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괴물 사냥 (2)
언제 알았느냐는 질문.
거기에 대답한 것은 나였다.
“알 텐데.”
“아… 음음. 대충 짐작은 간다요. 역시 그 때 딱 움직였어야 했는데….”
“방심했겠지.”
닭.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모가지를 비틀 수 있는 약자.
나시파가 사호를 그리 여겼듯, 사호 역시 우리를 그렇게 여겼으리라.
“음음, 그렇다요… 바보짓을 하고 말았다요. 이렇게 되어도 싸다요.”
한차례 더 한숨을 내쉰 사호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우리를 보았다.
“그래서? …이제 뭘 어떻게 할 거냐요?”
“우선은 고문부터 해야겠지.”
나시파가 차갑게 말했다. 사호는 고개를 수그렸다.
“아픈 건 싫다요…. 피해주면 좋겠다요.”
“그럼 왜 여기 왔는지 대답할 건가?”
“그러진 않을 거다요.”
나시파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말했다.
“정리하면, 아무것도 말하진 않을 거지만 고문은 하지 말아 달라?”
“그렇다요. 그냥 죽여주면 좋겠다요….”
“역시 고문을 해야겠군. 그리 당하다보면 뭐라도 말하고 싶어지겠지.”
사호는 몸을 움츠렸다.
“그야 고문을 하면 말하긴 할 거다요… 하지만 그게 사실이란 보장은 어딨냐요? 결국은 아프기 싫어 닥치는 대로 지껄이게 될 거다요. 그 와중에 뭘 말했는지도 까먹을 테고. 결과적으로는 두서없이 모순된 이야기만 푸짐하게 들을 수 있을 거다요.”
“나는 변경백이다. 네가 말한 그것을 어찌 모르겠나. 단순히 네게 그만한 고통을 안겨주고 싶다는 마음도 있다. 날 수차례에 걸쳐 기만해왔으니까.”
“변경백씩이나 되는 분께서 감정적으로 움직여도 좋지 않다요….”
사호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감정적이 될 만한 사안도 아니다요. 변경백께서는 월국에 충성했고, 달의 여신을 모셨을 뿐. 나는 제국에 충성했고, 약속의 주관자를 기렸을 뿐. 지금 이 상황은 그냥 그런 입장에 따른 차이다요. 공적인 차이로 벌어진 일에 사적인 감정으로 대응해도 무의미하다요.”
“말은 잘하는군.”
“책장수니까 풍월을 읊을 수 있는 거야 당연한 일이다요? …좌우간 나는 각하를 싫어하지 않았다요. 지금도 싫어하지 않는다요. 앞으로도 싫어하지 않게 해주시면 좋겠다요.”
나시파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 으르렁거림은 잠시 뒤 끼잉거림으로 가라앉았다. 합리성을 추종하는 짐승이란 명쾌한 논리 앞에 약해지는 것이다.
내가 나섰다.
“정리하자면,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테니 그냥 죽여 달라 이건가?”
“음음… 그렇다요. 가능하면 한순간에… 분풀이를 겸해서 정 고문을 해야 한다면, 그래도 너무 험하지 않게 부탁한다요.”
내가 유미이던 시절 제사장에게 그리 했던 것처럼, 사호는 자신의 패를 모두 깠다. 선택은 나와 나시파 두 사람의 몫으로 넘어왔다.
그것을 나도, 나시파도 느꼈으므로,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았다.
나시파가 먼저 말했다.
“어찌 됐건 정보는 최대한 뽑아냅시다. 그 다음에는 원하는 대로 죽여 버리죠.”
나도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저승의 주민들이 한 명씩 의견을 했다.
[첫 번째 은월: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살려주면 안 돼? 그럼 쟤도 우리 아군 되고 막….]
[최초의 성녀: 말도 안 되는 소리네요.]
[개천의 시왕: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첫 번째 은월: 아니, 그치만 마나가 옛날이야기 들은 게 있다잖아. 호걸이 호걸을 알아봐서 호걸끼리 막 호호껄껄….]
[최초의 성녀: 말도 안 되는 소리네요.]
[개천의 시왕: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첫 번째 은월: 아이 씨, 야. 흑치사라랑 하누리는? 걔네도 암살자로 왔는데 잘만 대접받았잖아. 전 친위대장은? 걔도 살려줬었고.]
[최초의 성녀: 전 친위대장은 이세가 살려준 거였지요. 흑치사라와 하누리는 유사 시 예언자님 혼자서도 제압할 수 있는 상대였고요. 둘 모두 사호와는 경우가 달라요. 사호는-]
[개천의 시왕: -너무나도 강하다.]
‘맞아.’
닭이라면 며칠 더 살려둘 수 있다. 하지만 호랑이를 그처럼 취급할 수는 없다.
[최초의 성녀: 강자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면 그걸 놓쳐서는 안 돼요. 악착같이 들러붙어 끝장을 내야 해요.]
[개천의 시왕: 내 아비의 장성했던 후계자들도, 주온도, 그걸 제대로 못한 통에 죽고 말았지.]
‘맞는 말이야.’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일단 여긴 사람이 너무 많군요. 조용한 곳으로 옮기도록 합시다.”
그 때였다.
“잠깐만!”
나와 나시파가 멈칫하여 돌아보았다.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던 현성대군이 그 자리에 서있었다.
◈ ◈ ◈
곳곳에 깨진 돌이 나뒹굴었다. 반쯤 열린 문 곳곳에 박힌 쇠뇌가, 문이 삐걱거릴 때마다 고문도구처럼 위협적으로 움직였다.
그 근처에 암살자 사호가 그물에 짓눌려 있었다.
현성대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사람도 심문 현장에 끼어도 되겠어?”
나시파 변경백은 한차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어째서 말입니까?”
“그야 일단… 저 여인이 첩자 노릇을 했다면 왜 했겠어? 달의 여신의 교리를 배운 적이 없어서겠지. 거짓된 신의 교리를 믿고… 그렇게 이단자들로부터 명령을 받고 그래서 그런 거 아니겠어. 그러니까 이 사람이… 달의 여신에 대해 잘 설명을 하면 생각을 고쳐먹을 지도 모르고 여러모로 좋지 않을까?”
나시파는 이게 왠 순진한 소리냐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한편 나는 다른 의미에서 이 상황이 다소 흥미롭게 느껴졌다.
무엇이 흥미로운가 하면:
“세자 전하. 지금 ‘개종’을 시도해보시겠다는 뜻입니까?”
“응….”
다음 세대의 은월은 머뭇거리면서, 그러나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다시피 이 사람은 은월의 눈동자를 가졌어. 지상에서 달의 여신을 대리하는 몸이지. 은월을 두고 보통 가장 강력한 전사라 지칭하지만, 실상은 그만큼이나 가장 신실한 신관으로도 여겨야 마땅할 거야.”
‘원론적으로 따지면 맞는 말이기야 하지.’
[최초의 성녀: 저도 은월인데 성녀라고 불리니까요.]
‘세 가지 문제가 있는데.’
1 검은 도끼의 밤.
그 뒤 왕가 주도로 신관 계층에 대한 억압과 숙청이 이어졌다는 사실.
[개천의 시왕: 길잡이여. 그것은 그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그대가 법왕으로 일하면서 어느 정도 결자해지하지 않았는가.]
2 달의 여신의 교리 자체.
즉 모서아가 만들고 법왕이 다듬은 개구라 사이비라는 것.
[간신 조련사: 모서아도 당신이고 법왕도 당신이었지요. 자신이 친 구라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가슴을 펴십시오.]
3 가장 의외라 여긴 것이 있다면,
“신전과 교리에 대한 것은 법왕과 잔월 공작가 쪽 관할 아닙니까?”
당대의 법왕은 백합법왕 유미가 하현후 마나에게서 입양한 인물이었다. 즉 하현 공작으로 물망에 올랐던 내 친형제다. 당연히 하현 공작가와 밀월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고 잔월후는 전대 제사장이다. 그녀가 삭에 든 뒤로는 그녀의 아들 중 한 명인 사잔군(師殘君)이 잔월 공작이라 불리게 되었다. 자연히 잔월 공작가는 가장 많은 신관들을 휘하에 둔 파벌이 되었다. 도란 제사 역시 잔월 공작가에 속해있는 것이다.
한편 현성대군은 상현후의 아들이다.
마차를 타고 오는 길에서만도 상현과 하현의 다름을 입에 담던 소년이, 하현과 잔월의 관할에 구태여 발을 딛는다는 것이 의아했다.
하지만 현성대군은 의아할 것 없다는 태도로 말했다.
“판을 크게 보라면서?”
마차를 타고 오며 내가 했던 말들을, 현성대군은 그렇게 입에 담았다.
“자네 말이 맞아. 이 사람은 왕국의 법통을 이어받을 세자지. 좁아터진 그림에 스스로를 우겨넣지 않기로 했어.”
그렇게 말한 현성대군은 사호를 바라보았다.
조심스레 발걸음을 뗀 그는, 나시파와 내가 멈추라고 말하기 전에 스스로 걸음을 멈추었다. 그렇게 충분한 거리를 두고 서서, 은빛 눈동자로 붙잡힌 암살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자네. 이 사람이랑 이야기 좀 하지.”
◈ ◈ ◈
그물로 이미 옭아 매인 사호를 병사들은 밧줄로 몇 차례 더 휘감아 좁은 방에 처넣었다. 그리고 더 묶으려는 것을 나는 제지했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할게요.”
수공업 Lv.2를 써가면서, 나는 사호를 꼼꼼하게 옭아맸다.
양팔은 등 뒤로 교차시키고, 그물코 바깥으로 빼낸 두 손은 따로 묶어 벽 모퉁이에 고정시켰다. 양 다리 역시 주저앉혀 발목을 그물코 바깥으로 빼낸 다음 엇갈아 묶어 같은 모퉁이에 고정시켜놓았다.
“철저하다요….”
“네가 강하다는 걸 원망해. 아직 불안할 지경이라고.”
“이제 손등에 말뚝이라도 박을 거냐요?”
“변경백은 그래야한다고 주장했지. 나도 그랬고.”
하지만 현성대군이 바라지 않았다. 그는 의자 하나를 끌어와 무력화된 암살자 앞에 앉았다. 나는 그 곁에 서서 도끼를 쥔 채 여차하면 현성대군을 감쌀 준비를 했고, 나시파는 아예 환도 끝으로 사호의 가슴을 짓눌렀다.
이 모든 절차가 끝난 뒤, 우리는 사호를 심문했다.
나시파가 물었다.
“북벽에는 어쩐 일로 왔나?”
사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책은 누구한테 배달하려고 했지?”
사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름과 소속은?”
사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시파는 칼을 꾹 쥐었다. 그녀는 그 칼을 휘둘러 사호의 피륙을 저미려 했다.
그 전에 현성대군이 말했다.
“달의 여신을 믿을 생각 없어?”
여기에는 사호가 반응했다. 헛웃음을 지은 것이다.
“아까부터 참…. 믿겠다고 하면 살려주기라도 할 거냐요?”
“응.”
그 말에는 누구보다 사호가 당혹했다.
뒤이어 나와 나시파도 당황했다. 나시파가 말했다.
“아니, 전하…. 살려줘선 안 됩니다. 하물며 세자 전하께서 그런 약속을 함부로 하시면…. 대체 왜 그런 말씀을.”
현성대군은 조심스레 말했다.
“저 여인을 이 사람 밑으로 거두고 싶어서.”
“왜 저런 간첩을….”
“강하잖아. 이야기도 잘 통하고…. 그러니 우리 편으로 만들면 그만큼 커다란 전력이 되지 않겠어?”
현성대군은 그 말에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는 눈치였다. 나와 나시파 모두가 할 말을 잃은 가운데 저승에서 반응이 돌아왔다.
[첫 번째 은월: 과연 내 후손.]
[최초의 성녀: 아니….]
[개천의 시왕: 아니아니아니아니….]
[첫 번째 은월: 이제 사호가 ‘천한 세작에 불과한 저를 등용해주시겠다니, 백골이 진토되어 사라지는 순간까지 이 은혜를 잊지 않겠나이다!’ 어쩌고 하면서 충성을 맹세하는 그림 아님?]
[최초의 성녀: 마나한테 옛날이야기 좀 그만 들으세요.]
[개천의 시왕: 아리야에게 동의한다. 대저 사람의 마음이란 그런 옛 이야기와 달라서….]
[첫 번째 은월: 정작 비류아 넌 니가 멸망시켰던 부족 애랑 결혼하지 않았냐?]
[최초의 성녀: 그건 시우가 이상한 거구요! 그치요, 비류아? 시우가 이상한 거지요? 시우 당신도 얼른 자기가 이상한 거라고 말해주세요.]
[개천의 시왕: ….]
저승에서 그런 이야기가 오가는 동안 이승에서도 격론이 오갔다.
“안 됩니다! 간첩은 믿을 수 없습니다. 하물며 저 녀석이 예, 이제부터 세자 전하께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하면? 그 때는 그냥 간첩도 아니라 배신한 간첩이 되겠지요! 세상 누구보다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달의 여신을 모시는 자들은 모두 이웃이고 동포야.”
“계율에야 그렇게 나와 있겠지요. 하지만 실제로 일이 그렇게 굴러가지 않는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아실 텐데요. 당장 세자 전하께서도 시현군을 못미더워 하셔서 여기까지 함께 왕래하셨다지 않으셨습니까….”
“더 이상 좁은 그림에 스스로를 우겨넣지 않겠다고 이 사람은 이미 말했어.”
나시파가 나를 쏘아보았다. 나도 당황해서 양팔을 휘저었다.
“아니, 전하. 제가 그리 말씀드린 건 사실입니다만-”
“-또한 부주의해서는 못쓴다는 말이지. 이 사람도 잘 알고 있어.”
현성대군은 담담하게 말했다.
“둘 모두 걱정하지 마. 이 사람에게 나름 생각하는 바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