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2대왕, 이세
우리들의 왕, 이세는 자신의 친위대원들을 둘러보았다. 그 정직하고 곧바른 시선이 칼날처럼 주위를 훑을 때마다 친위대원들은 모두가 흠칫거릴 뿐 대답이 없었다.
심지어 친위대장조차도.
그리하여 이 자리엔 침묵만이 흘렀다.
“없군.”
이세가 그 침묵을 깼다.
“없구나.”
조용한 목소리.
“본좌는, 본좌에게 부족함이 많다는 사실을 안다. 내가 형제로 여겼던… 그대들의 우두머리가 말한 대로 본좌는 싸움질만 좀 할 줄 아는 빡대가리일 것이다.”
그 목소리는, 분명 신전 바깥에도 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대들은 무엇인가. 그대들은 정녕 친위대이고자 한 적이 있었느냐.”
석궁을 든 채 신전을 에워싸고 있는 솔로마 부의 사병들에게도 들리고 있을 것이다.
“전사이고자 한 적이 있었느냐.”
이세가 발을 거두었다. 목이 밟혀있던 친위대장은 주춤, 주춤 엉덩이를 끌어 뒤로 물러났다.
이세는 피로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왕국에는 군왕이 필요하다. 본좌는 적자이고 적통이어서, 마땅히 부족한 몸으로도 왕의 책무를 다하고자 한다.”
그제야 흘끗, 이세의 시선이 친위대장을 한 차례 쓸었다. 친위대장은 몸에 불이라도 질린 듯 손끝을 움츠렸다.
“그것이 본좌에게 무(武)를 하사한 그대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보답하는 길이며, 본좌의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말을 달렸던 모든 전사들과 그 후예에게 보답하는 길일 것이다.”
우직한 눈빛이 친위대장을 똑바로 꿰었다.
“그러나 그대는,”
친위대원들을, 아직도 목을 부여잡은 채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솔로마 부장을,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그대들은, 무엇인가.”
신전의 벽 너머로 자리 잡고 있을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가.”
선언.
“물러나라.”
선고.
“그리고 언젠가는 무언가가 되어보도록 하라.”
아무도 거기에 저항하지 못했다.
친위대원들은 칼을 내렸다. 바깥에서도 석궁을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흑치사라가 안배한 병사들이 다가왔을 때에도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투항하여 몸을 맡겼다.
대보름의 밤 시도된 역란은 그렇게 갈무리되었다.
◈ ◈ ◈
여명이 튼 뒤로는 그저 일사천리였다.
솔로마 부장과 그 아들인 솔로차, 병사들, 그 밖의 친족들은 억류당했다. 친위대장과 친위대원들이 속해있던 아삼 부의 핵심층도 마찬가지였다. 그 밖에도 수많은 이들이 엮여 들어갔다. 참가자는 많았고 그 친인척은 널려 있었으므로 은월궁의 지하 감옥은 금세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엮여 들어가지 않은 자들은 이것을 기회로 여겼다.
“그들을 엄히 벌하셔야 합니다!”
“사직을 뒤흔들려 시도한 이들입니다!”
“아삼 부장이 관련성을 부정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 얼마나 후안무치한 일입니까!”
“옳소이다! 친위대장은 아삼 부장의 아들 아닙니까! 아들이 저지른 일을 아비가 몰랐다니!”
“터럭만큼이라도 의심이 가는 자들은 모조리 처형해야 옳습니다!”
“시왕 폐하라면 그리 하셨을 것입니다!”
이세는 손을 내저었다.
“모두 조용하라.”
그 목소리에는 왕관만큼의 무게가 있었다.
어지러이 떠들던 이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이세가 말했다.
“본좌는 머리가 둔하다. 그런 본좌이니 어머님과 같은 결단을 요구받아도 곤란할 뿐이다. 다른 의견은 없는가?”
왕국의 제사장이 고개를 수그렸다.
“채를 치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낱알과 모래를 구분하셔야합니다.”
“쉬이 말하라.”
“직접적인 가담자. 그 중에서도 특히 죄질이 독한 자들. 솔로마 부장과 친위대장 같은 이들은 엄히 처결하여 왕국의 정기를 바로 세움이 올바를 것입니다. 단순 가담자들 역시 역란에 준하는 일이니, 법왕께서 세우시고 시왕께서 승인하신 당국의 법에 비추어볼 때 극형을 면키 어려울 것입니다.”
하오나, 라고 제사장은 말을 이었다.
“가담자의 친인척이라고, 또 평소 교우 관계가 깊었다고 하여 처결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그 기준부터가 모호하며, 해당되는 이들이 너무 많아지는데다가, 억울한 이들이 생기는 것을 피할 수 없으니 올바르지 못한 일입니다.”
“허어! 어찌 그런 말을 하시오! 담당한 신월회를 제대로 관리하지도 못한 주제에!”
“옳소! 시왕 폐하, 아니 태부 각하! 심지어 법왕 본인께서 살아계신다 하여도 뿌리를 뽑아야 한다 말하셨을 것이오!”
“그만하라.”
들끓는 좌중을 이세가 조용히 시켰다.
“제사장은 계속 말하라.”
“조사를 거듭하되, 억울한 이들이 생기지 않도록 그 과정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추리고 또 추려 남은 모래알들만을 건져내야할 것입니다.”
“그것이 제사장이 생각한 바의 전부인가?”
“또 다른 생각도 있습니다.”
“어떤 생각인가?”
“모조리 참하는 것입니다.”
방금 꺼낸 말과는 정반대되는 차갑고 과격한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이세가 물었다.
“이유는?”
“모래를 추려낸다 한들, 모래가 추려진 일에 앙심을 품은 알곡이 반드시 생겨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곧 다른 부장들이 주장한 바이며, 저 또한 그릇된 판단은 아니라 여깁니다. 하니 모조리 참하신다면 우선 편해지실 것이고, 엉뚱한 생각을 하는 이들이 더 생겨나지 않도록 단속하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모래가 추려진 일에 앙심을 품는 알곡이 생겨날진대, 알곡이 추려진 일에 앙심을 품는 알곡은 더 많이 생기겠지요. 십수 년은 편할지 모르나 반드시 그걸 넘어서는 불편함이 찾아올 것입니다.”
제사장은 수그린 고개를 들고서 말했다.
“덧붙이자면, 시왕 폐하께서 택하신 길은 그 때마다 모두 추려내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마다 모두 죽인다는 말인가?”
“예.”
이세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툭 던지듯 말했다.
“무겁구나.”
“왕관의 무게는 왕국에 준합니다. 군왕으로서 내리는 판단은 왕국 전역에 미칩니다. 감당하셔야 할 무게이고 익숙해지셔야 할 무게입니다.”
이세는 역시 한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물었다.
“다른 의견은 없는가?”
“저로서는 더 이상 없습니다.”
그 말에 이세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 입이 열리기 전에, 제사장은 공손히 고개를 수그리며 말했다.
“다만, 청하건대. 여기 계신 유미 아씨께도 의견을 여쭈어주소서.”
그 말에 좌중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아직 나이도 안 찬 아씨를 대체 왜 이런 자리에….”
“쉿, 역란을 제압하는데 큰 역할을 하셨던 흑치사라 대부인께서 대행으로 보내신 것이오.”
“차기 법왕으로 내정된 몸이시다 이거로군.”
“거 아무리 공이 크다 해도 너무 거침없는 게 아닌지…. 소문도 안 좋은 이복 딸을 차기 법왕으로 두려 하다니….”
음.
그런 소곤거림이 오가는 동안, 이세는 묵묵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게가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나는.
‘할 말은 이미 제사장이 다 해버렸는데.’
정확히 말하면, 방금 제사장이 말한 것들이 이 자리에 들어서기 전에 내가 그녀와 공유한 의견들이었다. 그리고 그 원천은 비류아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개천의 시왕: 어차피 그 둘 중의 하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골라야한다면 후자다.]
‘전자는 이세의 역량으론 못한다고 보시는군요.’
[개천의 시왕: 섬세한 정치력이 요구되는 일이니까. 만약 그대가 몸 담았던 전대 법왕이 살아있다거나, 그대가 지금 몸담고 있는 차기 법왕이 좀 더 노회했더라면 전자를 권했겠지만, 둘 모두 아니지.]
‘예. 그러니까 일단 모조리 참하여 십수 년의 시간을 벌자는 것이고요. 유미 법왕이 짬 좀 먹게끔.’
[개천의 시왕: 결국 능신(能臣)의 숫자를 늘려 해결해야 할 일이니까. 그리고 여기에는 시간이 필요하지. 후자를 택하면 그 시간을 벌 수 있다. 간단한 결론이다.]
그런 상황이니 나로서도 용빼는 재주가 있을 리 없었다.
다만.
- 창피하고 면목이 없어 본좌는 애쓰는 것이다.
그 말을 기억했으므로, 나는 조용히 물었다
“폐하께서는 어찌 하고 싶으십니까?”
이세는 잠시 침묵했다가 대답했다.
“본좌가 원하는 바 말인가.”
“예. 폐하. 전례이니 뭐니 말이 많습니다만 원하시는 대로 처결하소서. 이루어질 것이나이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아직 법치(法治)의 시대는 멀었다. 법과 전례가 왕을 속박하기에는 왕국이 쌓아온 역사가 일천했다. 법도 완벽하지 않았으며, 나라를 건국한 비류아부터가 패도를 걷고 숙청을 남발하던 전쟁군주였다.
‘왕이 법을 자의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시대.’
그렇다면 이 정직한 전제군주가 하고 싶은 대로 놔두어도 괜찮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차라리 당대 지성들이 내놓는 예측이나 추론을 뛰어넘는 결과를 가져올지 몰랐다.
이세는 숙고하더니, 결정을 내렸다.
“모두 풀어주어라.”
‘어.’
“모두라면….”
“모두. 가담자든 가담자의 인척이든. 모두 다.”
‘어어.’
이 말에는 나도 좀 놀랐다. 내가 좀 놀랄 정도였으니, 좌중의 당황은 비할 수 없이 컸다. 심지어 똘똘이 제사장조차 경악하고 있었다.
2대왕 이세가 말했다.
“역란이 왜 벌어졌는가? 역란에 참여한 자들이 본좌의 능력을 의심했기 때문이다. 그 의심은 타당했는가? 실로 그러했다.”
누군가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폐하, 감히 자신의 군왕을 의심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극형으로 다스려야할 죄로서….”
“하지만 그 타당함이 본좌가 그들을 풀어주길 바라는 이유는 아니다.”
역란의 날 신월회장에서 있었던 이세의 연설은 이미 알음알음 퍼져나간 상태였다. 명가의 자녀들 모두가 들었으니 모든 명가에 전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세는 한 차례 더 우직하게 자신의 연설을 반복했다.
“…그렇듯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다. 그들이 무엇이 될 때까지 기다려주고 싶다.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본좌가 본좌가 될 때까지 기다려주었던 것처럼.”
“그렇다고 해도 역란에 참여한 자들을 벌하지도 않고 넘기는 것은….”
“본좌는 이미 마음을 정했다.”
그 뒤로도 몇 차례 불가하다는 읍소가 이어졌으나 이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것으로 회의는 파장을 맞이했다.
그리고 이세는 자신의 말을 지켰다.
은월궁 지하 감옥을 가득 채웠던 이들은 그 날로 석방을 맞이했다. 연관자들, 단순 가담자들, 심지어 핵심 주도자인 친위대장과 솔로마 부장조차도.
“무엇인가가 되어서 와라. 얼마든지 받아주겠다.”
그들은 대답 없이 고개를 수그린 채 떠나갔다.
이세의 바람과 달리 가담자들은 무엇인가가 되기보다는 무엇인가가 아니게 되었다. 속한 부로부터 추방당하는 것은 그나마 최선의 결과였다. 그들 때문에 엮여 들어가 곤욕을 치렀던 데다가 만월의 밤 신월회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해들은 친인척들은 가담자들과 연을 끊는 길을 선택했다.
사실 그래도 할 말이 없을 만큼 만천하에 꼴사나운 모습을 보인 이들이었다.
‘쯧쯔. 정말이지 전사라고 할 수도 없지요.’
[간신 조련사: 당신도 만만찮게 꼴사나운 모습을 많이 보이지만요.]
‘저야 전사가 아니니까 괜찮습니다요.’
[간신 조련사: 제길.]
‘예이~! 또 한 방 먹으셨죠.’
그렇게 가담자들 대부분은 연이 끊겼다. 소극적으로 연을 끊는 길이 추방이었고, 적극적으로 연을 끊는 길은 주살이었다. 솔로마 부는 부장이 갈렸다. 새로이 솔로마 부장 자리에 오른 인물은 중년의 여인이었는데, 이세 왕에게 굳건하게 충성을 맹세했다.
친위대장 역시 아삼 부로 돌아가지 못했다. 돌아가긴 커녕 멀어져야 했다. 그의 아버지이자 무술 사범이었던 아삼 부장은 풀려나자마자 그를 잡기 위해 아삼 부의 병사들을 동원했다. 꼼짝없이 잡혀죽을 수밖에 없는 천라지망이었지만 어떻게 한 것인지 친위대장은 포위망을 뚫고 왕국 바깥으로 도망쳤다. 되바라진 남자였다.
그렇게 죽음이 아닌 삶을 판결한 결과로 인해 왕국은 한바탕 요동을 쳤다.
그 모든 일이 과연 어떤 결과를 불러올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최초의 성녀: 말 그대로 역사가 판단해 줄 일이네요.]
[첫 번째 은월: 근데 우린 금세 알 수 있겠지.]
[첫 번째 은월: 어라? 그럼 혹시 우리가 역사인가?]
[최초의 성녀: 어떤 의미로는 그렇기도 하네요.]