고개를 떨구었다.
◈ ◈ ◈
그렇게 약조가 이루어졌지만 사호를 곧장 풀어줄 수는 없었다. 사호를 붙들어놓을 만한 인질을 확보하기 전까지는 가장 엄중한 감시체제 하에 두어야할 것이었다.
그것은 나와 나시파 변경백, 현성대군 모두가 동의하는 바였다. 다만 그 ‘가장 엄중한 감시체제’가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렸다.
“사호를 왕도로 압송하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나시파 변경백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겠습니까? 여기에 두는 것이….”
“들으시지 않았습니까. 곧 제국 병사들이 북벽 앞에 진을 칠 겁니다. 그렇게 바깥이 어수선해지자, 붙잡아놨던 암살자가 슬그머니 행동을 재개한다…. 옛 이야기 같은 데에서 자주 나오는 구절 아닙니까?”
“그건 옛 이야기에서 암살자의 사지를 자르지 않아서지요.”
현성대군이 끼어들었다.
“자르면 안 된대도!”
“그럼 힘줄들이라도 끊어놓겠습니다.”
“그것도 안 돼! 좀, 변경백. 이 사람의 판단을 믿어줘.”
나시파 변경백은 난처해했다.
나는 그녀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녀가 무엇을 가장 난처해하는지 짐작이 갔던 것이다.
“왕도에 압송해서 보고할 적에, 변경백의 과실은 일절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
“변경백이 사호를 여러 차례 입관시킨 전적이 있다는 것, 이번 일 역시 원인을 따지자면 변경백이 사호를 들여놨기 때문이라는 것 등등. 남들이 알아서 좋을 것 하나 없는 이야기는 모두 입을 다물겠습니다. 세자 전하께도 입단속을 시킬 거구요.”
“저하….”
“그럼 남는 것은 병사들에 대한 내부 입단속입니다만… 이건 뭐 변경백이 알아서 잘 하실 수 있겠지요. 믿겠습니다.”
“…제게 너무 잘 대해주시는군요.”
“북벽의 수호자에게 치러야 할 마땅한 경의입니다.”
나시파 변경백은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시선을 흘기면서 다시 열었다.
“저는… 역시 제가 어떤 형태로든 책임을 져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북벽을 지킴으로써 책임져 주십시오.”
“제가 잘 할 수 있을까요?”
“잘 해내실 겁니다.”
이건 빈 말이 아니었다.
‘임무 창.’
+
[ 은월을 지켜라 / 난이도 B ]
[ ★북벽수성(北壁守城) / 난이도 A ]
[ 대하대첩(大河大捷) / 난이도 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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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았어!’
북벽수성에 달성 표식이 찍혔다.
더 이상 변수가 없어졌다고 시스템이 판단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