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책장수, 사호 (1)
닭은 언제든지 죽일 수 있다. 나는 곧바로 이해했다.
“그러니 되도록 살려 알을 취하라?”
“예. 올바른 말씀 아닙니까? 저는 거기에 따랐습니다. 그랬더니 실제로 알을 많이 얻을 수 있더군요.”
입관세.
“그뿐 아니라 알아서 많은 닭이 오도록 하더군요. 명성이란 실로 도움이 되는 물건입니다.”
공정한 수문장이라는 입소문.
“확실히. 그런 장기적 이득을 염두에 두고 계신다면 죽여 없앨 필요는 없겠습니다.”
둘 모두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사실 이 시대에는 굉장한 것이었다.
[첫 번째 은월: 어째서…? 왜들 그리 서로를 죽이고 싶어 하는 거야…? 나한테 해를 끼친 녀석이 있다면 그야 벼랑까지 쫓아가서 보복하는 게 맞겠지만 아무것도 안한 애들을 왜….]
‘음. 죽이고 싶어 한다, 죽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같은 건 그냥 개인적인 차이지? 그리고 나시파는 죽이고 싶어 한다 쪽일 테고.”
[첫 번째 은월: 굳이 분류하자면 그렇겠는데….]
‘흑치사라의 강의는 그 ‘죽이고 싶어 한다’ 쪽 사람도 ‘죽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쪽으로 옮겨놓았다는 거지.’
[첫 번째 은월: 응… 아.]
‘그래. 그런 강의가 되풀이되다보면 결국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죽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쪽으로 옮겨가겠지?’
그 사회적 합의야말로 상업이 발달하기 위해 필요한 기반 중의 하나였다. 법으로 강제할 수는 있겠지만 가장 좋은 방향성은 나시파와 같은 이들이 늘어나는 것이었다.
‘흑치사라가 큰일을 했어.’
태학관이 예정보다 일찍 생겨난 덕에 확실히 왕국의 역사는 더 좋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음?’
뭐지.
‘방금 뭔가가 걸렸는데….’
그때였다. 병사 한 명이 들어와 나시파에게 보고했다.
“각하, 북벽 바깥에 행상이 왔습니다. 입관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래? 아는 자인가?”
“책장수입니다.”
나시파는 싱긋 웃었다.
“비구름도 이야기하면 온다더니. 세자 전하, 시현군, 한 번 만나보시겠습니까? 걱정하시던 대륙에 대한 정보도 들을 수 있고 나쁘지 않을 겁니다.”
“우응….”
현성대군이 졸린 눈을 부비며 일어섰다. 우리 셋은 그렇게 책장수를 만나러 향했다.
◈ ◈ ◈
북벽의 대문은 건국 60년이 지난 지금은 장식품이나 다름없었다. 나갈 일도 들어올 일도 없어, 거의 열리지 않은 탓이다.
“아마 열려고 해도 무진 애를 써야할 겁니다. 나무라는 게 여름이면 습기 먹어 부풀고 겨울이면 말라붙어 쪼그라들지 않습니까? 그렇게 60번을 반복했으니 어디 당겨서 떨어지겠습니까?”
“대규모 상단은 어떻게 들입니까?”
“글쎄요, 그만한 규모의 상단은 아직 온 적이 없어서. 혹시 오게 되면 쪽문으로 하나씩 들여 줄까 생각 중입니다.”
그 쪽문이란 곳도 평소에는 지레와 돌벽으로 문 뒤가 틀어 막혀 있었다. 열려면 제법 수고가 들어갔다.
그러기에 북벽에서는 행상 한 명을 맞이하기 위해 어느 문도 열지 않았다. 다만 밧줄 하나를 내려주었다. 잠시 후, 겨울에 언 밧줄을 붙들고 한 여인이 낑낑거리면서 기어 올라왔다.
“손바닥 가죽 다 벗겨지는 줄 알았다요….”
대륙 쪽 방언이 섞여 우스꽝스럽게 들렸지만 분명한 왕국어였다.
여인은 울상으로 장갑 낀 손을 바라보다가 엣취, 커다랗게 재채기를 했다. 그러고는 콧물을 쓱 훔친 다음 우리를 바라보았다.
“음음?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요. 저들은 누구냐요, 백작 각하?”
그런 모습이 익숙한지 나시파 변경백은 빙긋 웃었다.
“사호. 이들은 세자 전하와 시현군 저하시다.”
“음음, 과연. 전하랑 저하… 음음!? 그거 엄청나게 높은 분들 아니다요!?”
사호라 불린 행상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아직 잠이 덜 깨어있던 현성대군은 그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뭐야. 왜 소리 지르는데?”
“으으으으음~!”
사호가 달려왔다.
알실라인처럼 작고 탄탄하지도 않고 나투아인처럼 휘청하니 길쭉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왕국민처럼 체구가 크지도 않았다. 대륙인들은 그냥 딱 중간만 갔다. 키도 체격도 체구도 중간이었다. 긴 여행에 떡진 붉은 머리카락과 초롱초롱한 붉은 눈동자가 또한 그녀가 대륙인임을 알려주었다.
“음음, 음음. 과연. 은빛 눈동자…. 귀하께서 월국(月國)의 적계. 달의 여신이 지상에 보냈다는 대리인이냐요?”
“윽.”
들여다보는 눈빛이 부담스러운지 현성대군이 한 걸음 물러섰다. 나시파가 그런 사호를 말렸다.
“어허, 사호. 세자 전하께 무례를 범하지 말도록.”
“음음, 알겠다요 백작 각하!”
사호는 헤실거리면서 무언가 손짓을 해보였다. 성호(聖號)를 긋는 것이었다.
[최초의 성녀: 저 성호는….]
‘아리야, 알아보겠소?’
[최초의 성녀: 소모라에서 이따금 보던 성호예요. 거기서 두 번째로 자주 쓰이던 성호였는데….]
‘아, 과연.’
어떤 신을 기리는 건지 알겠다. 그때쯤 사호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귀하께서 저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반말로 답했다.
“약속의 주관자를 기리나?”
“음음?”
사호가 눈을 깜빡였다. 곧 활짝 웃었다.
“알아보는 거냐요? 그렇다요. 제국에서 모시는 네 천신 중 한 분의 가호다요. 신의를 지키고 성실을 다할 것을 다짐하는 상인들은 모두 약속의 주관자를 모신다요.”
“이름은 들어보았다네.”
“그것이라도 대단하다요! 월국민 중에서는 처음이다요!”
“왕국은 유일한 여신을 모시지. 나 같은 괴짜가 아니고서야 알아보는 이는 없을 거라네.”
“음음. 알고 있다요. 월국에서는 달의 여신 외의 다른 신들은 모두 이단으로 규정하지 않냐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요.”
얍, 내게서 두어 걸음 물러선 사호는 양팔을 활짝 펼친 채 빙그르르 돌았다. 바람이 불었고, 둘러멘 행상짐이 한 바퀴 그녀의 몸 주변을 돌면서 햇볕을 으스러뜨렸다.
“세상에는 이렇게나 많은 것들이 있다요? 하늘만 보아도 저 빛나는 태양이 보이지 않냐요? 달도 빛나지만 태양은 더 훨씬 더 빛이 난다요? 달을 모실 거면 왜 태양은 모시지 않냐요?”
“태양은 달의 그림자야. 별들은 달의 여신께서 거느린 사도들. 가리비수나 야리소연처럼 왕국의 위대한 선조 영웅들이고.”
현성대군의 대답이었다.
‘뭐여 저건.’
[간신 조련사: 뭐긴요. 당신이 법왕이던 시절에 해두었던 2차 창작이 세월 버프 받고 공식화된 거지요.]
‘아니 그건 알겠거든요. 근데 쫌… 저승의 비밀을 알아버린 저로서는 저런 말을 무려 왕족이 진지하게 입에 담는다는 것 자체가 그냥 쫌 그래요….’
[간신 조련사: 그 달의 여신이 멋지다고 한 건 당신 아니었습니까. 그러고 보면 달의 여신 자체가 당신의 창작물이군요. 창작자가 직접 2차 창작까지 하다니, 정말이지 훌륭한 자급자족 정신입니다.]
신앙에 진지한 이들에겐 그럴 수 없이 슬픈 이야기였다. 이승에서는 통 듣도 보도 못한 자모신이라는 존재 외에는 죄다 사이비라니. 그런 사이비들에 열을 올리며 살아가다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이 바로 그 안타까운 풍경이었다.
“어떻게 더 빛나는 게 그림자가 될 수 있냐요?”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호에게 왕국의 적통 현성대군은 열변을 토했다.
“인간의 그림자가 검은 것과 반대의 이치지. 신의 그림자는 빛나는 거야.”
‘뭐여 그건 또….’
“어째서냐요?”
“태양을 보면 눈이 멀잖아. 그건 태양이 달의 여신께서 모든 악인들을 가둔 감옥이어서 그래. 반면에 달은? 보아도 그저 편안하지.”
‘왜 그럴듯하고 난리야…?’
“음음? 그런 부분은 생각을 못 했었다요. 별들이 사도들이라는 건 무슨 뜻이냐요?”
“달의 여신께서는 늘 대륙을 내려다보면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는데, 그 중에 특출 난 이들을 가려서…. 아니, 이단자에게 말해봤자 알아듣기 어렵겠지. 어차피.”
현성대군은 말하다가 말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런 현성대군에게 사호는 바짝 고개를 들이밀었다.
“음음. 알아듣기 어렵다요? 그치만 설명해 달라요. 달의 여신의 대리인이라는 인물에게 이렇게 교리를 들으니 실로 영광이다요.”
현성대군은 바로 반응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거렸다. 그 때 나시파가 웃으면서 손뼉을 쳤다.
“전하. 저하. 날이 추우니 들어가서 이야기하시지요. 사호. 너도 와라. 근 3개월만인데 어디 회포나 풀어보지.”
◈ ◈ ◈
“음음. 달의 여신은 그런 존재냐요?”
“응. 옛날 옛적 아주 커다란 홍수가 있을 적에 우리 모두를 구원해주신….”
‘구원 안 했어….’
“아하, 그 홍수에 대해서는 제국에도 기록이 있다요. 태양의 아들을 벌하고자 약속의 주관자께서….”
“이단이네.”
‘너도 사이비야….’
복도를 걷는 동안, 현성대군과 사호는 활발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 이야기를 들을수록 절로 어깨가 무거워졌다.
문득 후 하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게 진실을 깨닫게 된 자의 업보라는 것인가.’
[간신 조련사: 그보다는 그냥 ‘지랄’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좌우간 약속의 주관자를 모시는 행상이라. 흠. 기억해보자면 소모라도 일단은 교역도시였지.’
[최초의 성녀: 아, 맞아요. 소모라 살적에도 후환 없을 것 같은 사람들 죽이고 물건을 빼앗던 기억이 나요. 이제는 다 추억이네요….]
[첫 번째 은월: 뭐지? 악마인가?]
[최초의 성녀: 성녀예요!]
[첫 번째 은월: 역시 악마인가?]
살다 살다 아리야가 아니라 야리소연의 말에 동의하게 될 줄이야.
[간신 조련사: (귓속말) 약자들은 약자들 나름대로 살아남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겠지요. 빈민가에서 학대받으며 살던 이들에게 고결함을 요구해도 별 수 없는 일입니다.]
‘(귓속말) 그거야 익히 아는 바지만 이렇게까지 생생하게 알고 싶진 않았다구요….’
[최초의 성녀: (귓속말) 부족의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었어요! 소모라 놈들이 우리 밥줄 다 틀어막았는걸요. 또 심심하면 우릴 잡아 죽였고. 그러니까 이건 정당방위…! 압도적이고 악마적인… 정당방위…!!]
‘(귓속말) 천사니임…?’
[간신 조련사: (귓속말) 아… 지난번 귓속말 설정을 그대로 놔뒀었군요. 미안합니다.]
[첫 번째 은월: (귓속말) 가지가지한다 진짜….]
그래, 진짜 신의 사도가 저런 상황이다.
이승에서 사람들이 사이비에 열을 올린 듯 어떻단 말인가. 그렇게 깨달음에 깨달음을 겹쳐 비로소 마음의 평온이 찾아왔을 즈음 우리는 나시파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배가 고프겠지. 들도록.”
나시파는 병사를 시켜 사호에게 간단한 요깃거리가 내주었다. 사호가 눈을 반짝이며 기도를 올렸다.
“오오! 고맙다요!”
“맛은 없을 거다.”
“그거야 익숙해졌다요. 여길 지난 지도 제법 되었다요. 바람과 벗하며 걷고 젖은 풀을 침대로 쓰다보면 따뜻하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고맙기 그지 없다요.”
그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사호는 개밥 같은 식사를 잘도 먹었다.
그러는 동안, 나시파는 사호의 보따리를 검사했다. 나와 현성대군도 같이 곁에서 보았다. 책장수라는 소개처럼 사호의 보따리 안에는 책과 붓, 그리고 대륙 은화가 가득했다.
그 은화 중 일부는 따로 싸여 있었다. 나시파는 그것을 익숙한 손길로 챙기고는 책들을 늘어놓았다.
사호가 한 손을 들었다.
“아, 혹시 살 거면 여기 이 네 권은 빼주면 좋겠다요. 예약이 되어있는 것들이다요.”
“어차피 나에게도 있는 책들이군. 이번에도 왕도까지 내려갈 셈인가?”
“그렇다요. 그 다음에는 대륙 배를 타고 떠나고…. 늘 하던 대로다요.”
“올 때도 배를 타고 오지 그러나.”
“그럼 각하를 못 뵙지 않냐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기는.”
그런 대화가 오가는 동안 나는 책들을 차례차례 살펴보았다. 대륙 문자들이 빼곡하게 쓰인 종이책. 이 시대에는 정말이지 값진 물건들이었다….
그때였다.
[첫 번째 은월: 가리비수, 잠깐만!]
‘응?’
[첫 번째 은월: 흑치사라가 방금 그 책 한 번만 다시 봐보자는데.]
나는 방금 살폈던 책을 다시 보았다.
사호가 빼달라고 했던 네 권의 책 중 한 권이었다. 어느덧 그릇을 다 비운 사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음음? 저하. 왜 그러냐요?”
“잠시만.”
나는 야리소연과 흑치사라가 요구한 대로 책을 펼쳤다. 논경 양화(陽貨) 편. 닭 잡는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냐는 경구로 500년 뒤에도 유명한 책이었다.
‘이게 왜?’
[첫 번째 은월: 어… 흑치사라가 말하는데.]
[첫 번째 은월: 일반적인 양화 편과는 다른 문자들이 섞여 있다는데.]
‘다른 문자들이 섞여 있다면….’
아.
과연.
나는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호의 모습이 보였다.
[ 독심술을 사용합니다. (2/3) ]
[ 사호의 생각을 읽습니다. ]
<음음?> <뭐지?> <왜?> <지금까지 잘만.> <음.> <저 중 한 권을 바라는 건가?> <왜?> <이미 팔았던 책.> <이 둘에겐 없나?> <그럼 팔지 뭐.> <그 편이 차라리.>
나는 확신했다.
‘이 녀석, 첩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