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나라를 살리는 일곱 번째 방법 (3)
잠시간 불편한 정적이 이어졌다.
“시현군께서는….”
그렇게 소연이 짓을 하던 다물 재상은 더 이상 웃음기 없이 말했다.
“전해 듣던 것보다 과격한 분이로군요.”
“어느 부분이 말씀이십니까?”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전쟁에는 각자만의 이유가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뒤집어 말하면 모든 평화에도 각자만의 이유가 있다는 이야기일 터입니다. 만사로부터 의미를 제거하는 말이니 사실상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신 것과 같습니다.”
나는 미소 지었다. 이전 개천식 당시 나투아의 사절단을 상대했던 때처럼, 역시 학자 계층이 생기니 말하는 맛도 듣는 맛도 한결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흑치사라? 걔는… 좀 너무 간 녀석이고.
[첫 번째 은월: 뭔 개소리야?]
야리소연은 반대로 좀 너무 가까이 있는 녀석이다.
‘소연이 너한텐 이런 식의 대화가 아직 좀 버겁겠구나. 흑치사라 강의 꾸준히 듣고 그래라.’
[첫 번째 은월: 소연이라고 부르지 마라. 확 건물 뽀개버릴라.]
‘뽀개지 마. 내 널 위해 손수 주석 달아줄게. 내참, 무슨 시험기간 앞둔 태학관 후배 요점정리 해주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도 어이가 없다만은.’
그렇게 나는 방금 다물 재상이 길게 한 말의 요점을 정리했다.
- 나 태학관 밥 좀 먹었으니 궤변으로 깝치지 마라.
[첫 번째 은월: 궤변이었어!?]
‘응. 왜냐면,’
“그리고 당장 걸려온 전쟁에 필요한 일은 그저 맞서 싸우는 것뿐이라는 말씀만은 옳습니다만, 왕국의 병사가 피를 흘렸다는 말은 들은 바가 없습니다. 도란 제사가 언급하신 옛적처럼 서해길을 오가는 우리들의 상선을 사라지길 합니까? 북벽에서 붉은 연기가 날아올랐습니까? 대하가 해웅의 깃발로 도배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 걸려온 전쟁 없잖아?
그런 말에 대해 나 역시 유려하니 대꾸했다.
“북벽 앞에 적들이 진을 치고 대하 위가 적선들로 가득 차면 이미 늦습니다. 무릇 평화 시의 목검 하나가 전쟁 시의 진검 하나를 대체하는 법입니다.”
- 그냥 넋 놓고 있다가 선빵 맞을래?
“허어. 그럼 어쩌자는 것입니까? 도읍 인근의 산 하나를 또 홀라당 벗겨야할까요? 그래야 목검이든 나룻배든 더 만들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만든 배로 대하를 먼저 건너자는 말입니까?”
- 군비 증강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요. 또 우리가 선빵칠 것도 아니잖아?
대충 그런 회화였다.
다물 재상은 기세가 등등했다. 아직 청년에 불과한 왕자님에게 도발적인 말을 들었다는 사실이 자존심을 할퀸 모양이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도 태학관을 나와 재상쯤 해먹고 앉았다면 왕자 하나는 갖고 놀 수 있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문제는 딱 하나.’
내가 다물 재상보다 500년 뒤의 태학관 밥을 먹었다는 사실이었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아는 사람?’
[첫 번째 은월: 니가 쟤보다 500년 후배라는 거?]
‘미친 야만인아….’
[간신 조련사: 당신이 500년 선배님께 대들어 대는 호로자식이라는 것.]
‘쫌, 천사님….’
[최초의 성녀: 예언자님께서 500년의 시간만큼 더 발전한 지식을 배웠다는 뜻이군요!]
‘역시 아리야로군.’
[최초의 성녀: 사실 제사장이 귀띔해줬어요….]
‘괜찮소. 태학관 시험으로 따지자면 책을 지참하고 치는 시험이었거든.’
나는 다물 재상에게 말했다.
“정리하자면 다물 재상께서 원하시는 것은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는 확신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대장군께서 갖고 계신 첩보들만으로는 판단을 내리기에 아직 부족하다 여겨집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서 결국 근거라고 할 만한 것은, 시현군 본인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대장군의 첩보들뿐 아닙니까? 그러니 자꾸만 말이 말에 얹히고, 말에 말이 먹히길 반복하는 것입니다. 불모한 논쟁에 지나지 않는 바, 불초는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는지 통탄스럽습니다.”
그렇게 말한 다물 재상은 짐짓 비난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애초에 왜 자꾸 이런 이야기를 꺼내어 사람들을 번거로이 하느냐는 함의가 담긴 눈길이었다.
‘흑치사라 제자답네.’
[첫 번째 은월: 이번에도 흑치사라는 웃을 뿐이었어.]
‘흑치사라 제자답게 흑치사라처럼 구는데, 어설프게 그렇게 굴어.’
덕분에 상대하기 편했다.
“그렇다면 그 근거를 찾아오겠습니다.”
“허, 어떻게 말씀이십니까? 대하를 건너시렵니까? 서해 뱃길을 타시렵니까?”
“둘 다 아닙니다.”
“하면 어디로 가셔서 무엇을 찾으시렵니까?”
나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당초 이 자리는 저의 거취를 논하고자 마련된 자리지요.”
다물 재상의 입가가 작게 씰룩였다. 미소였다. 내가 말빨에 밀려 말을 돌린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렇습니다, 시현군. 본디 무왕 폐하께서 시현군을 하현 공작으로 책봉하기 위한 자리였는데 도대체 어쩌다가 이리 말이 새어버렸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말이란 말과 같아 고삐를 놓치면 순식간에 들판 저편으로 넘어가버리는 법이지요. 무릇 사람이란 젊을수록….”
“북벽으로 향하겠습니다.”
다물 재상이 멈칫했다. 그뿐 아니라 도란 제사와 두오 대장군, 아직까지 곁에 있던 아신군까지 깜짝 놀라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다시 한 번 말했다.
“제가 북벽으로 향하겠습니다. 그곳에 가서 군기를 살피는 한편, 혹시라도 헛된 야욕을 품은 자 있거든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바로잡겠습니다.”
◈ ◈ ◈
침묵이 자리 잡았다.
오가는 설전을 묵묵히 듣고 있던 무왕이 말했다.
“괜찮겠는가, 시현군? 북벽은 왕자가 지내기엔 열악한 곳이거늘.”
솔직히 말하면 나도 가기 싫었다.
‘기껏 왕자 몸에 빙의했는데….’
그뿐인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문화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됐다. 일단 궁전부터가 야만인 우두머리의 소굴이 아니라 제대로 된 궁전처럼 일신됐다.
식탁 위에도 더 이상 빵인 척하는 곡물가루덩어리와 고기 요리를 흉내 내는 개밥 같은 것이 오르지 않게 됐다. 침대에도 웬 짚풀이나 양가죽이 아닌 비단이 깔렸다. 책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한 일주일 저승의 왕국에서 쉬다 오면 어땠을까 푸념했던 나다. 왕자 신분으로 이 모든 호사를 누릴 수 있는데 북벽 같은 데에 제 발로 가고 싶진 않았다.
‘그딴 데에는 나라 망할 때 도망쳤던 수문장 자식 같은 놈이나 가는 거지.’
하지만 그래도 내가 가야 했다.
‘나성 군사동맹은 북벽부터 친다.’
내가 있어야 대응하기 편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 무왕 이세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우려한 일이 생긴다면 어디든 불길과 바늘로 가득 찬 길이어서 걸을 수도 누울 수도 없겠지요.”
무왕은 우직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시현군은 쉬이 말하라.”
나는 살짝 감탄했다.
‘30년 지난 지금도 모르면 솔직하게 모른다고 하는구나.’
제사, 대장군, 재상 셋 모두 이 남자를 터럭만큼이라도 좀 본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고쳐 말했다.
“만약 왕국이 위험에 빠진다면 어디든 위험할 것입니다. 저는 왕자이니 더 위험하겠지요.”
“바른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더 있다.”
무왕 이세는 그 두 번째 문제를 입에 담았다.
“시현군. 그대는 전문적인 군사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북벽에 간들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소자가 하현공에 오른다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현 공작가의 의견들을 대표하고 정리하며 전달해줄 수 있겠지. 가끔 곤란한 일이 생기거든 양보나 조율도 좀 해주고.”
“예. 그리고 그것은 소자가 왕궁에서 자라 왕가의 사정을 잘 아는 덕입니다. 그런 만큼 하현 공작가를 맡아 그쪽의 일들을 처리하게 되더라도 왕가의 편의를 보아가며 그리 할 것이라 여기셨겠지요.”
“정확하다.”
“감히 예측컨대 다물 재상의 의견 아니었습니까?”
“그 또한 정확하다.”
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눈으로 다물 재상을 바라보았다. ‘재상이란 자식이 뭘 얕은 수나 짜내고 앉아있냐’ 하는 의미를 담아서. 다물 재상의 얼굴이 붉어졌다.
나는 무왕을 돌아보며 말했다.
“같은 이치를, 소자는 북벽에 가서도 행할 수 있습니다.”
“쉬이 말하라.”
“소자는 왕가의 일원입니다. 가서 있는 것만으로도 북벽의 정병들은 폐하의 손길과 눈빛을 느끼고 사기백배할 것입니다. 또한, 소자 또한 폐하를 닮아 저 자신이 부족함을 압니다. 가서 지위를 앞세워 지휘체계를 흐트러뜨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 뿐인가?”
“마지막으로, 소자는 전쟁이 벌어지리라는 분명한 확신을 품고 있습니다.”
‘왜냐면 임무 창에 떴거든….’
“그런 만큼 소자가 가서 살펴보면 무언가 다른 것이 보일지 모릅니다. 그곳의 정병과 장수가 가장 잘할 것이나, 잘 하는 것을 하다보면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면 시야가 좁아지게 마련이지 않습니까.”
무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본좌가 듣기에 바른 말이다. 시현군이 북벽으로 향하길 원하고 그 이유가 그릇된 것 같지 않으니 본좌로선 들어주지 않을 이유가 없겠다. 이견이 있는 자는 편히 말하라.”
도란 제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시거늘 어찌 이견을 말하겠습니까? 시현군의 뜻대로 하게 두소서. 본디 왕가의 일원은 또한 가장 강대한 전사이기도 하셨던 바, 시현군께 북벽은 그리 지내기 척박한 장소가 아닐 지도 모릅니다.”
두오 대장군은 팔짱을 끼었다.
“도란 제사가 말씀하신대로 본디 왕가의 일원은 또한 가장 강대한 전사입니다. 하지만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그런 만큼 폐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전문적인 군사 훈련을 받지 못하신 시현군께서 군기를 점검하시겠다 말씀하심은 쉬이 지나칠 수 없나이다.”
다물 재상도 한 마디 했다.
“하현 공작가의 가주 자리가 비어있음 역시 문제입니다.”
나는 하나하나 답해주었다.
“도란 제사께서 정확하게 짚어주셨습니다. 두오 대장군께서는 제가 신분을 앞세워 군기를 흐트리는 행동을 할까 염려하고 계신 것일진대, 그 부분은 유념하고 북벽 수문장의 권위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하현 공작가의 가주 자리는 잠시 다물 재상께서 대행해주십시오.”
도란 제사와 두오 대장군이 고개를 수그리는 가운데, 다물 재상은 예측하지 못한 말을 들은 듯 눈을 크게 떴다.
나는 그를 향해 말했다.
“분명 하현후께서 하현 공작가의 뜻을 대리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하현 공작가란 결국 하현후를 좇아 모인 이들이었고, 하현후를 좇아 모인 이들이란 결국 흑치사라 대학장을 좇아 모인 이들이었습니다.”
“…흑치사라 대학장께서는 정치에 손대지 않으셨나이다.”
“그럼에도 하현 공작가는 대학장의 눈치를 보았겠지요. 그리고 대학장의 피를 잇지 않았다고 하나 지식을 이으셨으니, 다물 재상께서도 잠시 대행하실 자격은 있다 할 것입니다.”
“으음….”
다물 재상은 입을 다물었다. 그로서는 내가 왜 자꾸 공작가의 가주 자리를 고사하려 하는지 이해가 안 되는 듯했다.
사실 그럴 것이다. 누가 왕도 공작 중 한 사람이 되어 정치질과 갑질을 쌍으로 즐기길 거부하겠는가?
‘근데 내가 할 일은 임무를 달성하는 거란 말이지. 정치질과 갑질을 즐기는 게 아니라.’
지위가 생기면 그만큼 움직임이 무거워진다. 뭘 하려 해도 계속 쓸데없는 견제를 받게 될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찍어 누를 만큼 압도적인 권력이 왕도 공작에게 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4명 중 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나머지 세 사람의 눈치를 봐야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군호 하나 있는 게 가벼워서 편해.’
그 밖에도 이유는 있었지만 나는 편히 말했다.
“하오니, 드릴 수 있는 대답은 모두 드렸습니다. 바라건대 폐하. 소자를 북벽으로 보내주소서.”
무왕은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
“이견 있는 이는 더 없는가.”
그 이상 없었다. 왕세자와 아신군, 다물 재상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나는 그 눈빛들을 향해 이렇게 말해주었다.
“곧 삭월이 들 것입니다. 달무리가 휘황할 때 거기에 대비하소서.”
바로 다음날, 나는 북벽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