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북벽 (1)
[첫 번째 은월: 드디어 왕도에서 벗어나보는구나. 겁나 오랜만이네.]
[최초의 성녀: 그러게요, 왕국이 세워진 뒤로 처음 아닌가요?]
[첫 번째 은월: 풍경이 바뀌니까 좋다 야…. 와, 저기 잔디밭 좀 봐봐. 겨울이라 그런가, 물이 살짝 빠진 게 분위기 있네.]
[최초의 성녀: 그러게요…. 심지어 우리들은 예언자님 주변이면 시야를 폭넓게 가져갈 수 있단 말이죠. 아, 저기 다람쥐 떼.]
[첫 번째 은월: 맛있겠다.]
[최초의 성녀: 맛있겠죠….]
‘야리소연이 야만인이라는 건 기억하는데, 아리야 그대 역시 야만인이라는 걸 깜빡깜빡 잊고는 한단 말이오. 되새겨줘서 고맙소이다….’
[최초의 성녀: 그, 그치만 다람쥐 진짜 맛있어요. 한 번 드셔보세요.]
‘싫소….’
북벽까지 가는 여정은 편했다.
왕국은 본디 기마병을 자랑하던 부족이 세운 나라였다. 혈통이 좋은 말을 잘 키울 줄 알았다. 그렇게 좋은 말이 끄는 마차 안에 비단이 깔렸다. 편했다.
500년 뒤 야만족들이 삽시간에 왕도를 빈집털이 했다는 데에서 추론할 수 있겠지만 북벽까지는 평평한 지형이 이어졌다. 길이 깔리지 않았어도 말들이 움직이기 좋다는 것이었다. 겁나 편했다.
‘불편한 게 2개 있다면….’
첫째. 좀 추웠다.
둘째.
“추우십니까?”
예상치 못하게 따라붙은 짐덩이, 나와 같은 마차에 탄 왕세자 현성대군이 그 이쁘장한 얼굴을 찡그리며 담요를 더 둘러썼다.
“겨울에 추운 거야 당연한 일이지.”
입으로는 그런 말을 담지만 담요를 잡은 두 손은 덜덜 떨고 있었다.
때는 11월. 마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새어드는 찬바람이 마치 면도날처럼 피부를 얇게 깎아내는 듯했다.
“그래도 많이 추워 보이십니다. 왜 오셨습니까?”
“왜. 오면 안 돼?”
“안 될 것은 없지요. 다만 대군이란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또한 많은 것을 배워야하는 존재지. 이 사람은 지금 후자를 택해야한다고 생각해.”
현성대군은 스스로를 ‘이 사람’이라고 지칭했다.
‘왜 1인칭이 그러냐 너….’
[첫 번째 은월: 스스로를 본좌라고 지칭하던 사람의 적자잖아.]
[개천의 시왕: 덤으로 질풍노도의 시기다. 철도 겨울이라 바람도 쌩쌩하군.]
여러모로 이해가 됐다.
“왜 그런 표정이야?”
그렇게 이해하는 내게 현성대군이 트집을 잡았다.
“제 표정이 어떻습니까?”
“따뜻해.”
“좋은 표정이겠군요.”
“기분 나쁠 정도로 따뜻해. 특히 그 두 눈. 찌르고 싶어질 정도야.”
“같은 아버지를 두었고 같은 현(玄)이란 자를 쓰는데 너무하십니다.”
“자네야 하현이잖아. 이 사람은 상현이고. 서로 대극된 현이니 잘해주는 것이 이상하지 않아?”
그 말처럼 이 이복동생 겸 왕세자 전하는 하현후 마나와 달리 전사들 측에서 제시된 달 그림자 상현후로부터 태어난 인물이었다.
파벌적으로 보면 그야말로 대극이라 할 만했다. 이세와 달리 이 왕세자 전하는 심계도 있어보였으니 한 차례 궁중암투물을 찍어 볼 만했을 것이다.
전쟁을 앞두고 있지 않았다면 말이다.
“세자 전하. 저는 하현 공작의 자리를 마다했습니다.”
“아, 인상적이긴 했지. 왜 마다한 거야?”
“전쟁을 앞두고 있으니까요.”
“공작이 되었다고 전쟁을 못 치르진 않잖아. 오히려 그렇게 확신한다면 공작가의 자산을 가용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어? 이 사람이 자네 입장이라면 그리 했을 텐데.”
한 손으로 뺨을 받친 채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은월의 눈동자에 대고서 나는 웃어주었다.
“너무 길어집니다. 너무 무거워집니다. 너무 번잡해집니다.”
“감수할 가치가 있지 않아?”
“없다고 봤습니다. 혹여 세자 전하께선 제 판단의 근거를 일일이 말해주길 바라시는지요?”
“….”
현성대군은 소연이 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방어적인 침묵.
나는 웃으며 말했다.
“세자 전하. 왕자들로부터 공작가라는 요소를 제거하면 남는 것은 그저 같은 왕자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형제를 조금 더 굽어 살펴주소서.”
“…북벽에 가서 뭘 할 셈이야?”
“어전에서 말씀드렸던 일을 할 생각입니다. 둘러보고, 바로잡고, 경계하고… 그 이상 할 일이 있겠습니까? 세자 전하야말로 북벽에 가면 뭘 하실 생각이십니까?”
“북벽을 지키는 정병들과 그 수문장은 상현 공작가 휘하야. 이 사람 어머니의 수하라는 말이지. 둘러보고, 바로잡고, 경계하고… 그 이상 할 일이 있겠어?”
한 마디로 나를 경계하여 따라왔다는 것이었다.
‘귀엽네.’
꼭 도토리를 낚아 채인 다람쥐 같다.
“또 그 너구리 같은 얼굴…. 마음에 안 들어.”
현성대군이 툴툴거렸다.
어차피 나로서는 북벽까지 가는 동안 저승 입주자들과 수다를 떠는 것 외에 딱히 할 일도 없겠다, 조금 놀려주기로 했다.
“수문장에게 서신 한 통 띄우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습니까? 전하께서 직접 움직이실 필요가 있었는지.”
“있다고 봤어. 문제라도 있어?”
“있지요. 가령 제가 전하를 인질로 잡는다면 어쩔 생각이십니까?”
현성대군이 멈칫했다. 경계하는 눈으로 나를 이리저리 뜯어보던 그는 조금 뒤에야 대답했다.
“말했듯이 정병들과 수문장은 이 사람의 어머니 휘하야. 그런 곳에서 그대 혼자 그런 미친 짓을 저지를 리 없지.”
“사실 제가 다 매수해놨을 수도 있죠. 아니면 이 마차가 지금 사실 북벽이 아닌 엉뚱한 데로 가는 중일 수도 있고. 또 단순히 제가 미친놈일 수도 있잖습니까? 이러한 사정들은 감안하셨습니까?”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소연이 짓이 아니었다.
현성대군이 한숨을 내쉬었다. 찬바람 속에서 그 한숨은 하얗게 형태를 갖추었다가 흩어졌다.
“감안하지 않았어.”
“예. 부주의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런 주의까지 다 기울이고 움직여야겠어? 이 사람은 대학장이 아니야. 양팔이 다 있다는 소리지. 한걸음 한걸음마다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너무 무거운 것 같아.”
“사실 그래야할 만큼 무거운 자리에 앉아계십니다. 세자 전하 아니십니까.”
다시 또 침묵.
“자네가 만약 이 사람이었다면 어찌 했겠어?”
“이미 말씀드렸듯 그냥 서신 한 통 띄웠겠지요. 허튼 짓 못하게 감시 잘 하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 사람이 그랬더라면 자네는 북벽에 가서 어쩔 생각이었는데? 뭘 하려 해도 방해가 됐을 텐데.”
“일단 세자 전하 욕을 푸짐하게 했겠지요. 그 다음에는 방해를 물리치고 하려던 일을 하고요. 해냈을 겁니다. 하니, 세자 전하의 수명이 은밀하게 늘어난다는 것 외에 크게 다를 건 없겠군요.”
“으음.”
현성대군은 입을 다물었다. 가끔 마차 창밖을 흘끗거리기도 하면서 그는 그렇게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최초의 성녀: 예언자님 멋지네요… 이번 임무 들어오셔서 진가를 발휘하신다는 느낌….]
‘지위와 몸과 나이가 받쳐주고 있으니 편하구료. 이번 빙의체는 정말 최상급이군.’
[첫 번째 은월: 그러게. 어전에서도 그렇고. 너 막 되게 충신 같애.]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실제로 충신 인증 받고 나라 살리는 중임.’
[간신 조련사: 안 살리면 댁이 뒈지기 때문이겠지요.]
‘사실의 한 측면이로군요.’
그 때 현성대군이 말했다.
“이 사람이 생각과 선택을 잘못했구나.”
조금 전과는 비할 수 없이 순순해진 어조였다. 과연 다음 세대의 은월, 정직남 이세의 피가 그에게 특히 진하게 흐르고 있다는 증거이리라.
“예. 거듭 말씀드리지만, 부주의하셨습니다.”
“어떻게 해야 유효한 수를 두었을까?”
“그렇군요. 우선은 그 4대 공작가를 좀 벗어나 생각하시지요. 생각의 뿌리를 거기 두고 계신 이상, 하현공의 자리를 마다한 제 시야를 쫓아오실 수 없습니다. 스스로를 좁아터진 그림 안에 우겨넣고 계시는 겁니다.”
현성대군이 다시금 하얗게 부서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군. 이 사람의 실책은 스스로를 왕세자가 아닌 어머니의 아들로 규정하고, 거기서 생각을 출발했다는 부분이구나.”
“영민하시군요.”
“…전쟁이 정말 일어날 거라 봐?”
“예.”
“어떻게 그리 확신해?”
나는 내가 나라를 살리기 위해 이 몸에 빙의했는데, 빙의하고 임무 창을 열어보니 삼국통일전쟁 서장이 떴노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제가 하현후의 아들이기 때문이지요.”
“음?”
“제 어머님의 핏줄을 거슬러 올라가면 흑치사라 대학장으로 이어지고, 흑치사라 대학장은 나투아 인이었습니다. 자연히 하현 공작가에는 나투아 측과 관계있는 이들이 모이게 됩니다. 자세한 과정은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만 그걸 통해 얻을 수 있었던 비보입니다.”
[최초의 성녀: 세상에! 예언자님, 언제 그렇게 조사를 하셨나요?]
‘안 했소.’
[최초의 성녀: 과연, 안 하셨… 음? 네?]
‘구라요. 그치만 뭔가 그럴듯하잖소?’
[최초의 성녀: 어… 그래도 구라를? 왜 이 상황에?]
‘보면 아실 거요.’
현성대군은 한 쪽 눈을 감은 채 말했다.
“과연. 자네가 하현공의 자리를 거부한 데에는 그런 까닭도 있는 거였어.”
이제야 모든 것이 명쾌하게 이해가 된다는 어조였다. 뭔가 적당히 그럴 듯한 미끼를 던져주면 사람들은 기꺼이 받아먹고 자기 상상력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나는 짐짓 침통한 어조를 꾸몄다.
“그렇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제가 만약 하현공이 되었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전쟁이 있으리라 알아챈 저를 하현 공작가 내부의 친나투아 파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현성대군은 신음을 흘렸다.
“암살하려 들었겠구나….”
“예. 이런저런 말이 많았지만 결국 저는 제 목숨을 건지기 위해 공작위를 고사한 채 북벽으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루한 인간이지요.”
이 말에는 자연히 감정이 우러났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이 말이 절반쯤은 사실에 기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성녀: 절반쯤은 사실에 기반했다면, 역시 하현 공작가 내부에 암세포가 있는 걸 조사하셨다는…]
‘음, 아리야. 앞으로 전쟁이 대충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려주겠소. 북벽수성과 대하대첩을 묘사하는 희곡들 모두가 나성 군사동맹이 북벽을 치는 걸로 시작하지. 그럼 왕국이 어떻게 하겠소?’
[개천의 시왕: 과연, 기초적인 성동격서인가. 북벽으로 병력이 몰려간 동안 주공(主攻)이 대하를 건너 오는거군.]
‘네, 그 결과 왕도가 한 차례 거하게 털립니다.’
[첫 번째 은월: 아, 그래서 튄 거임?]
‘응. 그러니 절반쯤은 나 살려고 북벽 가는 셈 맞음.’
왕국이 키운 좋은 말들은 마차를 끌면서도 거리낌없이 쭉쭉 나아갔다. 그만큼 왕도는 내 뒤로 멀어졌다. 꿀이었다.
[첫 번째 은월: 어, 잠깐. 그거 다 아니까 그냥 성동격서 안 걸리면 되잖아?]
‘당연히 안 걸리려고 해야지. 그러려고 가는 거고. 근데 안 걸리기가 좀 어려울걸.’
[개천의 시왕: 나-성 군사동맹이 이루어졌다는 건 두 나라 분량의 군대를 상대해야 한다는 거다. 심지어 그 중 하나가 대륙. 북벽에도 미끼라 보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적들이 몰렸겠지.]
‘옙. 당시 왕국이라고 죄 빡대가리들만 있진 않았을 거 아닙니까? 성동격서라는 거 짐작이야 했겠죠. 그러고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일단 급한 데를 막아야 되니깐. 그러니 일단 최대한 왕도에서 떨어지는 게 빙의체 생명을 보존하는 최선의 방법이지요.’
[첫 번째 은월: 정말이지 비루한 인간이구나 너….]
소연이의 총평을 마치 듣기라도 한 것처럼 한 목소리가 말했다.
“아니야.”
현성대군은 차분한 눈길로 나를 위아래로 쓸어보았다.
“자네는 절대 비루한 인간이 아냐. 자존심을 접는 방법과 제대로 된 선택을 내릴 줄 아는 왕국의 충신이야.”
음.
“제가 그냥 그런 척 연기를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왕세자 전하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서요. 그 부분은 고려하고 말씀하신 겁니까?”
“…아니. 고려하지 않았어.”
“예. 부주의하셨군요.”
“우음… 더 주의해야겠어.”
현성대군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수그렸다.
‘짐덩이가 아니라 귀염둥이였네.’
겨울바람 속에서, 마차는 덜컹거리면서도 그렇게 북벽을 향해 나아갔다.
◈ ◈ ◈
북벽의 수문장은 상현후의 조카이며 왕세자의 사촌으로 두오 대장군의 인척이었다.
[최초의 성녀: 수식어가 많기도 하네요….]
‘아직 인재 등용 시험을 치른다는 게 일반화되지 못했으니까. 파벌 핵심층에게 내줄 수밖에 없는 자리요.’
[최초의 성녀: 그리고 그 파벌 핵심층이란 곧 친인척… 으으음. 규모가 커지고 호칭이 바뀌어도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하군요.]
‘그렇지. 거기에 북벽 자체의 특수성도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