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저승의 저편에서 (1)
나는 고개를 들었다. 방긋 웃고 있는 흑치사라의 모습은 조금 전과 같았다.
나는.
“만약 그렇다면요?”
“으응… 뭐 그럭저럭…? 남의 과거를 읽는다거나 미래를 예언할 수 있는데… 그게 뭐 대수인가 싶기도 하고…?”
“말도 안 된다거나, 증명을 요구한다거나, 어떻게 가능한 거냐고 물어본다거나.”
“글쎄요… 당신이 말한 ‘어지간한 일’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냥 넘어가야 하지 않을는지요…? 특히 맨 마지막 건… 대답해주지도 않을 거면서….”
음.
흑치사라는 머리가 좋다. 그것도 특출나게 좋았다.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하려던 시도를 결행했다.
“흑치사라.”
반말.
“예…?”
즉답.
“권력, 포기하고 후학 양성에 힘써주지 않을래요?”
직설.
“우후후….”
웃음.
그리고.
“제가 그렇게 하면… 당신은 또 떠나게 되나요…?”
확인.
“예.”
긍정.
“또 제 곁을 떠나기 위해… 제게 저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이 되라고 요구하는 건가요…?”
질문.
“예.”
수긍.
침묵이 있고.
“정말이지 나쁜 사람….”
흑치사라는 숨을 흘렸다. 웃음도. 숨도 웃음도 아닌 다른 것도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강 내음이 조금 질어졌고, 동시에 짙어졌다.
그녀가 물었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마땅히 나오리라 추측했던 질문이었다. 그럼에도 대비가 되어있진 않았다.
편하게 나오는 대로 말했다.
“나쁜 사람을 굳이 만나고 싶어요?”
흑치사라는 우후후 웃었다. 짙어지고 질어졌던 강 내음은 어느덧 다시 청량하게 바뀌어 있었다.
“뭐어… 맞는 말이지만요…? 나쁜 사람이니까… 만나고 말고 정도는 제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지금 그게 안 되는 거니까… 좀 열 받기도 하고 그래서요…?”
나는 저승이란 게 있고, 내가 임무를 달성하고 나가면 거기서 계속하여 볼 수 있을 거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결국 저승에서 불멸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그냥 이 자리에서 목을 매고 죽으나 아둥바둥 살다가 죽으나 무슨 상관이냐고 물어올 사람이니까.
저승 입주를 결정짓는 두 요소, 운명 개변과 기억에 대해 설명하여 납득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임무를 계속하여 달성해내지 못한다면 결국 왕국은 멸망하게 되어 저승의 입주민들을 포함해 모든 것이 어두운 허무 속에 흩어질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당신의 삶에는 여전히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나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머리가 좋은 흑치사라라면 받아들여주고 이해해줄 터였다.
하지만 나는 아들을 무등 태운 채 서서 익사했던 한 남자를 생각했다.
진흙탕물을 마시고 죽어갔던 친위대원들을 생각했다. 재해에 휘말려 한 순간에 죽었던 사람들을 생각했다. 아직 저승에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 창피하고 면목이 없어 본좌는 애쓰는 것이다.
참으로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그러므로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냥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단지 이렇게 말했다.
“만날 수 있을 거예요.”
흑치사라는 대답하는 대신 두 가지 행위를 했다. 그 중의 첫째는 한 차례 더 웃은 것이었다.
그리고 둘째는.
+
<역사변이점>
- 건국 30년
[ ★은월을 지켜라 / 난이도 B ]
[ ★달 그림자 / 난이도 F ]
[ ★권력 분립 / 난이도 A ]
+
“흑치사라.”
그렇게 모든 임무에 달성 표식이 찍혔다.
“유미를,”
세계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마나를 잘 부탁해요.”
저편에서부터 와르르 무너지며 가까워져온다.
“하누리를, 흑치사라.”
그런 내 말을, 길쭉한 손가락이 입술을 짚어 막았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이미 세계는 나와 그녀가 서있는 이 한 뼘을 빼고는 무너져 있었다. 곧 이마저 무너질 테고, 나는 저승으로 돌아가게 되리라.
“바-보….”
우후후, 해초를 닮아 일렁이는 그 웃음.
“부탁받지 않아도… 그렇게 할 거랍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세계는 완전히 흩어져, 순식간에 재조립되었다.
◈ ◈ ◈
저승으로 돌아오자, 언제나처럼 야리소연이 날다람쥐마냥 뛰어내렸다.
“가리비수우우우--!”
“얍.”
나는 폴짝 옆으로 뛰어 피했다. “구악!” 맨바닥에 얼굴을 부딪힌 야리소연이 비명을 터뜨렸다. “아그극….” 힘들여 일어선 그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이 문명인 자식아! 왜 난데없이 피하고 지랄인데!”
“내 반사신경이 그만.”
“신경을 뽑아버릴라!”
“무섭다 야.”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리야와 비류아, 시우가 차례대로 나를 반겨왔다.
“어서 오세요, 예언자님!”
“고생 많았다.”
“정말로.”
음.
“아, 다들 감사합니다. 몸이 아니라 말로 반겨준다는 부분이 특히 좋네요. 앞으로도 그래주십쇼.”
그렇게 정리하고 넘어가려 했지만 비류아는 한 차례 더 고개를 수그렸다.
“이세를, 나와 시우의 아들을 보여주어 고맙구나.”
“뭘요. 조만간 여기서 아예 만날 수 있으실 텐데요.”
천사가 움찔했다. 설마 내가 대놓고 이 말을 날리리라곤 생각지 못했던 걸까?
하기사 뇌를 안 거치고 나온 말이기는 했다. 아직 흑치사라와 거닐던 봄의 햇살이 내 머릿속에 남아 있나보다.
다행히 시왕 비류아는 그저 웃어보였다.
“그것도 그렇군.”
아직 그 정도로 대담하지 못한 시우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편히 오면 좋겠는데.”
“그 역시 그렇고.”
천에 가려진 천사의 얼굴이 두 부부를 향했다. 그리고 다시금 나를. 천사가 말했다.
“흑치사라와 나눈 대화는 좀 위험하지 않았습니까? 이로 인해 흑치사라가 어떤 기록물이라도 남겼다간, 후대의 왕국에도 당신의 비밀을 눈치 채는 이들이 생겨날지 모릅니다.”
“에이, 뭘요. 화창한 봄날이잖아요. 기이한 일들이 수도 없이 있을 법하죠. 그만큼의 헛소리도.”
“진지하게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흑치사라쯤 되니까 나눌 수 있었던 대화예요.”
그토록 법왕과의 재회를 꿈꾸던 제사장만 해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뒷짐을 졌다.
“그야 대충 얼버무릴 수도 있었지만요. 흑치사라는 자기가 사는 방식을 바꿀 수 있다고 암시한 거잖아요. 자기 나머지 삶 전체를 저울 위에 올려놓은 거란 말이에요. 저도 그런 식으로나마 대답을 해줘야 그나마 저울추가 평형을 이룹니다.”
천사는 말이 없었다. 천 너머를 엿볼 수 있다면 참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을까? 모르면 그냥 따라와 줘도 괜찮은데.
[ 축하드립니다! ]
이 칼 같은 보상 수여처럼 말이다.
[ 왕가의 안위를 보우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메인 미션 클리어! ]
[ 국왕이 반려를 맞이하게 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메인 미션 클리어! ]
[ 왕국의 권력을 분산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메인 미션 클리어! ]
[ 인과(因果) 포인트를 산출합니다. ]
번쩍거리는 문자열이 빠르게 떠올랐다가 깨어졌다.
[ 은월을 지켜라 달성 성공에 따라, 인과 포인트를 3p 획득합니다.]
[ 달 그림자 달성 성공에 따라, 인과 포인트를 4p 획득합니다.]
[ 권력 분립 달성 성공에 따라, 인과 포인트를 8p 획득합니다.]
[ 인과(因果) 포인트를 총합 15p 획득했습니다. ]
15포인트라.
“은월을 지켜라랑 권력 분립은 그렇다 치는데, 달 그림자에서 주어지는 포인트도 꽤 높네.”
야리소연의 말이었다. 나는 그럴싸한 답을 갖고 있었다.
“4중 혼인이라 그런 것 아닐까?”
“오? 그럼 막 12중 혼인 이러면 12포인트 받고 그랬을까?”
“그러게. 해볼 걸 그랬네.”
“남의 아들한테 뭘 시키려는 거냐?”
시우가 건 딴지였다. 비류아는 쓰게 웃어보였다.
“넷이 딱 적절했다. 그 이상이 되면 다음 세대가 개판이 될 테지.”
“으음. 시왕님 가정사는 뻔히 아니까 흘려들을 수가 없네요. 흑치사라한테 그냥 권력욕을 버리는 게 아니라 이세를 잘 보좌해달라고 부탁하는 게 나았을까요?”
“가령 어떤 식으로?”
“어. 달 그림자 후보들을 정할 때 거기에 흑치사라랑 하누리를 끼워 넣는다거나… 사실 좀 생각하긴 했거든요.”
“아아. 형이 죽으면 그 아내를 동생이 취하는 그런 느낌으로요?”
아리야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왕님이 월족 이끌던 시절만 해도 당연한 풍습이기도 했고…. 그렇게 나투아와 알실라의 두 여인을 비(妃)로 맞이함으로써 외교를 도모하는 것도 되고. 하지만 역시 좀 문제가 있었소.”
“네 마음속의 족보가 개판이 된다는 것?”
“아니. 후계 구도가 너무 복잡해질 것 같더라고. 시왕님은 넷이 딱 적절하다 하셨지만 멀게 보면 사실 좀 과한 면이 있고.”
직계 혈족이 네 갈래로 갈라진다는 게 문제였다. 당장은 왕가 구성원이 너무 부족하기에 무리를 한 부분도 있었지만 이것이 어떻게 구를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야리소연은 태평했다.
“뭐 가리비수의 적은 가리비수인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잖아? 문제 생기면 또 관련된 임무가 생길 테니 그 때가서 해결하면 되지.”
깍지 낀 손으로 뒤통수를 받힌 채 길가의 돌을 툭 차는 이 야만인의 모습에, 사람들은 피식 웃었다.
분하게도 나도 좀 웃고 말았다.
“하여간 쓸데없는 부분에서 예리하다니까.”
◈ ◈ ◈
저승의 주민들과 해후를 마친 나는 인과 포인트를 분배했다.
먼저 왕가의 인과.
[왕가의 인과]
-신월후 지원 (3p)
-상현후 지원 (3p)
-하현후 지원 (1p)
-잔월후 지원 (1p)
“내용이 바뀌어있네.”
“이세가 크기도 했고, 현재 빙의체인 유미가 어리기도 하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에 이해한 바에 따르면 인과 포인트 분배란 결국 임무에 들어서지 않는 동안 빙의체가 어찌 움직이는지 그 방향성을 잡아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국가의 인과는 어떠려나.”
[국가의 인과]
-알실라와 협력을 강화하기 (2p)
-나투아와 협력을 강화하기 (2p)
-대륙과 협력을 강화하기 (2p)
-섬과 협력을 강화하기 (2p)
-야만족들과 협력을 강화하기 (4p)
이쪽은 비슷했다. 구태여 말한다면 알실라, 나투아, 대륙, 섬에 대한 세세한 정세가 바뀌어 있었고, 필요한 포인트 또한 바뀌어 있었다.
“알실라와 협력 강화가 1p 늘어났네. 나투아, 대륙, 섬과 협력 강화는 거꾸로 줄어들었고.”
“화산 폭발로 인한 재해를 알실라가 거의 수습했다는 뜻이군요.”
“그리고 왕국에 기초적인 조선 기술과 항해 기술이 갖추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겠다.”
세 은월의 말. 덧붙여 천사가 고개를 기울였다.
“야만인 부분은 이전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군요.”
거기에 대해서는 짚이는 것이 있었다.
“아마 정보가 부족해서 그럴 겁니다. 유미가 알 수 있는 것, 짐작할 수 있는 것 이상은 알기 어렵다는 뜻이겠죠.”
나는 턱을 짚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슬슬 행동에 들어가는 포인트의 크기 차이에 대해서도 감이 오네요.”
“어라, 어떻게 말입니까?”
“뻔한 것 아닙니까요? 아마 ‘빙의체가 할 법한 행동’은 포인트가 낮게 책정되어 있겠죠. 거꾸로 ‘빙의체가 하지 않을 법한 행동’은 포인트가 높게 책정되어 있을 테고요.”
가령 조금 전, 왕가의 인과에서 유독 소모 포인트가 적었던 하현후와 잔월후. 이 둘은 각각 마나와 제사장이었다.
마나야 유미의 이복 언니니 도울만하고, 제사장과는 임무 도중 호감도를 거의 최대치까지 높여놓고 밀조까지 맺어놨으니 지원하는데 그만큼 거리낌이 없을 터였다.
“이 포인트 책정 기준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로군.”
비류아가 그 중요성을 간파하고 말을 이었다.
“한 마디로 포인트가 크든 적든 보상의 크기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 아닌가.”
“예, 시왕님. 거기에 빙의체의 성격 차이도 영향을 줄 것 같네요. 아무 생각 없이 지르고 보는 성격이면 필요한 포인트 숫자가 그만큼 적겠고, 반대로 잔걱정이 많으면 그만큼 많겠고…. 가령 대륙과의 협력 포인트가 줄어든 건 유미의 성격이 반영되었다고 보는 게 좋겠죠.”
“호쾌하다 우리 유미!”
“내 말이.”
전직 망나니답다면 전직 망나니다웠다. 인과 포인트는 제한되어 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소모 포인트가 적은 행동들이 많을수록 이쪽의 선택지가 늘어나는 만큼 나라를 살려야하는 입장에서 볼 때는 나쁘지 않았다.
그런 생각 속에서 나는 마지막, 가문의 인과를 보았다.
[가문의 인과]
-결혼하기 (4p)
: 빙의체가 미혼 상태입니다. 누군가와 결혼합니다.
: 누구와 결혼할지는 후자를 함께 택하는 것으로 지정할 수 있습니다. 후자를 택하지 않을 경우, 결혼 상대는 무작위로 선택됩니다.
-신규 친위대장 (4p)
-신규 제사장 (4p)
-신규 부장 중 1명 (4p)
-외국 요인 자녀 중 1명 (4p)
-2대왕 이세 (8p)
-아이 만들기 (4p)
: 아이를 낳습니다. 중복 선택이 가능합니다.
: 아이가 누구로부터 태어날지는 결혼 상대를 택하는 것으로 지정할 수 있습니다. 택하지 않을 경우, 아이의 아버지는 무작위로 선택됩니다.
나와 세 은월, 천사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얼마나 결혼하기 싫으면 이래 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