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나라를 살리는 일곱 번째 방법 (2)
내가 살던 시기의 왕국에는 삼국 통일에 대해 신뢰할 만한 기록물이 남아있지 않았다. ‘역사를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며 본격적인 실록이 편찬되기 시작한 것 자체가 삼국 통일 이후부터 생겨난 일로서, 그 전까지 역사란 사실상 영웅들의 서사시와 그것을 이리저리 변주한 희곡에 가까웠던 것이다.
[첫 번째 은월: 서사시? 희곡이 뭐야?]
‘전설 같은 거야. 희곡은 그걸 극장에서 공연할 수 있게 만든 거고.’
[첫 번째 은월: 극장? 공연? 그건 또 뭔데?]
음.
‘남녀 둘이 전설에 나오는 등장인물. 가령 가리비수 역할이랑 네 역할을 맡아 그 전설의 내용을 흉내 내는 거. 극장은 그런 게 가능하고 또 사람들한테 보여주는 장소.’
[첫 번째 은월: 어… 왜 그러는데? 축제 때 숲의 정령 불의 정령 역할 맡아서 살풀이하는 거랑 비슷한 거임?]
‘응. 그리고 니가 맨날 나 구르는 거 볼 때마다 깔깔꾸러기 되잖아? 그런 것처럼 그냥 보고 즐기려고.’
[첫 번째 은월: 완전 깨달음.]
[최초의 성녀: 대충 알겠네요. 그리고 제사장이 말하는데, 그렇다면 극적인 장면들이 다양한 각도로 조명된다는 면에서는 담담히 역사를 기록한 실록인지보다는 나을 것 같다고 해요.]
새 입주자들이 대량으로 몰려온 덕분일까, 저승도 참 시끌벅적해진 모양이다. 이야기 상대가 많아진 세 은월에게도, 그리고 그만큼 다양한 관점에서 조언을 받아볼 수 있게 된 나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아니, 좋은 일 맞나? 그만큼 나 구를 때마다 배 잡고 데굴거리는 작자들도 늘어난다는 의미잖아. 나한테 무슨 노출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 슈바랄라 반메홈 허스키 같은….
[간신 조련사: 임무를 깨야지요, 간신이여. 그러니 좋은 일입니다.]
‘애초에 저는 왜 임무를 깨야할까요, 천사님…?’
[간신 조련사: 1 누가 국왕 곁에 끝까지 남아있다 뒈지랍니까? 2 그래야 다시 살 수 있잖습니까.]
‘젠장!’
한 차례 정신적 살풀이를 끝낸 나는 아리야가 전해준 제사장의 말을 떠올렸다. 아닌 게 아니라 삼국통일에 대한 ‘기록’은 없었지만, 그 시기를 배경으로 삼아 만들어진 ‘작품’들은 대단히 많았다.
‘북벽수성도 대하대첩도 모두 인기 있는 소재였지.’
그리고 이 두 개의 전쟁은 삼국을 통일하는 첫걸음이 된다.
‘태산 건너편, 황금 들판에서 알실라의 수도 황금성을 깨뜨리는 것이 마지막 걸음이 되고.’
하지만 황금 들판 전투는 한참 뒤에 벌어지는 일이었다. 임무 표시에도 떠있지 않다.
지금은 눈앞에 놓인 북벽수성과 대하대첩이 중요했다.
‘그리고 이 북벽수성과 대하대첩이 벌어지게 된 계기는….’
나는 생각을 정리하여 말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모두 아시겠지만, 최근 나투아와 대륙 사이의 친교가 끈끈해지고 있습니다.”
도란 제사는 팔짱을 끼었다.
“그들이야 원체 친했지요. 서해 뱃길을 탯줄마냥 서로 엮은 치들이니. 제가 어릴 적에는 얼마나 끈끈하게 붙어먹었는지 우리가 보낸 선박을 나포하고 나몰라라 한 적도 있다고 선대 제사장님께 들은 바 있습니다.”
[개천의 시왕: 내가 죽은 직후 들어갔던 임무에서 그대가 보고받았던 사건이군.]
[최초의 성녀: 앗, 제사장이 부끄러워하네요. 젊은 시절 예언자님께 보고했을 때가 떠올랐나봐요. 귀여워라.]
그 때가 건국 15년이니 45년이 후루룩 흘러버린 셈이다. 나는 새삼 감회를 느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요. 하지만 요즈음 오가는 교감은 여느 때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어떻게 말씀입니까?”
나는 숨을 들이마시고서 말했다.
“저는 두 나라가 군사적 동맹을 맺는 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북벽수성과 대하대첩이 벌어지는 이유.
나투아와 대륙을 지배하는 성 제국 사이에 나성 군사동맹이 체결되기 때문이었다.
◈ ◈ ◈
내 말에 자리에 있던 이들이 숨을 삼켰다.
“군사적 동맹 말씀이십니까?”
“허어. 하지만 대륙이 어찌하여 굳이? 대륙은 대륙을 돌보고, 반도는 우리가 돌보는 것이 지금까지의 기조 아니었는지요.”
도란 제사와 다물 재상이 한 마디씩 했다. 무왕과 왕세자가 묵묵히 듣고 있는 가운데, 이 자리에 참석해 있던 또 한 명의 인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원래 자신이 태어난 부에 속하여 각 부의 부장들을 따르던 전사들 역시 대륙식으로 편제를 개편했다. 그리하여 ‘대장군’이라 불리게 된 군부의 수장, 두오 대장군이 발언을 시작했다.
“최근 북벽으로부터 까마귀가 많이도 날아듭니다. 나른한 벌판과 하얀 머리 산에 자꾸만 수상한 이들이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상선에 스며 대륙과 나투아를 오가는 물고기들로부터도 두 나라의 항구에 상대측의 군선이 정박한 모습을 봤다는 보고들을 받은 바 있습니다.”
“쯧, 대장군은 또 그런 소리를…. 적당히 좀 하시오. 그런 흉흉한 이야기를 거침없이 말하니 기껏 다독였던 나귀 떼들이 안정을 못 찾고 방황하는 것 아니겠소.”
도란 제사가 불쾌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두오 대장군은 미간을 찡그렸다.
“제사. 내가 무슨 의도가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니외다. 나는 그저 내가 아는 사실들을 보고드릴 뿐이오.”
“거기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이지 않소? 그것도 죄 부정적으로다가….”
“허허. 그럼 군권을 가진 자가 개다래에 취한 고양이마냥 축 늘어져 있으라는 말이오? 경계하고 또 경계하는 것이 나의 일이오.”
“그게 너무 심하다는 거요. 10년간 그 자리에 있으면서 하는 말마다 전쟁이 날 것 같다, 전쟁이 날 것 같다 하는 소리뿐이니. 에잉. 꼭 전쟁이라도 나길 바라는 사람 같소.”
‘얘네 왜 이래.’
보아하니 신관과 전사들 사이의 분위기는 아직까지 불편한 듯했다.
‘너무 뿌리 깊어 돋는다 좀….’
[간신 조련사: 그 뿌리가 검은 도끼의 밤까지 거슬러 올라가니 실상 당신이 원인이 된 분위기지요. 돋을 만도 합니다.]
[개천의 시왕: 그렇다, 길잡이여. 그대가 그렇게 화려하게 일을 벌여주었거늘 내 어찌 숙청을 대충할 수 있겠는가? 답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그대의 의도에 맞추어 신나는 도끼춤을 출 수밖에 없었음을 알라.]
‘시왕님 요즘 신나셨네요….’
[개천의 시왕: 음. 시우도 왔고, 이번에 백성들도 우르르 들어와 우러러봐주니 실로 왕이 왜 귀한 줄 알 것 같다.]
‘하긴 왕녀 시절부터 대접받기 좋아하시던 분이셨죠….’
[개천의 시왕: 나는 불운한 유년기를 보냈다. 이해하라.]
‘예에… 최소한 이전의 그 방어적인 침묵보단 낫네요. 이번 임무는 시왕님 도움이 특히 필요할 것 같으니까.’
저승에서, 전설적인 전쟁군주는 빙긋 미소를 담아 전언을 보내왔다.
[개천의 시왕: 내게 맡기도록.]
이승에서, 그 전쟁군주의 아들은 과묵한 얼굴로 한 손을 들었다.
“모두 그만하도록.”
도란 제사와 두오 대장군이 입을 다물었다.
무왕은 다물 재상을 바라보았다.
“재상은 이에 대해 의견이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도란 제사의 말에 찬성하는가?”
다물 재상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기울어진 관모를 추어올렸다.
“우선 소신(小臣)은 도란 제사의 말에 찬성한 적이 없습니다. 소신은 다만 대륙이 구태여 그러한 일을 할 필요가 있을지 의문을 제기한 것뿐이나이다. 같은 의미에서 시현군과 두오 대장군께도 찬성하기 어렵습니다.”
중립충(中立蟲)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조금 더 순화해서 평했다.
“신중하시군요.”
다물 재상은 짧은 턱수염을 매만지면서 미소 지었다.
“소신은 흑치사라 대학장님께 직접 학문을 전수받았으니까요.”
[첫 번째 은월: 이 말에 재빠르게 흑치사라를 돌아보았지만 부끄러워하거나 쩔쩔매는 대신, 웃을 뿐이어서 재미가 없었다고 한다.]
‘소연아아….’
[첫 번째 은월: ….]
방어적인 침묵을 뜻하는 낱말을 슬슬 비류아 짓으로부터 소연이 짓으로 바꾸어도 좋은 게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의 참석자들, 도란 재상과 두오 대장군은 모두 소연이 짓을 하고 있는 게 된다. 둘 모두 불편한 얼굴로 입을 다문 채 다물 재상을 쏘아본 것이다.
‘중립충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지.’
그런 둘의 시선을, 다물 재상은 미소 지은 그대로 맞받았다.
‘그럼에도 중립충 노릇을 할 수 있다는 건 그만한 실력을 갖추었다는 뜻이고.’
좋아.
이 시대의 신관, 전사, 학자를 지배하는 3인방에 대해서는 판단이 끝났다.
1 신관을 대표하는 도란 제사.
‘얘는 그냥 꼰대고.’
2 전사를 대표하는 두오 대장군.
‘얘는 과격파. 추가로 밥값 하고 싶어 함.’
3 학자를 대표하는 다물 재상.
‘얘는 중립충. 능력은 있음. 다만 그 능력이 뛰어나지 못하다면 말로가 썩 좋지는 못할 그런 유형.’
이 셋은 또한 각각이 이념, 무력, 지식을 대표하는 자들이었다. 그로 말미암아 작금의 왕국이 어떠한가도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꼰대 기질과 들끓는 혈기를 갖추었지만 갈짓자 걸음 걸으면서 용케 넘어지지 않는 중.’
[첫 번째 은월: 뭐야 그게? 술먹은 아저씨 같네 완전히.]
‘그치….’
물론 그것은 왕국에게 온당한 평가라고는 할 수 없었다.
먼저 무왕 이세가 있었다.
‘머리는 나쁘지만 눈썰미 날카롭고 우직한데다가 주먹이 겁나 셈.’
그리고 왕세자 현성대군이 있었다.
‘외모는 이쁘장하고 강단도 있음. 학자층 보강한 덕인지 머리 좀 있어 보임. 이세랑 더하고 나누면 평범한 머리 수준?’
마지막으로 네 외척 파벌, 4대 공작가가 있었다.
‘욕심은 또 디지게 많음.’
[첫 번째 은월: 알고 지내기 싫다 참.]
[최초의 성녀: 음… 이 모든 설명을 종합해보면 작금의 왕국이라는 거. 완전히 야리소연 당신 아닌가요?]
[첫 번째 은월: 어? …어어?]
그러게 말이다.
왕국이 야리소연인 것이 작금의 시점이니 주변국들에서 보기에 군침을 흘릴 법도 했다.
그 야리소연 왕국을 향해 내가 말했다.
“소자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나이까.”
야리소연 왕국을 짊어지고 있는 총 책임자, 무왕 이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현군은 편히 올리라.”
좋아.
“먼저 도란 제사께서 말씀하시는 것들은 모두 무의미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시현군?”
도란 제사가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나는 차분히 대답했다.
“도란 제사께서는 전쟁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말씀하시면서 그에 대한 근거는 아무것도 대지 않고 있나이다. 이는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을 계속하여 다르게 나열하고 있을 뿐이니, 실로 고려할 바가 못 되나이다. 반면 두오 대장군께서는 최소한의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북벽과 두 나라의 항구로부터 날아드는 첩보들입니다.”
“실로 그렇습니다. 시현군께서는 실로-”
두오 대장군이 반색하며 내 말을 반겼다. 그는 도란 제사에게 꼴좋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오나.”
나는 그의 말을 허리께부터 쳐 날렸다.
“두오 대장군은 또한 도란 제사의 그런 모습을 이해해주셔야 할 것입니다. 희망을 나열함은 불안감의 표출 방법이지만 또한 그것을 다스리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도란 제사께서 계속하여 희망을 나열하게 된 것 역시 단순히 한 노인의 불안감이 아니라 그동안 꾸준히 전쟁론에 시달린 왕국민들의 피로감과 불안감을 대표하는 것이라 보셔야 합니다.”
두오 대장군이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두 사람을 입 다물게 만든 나는 마지막으로 다물 재상을 바라보았다.
“다물 재상께서 바라시는 것은 근거입니까, 이유입니까?”
다물 재상은 살짝 웃었다.
“후자겠습니다.”
“그렇다면 다물 재상께는 아무것도 드릴 필요가 없겠습니다.”
다물 재상이 멈칫했다. 나는 그 굳어진 얼굴을 향해 계속 말했다.
“모든 싸움에는 각자만의 이유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전쟁에는 각자만의 이유가 있습니다. 저쪽이 왜 전쟁을 걸어오는가 같은 것을 분석하는 것은 후대의 학자들이 할 일입니다. 당장 걸려온 전쟁에 필요한 일은 그저 맞서 싸우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