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북벽 (3)
장벽을 한 차례 돈 나와 현성대군은 한 방으로 안내되었다.
“쉬실 때는 여기서 쉬시면 됩니다. 혹시 불편하신 것이 있거든… 감내하소서. 솔직히 많은 것을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변경백께서는 늘 장벽에 머무르십니까?”
“아니요. 변경령이 제 관할인데 어찌 여기서만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다만 대리자가 제 수족 같은 사람이고, 당분간은 농한기라 한가합니다. 하니 저하와 전하 두 분께서 머무르는 동안 저 또한 여기에 머무르겠습니다. 설마하니 봄까지 머무르시진 않겠지요.”
그렇게 우리들의 북벽 생활이 시작되었다.
1일차. 아무 일도 없었다.
2일차. 아무 일도 없었다.
3일차. 아득히 먼 곳에서 먼지구름이 피어났다. 그뿐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내가 혹시나 싶어 시야 2배 효과를 받은 저승 입주자들에게 도움을 받았음에도 마찬가지였다.
4일차. 아무 일도 없었다….
“여기 참 엿 같구나.”
옷을 여러 겹 껴입어서 눈사람처럼 된 현성대군이 그럼에도 달달 떨면서 말했다.
“일단 추워. 딱딱하고…. 밥은 맛이 없고. 뭐야. 왜 이래?”
“저희가 태어나기 전에는 왕국 전체가 다 비슷한 처지였다고 들었습니다. 심지어 궁전이나 신전도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더군요.”
그리 대답하는 나도 침울한 표정이었다. 이제 왕국에서 모습을 감춘 줄 알았던 개밥들이 또 식탁 위에 등장해 밥인 척하고 있었다. 잔망스러웠다.
“그렇군. 하지만 이 사람은 단순히 투정을 부리는 게 아니라구.”
현성대군이 호오, 천으로 감싼 손에 숨을 불었다. 희게 부서지는 입김.
“시현군, 우리는 왕자잖아. 나름 귀하게 대우받고 있는 거겠지? 근데도 이렇단 말야. 병사들은 어떻게 대접받고 있겠어?”
오호.
“그들을 염려하시는 겁니까?”
“시현군도 보았잖아? 여기가 왕국 방어선의 최고 요충지라고. 그런 곳을 지키는 병사들이 그런 대접을 받는 게 온당한 일일까? 이 북벽이 그렇게 큰 것도 아니고. 여기 전체를 싹 바꿀 정도의 돈을 왕국은 가지고 있을 텐데.”
“실로 은월의 주인다운 지적입니다.”
“그렇지? 한 차례 물어보러 가자.”
현성대군은 콧김을 팍 뿜으면서 나시파 변경백에게 향했다. 나는 그 결과가 대충 짐작이 갔지만 아무 말 않고 따라갔다.
“예? 아니요. 전혀 귀하게 대우해드리고 있지 않습니다만.”
그래서 다리를 꼬고 앉아 책을 읽던 나시파 변경백이 이렇게 말했을 때, 현성대군은 놀랐고 나는 놀라지 않았다.
현성대군이 엣취, 기침을 했다.
“으, 으음. 우리들이 그냥 병사들과 똑같이 대접받고 있다고?”
“예. 차이가 있다면 근무가 없고 기상 시간과 식사 시간이 자유롭다는 정도일까요? 아, 2인실이 지급되었다는 것도 있겠군요. 그 밖에는 똑같습니다. 식사. 땔감. 전부.”
“웅…….”
“아니면, 왕세자 전하께서는 내심 특별대우를 바라셨던 겁니까? 그러니 마땅히 그리 대접받을 것이라고?”
“읏….”
현성대군의 얼굴이 빨개졌다.
나는 팔짱을 끼었다.
“저와 전하를 빨리 돌려보내고 싶으신 것이군요.”
나시파 변경백은 책을 덮었다. 입가에는 흥미로운 미소가 떠있었다.
“사실, 그렇습니다.”
“당신도 전쟁이 벌어질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까? 두오 대장군이 전쟁이 벌어질 거라 장담한 근거 중에는 당신이 날려 보낸 까마귀들도 있었는데요.”
“사실,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상관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현성대군이 물었다. 나시파 변경백은 덮은 책 위에 팔꿈치를 얹고는 손등으로 턱을 괴었다.
“전쟁이 벌어진다면 맞서 싸울 뿐. 벌어지지 않는다면 지금과 같은 일상을 보낼 뿐입니다. 그러니 제가 전쟁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하든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든 큰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그 말을 이해했다.
“자신이 어떻게 하든 전쟁이 벌어지지 못하게 할 수는 없으니 고민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저 밖에 전쟁을 일으키려는 마음을 먹은 자가 있다고 해봅시다. 제가 그 자에게 암살자를 보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북벽 바깥으로 병력을 내보내 그 자의 나라를 유린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대국적인 영향을 끼칠 방법이 없다는 뜻이지요, 라고 나시파 변경백은 덧붙였다. 그녀는 이어서 말했다.
“저는 그저 이 북벽의 담당자이고 제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허투루 할 생각은 없지만 도란 제사나 두오 대장군 같은 이가 그 이상의 기적을 바란다고 해도 곤란할 뿐입니다. 일어날 전쟁을 막는다거나, 일어나지 않을 전쟁을 일으킨다거나….”
“모두 변경백님 손 밖의 일이다?”
“예. 저는 최초의 성녀도 개천의 시왕도, 외팔의 대학장도 아니니까요.”
[최초의 성녀: 앗. 웅… 어, 어쩐지 부끄럽네요.]
[첫 번째 은월: 나 쟤 마음에 든다. 되게 명쾌하네.]
[개천의 시왕: 그러게 말이군. 바른 시야를 가진 자다. …그런데 아리야야 사실상 전설상의 존재이니 그렇다 쳐도, 흑치사라. 그대가 나와 비견될 정도의 인물이란 말인가.]
[첫 번째 은월: 이번 역시 흑치사라는 웃을 뿐이었다….]
[최초의 성녀: 그리고 왜인지 하현후 마나가 뽐내고 있네요…. 아니, 마나. 당신 어머님께서 잘난 것이지 당신이 잘난 것은 아니에요. 떽, 회초리 입에 물지 마세요.]
나는 나시파 변경백을 바라보았다. 비류아로부터 성장기의 어둠을 제거하면 이런 느낌이 될까?
‘겁나게 안정되어 있는데다가 끝장나게 합리적인데.’
이런 양반이 북벽을 틀어쥐고 있는데 도대체 왜 북벽수성이 실패한다는 거지? 불가사의했다.
‘암살이라도 당하나?’
분주한 생각 속에 나는 나시파 변경백이 읽던 책을 흘끗했다.
“책을 읽으시는군요.”
“예.”
“책을 읽으신다는 건 대륙 문자를 읽을 줄 아신다는 거군요.”
“전사가 대륙 문자를 아는 게 신기합니까? 저는 영주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수문장 노릇만 하고 있습니다만.”
해석하자면, 그 또한 너랑 현성대군 좀 돌아갔으면 하는 이유 중 하나라는 말이었다.
나는 개의치 않았다.
“책 읽는 걸 좋아하십니까?”
“보통은 활쏘기나 승마를 더 좋아합니다. 왕국민이고 전사니까요. 하지만 요즈음은 통 할 일이 없어서요.”
해석하자면, 이 또한 너랑 현성대군 좀 돌아갔으면 하는 이유 이하생략.
나는 역시 개의치 않았다.
‘이런 식으로 오돌뼈를 숨긴 말들은 유미 몸에 들어갔을 적에 제사장한테서 이미 많이 들었단 말이지.’
[최초의 성녀: 예언자님, 이 제사장 우는데요?]
‘아니아니… 음. 아니.’
어쨌든.
“아쉽군요. 책을 좋아하신다면 선물 좀 해드리려 했는데.”
나시파가 멈칫했다.
“책을 가져오셨습니까?”
“예. 저도 시간을 때울 것이 있어야하니까요.”
해석하자면, 죽칠 준비 하고 왔으니 그리 알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내 말의 오돌뼈야 어쨌든 나시파는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한 번 보고 싶긴 하군요.
“변경백께서도 보여주신다면.”
“물론입니다.”
잠시 후 우리는 서로가 가진 책들을 탁자 위에 늘어놓게 됐다. 나시파는 아… 소리를 내며 웃었다.
“논경 시학편… 좋군요. 읽어보고 싶었는데 이편만은 어째 눈에 띄지 않았거든요.”
“읽어보시겠습니까?”
“예. 저하께서는 무슨 책을 바라시는지?”
“저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혹시 주해를 바라신다면 해드리겠습니다.”
이 시대의 책은 혼자 읽기가 곤란했다. 한 장에 많은 정보량을 우겨넣기 위해 대륙 문자를 사용하여 그 내용을 최대한 압축시켰기 때문이다. 그 압축된 내용을 풀어 설명해주는 것을 주해라고 했다.
“호오.”
나시파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괜찮겠습니까? 주해는 그만한 학식이 뒷받침되어있지 않으면 힘들다고 들었는데요.”
“예, 보통은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학사가 맡는 일이지요. 하지만 가능합니다.”
[첫 번째 은월: 왜냐면 가리비수 넌 500년 뒤 사람인 데다가 태학관 수석이라서?]
‘아니.’
내가 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수고가 너무 들었다.
‘내 안에 대학자님이 계시니까.’
날로 먹을 수 있다면 최대한 날로 먹는 것이 나의 신조다.
◈ ◈ ◈
그리하여 몸을 동그랗게 만 현성대군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최초의 성녀: -라고 하네요, 흑치사라가.]
“-라고 합니다.”
나시파는 입을 떡 벌린 채 나를 바라보았다.
“…젊은 나이에 대단하시군요.”
“변경백과 비교해 크게 차이나지 않습니다만.”
“예, 그래서 더욱 대단합니다…. 저도 또래 중에서는 똑똑한 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나시파는 솔직하게 탄복했다는 듯 날 올려다보았다.
‘다물 재상보다 낫네.’
나는 자리에 앉아 물었다.
“태학관에 다니셨습니까?”
“어렸을 적 조금 기웃거렸을 뿐입니다.”
보통이라면 여기서 말을 멎었을 텐데, 어지간히 강의가 인상 깊었는지 나시파는 묻지도 않은 사정을 털어놓았다.
“하필 그 어렸을 적 조금 기웃거렸을 때 대학장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느릿느릿하게 말이 이어지는데… 어째 끊어지질 않고, 끊어진다 싶은 부분은 머릿속에 아, 저렇겠구나 하고 자동으로 채워지더군요. 마치 지금 저하께서 하신 것처럼요.”
‘그야 흑치사라가 한 강의를 전달해준 거니까.’
“태학관에 다니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러고 싶었지만 집안에서 반대했습니다. 저는 상현 공작가 휘하잖습니까.”
하현후 마나의 어머니인 흑치사라가 태학관을 세웠으니, 태학관은 하현 공작가 휘하의 기관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집안에서 뭐라 하든 다닐 걸 그랬습니다. 제가 딱 성인이 될 즈음 흑치사라 학장님께서 돌아가셨거든요. 하현후께서도 그 충격 탓인지 한창이신 때에 삭에 드셨고…. 안타까운 일들이 많습니다.”
[첫 번째 은월: 쟤 여기 데려오자.]
[최초의 성녀: 때 되면 올 텐데요 뭐.]
[첫 번째 은월: 빨리 오면 그만큼 빨리 기뻐할 텐데….]
[최초의 성녀: 으으음. 마음은 알겠지만요….]
왜 요즘 둘이 죽이 맞을까? 문명인들이 대거 입주한 덕에 둘 있던 야만인들이 단결하고 있는 것일까?
어쨌든 나는 그런 저승의 풍조를 간략하게 전해주었다.
“언젠가는 안타깝지 않게 되실 겁니다.”
‘구체적으로는 죽어서 저승 가게 되면.’
“음. 위로해주시니 고맙군요. 살아있는 동안 노력해야 할 일이겠지요.”
‘아니, 죽어야 한다고….’
어쩐지 훈훈한 분위기로 대화가 마무리되었다.
‘뭐 좋은 일이지.’
그보다 나는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책은 어디서 얻으십니까? 귀중한 보물인데요. 나시파 변경백령이 항구를 갖고 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습니다만…. 왕도에서 얻으신 겁니까?”
“몇 권은요. 몇 권은 대륙의 상단으로부터 샀습니다.”
상단?
내 의아함을 읽었는지 나시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북벽이 대륙과 육로로 통해있지 않습니까? 육로를 통해 왕국에 들어서려는 이들은 누구든 이 북벽을 통해야 합니다. 하지만 야만족들이 득실거리는 나른한 벌판을 지나 여기까지 오는 이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나는 생각해보았다.
“커다란 상단이어야겠군요. 혹여 야만족들의 씨족 중 하나에게 공격당하더라도 버텨낼 재간이 있는. 아니면….”
“아니면?”
“정반대로 몸이 가볍거나요. …그리고 책은 행상인도 갖고 다닐 수 있을 만큼 가볍지만 값은 많이 나가는 상품이지요.”
나시파는 싱긋 웃었다.
“예. 요 몇 년 자주 오는 이가 있습니다. 책과 붓을 들고 다니지요. 그녀에게서 샀습니다.”
나는 솔직하게 감탄했다. 왜냐하면.
“그냥 죽여 버리고 빼앗을 생각은 안 하셨습니까? 행상이라면 홀몸일 텐데요. 책은 비싸지 않습니까.”
[첫 번째 은월: 와.]
[최초의 성녀: 아니, 올바른 통찰이에요. 후환이 없는데 비싼 것을 가지고 다닌다…. 이건 제발 자길 죽이고 뺏어달라는 거지요.]
[첫 번째 은월: 우와아.]
[최초의 성녀: …어, 어째서 그런 눈으로 보시나요?]
[첫 번째 은월: 아니… 그냥… 음… 너희는 그… 양심이라거나…?]
[최초의 성녀: 그야 되도록 선량하게 대하려고 했다구요. 그치만 그래도 후환이 없는데 비싼 것을 갖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그렇잖아요?]
[첫 번째 은월: 뭐가 그런데…?]
저승의 야만인 동맹이 빠르게도 파국을 맞이한 가운데 나시파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야 저도 그렇게 했겠지요. 흑치사라 학장님의 강의를 듣지 못했다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겁니다.”
“어떤 강의였기에?”
논경에서처럼 인의예지를 다룬 강의였을까?
아니었다.
“닭 모가지는 언제든지 비틀 수 있다는 강의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