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106화 (106/261)

106. 저승의 저편에서 (3)

지난번처럼 까마득히 위에서 도읍지를 내려다보는 구도였다.

‘꽤 커졌네.’

그 말처럼 도읍지는 제법 커졌다. 그리고 건국 초기에 잘 잡아둔 계획 덕분인지 썩 못난 모양새도 아니었다. 눈이 닿지 않는 곳에 천막이나 움막 등으로 이루어진 빈민촌이 형성되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지만.

‘우선 수로가 깔렸어.’

건국 초기부터 짓기 시작했던 것이 이제야 완공되었다. 흙을 파서 낸 물길이 아니라 제대로 포석을 깔고 때로는 높게 다리를 세워 이어붙인 석제 수로였다.

산허리 수로에서 흘러나오는 지하수, 둑을 세워 의도적으로 수위를 높인 대하 상류의 물이 수로를 타고 흘렀다. 그렇게 흘러온 물은 모래와 숯을 통해 여러 단계의 여과를 거친 다음 거대한 저수조들에 모였다. 왕국민들에게 깨끗한 물을 공급하는 것은 그 저수조를 통해 이루어졌다.

‘수도관 연결… 까지는 아직 무리지. 기술력이 부족해.’

대륙이나 알실라 내부에서는 이 시대에도 어떻게 가능한 모양인데, 왕국은 아직 제련술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기에 저수조는 그 일대 사람들의 공용 시설이었다. 충분히 불어난 저수조의 물은 자동적으로 그 근처에 만들어진 하수도를 향해 흘러갔다. 배수 속도는 어느 정도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 있었다. 의도된 경사 차를 따라 하수도의 물은 다시금 대하의 하류를 향해 흘러갔다.

‘그 밖에는….’

신전과 궁전 사이에 커다란 건물들이 솟아났다. 반가운 위치에 세워진 반가운 건물이었다.

‘태학관.’

내가 살던 시기에 비하면 여러모로 단출했다. 그럼에도 확실히 태학관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흑치사라가 잘 해준 모양이네.’

그리고 나루터가 불어났다. 조선소도 한 단계 확장되었고, 시장도 한층 커졌다. 대장간은 규모가 커졌다기 보단 곳곳으로 퍼졌다. 이 모든 것들을 위해 도읍지 인근에 놓인 산 두 개가 벌거벗었다.

‘대륙과 섬을 상대로 협력 강화를 한 덕이겠군.’

이 시대 대륙은 성(聖)이라고 하는 고대 황조가 지배하고 있었다. 태학관에서 배운 대로라면 이다음에 판(判)이라 불리는 기마민족에게 한 차례 잡아먹히고, 그 뒤 또 한 번 대륙민들이 신(神)이라는 황조를 일으켜 세우게 된다.

‘내가 살아있던 무렵이 신 황조 무렵이지.’

약 500년의 격차를 사이에 두고 있음에도 같은 대륙민이 세워서일까, 대륙에서 온 성 제국민들의 옷차림과 행동거지는 낯이 익었다. 그리고 섬에서 온 이들은….

‘얘넨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네.’

세세하게 보면 뭔가 달라지기야 했겠지만 잘 모르겠다.

거기까지 보았을 때, 다시금 시야가 바뀌었다.

“유미, 결혼 안 할 거니?”

완전히 원숙해진 마나가 묻고 있었다. 그에 대한 대답은 들리지 않았지만, 마나는 회초리를 입에 문 채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알았어. 어차피 시기가 늦기도 했지. 하지만 흑치사라 어머님께서 남기신 유언 들었잖니? 법왕가를 이을 후계자가 없다는 건 여전히 큰 문제야.”

유언.

그렇구나, 흑치사라. 이 시점에는 이미.

“양자라도 들이렴. 내 아이들 중 한 명을 네가 맡으면….”

그렇게 말하는 마나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          ◈          ◈

눈을 한 차례 감았다가 뜨자, 나는 저승으로 돌아와 있었다.

수많은 시스템 메시지가 나를 반겼다.

[ 수로(Lv.1)가 건축됩니다! ]

[ 태학관(Lv.1)이 건축됩니다! ]

[ 대사관(Lv.1)이 건축됩니다! ]

[ 시장(Lv.2)이 증축됩니다! ]

[ 조선소(Lv.2)가 증축됩니다! ]

[ 궁전(Lv.4)이…. ]

[ 항구(Lv.1)가…. ]

.

.

.

저승의 왕국이 이승의 왕도(王都)를 따라 확장되었다. 야리소연은 흥미로운 물건을 발견한 고양이처럼 태학관을 살펴보았다.

“흐응, 이게 가리비수 네가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곳이라 이거지?”

“학자 양성기관… 이었지요?”

아리야도 말을 보탰다. 나는 감개가 무량했다.

“그렇소. 흑치사라가 일을 잘 해준 모양이군.”

“네에….”

느릿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때였다.

“정말… 고생 많았답니다….”

앙칼진 목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그러게 말야.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나보다 5년은 일찍 뒈진 거 있지.”

대로의 끝 편. 어슴푸레한 하늘과 안개에 깔린 땅이 맞닿아 그어진 길쭉한 일자 위에 크고 작은 두 개의 그림자가 보였다.

하누리와 흑치사라.

법왕이 아내로 맞이했고, 유미가 어머니로 두었던 두 여인이 그 자리에 서있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도.

◈          ◈          ◈

하누리가 팔짱을 낀 채 고뇌에 잠겼다.

“으으음….”

“하누리이잇!”

야리소연이 그런 하누리를 덮쳤다. 하누리는 표범에 짓눌린 토끼처럼 바닥에 깔려서는 당황했다.

“으와, 깜딱이야. 뭐야 너는?”

야리소연은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널 지켜보던 사람!”

“뭔가 기분 나쁜데….”

“그렇지 않아! 나 너 완전 좋아했다구!”

“더 기분 나쁜데! 아, 좀 치워봐!”

하누리가 파닥거렸다. 아리야가 야리소연의 어깨를 잡았다.

“야리소연, 놔주세요. 싫어하잖아요.”

“우씨….”

야리소연이 낙담한 얼굴로 하누리를 놔주었다. 하누리는 그런 야리소연을 어이없다는 듯 보다가, 다시금 팔짱을 낀 채 고뇌에 잠겼다.

그리고 하려던 말을 입에 담았다.

“그래서 난 널 지아비라고 해야 되냐, 딸이라고 불러야 되냐?”

이런 염병.

“그… 지금 나 생긴 모습 보면 앞쪽이 맞지 않겠냐?”

내가 힘겹게 대답했다. 그치만 하누리는 갸우뚱, 고개를 기울였다.

“생긴 모습 보면 딸에 더 가까운데?”

“아니 이건 뭔 헛소리? 아무리 내가 태학관 1년생 무렵부터 청아하다는 평판을 받았기로소니….”

“설명하지요!”

천사가 묘하게 들뜬 어조로 끼어들었다.

“간신이여. 저승 입주민들의 눈에 당신은 당신이 인식하는 생전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저승 입주민들이 빙의 당시의 당신을 어찌 여겼느냐에 따라 그 대체적인 인상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자모신 렌즈’라고 이름할 수 있겠지요.”

“자모신 렌즈라니 그건 대체 무슨… 그보다 잠깐만요 천사님! 야리소연이 나 보고 ‘너 되게 비리비리하다’, ‘가리비수랑은 완전 달라’ 어쩌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야 당신이 빙의 당시에 하도 얍삽하게 굴었으니까요. 그 촉새 같은 인상이 남은 거지요. 그러나 실제로 야리소연이 보고 있는 것은 완전한 당신도, 완전한 가리비수도 아닌 그 어떤 것입니다.”

‘뭔데 그거… 대체 뭘 보고 있다는 거야….’

“애초에 우리 모두가 같은 것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보장하겠습니까, 간신이여? 가령 내가 보는 ‘까만색’은 당신에게 있어 사실 ‘빨간색’일지도 모릅니다….”

‘태학관 철학부 1년생 같은 소리 막 던지지 말자 쫌….”

이쯤 되면 기분 나쁜 걸 넘어서 무서워질 지경이었다.

한편, 하누리는 무서울 정도로 기분 나쁜 소리를 내뱉었다.

“딸이라고 부를게!”

“아니 진짜… 내 족보 여기서 더 꼬지 말자 좀….”

“아씨, 뭐야. 싫어? 그치만 그렇게 보이는 걸 어쩌라고.”

그렇게 무섭고도 기분 나쁜 이야기가 오가는 동안, 다른 한켠에서는 또 다른 저승 입주민이 시우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태부 각하. 여기서 이렇게 다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제사장이었다. 시우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게 말이군! 그 때의 그 똑 부러지는 아가씨와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아가씨라 불릴 나이는 아닙니다만….”

“그런가? 내게는 여전히 똑 부러지는 아가씨로 보인다만.”

“부, 부끄럽습니다 태부 각하.”

제사장이 난처해했다.

천사가 내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참고로 이 ‘자모신 렌즈’는 저승 입주민들에게도 통용됩니다.”

“서로가 서로를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있다는 뜻인가요, 천사님…?”

“예.”

“지옥이군요. 아니, 생각해보면 처음 왔을 적엔 지옥이나 다름없긴 했지요.”

입주민 좀 늘어났다고 내가 눈에 뭔가 씌었던 모양이다.

“자모신 렌즈가 씌었지요.”

그런 기분 나쁜 것이 씌었다는 소리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보면 저승의 왕국은 아직 유령 도시나 다름없었다. 그 유령 도시를 아직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진짜 유령들이 쏘다니는 것이다. 무서운 노릇 아닌가.

“그래도 이번에는 입주자들이 대폭 늘어났는걸요.”

“음. 그 말 대로이긴 하오. 정말 대폭 늘었군.”

형체를 갖춘 입주자들은 하누리와 흑치사라, 제사장만이 아니었다. 개중에는 내가 아주 잘 아는 이가 있는가 하면, 아예 본 적도 없었던 이들까지 있을 지경이었다.

“유미. 나 관광 좀 시켜주려무나.”

“가령 아까부터 날 자꾸 회초리로 찰싹거리고 있는 이 등신은 저승 입주민으로 들어오는 게 이해된다 치자. 하지만 그녀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추종자들은? 맹세컨대 내가 유미 안에 있을 적에도 본 적 없는 이들이었다….”

“관광 좀 시켜달라니까 뭘 중얼거리니? 하여간 여기서도 그렇게 조신하지 못하게.”

“아, 바쁘거든! 아리야, 이 등신 좀 맡아주시오!”

“네, 예언자님. 마나. 이쪽으로 오세요.”

아리야가 등신을 데려갔다. “어어, 난 유미랑 더,” 등신은 저항하려는 것 같았지만, “쉿, 만나면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구요.” 아리야는 그런 그녀를 질질 끌고 갔다. 나로서는 면식이 없어서 뻘쭘할 뿐인 마나의 추종자들 역시 한 차례 내게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마나와 아리야를 따라갔다.

여전히 유령 도시이긴 했지만 그래도 인구 밀도가 높아진 것이다.

“갑자기 왜 이렇게 됐다지?”

“으응… 그야 제가… 노력했기 때문 아닐까요…?”

그림자를 닮은 목소리가 내 귀로 스며들었다.

“흑치사라.”

우후후, 웃음을 흘린 흑치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팔이 담기지 않은 소매가 끄덕임을 따라 일렁였다.

“태학관 세우면서… 가장 중시한 것이… 기록이었거든요….”

과연.

“체계화된 교육과 전승.”

“예에… 당신이 밝혀냈다는 입주자 법칙… ‘운명 개변’과 ‘기억되는 것’이 조건이라면… 태학관이 세워진 것만으로도… 달라지는 게 당연한 일이니까요….”

이해가 갔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해가 갔다.

“어째 미안하네요.”

“응…? 뭐가 미안할까요… 그런 어려운 일을… 나 혼자한테 휙 던지고 떠나버렸다는 것….”

“그것도 미안하고.”

“그러면 음… 아아, 여전히 저를 외팔이로 보고 계신다는 부분 말인가요…?”

그랬다.

결국 천사가 말한 대로, 자모신 렌즈이니 뭐니 하는 것이 내 눈에도 씌워져 있는 것이겠지. 그러기에 이 저승에 와서도 내게 흑치사라는 외팔이로 보였고, 저 멀리서 야리소연과 투닥거리는 하누리 역시 한쪽 얼굴에 화상을 입은 것으로 비쳤다.

“멀쩡한 모습으로 인식할 수도 있었을 텐데.”

“본 적 없는 것을 인식하라고 해도… 공허한 이야기가 되어버리니까요….”

방긋 웃은 흑치사라가 팔 없는 쪽 소매를 팔랑거렸다. 장난꾸러기 어린 아이가 소매가 긴 옷을 입어 팔이 가려졌을 때 그러는 것처럼.

“그리고… 사실 이승과 별로 다르지 않지요….”

음.

“보고 싶은 대로 본다는 것?”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는 것….”

“판단하고 싶은 대로 판단한다는 것.”

“여기든 저기든… 똑같으니까요….”

그림자를 닮은 미소.

“뭐어…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지요…. 결국 남을 인식한다는 것은… 나를 인식한다는 것… 그런데 그 ‘나’라는 인식부터가 애초에… 애매한 거니까요….”

그 말을 지적인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500년 뒤에도 한 줌밖에 없을 것이다. 하긴 그러기에 나는 이 사람에게 태학관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던 것이었다.

“아무튼 다시 만났네요.”

“네… 그러게요….”

“궁금한 게 있는데.”

“제게 당신은… 어떻게 보이냐구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흑치사라는 우후후, 웃었다. 이어 허리를 굽히더니, 길쭉한 손가락을 하나만 펴서 입술에 댄 채 눈을 찡긋해보였다.

“비밀, 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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