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111화 (111/261)

111. 북벽 (2)

[첫 번째 은월: 북벽 자체의 특수성? 어떤 건데?]

‘음. 북벽까지 오는 데에는 2인용 마차로 5일이 걸렸지? 만약 그냥 말을 탔더라면 약 이틀, 갈아타며 달리면 하루만에도 도착했을 거리라는 거거든.’

500년 뒤, 똑같이 말을 타던 야만인들에게 왕도가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한 이유가 있다고 할 것이다. 심지어 그 시기엔 곳곳에 도로까지 깔렸다. 북벽이 뚫리면 곧장 왕도까지 대로가 열리는 것이다.

‘하여간 수문장 그 빌어먹을 새끼.’

야만족의 왕, 카한에게 대뜸 붙어버린 그 자식을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린다. 나라가 망해버린 건 실상 그 자식 때문인데 살리기는 내가 살리고 있다는 이 현실이 슬펐다.

[간신 조련사: 그러게요. 대체 왜 붙었을까요?]

‘그야 개새끼니까요.’

[간신 조련사: 그뿐일까요?]

나는 심리적으로 뒷머리를 긁었다. 저승과 이승을 오가며 개처럼 구르는 동안 나도 참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개중에는 그 수문장 새끼에 대한 생각도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야만족들 조련한답시고 돈이랑 물자 건네는 헛짓거리 하는 동안 친해져버린 것 같습니다.’

[간신 조련사: 그뿐입니까?]

‘…그렇게 친해지기 위해서는 담당자의 연속성이 중요해집니다. 이 연속성, 그러니까 맡던 놈이 계속 맡는다는 걸 당시의 제도가 뒷받침했죠. 당시 북벽과 장성 관리는 순번제였는데 워낙에 북부가 척박하니 다들 가기 꺼려했거든요. 그렇게 고인 물이 썩은 물 되는 거야 뭐 순식간이죠.’

[간신 조련사: 그렇습니다. 결국 왕국이 강요한 자리. 강요받은 이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도리가 있겠습니까.]

‘에이, 그래도 그건 좀 아니죠! 그럴 거면 무과에 급제를 하지 말던가. 벼슬길은 자기가 아득바득 나와 놓고선.’

내가 마음속으로 궁시렁 거리는 동안, 비류아는 흥미롭다는 듯 우리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개천의 시왕: 흐음. 그 시대에는 그런 식으로 북벽 수문장 자리를 맡겼는가.]

‘예. 당시가 되면 일단 과거와 등과 제도가 보장되니까요. 정확한 명칭은 북벽 수문장 겸 장성 총사령관이었습니다.’

[개천의 시왕: 흥미롭구나.]

[첫 번째 은월: 이 시대에는 어떻게 맡기는데?]

[개천의 시왕: 남침(南侵)에 대해서는 개천식 이후 계속하여 염려하고 대비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법왕, 시우와 함께 논의한 결과 지금과 같은 형태로 정리가 되었지.]

북벽 수문장의 자리는 어느 시대에도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결정하는 요인은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1 사욕에 의거하여 지키게 할 것인가?

2 명예욕에 의거하여 지키게 할 것인가?

왕국 초기의 경우 전자였다. 북벽 수문장을 포함한 나름 커다란 영역을 하나의 부(部)로 떼어놓고 자치권을 보장하는 것이다. 대륙 식의 관제와 호칭이 들어온 뒤 그 부(部)의 이름은 변경백령(邊境伯領)으로 바뀌어 있었다.

상현후의 조카이며 왕세자의 사촌, 두오 대장군의 인척, 북문 수문장.

겸, 나시파 변경백령의 책임자, 솔란 나시파 변경백이 말했다.

“세자 전하, 시현군 저하. 오신다는 전갈은 받았습니다만, 여전히 갑작스럽군요.”

당대의 나시파 변경백은 생각보다 젊은 여인이었다. 20대 후반쯤 되었을까?

‘인맥빨 외에도 능력 있다는 소리고.’

전사 계층 출신답게 잔근육이 드러날 만큼 단련된 육신. 그리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엿보였다.

‘말하면 알아먹을 유형.’

나는 고개를 수그렸다.

“갑작스럽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꼭 북벽을 한 차례 둘러보고 싶었습니다.”

“왕자님답지 않은 행동이군요.”

“그렇습니까? 하지만 ‘왕자님답다’거나 ‘공주님 같다’라는 표현 자체가 제 세대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는 것 아닙니까.”

나시파 변경백은 살짝 웃었다.

“예. 선대 분들은 그런 호사를 누리지 못하셨지요.”

비류아는 시왕이다. 무왕 이세는 4살만에 법통을 이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왕자님 공주님 세월을 이렇게 길게 누린 것은 지금 내가 속한 시현군 세대에서 처음으로 가능해진 일이었다.

“그러니 이것도 충분히 왕자님다운 행동 아닐까요?”

“부정할 수 없군요.”

“예. 그럼 이제 북벽을 안내해주시겠습니까?”

“이 쪽으로 와주십시오.”

나시파 변경백의 안내를 받아 나와 현성대군은 북벽을 둘러보았다. 북벽이니 장성이니 해봤자 하얀 머리 산맥 한중간에 고랑처럼 나있는 분지를 기워놓은 것이니 500년 뒤와 비교해도 썩 다를 것은 없었다. 지형이 깡패였다.

‘500년 뒤가 좀 더 벽이 두텁고 대포까지 배치되어있다는 정도? 그 외엔 거의 똑같네.’

장벽 위를 거닐면서 나는 생각했다. 내 옆을 따라 걷던 현성대군이 성벽 담장을 짚고서 북쪽을 내다보았다.

“저 곳이 시왕께서 건너오셨다는 나른한 벌판인가?”

“예. 드넓지요.”

나시파 변경백의 말처럼 그 곳에는 탁 트인 황야가 놓여 있었다.

넓었다.

너무 넓었다. 강과 접해있지도 않았다. 바싹 마른 땅 위에 가끔 오는 빗물을 몇 번이나 걸러 마시며 자라난 억새풀과 갈대풀이 잔뜩 깔려 있었다.

‘얻을 가치도 없고, 얻어봤자 지킬 수가 없는 땅.’

그러기에 왕국의 북방 경계선은 나른한 벌판이 아니라 하얀 머리 산맥, 정확히는 서 산맥과 동 산맥이 급격이 졸아들며 마주치는 지형에 축조된 이 북벽에 그어져 있었다.

[최초의 성녀: 위에서 보니까 알겠네요. 마치 자연이 성벽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준 것 같아요.]

‘그렇소. 벼랑 사이에 세워진 덕에 장벽이 아니라 산을 타고 올라와 좌우에서 장벽을 치는 것도 어렵소.’

아예 하얀 머리 산맥 자체를 넘어 우회하는 것은 가능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야 말을 타고 들이칠 수 없었다.

경사가 급하지 않은 쪽에서 산을 타 능선을 따라 장벽을 옆에서 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그러자면 하얀 머리 산맥을 한참이나 헤매야만 했다.

지정학적 조화가 몇 개나 겹친 덕에 만들어진 천혜의 요새였다.

[첫 번째 은월: 하누리가 너무 천혜의 요새여서 너무 기댄 거 아니냐고 하네.]

‘맞는 말이야.’

왕국이 허망하게 무너진 이유는 결국 북벽을 너무 믿은 탓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은 북벽 관리에 대해서는 또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 망할 만했다.

[개천의 시왕: 원래 지나서 돌이켜보면 ‘그럴 만했지’ 싶은 것들이 당시에는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법이다.]

[개천의 시왕: 많은 이들이 지나서 돌이켜볼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그대는 돌이켜볼 기회라도 가졌으니 운이 좋다 해야 할 것이다. 심지어 그것을 돌이킬 수 있는 기회까지 생겼지 않은가.]

‘으음, 맞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해야 한다. 머리로는 납득이 되는데….’

[개천의 시왕: 막상 구르는 입장에서는 욕이 나온다 이거겠지. 누구보다 내가 잘 알 것이다.]

‘알아주시니 고맙습니다요….’

[개천의 시왕: 애쓰도록.]

그래야겠지 역시.

나는 나른한 벌판으로부터 시선을 떼었다. 나시파 변경백이 현성 대군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하므로 곧 여기가 왕국 북부를 방어하기 위한 최전선입니다.”

“여기 말고 안배된 것은 더 없는 거야?”

“아직까지는요. 언젠가 왕국의 재정에 여유가 생겨 이 근처에 산성과 요새를 몇 개 더 짓는다면 모를까. 하지만 짓는다고 해도 재미를 보진 못할 겁니다.”

현성대군은 나른한 벌판을, 그리고 고개를 정반대로 돌려 아래로 펼쳐진 왕국을 바라보았다.

“너무 넓구나.”

“예, 너무도. 결국 여기가 최초이자 최후의 보루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밖에는 대하에 이를 때까지 적에게 전력 소모를 강요할 만한 곳이 없는 것입니다. 억지로 조이려 해봤자 물을 움켜쥐려는 것과 똑같겠지요.”

“그러니 방어선을 치기 어렵다… 잘 알겠어.”

“세자 전하께서는 해가 갈수록 그 총기가 남달라지시는군요.”

현성대군은 간지럽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러더니 문득 물었다.

“만약 자네가 전쟁을 걸어온다면 여길 어떻게 뚫겠어?”

‘오. 아이라서 가능한 질문.’

나시파 변경백은 턱을 짚은 채 생각에 잠겼다가 답했다.

“글쎄요. 결국 투석기를 날려대면서 사다리나 갈고리를 동원해 물량으로 밀어야겠지요. 길고 괴로운 싸움이 되겠군요. 아니면 병사들을 매수한다거나….”

“여기 병사들은 믿을 만해?”

‘역시 아이라서 가능한 질문.’

나시파 변경백도 과연 여기에는 곤혹스레 웃어보였다.

“세자 전하. 아무려면 믿을 수 없는 병사들을 부리겠나이까.”

“시현군이 말하길 무거운 자리에 있는 사람은 최대한 많은 것을 의심해 보아야한다고 했어.”

‘어씨, 왜 날 끌어들여.’

나시파 변경백이 날카로운 눈으로 한 차례 나를 훑었다. 이어서 말했다.

“바른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믿을 만하다’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부터 잡아야 공정하겠지요. 그리고 충심 깊은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정령의 동굴 같은 것은 옛날이야기에서나 나옵니다. 있는 이들을 믿고 쓸 수밖에 없습니다.”

“으음, 그것도 그렇네.”

현성대군이 앓는 소리를 냈다. 나시파 변경백은 다시금 빙긋 웃었다.

“그리고 여기 병사들을 믿을 만하냐고 물어 보시기엔 너무 늦으셨습니다.”

“응?”

“전하께서는 이미 여기 와계시지 않습니까? 만약 이곳의 병사들이 믿을 만하지 못하다면 신뢰치 못할 이들에게 둘러싸인 셈인데, 이제 와서 여쭈셔도 의미 없는 일이지요.”

“아… 그것도 그렇네. 으으음. 어째 변경백, 시현군이랑 비슷하게 말하는구나.”

그 말에 나시파 변경백은 다시 나를 보았다. 조금 전과 달리 흥미롭다는 기색이었다.

“호오, 시현군이 이런 식으로 말합니까?”

“응. 오는 길에 많이도 지적받았어.”

“시현군 저하.”

음.

“예, 변경백.”

“만약에 저하께서 전쟁을 걸어오신다면 이곳을 어찌 공략하시겠습니까?”

다물 재상과 비슷하게 도발적인 질문이었지만 거기에 담겨있는 것은 적의가 아닌 흥미였다.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공략하지 않을 겁니다.”

“예?”

“내다보이는 곳에 병력을 깔아둡니다. 그리고 버팁니다. 몇 차례 공격하는 척도 합니다. 그렇게 왕국의 이목이 쏠린 틈을 타 대하를 도하하여 도읍지를 치거나, 뱃길을 통해 북벽 이남에 병력들을 내려놓을 겁니다.”

북벽수성을 소재로 만들어진 작품에서 묘사된 바를 그대로 말해주자 나시파 변경백은 다시금 손으로 턱을 짚었다.

“흥미롭군요.”

잠시였다. 나시파 변경백은 곧바로 말했다.

“하지만 북벽 이남이라면 왕국이 자랑하는 기마병단이 활약할 수 있습니다. 야전에 대해 방어선을 구축하기 힘들다는 것은 적병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만큼, 북벽에 수성 병력과 보조 병력만 남겨놓은 뒤 상륙한 병력들을 쓸어버리면 그만이군요.”

‘오.’

“상륙된 병력을 칠 때에는 우선 퇴로부터 끊어야겠지요. 대하와 해변 일대를 싹 돌아서 싸먹든, 배로 틀어막든 물길부터 막습니다. 땅길의 경우, 북벽은 들어오는 걸 막기도 하지만 나가는 것을 막기도 하지요. 상륙한 적병들은 그대로 호랑이 우리에 갇힌 거나 다름없는 신세가 될 겁니다.”

‘얘 좀 대단하네.’

이 또한 북벽수성과 대하대첩을 소재로 만들어진 작품에서 묘사된 거의 그대로였다. 왕국은 한 차례 왕도를 내주고 후퇴하지만, 결국 대하를 도하해 온 나투아를 쓸어버린다. 이어 곧바로 대하를 도하하여 나투아를 공략했다.

‘주 병력을 잃어버린 나투아는 그것을 감당하지 못했지.’

그리고 대륙은 나투아의 패색이 짙어지자 손을 뗐다. 결과적으로 나투아는 왕국에 정복당하고 만다. 이것이 북벽수성과 대하대첩의 결과였다. 두 전쟁이 삼국통일의 첫걸음이라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왕국이 이긴 전쟁이니까.’

요지를 맡고 있는 만큼 나시파 변경백이 유능한 인물인 것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감안한다 해도 이만큼의 군사적 식견을 갖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자연히 떠오르는 방책들이었다.

주 병력에 타격을 입히지 않는 이상, 잠시 빈집털이로 재미를 볼 수는 있어도 왕국은 무너지지 않는다. 자명한 이치였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임무 창에 떠있다는 건데.’

그 말은 단 한 가지 사실을 의미했다.

‘내가 개입하지 않으면 왕국은 북벽수성도, 대하대첩도 승리하지 못한다는 거야.’

어째서 그렇게 되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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