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책장수, 사호 (2)
“변경백.”
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붓을. 그리고 당신이 갖고 있는 양화 편을 가져다주십시오.”
내 심상치 않은 목소리를 느꼈는지 나시파 변경백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선 유일한 인물은 아니었다.
팡…! 의자에서 튕겨 오르듯 사호가 뛰었다. 움찔한 현성대군이 채 어떻게 대응하기도 전에, 내가 허리춤의 도끼를 들면서 그 앞을 틀어막았다. 쨍…! 사호가 든 수저가 내 도끼날에 부딪히면서 등골이 시릴 정도로 맑은 소리를 냈다.
[ 물리위기감지가 자동 발동됩니다. (2/3) ]
숨이 흘렀다. 실력으로 막은 게 아니라 스킬이 보호해준 것이다.
“어, 무, 무슨,”
현성대군이 얼버무렸다. 하지만 나시파 변경백은 무인이었다.
그녀는 곧장 품의 환도를 꺼내며 내려 그었다. 달인까진 아니어도 제법 숙련가에 가까운 그 동작을, 사호는 내게 수저를 들이민 그대로 돌아보지도 않고 걷어차 막았다.
퍽…! 처음에는 손, 퍽…! 두번째는 명치, “읍,” 정통으로 걷어차인 나시파 변경백이 숨을 흘렸다.
여기까지 딱 숨 한 번 내쉴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사호는 한 쪽 눈을 찡그리며 쯧 소리를 냈다.
“■■■■■■■■■■.”
대륙어였다.
어느 시대의 왕국에 태어나도 자연스레 말이 통했던 것과는 달리, 내가 태학관에서 배웠던 500년 뒤의 대륙어와는 발성법부터가 달라 알아들을 수 없었다.
‘상관없어.’
나는 바로 생각을 떠올렸다.
‘시설 창.’
저승의 건물들 중 하나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 시설물: 대사관 ]
레벨: 1
문명 수준: 전제군주정-일부 봉건제
담당자: 하현후의 추종자 나하라
효과: 통역(Lv. 2+1) 부여
+
스킬을 활성화시키자마자, 대륙어가 번역되어 들렸다.
“(뭐야, 어떻게 안 거야?)”
나는 입을 열어 답했다.
“(내가 학자거든.)”
사호는 살짝 놀란 것 같았다. 오래지 않아 미소를 머금었다.
“(대륙어도 할 줄 알아? 왕자님 유능해!)”
“(충분히 유능하진 못했지. 그냥 떼를 써가면서 책을 사는 척하고, 네가 나간 다음에 말해야했는데.)”
“(왜? 모두가 보는 앞에서 폭로하고, 그로써 자신의 지성을 과시하고, 덤으로 날 잡아 고문할 수 있는 기회였잖아? 놓치기 어려웠다는 거 이해 해.)”
“(네가 이리 강할 줄 몰랐지.)”
“(많이 듣는 말이야.)”
그런 대화 속에서, 나는 다른 손으로 두 번째 도끼를 꺼내려 했다. “(어허,)” 그 순간 날아드는 걷어차기,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젖혔다.
[ 물리위기감지가 자동 발동됩니다. (1/3) ]
눈앞을 스쳐간 발끝이, 돌연 대낫처럼 휘어 들어왔다. 여전히 수저가 도끼를 붙들고 있어 나는 채 물러설 수가 없었다.
[ 물리위기감지가 자동 발동됩니다. (0/3) ]
그리고,
“이런 씹,”
튀어나오려던 욕설은 머릿째 짓밟혀 뭉개졌다.
쾅…!
눈앞이 번쩍했다.
코가 처음엔 언 듯이 시큰하더니, 뒤이어 타는 듯 뜨거워졌다.
보이지도 않는 걷어차기가 날아와 안면을 때렸던 것이다.
‘이 녀석, 진짜 강해….’
내 Lv.3 도끼술에 대항하면서 한 쪽 발만으로 나시파 변경백을 제압한 시점에 알아봤어야 했다. 달 그림자 임무 때 이세가 보여주었던 신위만큼은 아니라도 달인쯤은 충분히 찜 쪄 먹는 솜씨였다.
그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쾅…! 한 번 더 눈앞이 번쩍하고, “읍,” 숨을 삼킨 순간, 신체 말단부가 차가워지더니 온몸에서 힘이 쪽 빠져나갔다.
‘뇌진탕.’
어지러움 속에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법이었어, 왕자님.)”
동시에 가벼운 손놀림이 내가 들고 있던 도끼를 낚아채려 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 불굴의 인내력(Lv.4)을 사용합니다. (2/3) ]
[ 30초 동안, 모든 고통을 무시하고 움직일 수 있습니다. ]
내가 든 도끼를 내주었다. 동시에 두 번째 도끼를 빼내는 것과 함께 올려 그었다.
퍽……!
“(흐아악!)”
사호로서는 무력화시켰다고 생각한 상대가 예상치도 못한 타이밍에 달인급 올려치기를 선보인 것처럼 느꼈을 것이다. 이세라면 그런 속에서도 어떻게든 했을지 모르지만, 사호는 그 정도 실력은 못 되었다.
결과, 사호의 왼쪽 팔꿈치에 도끼가 박혔다.
자르지는 못했지만, 관절의 연골을 부순 것은 확실했다. “(큭,)” 사호는 나를 걷어찼지만, “(으아아악!) 나는 팔꿈치에 박힌 도끼를 빡 소리가 나게 빼내면서 계속 움직였다. 핏방울을 뿌리며 허공에 그려지는 궤적, 사호는 그것을 피해냈다.
피해내면서, 사호는 이번엔 내게 타격을 주는 대신 그저 발로 가슴을 밟아 팍 밀어냈다.
“읏…!”
고통과 부상은 무시할 수 있었지만 그 물리력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대로 휘청 뒤로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한 손에 빼앗은 도끼를 쥔 사호가 현월 대군에게 달라붙었다.
“움직이지 말라요!”
범벅한 왕국어가 다시금 사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나도, 이제 겨우 호흡을 되찾은 나시파 변경백도 움직이지 못했다.
“사, 사호…? 이게 무슨,”
현성대군이 중얼거렸다. 사호는 후, 웃더니 그런 현성대군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가만히 있어 달라요. 그럼 해치지 않겠다요.”
“거짓말을,”
나시파 변경백이 말했다. 사호는 손가락을 튕겨 손도끼의 날을 한 차례 돌린 것만으로 그녀를 입다물게 했다. “읏,” 그 과정에서 가볍게 살갗이 긁힌 현성대군이 신음을 흘렸다.
“변경백님!”
“전하, 이게 무슨….”
그리고 바로 그 순간에야, 실내의 소란을 인지한 병사들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얼어붙었다.
사호가 숨을 흘렸다.
“음음… 이러면 완전 나가리다요….”
그 숨은 가쁘고, 또 붉었다. 뚝, 뚝. 축 늘어진 그녀의 오른쪽 손끝을 타고 피가 흘렀다. 도끼날로 팔꿈치 부분을 제대로 얻어맞은 오른쪽 팔은 그녀가 숨을 쉴 때마다 떨어져나갈 듯 부자연스럽게 덜렁거렸다.
아무도 움직이지 못하는 속에, 나는 스킬을 썼다.
[ 독심술을 사용합니다. (1/3) ]
[ 사호의 생각을 읽습니다. ]
<아파> <어떻게 할까> <인질> <도망?> <죽겠어> <불가> <어차피> <출혈> <부상> <힘들다> <이러면> <월국의 적통이라도> <길동무><동생>
이런 젠장,
“사호오오오오!”
내가 외쳤다. 동시에 자리에서 튕겨나갔다. 덤벼들었다.
그리고 사호는 나를 상대하느라 자신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일순의 낭비도 없이 사호의 도끼날이 현성대군의 목을 그었다.
피가 터졌다.
“아,”
현성대군의 눈동자가 크게 뜨이고, 다음 순간 축 늘어졌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내가 집어던진 도끼가 사호의 머리를 박살냈지만, 그 순간 현성대군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죽은 뒤였다.
“아….”
나시파의 목소리.
나의 목소리.
그리고.
+
[ × 은월을 지켜라 / 난이도 B ]
[ 북벽수성(北壁守城) / 난이도 A ]
[ 대하대첩(大河大捷) / 난이도 A ]
+
임무 표시가 갱신되고.
+
[ × 은월을 지켜라 / 난이도 B ]
[ × 북벽수성(北壁守城) / 난이도 A ]
[ 대하대첩(大河大捷) / 난이도 A ]
+
또 한 차례, 임무 표시가 갱신되었고.
+
[ × 은월을 지켜라 / 난이도 B ]
[ × 북벽수성(北壁守城) / 난이도 A ]
[ × 대하대첩(大河大捷) / 난이도 A ]
+
마지막으로, 임무 표시가 갱신되었다.
[ 과반 이상의 임무에 실패했습니다. ]
시야의 가장자리부터 어둠이 닥쳐왔다.
◈ ◈ ◈
그리고.
[ 태학관 담당자 흑치사라의 고유능력 - 오판 예지가 발동됩니다. (0/1) ]
[ 오판의 결과를 모두 예지했습니다. ]
[ 예지 도중 사용된 스킬은 회복되지 않습니다. ]
나는, 눈을 떴다.
“음음? 저하. 왜 그러냐요?”
사호의 목소리.
명랑함과 호기심에 가득 찬 행상의 목소리가 뱀의 혓바닥처럼 목덜미를 핥아, 나는 주춤했다.
“시현군?”
바로 곁에서, 현성대군의 목소리.
나는,
[개천의 시왕: 길잡이여.]
음.
[개천의 시왕: 정신 차리도록. 실제로는 벌어지지 않은 일이다.]
아, 과연.
과연, 이런 식인가.
‘그래서 그 와중에 저승의 목소리가 안 들려왔던 건가.’
[개천의 시왕: 그럴 것이다.]
‘예.’
나는 숨을 놓았다.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말했다.
“이 책을 사고 싶군.”
사호 본인은 눈을 한 차례 깜빡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시파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하. 논경 양화 편은 저도 갖고 있습니다만.”
음.
“돌아갈 때를 대비해 제 것을 또 사두고 싶습니다.”
“하지만 예약 중인 도서라고 하잖습니까? 사호도 발품을 많이 팔았을 테니 곤란하게 하면 안 되지요. 또, 책을 예약할 정도라면 보통 재력가가 아닐 겁니다. 저하께 앙심을 품을 지도 모릅니다.”
젠장.
눈치가. 어째 도와주질 않냐.
‘어쩌지?’
좀 더 밀어붙여볼까? …하지만 눈치 채고 날뛰기 시작하면? …이 녀석을 막을 방법이. …물리위기감지는 다 썼고. …독심술도 1개밖에 남지 않았다.
이번에 실패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답은 저승으로부터 돌아왔다.
[개천의 시왕: 무리할 필요 없다.]
‘하지만 내용이.’
[개천의 시왕: 그냥 이 자리에서 훑어보도록.]
‘아.’
[개천의 시왕: 흑치사라. 붓과 종이를.]
‘확실히.’
“그럼 좀 훑어보기만 하겠습니다.”
나는 양화 편을 펼친 뒤 슬쩍슬쩍 넘겼다. 눈속임을 위해 다른 책들도 펼쳐놓고 훑어보는 척했다.
사호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만지진 말아 달라요? 책이란 게 원래 손에서 손으로 건너가는 거라지만, 그래도 너무 손때가 타면 값이 떨어진다요.”
나는 차분하게 답했다.
“알았어. 혹시 그런 일이 생기거든 값을 치르지. 책은 나도 좀 있거든.”
“그렇다면야. 말씀드렸듯 예약된 책들만 조심해 달라요.”
그리고 여기서는 나시파가 도움이 됐다. 씩 웃어 보인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너와 내 사이가 아닌가. 만약 저하께서 예약된 책에 실수를 하시거든 내 책을 내주지. 바로 가져가면 될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입에 담은 순진한 말. 그것이 사호의 의심과 경계를 누그러뜨린 듯했다. 사호는 곤란하다는 듯 웃어보였다.
“각하께 이 이상 폐를 끼치긴 싫다요….”
“그럼 더 좋은 책들을 구해와라. 더 자주 오고.”
“알겠다요!”
오가는 대화.
나는 책을 읽으면서 사호의 기척에 주의를 기울였다. 흘끗거리면 눈치 챌 테니 귀에 온 힘을 집중했다. 사호가 수저로 먹을 걸 퍼는 소리, 입에 가져가는 소리, 냠냠 씹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 속에서 나는 책들을 넘겼다.
드윽.
덕분에 수저가 한 차례 바닥을 긁는 소리를 낸 순간, 나는 곧바로 자연스레 입을 열 수 있었다.
“세자 전하께서는 책에 흥미 없으십니까?”
“음? 책?”
현성대군이 나를 돌아보며 되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책 말입니다.”
“하지만 대륙의 책이잖아. 달의 여신의 대리자 중 한 명인 이 사람이 읽을 만한 책들은 없을 것 같은데? 사실 시현군, 자네도 폐하의 피를 잇고 군호를 받은 사람 아냐? 그런 자네가 저런 이단자들의 경전을 뒤적이는 것은….”
“책이라고 경전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호, 그렇지 않나?”
득, 드윽. 빈 그릇을 긁어 마지막 한 수저를 꿀꺽한 사호가 활짝 웃어보였다.
“그렇다요. 단순한 이야기책도 있고, 지리에 대한 책도 있고, 산술 요령에 대한 책도 있고 다 있다요?”
“그런가?”
“그렇다요. 가령 요 책의 경우에는….”
복도를 걷던 무렵 달의 여신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던 때와는 정반대로, 이번에는 사호가 현성대군에게 책들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경전이 아닌 책이 있다는 말이 솔깃했는지 현성대군은 그 설명을 들었다.
잠깐 그렇게 시간을 벌어놓고 나서, 나는 계속해서 책을 넘겼다.
“호오. 다시 말해 여우가 둔갑했다는 거야?”
“그렇다요. 주막을 차려놓고 오가던 사람들을 잡아먹던 그 요괴는….”
책을 넘겼다.
“방금 건 조금 흥미롭군.”
“음음, 그렇다면 다행이다요. 그렇듯 3에 3을 곱한다는 건 곧 3이 3개만큼 있다는 것이어서….”
책을 넘겼다.
“자네 상당히 똑똑하네. 달의 여신으로 개종할 생각 없어?”
“아하하, 달의 여신을 대리하는 분께서 그리 봐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요.”
책을 넘겼다.
“아니, 정말 이야기가 잘 통하는 것 같아서 말야. 이-”
“그런데.”
그리고.
현성대군의 말을 마치 칼이 뽑혀 나오기 전에 손잡이를 눌러 막듯이 얌전히 눌러 막고서, 책장수 사호는 방긋 웃었다.
“변경백 각하. 지금 여기 와계신 손님은 두 분이 전부냐요?”
음.
손끝이 약간 떨렸다. 눌러 진정시켰다.
아무렇지 않은 듯, 나는 마저 책을 넘겼다. 이어 툭 던지듯 말했다.
“그러고 보면 변경백, 무왕 폐하께서 곧 북벽을 둘러보러 오실 겁니다. 준비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